기획 특집

21세기 한국영화: 꿈과 역동성 기획 특집 4

 Five Habits of Successful
Popular Films

성공한 영화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그러나 뒤에 올 영화들이 앞서 성공한 영화의 흥행 공식만을 추종할 때, 그 자기복제와 획일화의 피해는 결국 관객들에게 돌아온다.

우리 영화업계에는 ‘천만영화는 신이 내린 대박’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영화가 그 행운을 잡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래서 예측은 어려운 대신에 사후 흥행 요인 분석은 쏟아져 나오곤 한다.

국민정서에 기댄다
첫째 요인은 “민족-국가주의적 정서 편승”이다. 한국인들의 강한 민족-국가주의적 정서를 자극함으로써 흥행에 성공한 영화로는 <명량>(2014), <국제시장>(2014), <태극기 휘날리며>(2004)를 꼽을 수 있다. 어쩌면 별다른 극적인 맥락 없이 서울을 굳이 액션의 배경으로 설정하여 떠들썩한 서울 로케이션을 벌여 실로 짭짤한 재미를 보았던 미국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까지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요인은 주류 비판이다. 이 흥행 코드에 기대어 <암살>(2015)은 일제로부터 해방 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회적, 경제적 특권을 이어가고 있는 친일파에 대한 국민들의 잠재적 분노를, <베테랑>(2015)은 재벌 3세들의 각종 무개념 난봉질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광해>(2012)는 서민들의 현실생활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소모적 정쟁에 매달리는 정치권에 대한 염증을, <변호인>(2013)은 당시 대통령에 대한 실망과 반감을, <괴물>(2006)은 주한미군기지에서 벌어진 오염과 주한미군의 특권적 지위 등에 대한 반감 및 재난 대응에 무능한 한국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안을 성공적으로 불러일으켰다(최근작 <부산행>도 <괴물> 계열이다).
셋째 요인은 절묘한 타이밍이다. <겨울왕국>(2014)은 크리스마스 시즌, <변호인>은 당시 정권에 실망하는 분위기 및 이에 따른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 <암살>은 광복절 개봉 및 친일파 악역의 모티브가 된 현실 속 기업인의 집안싸움, <베테랑>은 재벌 3세들의 갖은 비리와 부도덕이 한창 화제가 되던 상황과 절묘히 맞아떨어졌다.

품질로 승부한다
여기에 화제성과 흥행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높은 완성도를 갖춘 영화들에 대한 한국 영화관객들의 호응이라는 넷째 요인이 더해진다. 사실 흥행에 크게 성공한 영화는 기본적으로 진부하다는 예단만큼이나 빗나가는 진부한 말도 또 없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이는 빈말도 아첨도 자아도취도 아니다. 지금까지 18편을 기록하고 있는 ‘천만영화’들의 면면만으로도 한국 영화관객들의 안목은 확인된다. 세계영화사에 두고두고 기록될 만큼 굵직한 획을 긋는 걸작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왕의 남자>(2005), <인터스텔라>(2014), <도둑들>(2012), <암살>(2015), <광해>, <괴물> 등은 천만 흥행을 환영할 만큼 충분한 완성도를 갖춘 작품들이었다. <아바타>(2009), <베테랑>(2015), <변호인>, <실미도>(2003), <겨울왕국>, <부산행>, <명량> 같은 작품들 역시 딱히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면 흥행의 이유를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관객 저마다의 평가에 개인적 편차는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천만영화’ 18편 중 대략 7할 정도는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갖춘 영화였다.

유명인의 존재감에 기댄다
이런 맥락에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감독과 배우의 역량 및 지명도 및 신뢰성 또한 ‘천만영화’를 만든 다섯째 요인으로 꼽을 수 있겠다. 최동훈, 봉준호, 이준익,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감독들은 자신의 관심과 색깔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보이면서도) 대중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즉 작품성과 흥행을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한국관객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 할리우드 대작 벤치마킹이라는 딱지가 꾸준히 따라다니는 윤제균 감독은 그 개별 작품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흥행을 위한 연출감각과 제작자로서의 역량까지도 갖춘 감독임은 분명하다. 배우로서는 ‘천만 요정’이라고 불리는 오달수가 가장 먼저 떠오르겠지만, ‘야구는 투수놀음, 영화는 주연놀음’이라는 말처럼 역시 연기력과 존재감 자체로 영화를 끌어갈 능력을 갖춘 송강호, 최민식, 황정민, 이병헌 등의 배우들이 ‘천만’의 핵심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여기에 폭염 대피형 수요를 극적으로 증가시킨 지구 온난화? 뭐, 올해는 그것도 흥행 요인에 끼워 넣을 수 있겠다.

너무 친절한 영화음악
아무튼 이러한 분석은 어디까지나 사후적인 것이다. 단기적으로든 장기적으로든 이런 요소들이 앞으로의 흥행에서 마스터키로 기능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자본의 입장에서 이런 요소는 무시할 수 없는 중요성을 띠게 된다. 영화는 전형적인 고비용 고위험 고수익 분야다. 점점 상승되는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으로 인해, 위험성은 점점 높아진다. 영화 투자자는 불확실성과 위험을 최소화하고 싶어 하며, 따라서 위에 적은 ‘천만 요인’들, 특히 최근의 ‘천만영화’들의 특징들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얻게 된다.
영화의 투자-배급-상영을 수직계열화하고 있는 메이저들이 입장 관객수로 따져 90%를 상회하는 시장을 점유하고 VOD, IPTV나 DMB 등의 뉴 미디어 플랫폼까지 그 지배력을 넓혀가고 있는 독과점이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현재 한국영화의 지형 안에서 위에 짚어본 성공 요인들이 다음 상업영화들의 만듦새와 짜임새에 현실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현상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징후는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는 영화들(드러내놓고 말하건 하지 않건 이 영화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천만 클럽’ 가입이다)이 보이고 있는 몇몇 공통적인 특징들을 통해 육안으로 체감되고 있다.
가장 단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음악의 사용 방식이다. 최근 1년 동안 개봉된 영화들 중 비교적 큰 투자가 이뤄지고, 이른바 주연급 스타들이 두 명 이상 기용된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에 사용된 음악을 들어보자. 이들 대개는 특정 장면에서 관객이 느껴야 할 감정을 대단히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비장하거나 슬픈 장면에서는 온 세상 모든 오케스트라들의 스트링 섹션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연주한 듯한 아다지오가 흐른다. 그러다가도 영화가 쉬어가는 페이지처럼 준비해 둔 코믹 장면이 나올라치면 곧바로 콘트라베이스와 목관악기가 흩뿌려진 쉼표 사이를 깡충거린다. 때론 이런 ‘감정 브리핑’ 음악은 그 상황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제 곧 관객들이 느껴야 할 감정을 미리 설명하는 ‘선행 음악’으로까지 나아간다. 사실 이러한 과잉친절 음악의 뿌리는 매우 깊어 할리우드에서는 이를 일컬어 ‘미키 마우징’이라는 용어까지 있다. 관객의 집중력이나 이해도를 미키 마우스 만화영화를 보는 아동관객들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집어넣은 음악이라는 점에서 관객의 입장에서는 매우 모욕적이고 불쾌하지만 이 용어는 실로 적절하다.
“그런 음악이 들어간 영화들의 대부분이 음악 때문에 망가지는 건 아니다. 그 영화엔 아마 다른 클리셰(진부한 수법)들도 넉넉할 테니까.” 할리우드의 거장 시드니 루멧 감독의 이 지적은 지금 한국에서도 그대로 적중되고 있고, 그것은 ‘눈물 압출형’ 엔딩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웃음이건 분노건 슬픔이건 ‘강하고 확실한’ 감정적 카타르시스의 체험에 대한 요구가 강한 한국 관객들의 정서적 기질적 특성에 발맞춰, ‘아홉 번의 폭소와 한 번의 통곡’이라는 공식은 거의 한국 상업영화의 산업표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꾸준히 적용되어 왔다. 중요한 것은 최근 많은 한국영화들이 이 ‘한 번의 통곡’을 위해 억지스러운 설정과 개연성 없는 돌발적 전개도 불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객보다 주인공이 먼저 통곡하며 울음을 선동하는 일은 이제 일반화되었고, 그 통곡의 길이는 점점 길어지고 늘어나는 시간에 비례해 연기와 연출의 색채도 점점 과잉으로 흐른다. 그 뒤로 깔리는 비탄의 현악 오케스트라는 고막을 찢는다. 극장을 떠나기 전 관객을 한 번 제대로 울려 내보내겠다는 의도가 스크린과 스피커를 통해 유감없이 분출된다.

비슷한 사회비판의 변주
문제는 한때 한국의 TV 드라마를 지배했던 막장 드라마가 그러했듯, 자극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부르게 되며, 그 끝은 결국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남는 것은 화전민이 지나간 숲처럼 재만 남은 채 황폐해진 빈터다.
‘더 센 것’의 덫에 걸린 징후를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 영화들은 ‘현실비판형 액션 느와르’라고 불리는 일련의 영화들일 것이다. 이들은 주로 검사, 정치인, 언론인, 재벌, 경찰 등 권력기관에 몸담은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이들 사이의 어두운 거래와 암투를 최대한 리얼한 톤으로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경쟁만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제도적 불합리, 경제적 양극화, 그리고 정치적 소통부재가 이 한국영화 특유의 장르를 만들고 키워가고 있다. 이 영화들의 흥행성적만 봐도 짐작되듯이, 한국 관객들은 이들이 건드리는 비판 지점에 깊게 공감하고 있고, 영화관람을 통해 현실의 갑갑함을 해소함과 동시에 일종의 소극적 발언에 탐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만들어진 파이의 대략 90%를 사들이는 사람이 세 명 정도로 정해져 있다면, 웬만한 고집이나 장인정신이나 여력이 있지 않은 한, 파이 요리사들로서는 굳이 나머지 10%의 잡다한 입맛에 맞는 파이를 만드는 수고로움과 모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 세 명의 큰손의 입맛에 맞추는 것, 그것은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파이 요리사들의 가장 주요한 목표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요인이 있다. 그것은 이러한 사회비판 영화들이 정작 스스로의 영화적/미학적인 동어반복과 자기복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하지 못하고, 또 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복제는 장르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하지만 최근 ‘사회비판적 범죄 느와르’를 표방한 한국영화들을 보면 마치 검찰/경찰/재벌/정치인/언론인/깡패 등등이 적힌 카드들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그 중 몇 개를 적당히 뽑아 조합한 뒤, 그런 역할로 유명한 배우들의 이전 캐릭터를 적당히 변주해 만들어낸, 이름과 입고 있는 옷만 다른 쌍둥이들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로지 달라지는 것은 그 이야기의 수위와 묘사의 강도 정도다.
이렇게 이전의 성공을 변주하는 안이한 기획과 점점 엇비슷해져 가고 있는 만듦새는 단순히 창작자들의 자질과 마음가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또, 요즘 감독 지망생들이 바이블처럼 신봉하고 있는 ‘로버트 맥키 매뉴얼’의 탓만도 아닐 것이다. 이러한 자기복제와 획일화의 근본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의 기획에서부터 배급까지 전 과정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자본의 요구, 즉 ‘천만영화’라는 키워드로 집약되는 요구가 있다. 만일 만들어진 파이의 대략 90%를 사들이는 사람이 세 명 정도로 정해져 있다면, 웬만한 고집이나 장인정신이나 여력이 있지 않은 한, 파이 요리사들로서는 굳이 나머지 10%의 잡다한 입맛에 맞는 파이를 만드는 수고로움과 모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 세 명의 큰손의 입맛에 맞추는 것, 그것은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파이 요리사들의 가장 주요한 목표가 된다. 큰손에게는 파이를 만들 재료를 공급해주고, 스태프 요리사들을 붙여주고, 오븐을 대주고, 트럭을 빌려주고, 가게의 진열장을 내줘서 천만 개 파이를 팔 판매망을 열어줄, 또는 닫아버릴 힘이 있다. 그 힘을 쉽게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요리사가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결국 손해는 관객들의 몫이다. 되는 영화로 거의 도배되다시피 한 스크린들. 더구나 그 영화들의 모양새는 바로 얼마 전에 봤던 영화와 거의 다르지 않다. 작은 영화들에게는 순간적으로만 열리는 한없이 좁은 스크린. 더구나 큰손들은 이른바 ‘아트하우스’ 시장까지 손을 뻗고 있다.
한국영화가 지금 같은 극적인 성장을 이루는 데는 불과 15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한국의 관객들은 그 규모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크게 성장했다. 그 성장은 상업적 제약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려는 창작자들의 고군분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성장이 진행되던 그 기간 동안, 당시 영화 선진국 홍콩과 일본의 영화계가 겪은 일들 그리고 그들의 현재를 볼 때, 지금 한국영화에 나타나기 시작한 판박이적 징후들은 분명 하나의 경고다.

한동원 (Hahn Dong-won, 韓東源)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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