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두 한국 이야기 ‘총각엄마’와 그의 아이들

새터민 청소년 그룹 홈 ‘가족’은 의지할 가족구성원이 없는 탈북 청소년들이 모여 사는 대안가정이다. 나이 마흔에 결혼도 잊은 채 10년째 이 가정의 엄마 노릇을 하고 있는 김태훈(金泰勳· Kim Tae-hoon) 씨를 주위에서는 ‘총각엄마’라고 부른다. ‘미리 온 통일세대’ 아이들 열 명이 그와 함께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

새터민 청소년 그룹 홈 ‘가족’이 주말 저녁을 맞아 모처럼 거실 탁자에 둘러 앉았다.

김태훈씨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 늦잠 자는 아이들을 깨워 먹이고 학교에 보내느라 눈코 뜰 사이가 없다. 아이들의 등교준비를 돕는 부산한 아침시간이 지나면 그는 날마다 집안 곳곳을 속속들이 청소하고, 빨래하는 걸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남자 11명이 한집에 모여 살기 때문에 ‘남자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세탁기 두 대를 날마다 돌립니다. 남자아이들이라서 그런지 빨래의 양도 유난스레 많습니다.” 그는 화장실 청소에 무엇보다 신경을 곤두세운다. 암모니아 냄새를 지우기 위해 변기를 치약으로 닦는 노하우까지 생각해 냈다.
아이들은 그를 삼촌이라고 부른다. 아이들 중에 남한사회 부적응자가 많을 것이라는 지레 짐작은 선입견에 불과하다. “우리 집 아이들 자랑을 좀 하고 싶습니다. 화가, 작가, 뮤지컬 배우, 전교 학생회장, 전국 봉사왕도 있지요. 대단하죠?” 그는 “학생회장 ‘엄마’가 된 덕분에 학부모회장으로 치맛바람도 일으켜 봤다”고 너스레를 떤다. 탈북 청소년이 일반학교에서 다른 후보들과 치열하게 겨뤄 전교회장에 선출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 주인공 한진범은 회장이 된 뒤 더 책임감이 강한 아이가 되었고, 진범이의 이런 성과는 그를 새롭게 일깨웠다.

올 가을에 이들은 ‘가족’ 탄생 1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준비하느라 노래 연습으로 바빴다. 11월 18일부터 20일까지 사흘 동안 서울 아리랑시네센터에서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

어쩌다 들어선 운명의 길
그는 이렇게 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출판사에 다니던 그가 우연히 만난 탈북 소년과 며칠을 함께 지낸 게 운명의 길로 들어서는 시작이었다. 2006 년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기관인 하나원에 봉사하러 갔다가 만난 한 퇴소예정자가 전해준 주소지인 서울시 양천구의 한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다. 어두컴컴한 집에 초등학교 4학년 남자 아이가 TV를 켜놓고 혼자 자고 있었다. 하나원에서 마련해준 이 임대아파트에 아이만 남겨 두고, 어머니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지방에 내려간 터였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먹을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가슴이 찡했다. 요리를 잘 하는 그는 장을 봐와서 밥을 지어 소년과 함께 먹었다. 소년은 묻지도 않은 자신의 고향 얘기를 꺼냈다. 그러고 나서 하룻밤 함께 자고 가면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는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그 집을 떠나지 못했다. 얼마 뒤 소년의 어머니는 일자리를 구해 지방에 거주하게 되었고, 그는 소년과 함께 살기로 했다. 그 뒤 하나원을 통해 아이들을 하나 둘씩 더 받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뒷바라지하는 탈북 청소년 10명의 보금자리는 여러 곳을 전전하다 현재 서울시 성북구 북악산 자락 단독주택에 마련됐다.
새 아이가 오면 그는 우선 땟국부터 벗긴다. 입고 온 옷과 소지품은 본인의 동의를 구하고 대부분 버린다. 그러고는 미용실에 데려가 머리손질을 해주고, 동대문시장에 가서 개성에 맞는 옷을 골라 사 입힌다. 학교에서 무난히 적응하려면 탈북자 티를 내지 않아야 하기에 아이들은 옷차림에 매우 민감하다.
아이들은 남한에 혈육이 아예 없거나, 북에서 함께 온 부모가 먹고 살기조차 바빠 손수 아이를 양육하기 힘들 때 이곳으로 보내진다. 대개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함경북도, 함경남도, 양강도 출신 아이들이다. 초등학교 3학년인 정주영은 할머니와 살다가 선교사의 도움으로 여섯 살 때 탈북했다. 이 집 막내인 그는 부모의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이곳에 와서야 난생 처음 교복을 입고, 바다를 보았으며,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성년이 다 되어가는 아이들이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기도 한단다. 생일상도 처음 받아본다. 가족이 된 뒤 첫 생일엔 깜짝 파티를 열어준다. 새 식구가 늘어나기 직전엔 반드시 가족회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의견이 모일 때까지 설득한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김태훈 씨는 그림에 소질을 보이는 아이들은 직접 지도하고 2년마다 가족 미술전시회를 연다. 2014년에는 “우리 이야기 들어보실래요?”라는 제목의 유화전을 열어 아이들이 글과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게 해주었다.

지속가능한 기반을 만들다
10대 청소년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아놓은 사비를 털었지만 금세 한계에 부딪혔다.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여러 번 이사를 다니고, 돈 걱정을 하던 끝에, 가정 해체로 보금자리를 잃은 어린이들의 사회적응을 높이기 위해 보육교사가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대안가정의 일종인 ‘그룹 홈’ 제도를 찾아냈다. 이 지원 프로그램으로 정부, 민간단체, 복지재단, 기업체 사회공헌팀에게 후원을 신청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하여 2009년 그는 새터민청소년 그룹홈 ‘가족’의 대표라는 공식 이름을 얻었고, 여러 기관과 기업에 지역공모사업 형태로 지원을 요청해 재정적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이탈주민이라면 무조건 편견과 어두운 눈으로만 바라보는 사회분위기를 아이들과 함께 이겨나가는 일은 힘든 도전이다. 노총각과 여러 남자 아이들이 모여 사는 걸 마뜩찮게 여기는 이웃의 시선이 따가운 적도 많았다. 앵벌이들이 모여 산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 경찰이 찾아와 현장조사를 하고 간 적도 있다.

‘북한에선 헐벗고 못 먹고 산다’는 부정적인 이야기에 짜증이 나거나 따돌림에 상처 받고 귀가한 아이들 마음을 도닥거리는 것도 그의 몫이다. “제 사투리가 심하니까 남한 친구들이 ‘빨갱이’라며 놀려댄 적이 많았죠. 저는 남한에 그런 말이 있는지 조차 몰랐는데 말입니다.” 김태훈씨의 오늘이 있게 만든 염하룡의 얘기다. 이곳에서 자라 부경대 간호학과에 진학한 이억철은 지금도 “북한에서 왔다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싫다”고 말한다.
김씨에게는 부모의 엄청난 반대도 넘어서기 힘든 장애물이었다. 장남이 피도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 뒤치다꺼리나 하며 노총각으로 살아가는 걸 좋아할 부모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고 남는다. 초기 2년 동안 가족들과는 소식을 끊고 지냈을 정도다. “혹시 제 어머니가 찾아와 우리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라도 할까 봐 무척 걱정했지요.”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가 지금은 든든한 원군으로 바뀌었다. 2013 년 설 때는 아이들을 손자로 받아들여 세배도 받고 차례도 함께 지내게 허락했다. 그 뒤부터 아이들과 함께 부모님 집을 자유롭게 왕래한다.
무엇보다 다행은 아이들 대부분이 기죽지 않고 건실하게 성장해 가는 것이다. 첫 아이 하룡이는 전국중고생 자원봉사대회에서 대상을 받아 한국 대표로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세계대회에 참가했고 이제 경북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는 어엿한 대학생이 됐다. 전교학생회장 노릇을 무사히 마치고 고3이 된 진범이는 올해 수시모집으로 광운대 생활체육학과에 합격한 상태다.
“새터민 청소년들은 일반학교에 10명 입학해서 한두 명 졸업하는 것이 현실이에요. 대부분이 중퇴하여 검정고시를 보거나,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로 옮겨가지요. 일반학교에 잘 적응하고 성장해주는 우리 아이들이 그래서 더 대견해요.”

그의 아이들 중에 남한사회 부적응자가 많을 것이라는 지레 짐작은 선입견에 불과하다. “우리 집 아이들 자랑을 좀 하고 싶습니다. 화가, 작가, 뮤지컬 배우, 전교 학생회장, 전국 봉사왕도 있지요. 대단하죠?”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그는 아이들에게 어려운 이웃을 돕는 마음도 길러주기 위해 태국 오지 아카 부족 마을에 함께 세 차례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재정 지원은 대부분 코스콤이 해줬다. 태국은 북한을 떠난 많은 아이들이 한국에 들어올 때 거쳐 오는 곳이기도 하다. 경북대 농업경제학과에 진학한 이진철은 “태국에 간다는 게 처음엔 두려웠다. 우리가 배를 8시간이나 타고 메콩강을 건너 그 곳을 거쳐왔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진철이는 고등학생이던2012년 지구마을살리기 국제자원봉사활동단에 참여해 아카 마을에 물탱크, 주차장, 도서관 터를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탰다. 어찌나 성심껏 일했는지 마을 어른 한 분이 자기 딸과 결혼해 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2013 년 여름 다시 이 마을을 찾아가 외국인 자원봉사자 숙소인 클레이하우스를 짓는 일에 참여했다. 마을 담벼락에는 멋진 그림도 그렸다.

김태훈 씨가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이들을 철부지라고 생각했는데 힘든 일도 어려워하지 않고 잘 해냈어요. 게다가 단순히 봉사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도 저도 모두 그 경험을 통해 정신적으로 부쩍 성장했다는 걸 느꼈죠.”
그런 그에 대해 아이들은 또 다른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아카 마을에서 보는 삼촌은 그 동안 한국에서 보아왔던 것보다 더 커 보였어요.” 아이들은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와서는 그 동안 잘 하지 않던 집안 대청소까지 했다.
아이들은 강원도 원통 글라렛 수도원에서 천주교 신부님의 일손을 돕기도 한다. 가을걷이, 콩 타작, 경운기 몰기 같은 봉사활동 틈틈이 자연을 벗 삼아 노는 체험도 한다. 동해에서 바닷물놀이도 생전 처음 해봤다.
그가 미술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아이들의 미술공부 지도만큼은 소양에 따라 더욱 알차게 해주고, 미술전시회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2년마다 미술전시회도 연다. 준비 과정에서 의견 다툼도 있고 실수도 저지르지만 그 결과 얻어지는 공동 작업에 대한 자부심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한 단계씩 성장시킨다.
이 가족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뮤지컬 <우리도 가족일까?>, 아이들의 글과 삽화를 모은 문집 <밸이난다>(짜증난다는 뜻의 북한 말) 등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우리 가족>(감독 김도현)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돼 2013년 제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초청작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김씨는 한 단계 도약을 준비 중이다. 사회적 기업 설립 계획이 그것이다. 북한 접경지역인 강원도 철원을 거점으로 북한이탈주민들의 자립을 돕는 한편, 지역경제를 살리는 내용의 사업을 설계하고 있다. 일단 5년을 준비 기간으로 잡고 차근차근 꿈을 실현해 나가려 한다. 사업에서 나온 수익의 3분의 1은 다른 그룹 홈들도 지원하는 방식으로 안정적인 운영을 모색할 계획이다.
“우리는 언젠가 독립하겠지만, 평생 같이 살아갈 가족이라고 생각한다”고 아이들은 모두 입을 모은다. ‘총각엄마’ 김태훈은 자신이 하는 일이 통일준비의 하나라고 여긴다.

김학순 (Kim Hak-soon, 金學淳) 언론인,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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