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한국을 올바로 알리고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해 헌신해온 국내외 인사를 격려하기 위하여 2008년 한국국제교류재단상을 제정하고 격년 시행
1인 (또는 기관/단체)
한국국제교류재단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어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과 한국학에 발을 들여놓은 지도 거의 반세기가 되어 가는데 그 중에서도 오늘은 뜻깊은 날입니다. 제 오랜 동료학자들 역시 이 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되지만 오늘은 제가 대표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학이 유럽이나 미국 등 서양학계에서 태동할 때는 참으로 어렵게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지난 수십년간 한국학이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보면 엄청난 발전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몇년전만 해도 한국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었지만 이제는 한국학이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한국학의 전성기는 단지 몇몇 학자의 노력만으로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한국국제교류재단과 같은 한국의 다양한 기관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중요한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지원으로 학자들이 안정적으로 연구를 지속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까지 한국학의 저변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에 대한 연구저작물의 출판해서 한국학자들과도 의미있는 교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처음 온 것이 1967년입니다. 그 때의 한국은 지금과는 다른 나라였습니다. 경제발전은 미미한 상태였고 시골에서는 여전히 전통방식의 생활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가끔 그 시기를 그리워하며 다시 떠올려보기도 하지만 제가 말하는 “그 옛날 좋은 시절”이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는 매우 힘든 시기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 한국은 제가 태어난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급속도의 경제발전과 변화를 겪었습니다. 7~80년에 서울을 방문할 때는 매번 새로운 지도가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한국의 발전은 여전히 놀랍습니다. 너무 급속도로 변화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동아시아에서 한국만이 가지는 특징적인 요소인 전통적인 가치나 문화적, 사회적, 건축적 랜드마크들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제가 조선시대를 다루는 사회역사학자인 탓에 이러한 변화가 조금은 아쉽지만 에너지 넘치고 혁신적이며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의 모습은 정말로 자랑스럽습니다. 한국과 한국학은 정말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제가 학자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신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이사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제1회 한국국제교류재단상을 수상으로 제 학자인생에서 가장 정점에 오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울러 오늘 재단상 수상식장에도 참석해주신 여러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유 영 익(전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 2008. 12. 10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이 자리에서 영예로운 제1회 ‘한국국제교류재단상’을 수상하게 된 말티나 도이힐러 박사의 추천사를 드리게 된 것을 망외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지난 9월 서강대학교의 방문교수로 내한하신 도이힐러 박사는 스위스 시민으로서 런던대학의 한국학 명예교수이며 영국 학술원의 재외회원이십니다. 유럽학술계에서 가장 높이 권위를 인정받는 ‘영국(왕립)학술원’에 한국학 전문 학자가 회원으로 선임된 것은 도이힐러 박사의 경우가 처음입니다. 이는 도이힐러 박사야 말로 해외 한국학 연구자들 가운데 가장 빼어난 인물, 즉 ‘군계일학과 같은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오늘 저는 이 벽안의 여류 학자가 어떻게 한국학 분야에서 이같이 높은 고지에 도달했는지 그리고 그의 업적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국제학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지 등에 대해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도이힐러 박사는 1935년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습니다. 학문을 숭상했던 부모의 영향으로 그는 일찍이 인문학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우선 취리히의 Gymnasium에 들어가 라틴어와 희랍어를 익힌 다음, 네델란드의 라이덴대로 유학하여 그곳에서 5년간 한문, 중국 고전, 현대 중국어 및 중국 역사 와 일본어 및 일본 역사를 전공한 끝에 1957년에 ‘중국 고전 문헌학 및 일본어 학사학위’를 취득함으로써 동양학 연구에 필요한 기초 요건을 탄탄히 갖추었습니다. 라이덴대를 졸업할 무렵 그는 미국 하버드대의 중국근대사 담당교수이며 동아시아연구소의 소장이었던 패어뱅크(John K. Fairbank)교수에게 직접 발탁되어 1959년 하버드대의 자매대학인 래드클리프대의 대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패어뱅크 교수와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처음에는 중국 근대사를 전공하다가 도중에 특별한 사연으로 한국 근대사로 연구방향을 바꾸어 1967년에 「조선의 개국, 1875-1884」(“The Opening of Korea, 1875-1884")라는 주제의 학위논문을 완성, 하버드대에서 ‘역사 및 극동언어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직후 도이힐러 박사는 한국으로 건너와 1969년까지 2년간 서울대 규장각에 드나들며 학위논문을 보강하는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이 때 그가 펼친 연구는 8년 후 1977에 워싱턴대 출판부를 통해 출판된 그의 처녀작 『유교적 신사와 야만적 외신: 조선의 개국, 1875-1885』(Confucian Gentlemen and Barbarian Envoys: The Opening of Korea, 1875-1885)로써 완결되었습니다.
규장각에서 한국 근대 외교사 관련 연구 작업을 끝마친 도이힐러 박사는 학부시절부터 꿈꾸었던 전통시대의 사회 및 사상에 대한 연구에 도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1972년에 37세의 나이로 옥스퍼드대의 사회인류학연구소에 '특대생‘로 편입하여 프리드만(Maurice Freedman)교수에게 사사하면서 사회인류학을 따로 학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1973년에 두 번째로 한국 방문을 결행하여 2년간 서울과 지방에 체류하면서 사회인류학적으로 가치 있는 전통적인 사회 관습을 관찰하고 관련자료를 수집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이러한 연구 작업을 끝마치고 1975년에 모국에 귀환한 그는 드디어 취리히 대학의 조교수로 발탁되어 대학교수 생활을 개시하였는데, 이렇게 인연을 맺은 취리히 대학에서 그는 1986년에―영구재직권이 없는―교수 직위를 부여받은 다음 1988년까지 13년간 봉직하였습니다. 취리히 대학에 임용된 지 3년만인 1978년에 그는 「유교와 조선초기의 사회구조」(“Confucianism and the Social Structure of Early Yi Korea”)라는 논문을 이 대학에 제출하여 같은 대학으로부터 Habilitation이라는 제2의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동시에 '중국 고전학 및 한국학 교수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유럽지역에서 최초의 ‘한국학’ 담당 전임 교수가 된 것입니다.
취리히 대학 재직시에 도이힐러 박사는 꾸준히 조선시대 한국의 사회사, 사상사 및 여성사에 관련된 독창적인 논문을 15편 이상 영어, 독일어 내지 프랑스어로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구미의 동양학계로부터 각광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1988년에 런던대 SOAS에 영구재직권이 부여된 부교수(Senior Lecturer)로 기용되었습니다. SOAS에 부임한 지 1년 후 그는 SOAS 부설 ‘한국학연구소’ 소장직을 맡아 이 연구소를 1998년까지 9년간 이끌었습니다. 한국학연구소 소장직에서 물러난 다음 1991년에 런던대의 정교수로 승진된 그는 10년간 그 자리를 유지하다가 2001년에 정년 퇴임하여 명예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2001년이후 그는 미국의 코넬대와 한국의 정신문화연구원(現한국학중앙연구원) 및 서강대 등에서 한국학 방문교수로 계속 후진양성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도이힐러 박사는 취리히 대학 재임시절부터 한국학관련 국제학회 내지 국제단체에 적극 참여하여 막중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그는 1977년 발족된 ‘유럽 한국학 학회(AKSE)’의 창립멤버로서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이 학회의 회장직을 맡아 유럽지역에 한국학을 뿌리내리고 보급하는데 획기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미국 내 동양학 연구자들에게 영향력이 큰 사회과학 연구 위원회 및 미국 학술단체연합회(SSRC/ACLS)의 한국학합동위원회(The Joint Committee on Korean Studies)의 위원(1980-1983)과 ‘북미아시아학회'(AAS)의 한국학 운영위원회의 위원(1983-1986)으로서 북미 지역의 한국학 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2000년 이후 그는 하버드대 동아시아학 [개발 심의] 비상임위원회 및 라이덴 대학의 비서양 언어 및 문화 [교육개발 심의] 비상임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 이들 대학에서 한국학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자문역을 수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국제교류재단의 '국제자문위원회' 위원직을 맡아 한국학을 전 세계적으로 진흥시키는데 필요한 자문을 해주셨습니다.
도이힐러 박사는 한국학 전문가로서 지난 40여 년간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의 탁월한 연구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는 1969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50여편의 주옥같은 논문과 3권의 견실한 저.편서를 출판하였습니다. 그의 논문 가운데 5편은 한국어로, 9편은 독일어로, 1편은 프랑스어로,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영어로 발표되었습니다. 그의 저.편서로는 앞에서 거명한 『유교적 신사와 야만적 외신』 이외에 1992년에 하버드대의 동아시아 출판협의회(Council on East Asian Publications)를 통해 출판된 『조선의 유교화: 사회와 이념에 대한 연구』(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라는 대작과 콜럼비아 대학의 김자현(JaHyun Kim Haboush) 박사와 공편(共編)하여 1999년에 하바드대의 동아시아 출판협의회를 통해 발간된 『조선 후기의 문화와 국가』(Culture and the State in Late Choson Korea)라는 단행본이 있습니다.
앞에서 살핀 대로 도이힐러 박사는 하버드대에서 19세기 후반 조선의 외교사에 관련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한국학에 입문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1977년에 『유교적 신사와 야만적 외신』이라는, 강화도조약과 조미조약의 체결과정 및 갑신정변 발발 배경을 다룬 명저를 출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1972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프리드만 교수의 지도하에 사회인류학을 학습하는 때로부터 자신의 한국학 연구 초점을 조선 후기 외교사에서 조선전기의 사회사 내지 사상사로 바꾸었습니다.
도이힐러 박사는 1975년부터 꾸준히 전통시대 한국의 사회사. 사상사, 및 여성사 관련 논저를 발표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한국 전통시대사 연구성과는 1977년에 발간된 그의 대표작 『조선의 유교화』에 집대성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150여종의 1차 사료와 290여 편의 논저를 동원하여 고려 후기로부터 시작된 한국사회의 유교화 과정을 친족, 조상숭배, 가계계승, 상속제, 결혼 및 상장례 등 제도를 중심으로 사회인류학적 연구방법론에 따라 천착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성리학을 받드는 조선 초기의 건국세력이 조선 사회의 유교화를 꾸준히 추진한 결과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조선의 양반사회는 적장자 중심의 리니지 사회로 재편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재구성된 조선사회는 고려사회와 구조적으로 확연히 다를 뿐만 아니라, 송, 명, 청 등 전근대 중국 왕조의 사회보다 훨씬 더 철저히 유교화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연구 성과는 도이힐러 박사의 탁월한 한문 해독 능력, 한국과 중국의 고전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사회인류학이라는 사회과학의 방법론 터득 등 그만이 갖추고 있는 비범한 학문적 능력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봅니다. 여하튼 이 저서의 발간을 계기로 도이힐러 박사는 전통시대 한국 사회사와 사상사의 세계적 대가로서 명성을 굳혔으며 결과적으로 그는 한국학 분야에서 전통시대사 전공 학자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도이힐러 박사야 말로 1900년 서울에서 구미의 학자와 선교사들 간에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 지부’(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라는 한국 문화를 연구하는 학술단체가 창립된 이래 최고의 학문적 업적을 달성한 외국인 학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남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논저들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국내외 한국학 연구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키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유럽과 미국, 그리고 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하면서 우수한 한국학 전공 학자들을 많이 양성했습니다. 그는 한국학 연구소 내지 한국학 관련 학회 등에서 주도적인 직책을 맡아 구미지역에 한국학을 뿌리내리고 확산시키는데 발군의 공헌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과 구미의 여러 대학 혹은 연구단체의 초청연사로서 누구보다도 많은 회수의 특강이나 기조연설을 행함으로써 한국학계의 연구 성과를 해외 학자들에게 널리 알림과 동시에 해외 학계에서의 한국학 연구 동향을 국내 학자들에게 소개하는 학술교류의 가교 역할도 훌륭히 해냈습니다. 그가 이처럼 여러모로 돋보이는 업적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우수한 자질과 ‘완벽한’ 교육에 힘입은 바 크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가 자신의 사생활을 돌보지 않고 거의 전 생애를 오로지 한국학연구에 헌신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주지된 바와 같이, 그는 오래전에 ‘위암장지연 기념 학술상'(1993)과 ’용재 학술상‘(2001)을 수상한 바 있으며 또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하는 은관 문화훈장(1995)과 한국 국제교류재단의 표창장(2001)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올해 모처럼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상’을 제정하여 그 제1회 수상자를 물색. 지명함에 있어 도이힐러 박사를 선정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확신합니다.
뜻 깊은 한국국제교류재단상을 최초로 수상하심으로써 이 상의 성가를 높여주시는 도이힐러 박사에게 충심의 축하와 더불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임성준 이사장님, 한국국제교류재단 임직원 여러분, 그리고 참석자 여러분!
한국국제교류재단상을 받게 된 것은 저로서는 분수에 넘치는 감도 없지 않지만 대단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해외 한국학의 상황을 어느 다른 기관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전문성이 뛰어난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수여하는 상이니만큼 저에게는 매우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학문적 업적이 뛰어나신 초대 수상자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의 뒤를 이어 상을 받게 되니 뭐라 말씀을 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 동안 제가 노력해온 것을 인정해 주시는 상이기에 무척이나 감사하게 생각됩니다. 하지만 제 개인의 노력과 업적보다 제가 현재 맡고 있는 UCLA 한국학 프로그램이 지난 10여년 사이에 이룩한 성과를 인정해주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UCLA 한국학연구소의 초대 소장 로버트 버즈웰(Robert Buswell) 교수의 노력과 비전, 동료 교수들의 노력과 협조, 그리고 프로그램 발전에 대한 제 욕심 때문에 밤마다 늦게까지 고생하는 연구소 직원들의 희생도 간과할 수 없을 겁니다.
UCLA 한국학 프로그램이 이룩한 일은 꽤 많습니다. 소속교수들의 연구업적은 물론이고 해마다 1,500명이나 되는 학부생들에게 한국어, 한국역사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교육과정, 한-미 학자간의 인식차를 좁히기 위한 한국대학과의 공동연구, 교환교수 및 교환학생 프로그램 운영까지.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UCLA 한국학 프로그램이 배출한 차세대 학자들의 활약입니다. 지난 7~8년간 UCLA에서 배출한 한국학 박사 25명은 미국과 한국의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해외한국학의 발전을 위해,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매우 큰 보람을 느낍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UCLA의 노력을 인정하여 이렇게 재단상을 주시는 것도 감사하지만 지난 수년간 UCLA의 한국학 프로그램을 꾸준히 후원해주신데 대해서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UCLA의 한국학 교수직 10석 중 3석은 KF의 지원으로 마련된 것이며 매년 UCLA 대학원생 4~5명은 KF의 대학원생 장학지원 프로그램으로 지원 받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UCLA가 진행하는 개별연구나 교육프로젝트도 KF의 지원을 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KF의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성과를 절대로 이룩하지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단 UCLA 뿐만 아니라 지난 20년 동안 해외 한국학의 양적 팽창과 질적 향상은 KF의 역할을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제가 재단상을 받는 것도 자랑스럽지만 더욱더 영광스러운 것은 고려대 학부 시절 저의 은사님이시던 김준엽 선생님과 이 자리에 함께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김준엽 선생님은 항상 학생들에게 학자로서의 모범뿐만 아니라 인생을 떳떳하게 사는 인간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개인적으로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돌봐주시고 학업에 매진하도록 지도해주셨습니다. 김준엽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 이 자리를 빌어 매일 밤, 매주말마다 서재에 박혀 있는 저를 참을성 있게 지켜봐주고 지지해 준 제 아내, 유계실 씨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임성준 KF이사장님과 KF 임직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도 형 (Dohyung Kim) / 연세대학교 교수, 한국근대사 - 2009.12.16
먼저 한국국제교류재단상을 수상하신 John Duncan 교수님께 축하를 드립니다. 학문이 부족한 제가 던컨 교수님의 공적을 소개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던컨 교수님은 미국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학문적 업적이 인정된 훌륭한 학자입니다. 별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다음의 몇 가지 점을 들어 교수님을 소개하려 합니다.
첫째, 던컨 교수님의 한국사, 한국학 연구 속에서 한국인보다도 더 한국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외국인이 다른 나라의 역사를 볼 때는 대체로 자국의 사회적 가치와 학문 풍토에 영향을 받습니다. 미국에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역사를 다루면, 아시아의 입장이 아니라 서양에서 보는 아시아관이 투영됩니다. 물론 던컨 교수님의 학문적, 이론적 기반은 미국의 동양학과 한국학 연구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는 오히려 한국의 입장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 집니다. 제가 오랫동안 던컨 교수님을 알고 있습니다만, 만나면 만날수록 옛날 공부하는 선비의 생각과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런 점은 꼭 사모님이 한국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집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아도, 사모님이 영어로 말하고, 던컨 교수님은 한국어로 말씀하시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모든 사고(思考)를 한국인으로 하고, 또 한국어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우리 교민이 많이 살고 있는 LA지역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고, 또한 현지 교민도 던컨 선생님의 역할에 만족하고 또 기대하고 있습니다.
둘째, 던컨 교수님은 한국사, 한국학 연구 수준을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일찍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수학하고, 그후 석사, 박사는 미국에서 하였지만, 완벽한 한국어와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원사료 해독은 물론 한국의 최근 연구까지 모두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또한 던컨 교수는 한국사, 한국학을 동아시아 속에서 파악하고, 그 가운데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가지는 독특한 면을 잘 포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 내 다른 한국학자와는 수준을 달리하는 점입니다.
이런 문제의식과 학문적 역량 위에서 고려말, 조선초의 족보, 호적, 금석문 등을 분석하여 조선 초기의 지배층이 고려 지배층과 상당히 연속 된다는 점을 밝혔고(The Origins of the Chosŏn Dynasty,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0), 아시아의 공통적 이념인 유교를 중국, 일본, 베트남과 상호 비교하는 저서(Rethinking Confucianism: Past and Present in China, Japan, Korea, and Vietnam, co-edited with Benjamin Elman and Herman Ooms, UCLA, 2002)의 공동 편집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그 외 수 많은 연구들을 통해서 한국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혔고, 또한 그 연구가 한국학계에도 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셋째, 던컨 교수님은 미국에서의 한국학의 성장에 필요한 학문 후속 세대를 확실하게 양성하고 있습니다. 1989년에 UCLA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에 부임한 이후 약 20년간 수많은 제자를 키웠습니다. 1994년 이후 배출한 제자 중 32명이 미국과 한국의 교수직에 진출하였고, 특히 2006년에는 박사학위를 받은 10명 전원이 교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미국 명문대학의 교수가 된 제자들은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한국학 발전과 나아가 한국의 인지도를 확산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던컨 교수의 지도를 받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은 스스로를 서림학파(西林學派)라고 칭할 만큼 자부심도 대단합니다. UCLA가 있는 지역이 Westwood인데,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수한 제자를 많이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던컨 교수의 엄격한 학생선발과 수업, 논문 지도에서 가능했습니다. 던컨 교수는 학문적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또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학생을 선발합니다. 그리고 대학원 과정의 수업에서는 한국어로 된 학술 논문, 저서를 읽게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국에서도 주목받는 연구를 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학생을 정말 성심을 다해 지도하고, 또 가능한 많은 학생을 직접 한국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을 옆에서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던컨 교수님의 역할을 기대해 봅니다. 한국학을 세계 학문 연구 속에서 정착시키기 위한 활동을 기대합니다. 2-3년전부터는 남미 지역에서의 한국학 발전을 위해 몇 번이나 남미를 오가면서 그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활동은 물론, 이를 발판으로 그 활동 영역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으로 한국학의 세계화가 더욱 확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던컨 교수님 아래에서 배우는 젊은 연구자 양성이 더욱 활발해 질 것을 기대합니다. 이미 많은 제자들이 미국 유수한 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더 많은 사람이 배출될 것입니다.
던컨 교수님은 학술적인 일로 한국에 와도 언제나 바쁩니다. 공식적인 학술행사 일정이 끝나면 쉬지도 않고, 바로 기금 모금 활동을 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한국학 발전, 특히 UCLA 한국학연구소의 기금이나 공부하는 학생들의 장학금을 모으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에서 더 많은 분들이 이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더 많은 지원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한번, 던컨 교수님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던컨 교수님과 오랫동안 친구처럼 지내 왔던 점에서, 제가 상을 받은 것처럼 기쁘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김병국 이사장님 그리고 한국국제교류재단 교류재단 임원님들, 바쁘신 일정에도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귀빈님들, 반가운 동료와 후배 교수님들, 그리고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교수님들. 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축하해 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누가 뭐라해도 제게는 생의 최고의 날입니다. 제가 제3회 한국국제교류재단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김병국 이사장님의 글을 받아들고, 감격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실로 저에게는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이것은 저 혼자만의 영광이 아닙니다. 제가 몸을 담고 있는 하와이대학의 영광이며, 저를 계속 성원해 주신 하와이 교민사회의 영광이며, 미국을 위시한 해외 한국어교육계의 영광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미국에서 걸어온 한국어교육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1970년대까지 미국대학 한국어교육은 그야말로 풍전등화격이었습니다. 10개 미만의 대학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소수의 한국학 전공자, 전 평화봉사단원, 국방외국어 대학 출신, 한국전 참전용사, 한국인의 배우자, 일부 한국인 후세 등 특별한 이유로 한국에 관심있는 소수 학생 외에는 한국어를 배우려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어교육이 저조했던 것은 당시만해도 한국, 한국문화가 대부분의 미국학생들의 관심 밖이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일본어 같은 경쟁력 있는 언어를 선호하는 반면, 경쟁력 약한 한국어를 택해야 할 이유나 동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지난 30년 동안 한국어교육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다양한 원동력으로 꾸준히 발전해 왔습니다. 미국의 Modern Language Association의 통계에 따르면, 1970년 미국 전체 대학의 한국어수강생 수는 101명에 불과했습니다. 10년 후인 1980년에는 374명으로 증가했고 그 30년 후인 2009년에는 8,511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미국대학이 1970년대 초에 10개 미만이었던 것이 현재는 140여개로 증가했습니다. 현재 미국대학에는 약 200개의 외국어 강좌가 개설돼 있는데, 등록 학생수로 보면 한국어는 13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5위를 차지한 일본어는 우리의 9배이고 6위를 차지한 중국어는 우리의 7배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과업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한국어 수강생이 꾸준히 증가한 것은 국의 비약적인 경제발전, 과학기술 발전, 미주이민 인구의 급증, 그리고 한류 등 외적 요인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외적 요인이 한인교포후세나 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 습득의 동기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외적인 요인에다, 지난 20년간 해외 한국학, 한국어교육, 한국문화예술 보급을 위한 교류재단의 미증유의 노력과 지원의 덕택으로, 한국어교육은 양 뿐 아니라 질에서도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교류재단에서는 한국학, 한국어교육을 위해 많은 교수, 전임 강사의 자리를 만들어 주시고 교재개발, 연구비, 장학금, 학회활동을 지원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한국어교육의 흐름에서, 저는 한국어교육이 극히 저조했던 1970년대 초에 한국어연구와 교육에 투신했습니다. 저는 1971년 하와이대학 아태언어연구소의 계약제 연구조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마이크로네이시아의 Woleai라는 언어의 문자와 문법과 사전을 개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1972년에 하와이대 동아시아 언어학과에서 예상치 않았던 한국어 조교수를 모집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바로 이 해 봄에, 하와이대학 이사회가 미국 최초의 한국학연구소를 신설하기로 결정하고, 한국어교육을 강화시키기 위한 tenure-track 조교수직을 신설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선발된 것이, 그 후 한국어연구와 교육에 전념하게 된 동기였습니다.
큰 꿈을 안고 동아시아언어학과에 발을 디디고 보니, 학생부족으로 한국어프로그램은 어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같은 과의 일본어프로그램은 학기당 등록수가 한국어의 30배 가량인 1,000명에 육박하고, 중국어 프로그램은 한국어의 10배 가량인 300여명이었습니다. 한국어 프로그램에서는 학위과정 없이 언어훈련만 시키는 반면, 일본어와 중국어는 학사과정과 대학원 과정이 있었습니다. 과를 좌지우지하는 일본어와 중국어프로그램의 교수들은 저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어프로그램이 살아남고 발전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한국어교육이 탄탄한 학문적 기반 위에 세워져야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한국어의 학문적 제도화를 위해서 온갖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많은 시련과 실패 끝에 1980년 후반에 한국어의 석박사 과정을 신설하고 1995년에 학사과정을 신설하게 되었습니다. 학위과정이 없던 때와는 달리 학위과정이 있는 한국어 프로그램은 학생들, 대학당국, 대외에 미치는 이미지, 발언권, 영향력이 상당히 컸습니다. 마침내 일본어나 중국어와 동등한 입장에서 거침없이 한국어프로그램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처음은 학사, 석사, 박사 전공학생 수의 저조로 좌절하기도 했지만, 몇 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크게 발전하였고 훌륭한 한국어전공학생이 속속 배출되었습니다. 저는 특히 영어권 대학에서 차세대 한국어교육을 맡을 박사양성에 많은 열정과 시간과 애정을 쏟아 왔습니다.
한국어 관련 학회 창설, 학회활동, 학술발표, 저서와 학술논문 출판, 한국어 교재 개발 등 이 모두가 미국에서의 한국어의 학문적 기반구축과 지속적인 제도화를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이러한 한국어교육의 학문적 제도화가 빠른 시일 내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유지되는 데는 국제교류재단의 지원과 협조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저와 직접 관련된 예만을 들면, 하와이대학에 설립해 주신 Korea Foundation Endowment는 하와이대학의 한국학과 한국어교육 발전의 영구적 재원이 되었습니다. 한국어교수들의 연구, 학술활동, 학생장학금 급여의 재원입니다. 그리고 교류재단 장학금은 일부 박사과정 학생들이 수혜자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1994년 처음 시작한 미국한국어교육자 협회가 지속발전하는 것은 교류재단의 지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개최된 연례대회와 학술지 발간이 교류재단의 지원 하에 활발히 추진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IMF때도 연례대회를 지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1994년부터 제가 주관해서 실시한 대규모 영어권 한국어교재 개발은 당시의 이사장님의 이니셔티브와 교류재단의 지원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이 영광은 많은 부분 교류재단의 덕택임을 말씀드립니다.
끝으로 과거 54년간 저와 고락을 같이하면서 저를 지성껏 내조하고 보살펴준 제 아내와 더불어 이 영광을 길이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려대학교 유석훈 교수
손호민 교수님은 과거 40년간 하와이대학에 재직하면서 해외 한국어 교육과 연구와 보급에 많은 공적을 쌓으셨습니다. 특히 손 교수님의 비전과 지도력과 추진력은 미국 한국어교육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손 교수님은 한국어 교육의 대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외한국어 진흥에 공헌한 손 교수님의 업적은 학술발표와 저술, 대학 한국어교육의 메카 구축, 한국어 관련 학회창설, 영어권대학 교과서 개발, 그리고 후진양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선 세계 도처의 학술회에서 발표한 한국어연구와 한국어교육 관계의 학술논문은 국제학술대회 기조강연논문 25편과 아시아학회 발표 논문 10편을 위시하여, 총 100여편에 이릅니다. 그리고 한국어연구와 교육에 관해 출판한 저서, 공저, 편저는 17권인데, 저서 중, 1994년 런던 Routledge 출판사 에서 출판된 Korean: Descriptive Grammars 와1999년 Cambridge 대학출판부에서 출판된 The Korean Language는 세계 언어 학계와 한국어 교육계에 한국어를 선양하고 보급하며, 대학이나 대학원 교재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The Korean Language는 해외학자들에 의한 7편의 서평이 국제학술지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어 교과서는 7권을 출판하였습니다. 손 교수님은 또한 각종 학술지에 한국어와 한국어교육에 관한 논문 90여 편을 출판하였습니다.
한편, 손 교수님은 하와이대학 한국어 프로그램을 해외 한국어연구와 교육의 메카로 개발하고 육성하였습니다. 손 교수님이 처음 하와이대학에 조교수로 임용되었던 당시 한국어 프로그램은 조교수 1명과 전임강사 1명이 전담했고 학기당 한국어 수강생은 30여명에 불과했으며, 단순히 언어교육만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손 교수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현재 하와이대학 한국어프로그램은 교수진 8명, 시간 강사 10명, 조교 7명이라는 미국 최대 규모의 한국어프로그램으로 성장했습니다. 손 교수님은 한국어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신설했습니다. 학위과정의 신설은 손 교수님이 10년간의 동아시아어문학과 학과장, 6년간의 한국학연구소 소장, 5년간의 한국전문가 양성기관인 한국어 Flagship 센터 소장직을 맡으면서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번 학기 한국어 수강생은 482명으로 중국어 수강생 397명을 웃돌았고, 한국어석사과정 재학생은 18명으로 일본어학 13명, 중국어학 4명을 능가하고, 한국어학 박사과정 재학생은 23명으로 일본어학 11명, 중국어학 7명을 훨씬 앞섰습니다.
또한, 손 교수님은 해외 한국어 연구와 교육의 활성화와 보급을 위한 세 학술단체의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우선, 1975년에 5명의 북미 교수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아시아 학회 직후, 당시 너무도 미미했던 한국어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국제한국어학회 (International Circle of Korean Linguistics)를 창설했습니다. 미시간 주립대의 故 송석중 교수가 회장, 알래스카대의 故 구장회 교수가 총무, 손 교수가 학술지 편집장을 맡았습니다. 손 교수님은 학술지 Korean Linguistics 1권을 1978년에 출판했습니다. 손 교수님은 1980년에 3대 회장에 선임되었고 1982년 하와이에서 대규모의 2차 국제 한국어학 학술대회를 주관했습니다.
또, 손 교수님은 1994년 미국비전통외국어연합회의 지원을 받아, 워싱턴에서 미국한국어교육자협회(American Association of Teachers of Korean)를 창설하였습니다. AATK로 알려진 이 학술단체는 미국에서 초-중-고-대학의 한국어교육을 대표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학술단체입니다. 손 교수님은 3년간 초대회장으로 봉사하면서 Monterey, LA, Phoenix 등지에서 세 차례의 학술대회를 현지 교수님들과 더불어 성황리에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손 교수님은 첫 대회의 발표논문을 선별 편집해서 Korean Language in America 제 1권으로 출판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본 학회 학술지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AATK는 교류재단의 지원하에 연례학술대회, 교사연수워크숍, 학술지 발간, 공동연구, 네트워크 구축을 통하여 미국에서의 한국어교육발전에 크게 공헌하고 있습니다. 금년 대회는 Yale 대학에서 개최되었는데, 150명의 학자와 교육자가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손 교수님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의 권고로, 1994년 사단법인 한국어교육연구 센터(Korean Language Education and Research Center)를 하와이 주에 설립했습니다. KLEAR로 알려진 이 센터의 일차 목표는 영어권대학의 한국어교재개발과 출판인데, 이 센터의 소장으로 봉사하면서 영어권 대학한국어 교재개발을 총지휘해 왔습니다. 이 교재개발사업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의 발상과 지원으로 실시되었는데, 30여명 교수가 참여하여 1994년에 착수되었고, 2000년부터 총 19권의 교재를 하와이대학 출판부를 통해서 출판했습니다. 교사용 지침서인 resource book 한 권은 지금 출판중이고 문법용례사전은 지금 집필중입니다. 연간 10,000부 이상 판매되는 KLEAR 교재는 하와이대학 출판부의 Best-seller로서 현재 영어권에서만도 80 여 대학에서 한국어교재로 사용하고 있고, Europe 이나 동남아 여러 대학에서도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끝으로, 손 교수님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은 헌신적인 후진양성입니다. 현재까지 손 교수님이 박사학위 심사위원장으로 지도한 박사나 예비박사(ABD)는 38명이고, 심사위원으로 지도한 학생도 80여명입니다. 이들 제자 중 40여명이 현재 국내는 물론 영어권 대학의 언어학이나 한국어연구, 한국어교육 분야에서 교수나 전임강사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손 교수님께서 해외 한국어 발전에 기여한 업적 때문에, 1997년에는 한국 대통령 표창, 2001년에는 동숭학술 공로상, 2005년에는 인문계로는 극히 이례적인 하와이대학 이사회의 우수연구교수 포장을 수상했고, 금년 한글날 경축식에서는 문화포장을 수상했습니다.
이상으로 약식이나마 손호민 교수님 소개의 글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中国人民对外友好协会, Chinese People's Association for Friendship with Foreign Countries
독일연방하원 독한의원친선협회장, 한독포럼 공동대표, 한-독통일외교정책자문위 독일측 위원장으로서 2012년 수교훈장 중 최고의 훈장인 "광화장"을 받은 후, 오늘 한국국제교류재단상을 받게 되어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한-독 관계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저와 함께 전력을 다했던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이 상을 받고 싶습니다. 고통스러운 독일 분단의 경험과 독일통일의 기쁨이 특별한 배경이 되어, 저의 염원은 독일과 유럽연합이 한반도의 평화, 화해 그리고 자유통일을 위하여 힘쓰는 것입니다.
이에 부응하여 상금 10,000달러는 제가 설립하고자 하는 재단의 기금으로 사용할 계획입니다.
이 재단의 목적은, 독일 측으로부터 분단 한국과 북아시아에 신뢰구축, 화해 및 인간적인 화합을 이루는 본보기적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발전시킴으로 평화적이고 화해적인 동북아에서 하나되는 한국이라는 목표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재단의 명칭은 다음과 같습니다.
stiftung-ein-korea.de (통일 한국 재단)
vertrauen.vers?hnen.verbinden. (신뢰, 화해, 결합)
요아힘 가욱 독일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한국방문 국회연설에서 "국가의 분단을 경험한 한국과 독일 사이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고 하였습니다. 동시에 독일 분단 극복의 역사가 절대로 "청사진"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분단국가에게는 독일의 경험과 교훈이 참고가 될 수는 있습니다.
가욱 대통령은 국회연설에서, "남북간 긴장 상황이 지속되더라도 대화가 중요함을 역설하였습니다. 대화는 이른바 딱딱한 안보정책 주제만이 아닌 경제, 학문, 문화 및 환경에 대한 것이 의사소통의 채널을 여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신뢰와 대화는 평화적인 전환, 합의의 열쇠이다. 그와 동시에 통일을 목표로 한 시선을 항상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북한이 수소탄실험 발표를 한 이 때에, 가욱대통령의 말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행동은 남북한 친선과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 프로세스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북한의 행동은 독일과 유럽연합의 대북 포용정책을 어렵게 하고, 전세계가 대북제재 강화에 동의 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은 북한의 핵실험에 대하여 "북한은 국제사회 원칙을 어기고 있다"고 한 바 있습니다.
유럽연합은 이 실험이 유엔 안보리 결의에 심각한 위반이라고 하였습니다. 북한의 핵무기실험은 핵무기를 생산하거나 실험하지 않기로 한 북한의 의무를 위반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러 차례 유엔 안보리 결의로 확정 된 것입니다.
또한 실험은 동북아 전체의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며, 북한의 핵 무기가 다른 손에 넘어갈 위험도 가져옵니다.
새로운 핵실험을 통한 북한의 도발로 김정은은 6자회담 재개의 문을 닫아버렸고 북한을 국제사회로부터 더욱 단절시켰습니다. 북한 핵실험의 배경은, 젊은 지도자 김정은이 아직 권력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했고, 그럼에도 북한 군대에게는 자신이 "힘있는 사람"임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국제사회 속에서 자신의 권력체계가 불안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 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밝힌 북한주민의 생활수준 향상이라는 목표는 국제사회와 결탁 없이, 그리고 남북한 친선을 위한 노력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중국입장에서 북한의 핵실험은 정면도전입니다. 저는 중국이 대북정책을 변경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고립된 국가의 우방인 중국 조차도 북한 핵실험을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행되었다고 평가하였으며, 평양정부에 "비핵화 의무를 지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중국 신화통신은 핵실험을 한반도 비핵화에 목표에 "위배" 된다고 표현하였고, 오로지 대화만이 불신을 없앨 수 있으며, 2009년 이후 이뤄지지 않은 북한, 남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6자회담이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전에 "신뢰와 대화는 평화로의 전환, 합의의 열쇠이다"라고 했던 가욱 대통령의 말은 지금 핵실험 상황에 그 어떤 말보다 적합하며, 또한 북한정권에게 국제사회고립을 끝내고 지속적인 한반도 긴장완화를 유지시키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독일 정치와 외교, 독일 경제, 독일의 정치 재단, 괴테인스티투트, DAAD,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 또한Welthungerhilfe (세계기아원조) 와 같은 독일 구호단체, 독일 적십자사와 구교 및 신교회는 비인간적인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남북한의 친선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2010년에는 독일통일 20주년을 기념하여 양자 간 전문위원회를 구성 하였습니다. 이는 독일 통일과정에 대한 정보와 학문적 인식공유를 지원하고 한국 통일정책에 적용 여부에 대한 논의를 합니다. 특히 독일은 -가능한 한- 한국의 요구에 따라 한국정부에게 독일 통일과정관련 국가문서와 그 외 역사적 증거서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2002년에 설립된 한-독 통일자문위원회에는 독일 측 인사로 로타 드 메지에르, 호르스트 텔쉭, 라이너 에펠만이 소속되어 있습니다. 독일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 까지 Neues Forum (새 포럼) 소속 동독민권운동가이자 1990년 동독인민의회로부터 동독국가안보부 해체를 위한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 되었던 요아힘 가욱 대통령 또한 이 위원회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방독을 계기로 2014년 3월 베를린에서 마침내 남북한 친선을 위해 독일의 노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합의를 이루어냈습니다. 특히 독일 외무장관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와 윤병세 외교부장관은 "한-독 통일외교정책자문위원회"를 세우기로 합의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한 양해각서는 2014년 9월에 체결되었습니다. 전문위원회는 2014년 10월 슈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의 한국방문을 계기로 서울에서 구성되었고, 슈타인마이어 장관은 저를 독일 측 위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한국측에서는 한승주 전외교부장관이 위원회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양국 전문가 7명씩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한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독일통일의 외교적 부분에 있어 어떠한 경험이 한반도 상황과 동북아 주변에 적용될 수 있을지를 논의 합니다. 제 3차 회의는 가욱 독일대통령의 방한했던 지난 10월에 개최 되었습니다.
작년은 독일 통일 25주년을 기념하는 해였습니다. 한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인 동시에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독일과 한국의 분단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독일은 한국과 40년간 분단의 운명을 함께 하였습니다. 또한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독의 평화적 혁명 25년 후에도 독일 내 분열극복과 한반도의 계속되는 분단은 독일과 한국을 결합시키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독일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전력으로 남북한의 친선과 정의와 자유 속에서의 평화통일을 위해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는 25년 전, 1990년 10월 3일에 꿈을 이루었습니다. 동시에 이 날, 10월 3일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또한 한국의 10월 3일은 국가적인 통일을 기념하는 "개천절"로 양국의 역사는 접합점을 갖습니다. 이 날은 단군이 기원전 2333년에 한국의 첫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건국기념일 입니다. 이 날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하늘이 열린 날"입니다. 이 날은 단군을 통하여 나라가 세워짐을 기념할 뿐 아니라, 기원전 2457년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에 내려온 날이기도 합니다. 이 날은 나라와 민족의 기원을 숙고함으로 민족근원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 합니다.
저는 통일 한국의 날이 도래할 것을, 또한 단군 정신의 한국민족이 통일, 평화, 자유 속에서 민족 자결권을 얻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는 분명 기대하는 것 보다 빨리 찾아올 것입니다. 1989년 초, 전 세계 아무도 그 해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독일이 이듬해에 통일될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10월 3일을 독일통일기념일로서, 또한 통일 한국의 개천절로 함께 기념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한국의 자랑스러운 긴 역사 속에서 지난 70년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될 것입니다. 가욱대통령이 연설 마지막에 했던 말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 독일은 통일로 인해서, 그리고 통일로 인해 새롭게 주어진 역할로 인해서 유럽과 세계에 대해서 새로운 책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대한 독일의 책임은 관심을 갖고 또 한국이 원한다면 조언을 하면서 한국의 여정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한국국제교류재단상을 받을 수 있는 영광에 감사 드립니다. 이 상은 저에게 격려이자 동시에 의무입니다. 앞으로도 한-독 관계와 한국통일을 위한 남북한 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영진 / ㈜한독 회장, 한독상공회의소 이사장, 한독협회 회장 - 2016.1.22
제5회 한국국제교류재단상 수상자로 하르트무트 코쉭 독일연방의회 의원이 선정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개인적으로 한독협회 회장으로서, 독한협회를 이끌며 한독포럼 등 많은 도움 주고 계신 코쉭 의원의 추천사를 말씀 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번에 수상자로 선정되신 코쉭 의원은 한국과 독일 양국간 정치외교, 경제, 문화 교류에 구심점 역할을 해 오셨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코쉭 의원은 현재 메르켈 총리가 이끌고 있는 기독민주당 연정 파트너인 기독사회당 소속의 7선 연방하원의원으로 난민 이주와 소수민족 정책을 담당하는 독일연방특임관이기도 합니다. 2009년부터 5년간 독일 재무차관도 지내셨습니다.
코쉭 의원은 독일 정치계 내 대표적인 지한(知韓)인사 입니다. 1998년부터 14년 동안 독한의원친선협회장을 맡아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과 국회의장 등 수많은 정치 인사들이 독일 방문을 할 때마다 당신의 정치 인맥을 총동원해 독일 주요 인사들과 면담을 주선해 주셨습니다. 또한 회담 진행을 지원해 우리나라의 방독 행사 성과를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해 왔습니다.
지난 10월 가욱 독일 연방대통령 방한을 포함해 역대 독일 연방대통령의 방한 때마다 공식 수행원으로 동행해 왔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취임식 때는 독일을 대표하는 축하사절로 방문해 주셨습니다. 공식 방한 횟수가 열 번이 넘으니, 코쉭 위원이 우리나라 정치계와 얼마나 깊은 인연이 있는가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또 코쉭 의원은 독·북한의원친선협회장도 겸직하고 있어 북한에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한-독 통일외교정책자문위원회 공동의장이기도 해, 수 차례 방북 경험을 토대로 북한의 실상과 한반도 평화통일 해법을 조언해 주고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독일 안에서의 지지와 공감을 이끌며 우리 통일외교 현안에 대한 정책 자문도 해주고 있습니다. 평화통일을 이룬 독일의 경험을 바탕으로 남북한 신뢰구축과 한반도 평화통일 방안을 모색하며 헌신하고 있는 코쉭 의원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코쉭 의원은 독일 정치계 내에서 우호적인 여론을 이끌며 우리나라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2004년과 2008년, 한독수교 120주년과 125주년을 기념해 연방하원 내 ‘독한 관계의 역동적인 지속발전 결의’ 채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2001년에는 ‘한반도 평화안정통일에 관한 결의’ 채택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해서 독일 정계에서 양국관계 발전과 한반도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코쉭 의원은 또한, 양국 경제, 사회 분야의 교류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003년부터 독한협회장, 2007년부터 한독포럼 공동대표직을 맡아, 두 나라간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회장직을 맡고 있는 한독협회에서 2002년 요하네스 라우 독일 연방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마련한 한독포럼 창립에 큰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매년 참가할 때마다 저는 한독포럼이 양국의 정치·경제·문화·교육 분야의 협력을 이끄는 내실 있는 포럼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됩니다.
코쉭 의원은 국권의 신장과 우방과의 친선에 공헌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우리나라 수교훈장인 ‘광화장’을 수훈하기도 했습니다. 독일 내 한반도 전문가 코쉭 의원이 이번 한국국제교류재단상 5번째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매우 의미가 큽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코쉭 의원이 독일과 한국 양국간 교류가 더욱 풍성해지는데 힘을 보태고 특히, 남북한의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한반도 평화통일에 역할 해 주시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 - 2016.1.22
존경하는 독일연방공화국 하르트무트 코쉭의원께서 한독교류협력에 이바지하신 공로로 한국국제교류재단상을 수상하게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는 한독동문네트워크인 아데코(ADEKO) 이사장으로서, 코쉭의원을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재단측에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역대 수상자 가운데 정치인이 수상한 것은 처음이어서 그 의미는 더욱 큰 것 같습니다.
코쉭의원이 한독 교류협력을 위해 애써오신 내용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앞서 유현석 이사장과 김영진 한독협회 이사장께서도 자세히 소개하셨으므로 저는 그 내용을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2013년 베를린에 6개월 동안 머무는 동안 경험한 것을 말씀드린다면, 코쉭의원은 한국관련 행사에 빠짐 없이 찾아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개천절 기념행사로 베를린필 공연장에서 열린 금난새씨 지휘의 오케스트라에 참석하여 연주역량에 찬사를 보내고 지휘자의 재치있는 익살에 즐거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제가 재무차관실을 방문했을 때 친절히 맞아주고 많은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해주신 생각도 납니다.
한국과 독일은 자유, 평등, 정의, 인권 등 인류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입니다. 한국은 동북아시아 국가 중 EU와 가장 먼저 FTA를 체결하였고 독일은 EU의 중심국가로서 양국은 앞으로도 끈끈한 경제협력관계를 이어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로서 이미 통일을 이룬 나라입니다. 실로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배우고 참고하고 또 협력해나가야 할 나라입니다.
코쉭의원께서 앞으로도 계속하여 한독 양국의 교류 협력, 우호친선을 위해 노력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코쉭의원의 앞날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고, 또한 더 큰 정치적 성공을 거두어 나가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게 이런 좋은 상을 주신 한국국제교류재단에 감사드리고, 오늘 만사를 제치고 오셔서 이렇게 자리를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돌이켜보면, 1970년 1월 4일 아침,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 칼바람 몰아치는 청진동 골목을 걸어 올라가 제가 Korea Times 편집국에 첫 발을 들여놓은 이후 거의 반세기가 흘렀습니다. 그 동안 적지 않은 일을 해 왔지만, 생각해보면 결코 그 어느 일도 제가 혼자 한 것은 없었습니다.
학교를 갓 졸업한 저를 영어신문기자로 길러 준 Korea Times, 몇 번의 퇴사와 재입사를 허용하며 제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Korea Herald, 그리고 2007년부터 오늘까지 Korea Focus 와 Koreana, 두 가지 중요한 간행물의 편집장이라는 중책을 맡겨 온 한국국제교류재단, 그 밖에 문화재청,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를 포함한 여러 기관과 수많은 분들이 제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함께 고생하고, 지켜보며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의 많은 분들이 오늘 자리까지 와 주셨습니다.
올해는 Koreana 가 창간 된지 30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그래서 여름호부터 겨울호까지 표지에 30주년 기념 엠블렘을 넣고 더욱 정성껏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Koreana 가 한 권 한 권 나오기까지는 많은 분들의 노고가 필요합니다. 편집자문위원님들로부터 인쇄하고 제본해서 마무리 작업을 하시는 분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들이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서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그 중에는 물론 필자, 사진작가, 편집 기획, 디자이너 등 여러 부문에서 지식과 지혜와 창의로 책을 격조 있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말로 읽어도 쉽지 않은 글들을 외국어로 옮겨주시는 번역가들이 계십니다. 그것도 한 두 개 언어가 아니고 무려 10개의 언어로 남모르는 고뇌 속에 씨름을 하고 계십니다.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본격적인 등장을 하고 있을 즈음 때맞추어 태어난 Koreana 는 그 동안 많은 발전을 해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노력을 높이 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더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생각,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창간 이후 우리의 고유한 문화를 잘 보여주어 세계인들의 눈을 한국을 향해 뜨게 하는데 주력해왔다면, 앞으로는 공동의 관심 주제를 찾아 함께 즐기고, 함께 생각하고, 때로는 함께 고민하면서, 함께 미래로 나갈 수 있도록 더 많이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방방곡곡에서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지혜로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문화가 살아 생동하는 나라, 꼭 가보고 싶은 나라, 그래서 주변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계산에 희생되어서는 안 되는 나라, 핵무기로 파괴될 수 없는 나라, 더 나아가 하루 빨리 통일을 이루어 오롯이 한 국가로 국제사회와 인류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 나라 — 이렇게 인식하고 협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Koreana 가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더욱 더 열심히 책을 만들 것입니다.
오늘 이처럼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신 이시형 이사장님과 재단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함께 해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깊이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유장희 이화여대 명예교수, (전)동반성장위원장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또 세계 주요국 대학에서 한국학 전문가를 양성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2017년도 재단상 시상식을 거행하는데 불초소생이 축사를 맡게 된 것에 대해 저로서는 극히 외람되면서도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경희 편집장을 제가 처음 알게 된 것은 그가 「코리아 헤럴드」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였습니다. 제가 그 신문의 자문위원으로, 또 칼럼니스트로서 관계를 맺고 있을 때인데 주요 일간지의 여성편집국장을 뵙는 일은 퍽 드문 일로서 자연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국장은 편집국장을 거쳐 동 신문의 주필까지 역임하였는데 그가 보여준 언론인으로서의 공정성, 책임감, 열정, 그리고 리더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습니다.
「코리아 헤럴드」를 퇴임하시고 한국국제교류재단의 8대 편집장 직위를 맡아 Koreana와 Korea Focus를 발간하는데 주역을 담당했습니다. 저는 지금은 폐간됐지만 Korea Focus의 편집위원으로서 이 편집장과 약 7년간 같이 일한 적이 있습니다. 이경희 편집장은 한마디로 표현하여 「사명감」을 데리고 사는 분이었습니다. 우리 문화와 예술,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제까지 다루면서 우리나라를 제대로 세계에 알리는 일이 본인에게 주어진 필생의 사명이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우리 것을 세계에 알리는데 세 가지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즉 한국)에 대하여 외국인들이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가를 간파하는 일입니다. 국내에 우리의 문화, 예술, 정치, 경제, 사회, 체육 등등에 관한 논문과 수필이 많습니다만 대부분이 국내적 관심사를 주로 다루고 있고 또 대부분 아전인수, 자화자찬 격인 글들이 많습니다.
둘째는 한국을 알리는 모든 발간물에 해당되는 사항으로써 우리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공평하게 다루어야 외국의 독자들이 그 발간물의 객관성을 인정하지 않겠느냐라는 일종의 의무감입니다. 그런데 좋은 점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데 나쁜 점은 어떻게 표현해야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불리하게 되돌아오지 않겠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모두 고민을 많이 합니다.
셋째는 언어문제입니다. 영문번역이 잘돼야 내용전달도 잘되고 또 발간물의 품위도 높아집니다. 그런데 번역된 글들을 일일이 읽어보고 감수하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학의 수준이 높은 분으로써 꼼꼼하게 전편을 검토할 수 있는 열정의 소유자가 편집진에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 해 같이 일 해본 저는 이경희 편집장이야말로 이렇게 어렵고 예민한 일을 한꺼번에 해결해 오신 최고의 적임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정통 언론인 출신으로서 독자들이 무엇을 Koreana 와 Korea Focus에서 읽기를 원하는가를 거의 본능적으로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특히 영문 일간지를 운영한 분이므로 외국인들의 감각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여성편집장으로서 갖고 있는 섬세함이 있어 우리 것을 알리되 읽는 이들이 수긍할 수 있는 수준의 자랑스러움과 부끄러운 점을 균형 있게 싣는데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의 탁월한 영어 실력은 필자들이 제출한 원문을 그냥 통과토록 놔 주질 않습니다. 이런 노력 끝에 나오는 Koreana 의 매호는 문자 그대로 각각의 작품입니다.
이경희 편집장은 Koreana 편집뿐만이 아니고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알리기 위해 많은 저서와 역서를 펴냈습니다. 1998년에 나온 World Heritage in Korea 와, 동일한 제목의 2012년 역서는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한국문화를 알고 싶은 모든 이들의 필독서라고 봅니다. 또 우리 것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수많은 자료를 번역했으며 대부분 등재에 성공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Koreana」잡지 창간 30돌을 맞아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이경희 편집장을 재단상 수상자로 결정한 것은 재단이 근래에 결정한 여러 주요사항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결정이었다고 저는 생각하면서 이경희 편집장은 물론 한국국제교류재단에게 무한한 감사와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경희 편집장 같은 분이 이 나라에 많이 배출되어 우리를 세계에 옳게 알리는 데에 앞으로도 부족함이 없도록 되길 바랍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모두 축사를 하셔야 할 분들인데 제가 외람되게 몇 마디 두서없이 축사말씀을 드렸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이근 이사장님과 내외 귀빈 여러분,
우선 수많은 훌륭한 후보 가운데 저를 한국국제교류재단상 수상자로 선정해 주시고 시상식에 초대해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처럼 의미있고 명예로운 상을 받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저를 비롯한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와 한러대화(KRD) 관계자들이 한-러 학술·교육분야 협력 강화와 양국 간 건설적 대화 실현, 양국 국민간의 교류 강화와 관련하여 이룬 성과들을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인정해주었다는 점을 의미있게 생각합니다.
러시아 내 한국문화를 전파하고, 한국의 유구하고 풍부한 전통을 러시아인들에게 알리며, 한국인들에게 러시아의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것은 저에게 큰 기쁨입니다. 저는 여기 계신 학계 인사 및 한러대화 관계자들과 한마음 한뜻이며, 우리는 모두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는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유럽권 최초로 한국어 교육을 시작하였고, 2017년에는 한국학 교육과정과 연구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한국학과를 별도로 개설하였습니다. 우리 대학이 한국 산문 및 시문학 교육 분야에서 그간 쌓아온 연구 전통과 성과는 가히 자랑할 만하며, 졸업생들이 문학 전문 번역가의 길로 진출하고있는 점 또한 자랑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들은 한국의 고전 문학뿐 아니라, 현대 문학을 번역하여 러시아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한반도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 사회에 관한 교육과 연구를 성공적으로 이뤄냈으며, 러시아 내 한국학의 중심지라 불릴만 합니다.
오늘 이처럼 영예로운 상을 수상하는 것에 개인적으로 큰 책임감을 느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 간, 더 나아가서는 한-러 양국 관계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 모두는 다가오는 2020년이 다채로운 문화행사로 빛나고 기억에 남는 해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토록 영예로운 재단상을 수여해주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상 수상의 영예를 안게 해주신 재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랜 세월 일본에서 교원으로 일하며 일본의 젊은이들, 혹은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의 교육에 임해 왔습니다. 또한 역사연구자로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과 한국의 역사 연구에 매진해 왔습니다. 동아시아 동북부에 위치한 양국은 유사(有史) 이전부터 사람들의 왕래와 교류가 있었고, 그 결과 양국은 서로 훌륭한 문화를 구축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서로의 문화를 배우고 인적, 물적 교류 끝에 세계에 자랑할 만한 역사적 유산을 형성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침략과 지배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는 일본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며 그 부당성의 보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깊게 성찰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훌륭한 교류와 배움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5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특히 임진왜란 이후 약 200년 간 조선통신사가 왕래한 결과, 한국과 일본 간에는 신의를 나누는 관계가 성립되었고, 서로 배우는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관계는 1811년을 끝으로 끝이 났지만, 그 아름다운 시기의 유산을 통해 서로 배워 나간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역사적 자각을 현대인들에게 전하고,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저의 또 하나의 사명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한국국제교류재단상 수상을 계기로 미력이나마 앞으로 양국 시민의 우호와 친선 증진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