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 작가 지희킴“언어의 벽을 넘어 그림으로 소통합니다”
지희킴은 서울과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지를 오가며 활동하는 드로잉 작가입니다. 해외의 예술가 레지던시에 참여하고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시민들과 드로잉 워크숍을 진행합니다. 언어보다 강력한 소통의 도구로서 드로잉을 활용하는 지희킴의 작업은 한국의 문화예술 역량을 세계에 알리는 한편, 국경을 초월해 사람을 연결하는 예술가 국제교류의 선례를 보여줍니다.
드로잉으로 사고하고 기억하며 소통하는 사람
영국 도서관에서 기증 받은 책으로 북 드로잉 작업 시작
런던, 타이베이, 도쿄에서 전시회와 드로잉 워크숍 진행
말과 글보다 강력한 시각언어로 세계의 대중과 소통
KF가 지원하는 전 세계 예술가 국제교류는 공공외교의 소중한 토대
안녕하세요. 개인전과 박사학위 취득까지 올 상반기를 바쁘게 보내신 것 같습니다. 요즘 근황은 어떠신가요?
반갑습니다. 4월에 개인전 <너의 손은 나의 것>을 마쳤고 최근에는 다음 예정된 전시들을 준비하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드로잉과 회화를 중심으로 동시대 미술을 강의하며 학생들도 만나고 있어요.
‘드로잉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시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드로잉이라는 시각언어는 제 작업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로잉의 자연스러움, 즉흥성, 예민한 감각들이 제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작동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저를 드로잉으로 사고하고 기억하며 작업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영국 골드스미스런던대학교 유학을 기점으로 드로잉 작업에 변화가 있었어요. 대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북 드로잉이 이때 시작되었고요.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말씀하신대로 영국 유학은 저에게 커다란 변곡점이 된 경험입니다. 낯선 환경, 저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 영국의 현대미술, 아름다운 미술관과 갤러리들, 동시대 예술에 스며있는 철학은 지금까지 저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제 자신과 작업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북 드로잉은 책을 펼쳤을 때 눈에 띄는 단어를 포착해 그 단어로부터 연상되는 기억이나 감정을 책 위에 그대로 그려나가는 작업이에요. 2011년쯤 시작했는데 제가 처음으로 작업을 위해 어떤 용기를 낸 프로젝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작업실 밖으로 나가 런던의 도서관을 조사하고, 버려지는 책들을 제게 기부해달라고 도서관에 편지를 썼어요. 도서관 사람들을 만나 제 작업을 설명하고 설득한 일들은 그 이전의 저였다면 생각하지 못했던, 대담한 모험이었어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작업에도 어떤 변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유학 이후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다양하게 참여하셨잖아요. 예술가들에게 거주 공간을 제공하고 그 안에서 예술가들이 교류하며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할 기회도 만드는 프로그램인데요. 가장 최근의 도쿄 레지던시는 어땠나요?
도쿄 생활은 일본을 새롭게 들여다본 계기였어요. 그 전에는 제가 일본을 상당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생활해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올해는 일본의 전통미술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었고 그중에서도 우키요에의 세밀한 표현 기법에 매료되었습니다. 우키요에는 에도 시대에 유행한 풍속화인데 저는 주로 작품 속 인물의 손에서 영감을 받았고, 손이라는 신체 부분을 제 드로잉으로 해석했어요. <너의 손은 나의 것>은 그때 일본에서 제작한 드로잉 신작과 기존 작업의 손 표현을 중심으로 기획한 전시입니다. 도쿄, 타이베이, 가오슝 같은 해외의 레지던시에 참여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일 때문에 잠깐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하다 보니 각 나라의 예술가들이나 관계자들과 교류하는 폭이 넓어져요.
거주한 도시마다 드로잉 워크숍도 꼭 진행하셨어요. 워크숍에 기대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앞서 이야기한 북 드로잉 프로젝트는 언어의 장벽에서 비롯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언어의 장벽에 부딪치고 교묘한 방식으로 소통에서 배제되는 일들을 겪으면서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로 소통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커졌고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영국, 타이완, 일본 같은 나라들에서 제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이미지로 소통하는 드로잉 워크숍을 기획하고 진행했어요. 기획할 때 어느 정도 기대는 했지만 실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활발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건 놀라웠어요. 드로잉의 힘과 소통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 흥미로운 프로젝트예요.
워크숍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성향이나 특징도 나라별로 차이가 있나요?
드로잉 워크숍에 참여하는 분들은 90퍼센트 이상이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가장 놀라운 건 그분들이 비전공자이면서도 무언가를 드로잉으로 표현하는 데 전혀 두려움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타이베이의 참여자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요. 정말 거침 없이 적극적으로 드로잉을 그려내고 표현하더라고요. 각 나라별로 표현 기법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흥미로웠어요. 예를 들어 런던의 워크숍 참여자들은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라인(line) 드로잉을 선호하는데 타이베이와 가오슝의 참여자들은 화려한 색의 면을 중심으로 그려 나가요. 도쿄와 서울의 참여자들은 면과 선이 적절히 어우러지도록 드로잉하는 경향이 있고요.
글로벌 문화예술 교류는 KF의 주요 사업 방향이기도 합니다. 작가 입장에서 제안하실 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저도 언젠가 KF의 사업에 참여해 제 작업을 발전시킬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 작가에게 물질적, 심리적인 지원은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정말 소중한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해외 활동은 작가가 스스로를 확장하고 작업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한 나라로 보자면 예술 분야의 인적 자원을 확대하고 그 나라 문화예술 프로젝트의 수준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수준 높은 문화예술은 공공외교의 든든한 자원이라고 생각합니다. KF가 공공외교 전문기관으로서 작가들의 해외 활동과 문화예술 프로젝트 확대를 위해서도 더욱 애써주시면 좋겠습니다.
x=b, 기부 받은 책 페이지 위에 홀로그램,스티커, 23ⅹ30cm, 2016
© 2020 Jihee Kim All rights reserved. photos by Junyong Cho
기묘한 살갗 3, 종이에 과슈,잉크, 131ⅹ250.5cm, 2019
© 2020 Jihee Kim All rights reserved. photos by Junyong 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