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외교문서를 통해 돌이켜 본 한·중앙아 초기 관계사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박사 곽성웅
내년이면 한국이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중앙아시아의 신생 독립국들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한 지 30주년이 된다. 한국은 1992년 1월 28일
카자흐스탄을 시작으로 우즈베키스탄(1월 29일), 키르기스스탄(1월 31일),
투르크메니스탄(2월 7일), 타지키스탄(4월 27일)과 차례로 수교(修交)한 바
있다. 수교 이후 지금까지 한국과 중앙아시아는 30여 년 동안 괄목할만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상호교류와 협력을 일구어왔다. 외교적으로는
다수의 국가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했고, 경제적으로는 2019년 기준
68억 달러에 달하는 교역 시장을 형성했으며, 사회·문화적으로는 양자 간
활발한 교류 활동으로 중앙아시아 5개국 국민의 한국 내 체류민 수가 만
11만 명을 넘을 정도(2019년 기준)이다.
이렇게 상당히 견고하게 쌓아 올린 한국과 중앙아시아 간 우호 관계의
시작은 정식 수교 전인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 관련하여 2021년
기밀 해제된 1990년 한국의 외교문서를 살펴보면 한국과 중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펼쳐진 초기 수교 과정의 흥미로운 단면들이 여실히 드러난다.
중앙아시아에 대한 한국 정부 차원의 정책적 관심과 함께, (당시에는
구소련 연방의 지방정부에 불과했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적극적인 대한(對韓) 관계개선 의지가 사료 곳곳에서 묻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1990년은 아직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정식 수교보다
2년이나 앞선 시점이었다.
사실 한국과의 관계개선 의지를 최초로 내보인 중앙아시아의 사회주의권
국가는 아프가니스탄이었다. 1988년 소련군 철수가 시작된 이후 아프간의
나지불라 정부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인도와 미국, 인도네시아, 헝가리,
에티오피아, 가봉 등지에서 여러 차례 외교적 경로를 통해 한국에 대해
관계 정상화 의지를 적극 표명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아프간의 정정
불안 및 나지불라와의 관계 복원을 반대하던 미국과 파키스탄의 반대에
외교적 부담을 느꼈다. 결국, 한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외교 관계는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2002년에서야 비로소 수립됐다.
그러나 아프간의 사례와는 다르게 한국과 카자흐스탄의 관계개선 노력은
시작부터 순조로웠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강력한 관계 수립 의지에
한국 정부가 화답했기 때문이다. 나자르바예프는 한소 수교가 이루어지기도
전인 1990년 7월의 미국 방문 중에 샌프란시스코 주재 한국 총영사를 만나
방한(訪韓) 의사를 표명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는 한소 수교 직후인
같은 해 11월 한국을 방문하여 노태우 대통령에게 카자흐스탄 주재 영사관
설치를 직접 건의할 정도로 한국과의 관계에 공을 들였다.
우즈베키스탄 역시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은
한소 수교 직전인 1990년 8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1차 한소정부대표단
회의에서 당시 김종인 단장과 직접 접촉하여 관계수립 의지를 강력히
드러낸 두 개의 소연방 구성 공화국―카자흐와 우즈벡―중 하나였다. 그리고
카리모프 대통령은 1990년 10월 모스크바 주재 공로명 영사처장을 접견한
자리에서 직접 자국 경제 상황의 진단을 위한 경제개발조사단 파견을
요청하며 한국과의 협력에 대한 기대감을 표명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한국
방문 의사도 전달했는데, 이는 수교 이후에 성사됐다. 중앙아시아
신생독립국 지도자 중 나자르바예프에 뒤이어 2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카리모프는 그 후에도 10차례 이상 한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정도로
친한파(親韓派)의 면모를 내보였다.
1990년대 초반 한국이 구소련의 중앙아시아에 정책적 관심을 기울인 것은
무엇보다도 이 지역의 자원잠재력과 신(新)시장개척에 대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당시 현지에 상당수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의 존재도 큰
몫을 차지했다. 외교문서에 따르면, 1990년 당시 한국 정부가 파악하고
있던 고려인의 수는 카자흐스탄에 10만 명, 우즈베키스탄에 20만 명이었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고려인의 불행한 강제이주 역사에 대한 민족적
아픔에 공감하는 한편으로, 이들이 닦아놓은 현지의 인적 네트워크와 물적
기반에도 주목했다. 카자흐와 우즈벡 정부 역시 자신들과 함께 생활하는
고려인의 존재를 최대한 부각하며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이를 집중적으로
활용했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과의 접촉에서 고려인 문제는 단골
주제였는데, 카자흐스탄은 고려인이 주로 종사하는 원면 생산과 관련된
투자 협력을 직접적으로 제안할 정도였다.
이렇듯 1990년의 외교문서는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관계수립 초기에 있었던
여러 흥미로운 외교사적 일화와 사건, 정보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시의 사료를 통해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했던 이들이
공유했던 시대적 공감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서로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관심과 기대, 희망이다. 이러한 공감대 속에서 중앙아시아의
지도자들은 구소련의 낡은 관료적 체면을 중시하지 않고 관계개선을 위해
솔직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실용적인 면모를 보여줬다. 그리고
한국 정부 역시 아직 지방정부 수장에 불과했던 카자흐스탄 대통령을
외교부장관 명의로 초청할 정도로 과감한 정책적 태도를 내보였다. 이는
당시 일본이 지방정부보다는 구소련 연방정부와의 단일창구에 집착했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양자의 노력이 축적되어 맺은 결실은 눈부시다. 현재 한국은 외교적
측면에서 카자흐스탄과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 우즈베키스탄과는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 투르크메니스탄과는 호혜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2001~2019년의 기간 동안 한국과 카자흐스탄의 교역량은
약 21배 이상 증가했고,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은 6배 가까이 성장했다.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도 매년 10만 명을 넘나드는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국민은 폭넓게 상호 교류하며 문화적 다양성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30주년을 앞둔 현재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관계는 순탄하다. 지금까지의
관계 형성 과정 속에 불안 요소가 없지는 않았으나, 한국과 중앙아시아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를 슬기롭게 극복할 것이다. ‘미래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과거에서 희망을 얻는다’라는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한국과 중앙아시아는 앞선 세대들이 적극적으로 노력해 온
상호교류와 협력의 역사를 숙지하며, 이를 토대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데 앞장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