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학으로 한지를 재해석하는 이승철 작가
사진 : 이승철 작가 제공
1.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에 재직하고 있는 한국화 화가이자 작가인 이승철 교수입니다. 전통 한지를 우리 현대미술에 적용해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문화를 다시 현대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2. 오랫동안 전통 재료인 한지를 현대미학으로 재해석하는 데 힘쓰셨는데요. 어떻게 한지와 인연을 맺게 됐나요?
199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지가 우리나라 회화사에 미친 영향’이란 논문을 쓰면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논문 완성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전국을 다니며 한지의 현실을 조사한 것입니다. 그때 피폐해진 우리 전통 한지의 현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됐습니다. 전통을 재현하기 위해 유물 컬렉션을 시작했고, 자료가 될 수 있는 작은 재료부터 모으기 시작한 것이 제 한지 작업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약 6개월간 종이공장을 운영하며 실제로 전통 한지를 재현하는 작업도 했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한지를 제대로 알고 사용하게 만드는 교육이라고 생각해 책을 썼고,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한지 조형’이라는 수업을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과 프로그램을 통해 한지가 과거의 전통이나 문화의 한 부분이 아니라 현재의 미술로 어떻게 정립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현대미술의 한 수단으로써 좀 더 잘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3. 세계 최초로 한지 이론을 정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만들었다기보다는 정리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여기저기 흩어지고 사라진 우리의 역사와 유물에 나타난 한지 문화를 정리하고 다시 재현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전통 한지에는 색지가 있는데요. 한지를 만드는 사람은 자연색을 만들 줄 모르고, 자연염색을 하는 사람은 전통 한지를 만들 줄 모릅니다. 따라서 유물로 내려오는 자연염색지라는 색한지는 만들 수 없습니다. 지금 시중에 나오는 색한지는 전통 기법을 바탕으로 한 자연염색 한지가 아닌 화학염이나 혹은 변형된 방법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연구해 전통 한지와 색한지를 이용한 여러 공예품이 다시 우리 현대미술의 근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4. 2월 22일부터 4월 21일까지 이탈리아 로마의 한국문화원에서 한지부조 개인전 ‘한지: 삶에 깃든 종이이야기’를 개최하는데, 현지 반응이 궁금합니다.
전통 한지는 번지지 않으며 과하게 표현되는 부분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 중에 하나가 한지를 입체화하고 이를 다시 동양과 서양의 모습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입니다. 30년간 연구한 한지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난 1년간 한지를 어떻게 현대미술에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 입체적으로 작업했는데, 이번에 기회가 닿아 로마에서 초대전을 가졌습니다.
오픈 당일 무척 놀랐습니다. 오픈 전부터 외국인들이 줄을 섰고, 방문한 현지인이 많아 행사장에 다 들어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한국의 전통문화인 한지에 대한 관심과 우리 전통문화와 연관된 반닫이, 항아리, 불상 등의 작품, 한지로 만든 성모마리아상, 예수상, 십자가상을 함께 선보였고, 관람객으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연염색으로 나온 색상에도 관심을 보이더군요. 역시 문화는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한지와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우수성을 보여주는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5. 올해부터 내년까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미국 등에서 대대적인 순회전을 열고 한지의 미학과 한지에 담긴 한국 문화를 선보일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로마의 전시를 시작으로 5월 18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한국문화원 개관전을 개최하고, 이후 프랑스 파리 쿠스타프갤러리 초대전이 있습니다. 2024년 2월 23일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전시가 있고, 2월 초 바티칸박물관에서 이탈리아 내 문화재 보존처리 기술자를 대상으로 색한지 관련 워크숍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지금도 현지 박물관들이 다음 전시를 계속 요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6. 한지 작품의 매력과 한지 예술의 가능성이 궁금합니다.
한지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강인성과 변형성, 그리고 순환성입니다. 한지는 세계 어느 나라의 종이보다 강한 강인성과 자연성, 투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다른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일례로, 한지는 땅에서 기운을 받고 자란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져 글씨를 쓰는 종이나 인쇄 용지로 사용됩니다. 그 생명이 다할 때쯤 이 한지는 실처럼 꼬거나 한지원료죽이 되어 다시 그릇 등의 공예품으로 변형됩니다. 때론 신발이나 옷이 되기도 하죠. 이렇게 여러 모양으로 변형돼 사용하다가 쓸모가 다하면 불쏘시개나 거름이 됩니다. 그것을 양분 삼아 다시 새로운 닥나무가 자랍니다. 한지의 이런 아름다운 순환 과정이 예술의 한 장르로, 또 현대미술의 한 부분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고 싶습니다.
7. 작가로서 또 교육자로서 포부와 바람이 있다면요?
문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문화가 현재도 여전히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유물이나 기록에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결국 사장된 문화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라지고 있는 문화를 좀 더 우리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고 이러한 문화가 다시 현대화되어 미래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저처럼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과 작업을 하는 작가의 몫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작가는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한지가 저에게 새로운 도구였던 것처럼 한지가 미술의 새로운 분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세계 미술 시장에서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 많은 미술학도가 한지를 현대 미술 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소재로 활용해 새로운 미술 역량을 보여주길 기대합니다.
한지 달항아리
한지부조 문수보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