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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음악이 어우러진 신비로운 향연, 생황 콘체르토

작곡가 진은숙이 지난 8월 28일 일본 도쿄의 산토리 홀에서 ‘생황 협주곡 <슈>(Su, Concerto for Chinese Sheng & Orchetra)’를 세계 초연했다. 무대는 그야말로 승리의 함성, 트리옹팡(triumphant)으로 물결치며 많은 이들의 가슴에 감동을 안겨주었다.
작곡가 진은숙이 내딛고 있는 승리의 행진은 진행 중이다. 그녀의 협주곡들은 세계 초연 때마다 청중으로부터 ‘트리옹팡’이란 말이 절로 떠오르는 폭발적인 갈채를 거두고 있다. 2001년에 초연한 진은숙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녀에게 현대 작곡가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인 그로우마이어 상을 안겨주었다. 지난 8월 13일 영국의 ‘2009 BBC 프롬스’ 축제 중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세계 초연한 ‘첼로 협주곡’(BBC의 위촉 작품)에 대해서 <더 타임스>의 비평가는 ‘새로운 음악 작품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할 수 있는 “다시 듣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다시 보름 후, 지난 8월 28일 도쿄의 산토리 홀에서 박은숙은 생황(笙簧) 협주곡 <슈>를 초연했다.



생소한 악기의 신비로운 울림, 세계인을 매혹하다
올해 일본의 산토리 음악재단 창설 40주년 기념 여름 음악제 <뮤직 투데이(Music Today) 21>에서 올해의 테마 작곡가로 초청된 진은숙은 사흘에 걸친 음악 행사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마지막 날, 마지막 곡으로 <슈>를 세계 초연했다.
귀에 익숙하지 않은 현대음악의 초연임에도 약 2,000석 객석의 75%를 메운 청중(주최 측의 추산)들은 25분 동안 펼쳐진 단악장 형식의 생황 협주곡이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갈채와 커튼 콜로 한국인 작곡가 진은숙과 중국인 독주자우 웨이(吳巍)를 다섯 차례나 무대 위로 불러들였다. 문자그대로 ‘트리옹팡’이었다.
공연이 끝난 뒤 이번 ‘산토리 홀 국제 작곡 위촉 시리즈’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일본의 원로 음악인 유아사 조지(湯淺讓二) 씨는 그의 친구 강석희 교수에게 이 시리즈가 그동안 위촉한 30편이 넘는 국제적 작곡가의 작품 중에서 올해 진은숙의 작품이 가장 좋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강 교수는 내게 이 이야기를 흐뭇한 마음으로 귀띔해주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악기, 생황
진은숙의 협주곡을 낳은 생황이란 도대체 어떤 악기인가?
한국(생황), 중국(笙-sheng), 일본(笙-shou) 등 동북아 3국에 다 같이 궁중 음악의 아악기(雅樂器)로 사용된 이 관악기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도 이미 삼국 시대부터 고구려, 백제에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생황은 특히 통일신라 시대에 중요한 악기로 여겨졌다. 17개의 죽관(竹管)을 속이 텅 빈 바가지(匏)의 바닥에 원통 모양으로 세워놓고 주전자의 귀때 비슷한 부리로 불게 돼 있는 생황은 다섯 또는 여섯의 죽관을 동시에 부는 이른바 ‘합죽(合竹)’으로, 화음을 낼 수 있는 공명(空鳴) 악기다.
작곡가 진은숙은 오래전부터 이 생황에 매혹되었다고 술회한다. 어릴 때 한국 농촌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위 위에 앉아 생황을 불던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추억 속의 모습이 <슈>라고 제목을 붙인 이번 작품의 이미지를 제공한 것이라고 한다. <슈>는 진은숙이 비(非)서양 악기를 위해 작곡을 한 첫 작품으로 그의 창작 생활에 중요한 이정표를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진은숙은 서양 음악의 문맥 속에서 비서양 악기를 어떻게 구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가져왔다고 고백한다. 그게 어찌 그만의 관심사였겠는가. 그것은 윤이상, 정회갑, 강석희 등이 모두 그에 앞서 시름했던 관심사였다. 진은숙은 오히려 한때 이 문제를 기피하기까지 했다. “나는 비서양 음악 문화가 구축해온 전통에 커다란 존경을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에 전혀 다른 전통 속에서 길러진 것들을 그냥 뒤섞어버린다는데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 말에 설득력이 있다.

동양과 서양의 절묘한 어울림
이번 작품에서 참으로 귀 기울여 들어봐야 할 것은 서양 오케스트라에 동양의 독주 악기를 단순히 뒤섞은 것이 아니라 이들을 ‘유기적’으로 융합해서 협주한 부분이다. 진은숙은 이 답안을 청중에게 제시했고, 도쿄 산토리 홀에서 <슈>의 공연이 거둔 큰 성공은 바로 이 답안에 대한 청중의 채점이었다.
분명한 것은 우 웨이가 연주한 악기는 생황이지만 그 음악은 이미 중국의, 또는 동양의 음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생황과 협주한 오케스트라는 서양의 오케스트라지만 그 음악은 이미 서양의 음악이 아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오직 진은숙의 생황 음악이요, 진은숙의 오케스트라 음악, 동서양을 넘나드는 글로벌 시대에 동서양에 다 같이 들려주는 진은숙의 글로벌 음악일 뿐이다.
생황 콘체르토 <슈>는 과연 글로벌 음악답게 동서양을 넘나들며 다원적인 기관으로부터 중첩적인 작곡 위촉을 받은 작품이다. 도쿄 산토리 홀의 세계 초연에 이어 올해 10월 9일에는 LA의 월트 디즈니 홀에서 LA 필하모니가 <슈>의 미국 초연을 하고, 내년 3월13일에는 암스테르담의 콘체르토헤보우 연주 홀에서 네덜란드 방송 교향악단이 유럽 초연을한다. 그리고 내년 6월 4일에는 독일 에센에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슈>의 독일 초연을 마련할 예정이다. 그 사이에 서울에서도 한국의 팬을 위한 <슈>의 공연이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