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청춘과 함께한 두 번의 인연 그리고 40여 년 만의 재회

지난 45년 전 한국과 맺은 인연은 필자의 인생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 여정을 회고하는 글을 써달라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청탁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짧은 글로서 아름다운 추억의 면면을 풀어보고자 한다.



낙후된 땅의 낯선 이방인
필자가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미국에서 대학을 갓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66년 가을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 젊은이들을 전 세계 저개발 국가에 보내 해당 국가의 발전을 지원하고, 양국 간 우호와 이해를 증진할 목적으로 평화봉사단이라는 단체를 창설한 해로부터 5년 후의 일이다.
대학 4학년 때 평화봉사단에 지원을 한 나는 몇 달 후 입단 허가서를 받아 들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한국에 파견될 제1기 평화봉사단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당시 한국에 대한 지식이라곤 어릴 적 신문과 뉴스, 영화에서 본 한국전쟁과 관련된 흑백 사진 혹은 영상이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금은 긴장되고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이 새로운 모험에 나섰다.
그 해 9월 필자를 포함해 총 100명으로 구성된 평화봉사단이 한국에 입성했다. 우리는 하와이에서 3개월간 교사 연수 과정을 거치면서 기초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해 배웠다. 서울에 도착해 며칠간 오리엔테이션을 받았고 각자 임지를 배정받아 전국으로 흩어졌다. 나는 충남 공주에 소재한 공주고등학교라는 남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됐다.
1960년대 중반 한국은 아직도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른 소도시와 마찬가지로 공주 또한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이었다. 자동차를 구경하기도 어려웠고 도심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제외하곤 모든 길이 비포장 도로 상태였다. 어쩌다 폭우라도 올라치면 도로는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당시 공주 사람들은 매우 자연친화적인 삶을 사는 듯 보였다. 교실에는 석탄 난로 하나가 전부여서 추운 날이면 온기를 찾기 어려웠다. 선생이든 학생이든 외투로 몸을 꽁꽁 싸맨 채 지내는 것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나는 당시 하숙집에 살았는데 방 한 구석에 물 대접을 놓아둔 채로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그대로 물이 얼어 있곤 했다. 공부하기에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었을 텐데도 학생들은 대부분 목표를 갖고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외국인을 보기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공주 같은 지방은 말할 나위 없고 서울에서조차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공주 거리를 지날 때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고개를 돌려 눈을 크게 뜨고는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다(그러나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어디를 가든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항상 몇몇 아이들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한 장면처럼 뒤를 졸졸 따르며 목청껏 “헬로”를 외쳐대곤 했다. 필자가 그렇게까지 흥미로운 대상이었던 적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공주에 사는 동안 나는 한국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 교실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국 생활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물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 특히 동료 교사들과 기본적인 것 외에는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좌절하던 끝에 나는 동료들과 좀더 의미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흡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남성이 담배를 피웠고 서로 간의 유대를 표시하는 한 방법으로 상대에게 담배를 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흡연자였던 필자는 몇 주간 동료 교사들이 권하는 담배를 거절하던 끝에 결국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신탄진’ 한 갑을 샀다. 그러고 나서 먼저 담배를 권하기 시작했고 곧 보답으로 돌아오는 담배도 받아 피우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슬프게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골초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후 다시 비흡연자로 돌아오기까지 십 년 넘게 꽤나 애를 먹었다.
공주에서 1년 반을 근무하고는 대전에 소재한 도교육위원회에서 6개월 그리고 다시 서울로 옮겨와 1968년부터 1969년까지 평화봉사단원으로서 마지막 해를 보냈다. 이 마지막 1년간 한국인 영어 교사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현직 연수 프로그램 담당자로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고 덕분에 한국인 삶의 다양한 면면을 경험할 수 있었다.



진정한 공동체의 삶을 배운 소중한 경험
다시 한국에 돌아온 것은 1973년이었다. 이번에는 컬럼비아대학교 문화인류학 전공 대학원생 신분이었다. 몇 달간 현지 연구조사를 할 시골 마을을 물색하던 끝에 충북의 한 산골 마을을 택해 같은 해 봄 아내와 함께 그곳으로 들어갔다(아내 또한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으니 한국은 우리 부부를 맺어준 중매쟁이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잠시 떠나 있던 3년 이상의 기간 동안 한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향한 날갯짓을 막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간의 경제 발전 노력은 대체로 대도시, 특히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다. 시골은 여전히 낙후된 환경으로 1960년대 중∙후반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가 들어간 마을도 전기가 들어온 것이 1년이 채 안 되었고 전기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여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이 새로운 발전상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라고는 천장에 덩그러니 전깃줄로 매달아놓은 전구 하나뿐이었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궁색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가구별 인구 조사를 하며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 있는지를 묻곤 했는데 물려받은 것이라곤 가난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실제로 자식을 고등학교에 진학시키지 못하는 부모가 많았고, 어른들은 대부분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 바빴다. 그래도 살림이 조금이라도 나은 집은 형편이 넉넉지 못한 이웃과 나누어가며 평화롭게 살아갔다. 혼례나 장례 등 대소사가 있으면 부자와 가난한 자 구분하지 않고 너도나도 손을 보탰고 이웃에 경사나 위안할 일이 생기면 모두 건너와 축하나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이는 마치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십시오”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르는 것 같았다.
이 마을에서 거의 2년을 살았는데 그동안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우리에게 들려주곤 했다. 이들의 성공담과 낙담했던 경험 그리고 그들이 소망하는 바와 두려워하는 일에 대한 사연을 전반적으로 알게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뜻 깊은 점은 오늘날은 찾아보기 힘든 강한 유대감을 지닌 공동체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득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공동체를 관찰하고 직접 참여해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삶을 풍요롭게 한 경험이었다.

놀랍게 성장한 한국과의 새로운 만남
한국에서 현지 연구조사를 마친지도 어언 35년이 흘렀고 그간 필자는 짧은 여정으로 몇 번밖에 한국에 오지 못했지만 그때마다 한국이 이룬 엄청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발전상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한국이 선진국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보면 자부심이 느껴진다. 이제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지원 덕분에 필자 부부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 땅에서 다시 한번 장기간 살아보고자 하는 오랜 꿈을 실현하게 됐으며 지면으로나마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