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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말 속에 먼저 남은 채소, 오이

Lifestyle 2026 SUMMER

말 속에 먼저 남은 채소, 오이 더위에 지쳐 입맛을 잃기 쉬운 여름철에는 오이만 한 반찬이 없다. 오이는 옛사람들의 말 속에 먼저 자리 잡은 채소다. 문헌 기록에서도 오이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속담과 관용구, 설화와 민담 속에 더 빈번하고 흔하게 등장한다.여름마다 다닥다닥 영그는 이 채소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일상에 가까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이를 먹는다는 건 계절을 견디는 방법이 아니라, 계절과 함께 사는 방식을 의미한다. 수분 함량이 높은 오이는 아삭한 식감과 청량한 향으로 여름철 입맛을 돋우는 대표적인 식재료다. 한국에서는 오이소박이를 담가 먹거나 오이지 같은 저장 음식으로 활용한다. ⓒ 셔터스톡 오이와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고려사』다. 조선(1392~1910) 전기에 편찬된 이 역사서를 통해 고려(918~1392) 시대에 이미 오이를 재배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오이는 문헌 기록보다 앞서 존재했던 식재료다. 광주광역시 신창동 일대에서 출토된 기원전 1세기경 생활 유적에서 오이씨가 적지 않게 발견된 것을 보면, 삼국 시대 이전부터 오이를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이가 얼마나 친숙하고 오랜 식재료였는지는 속담으로도 드러난다. “오이는 씨가 있어도 도둑은 씨가 없다”, “오이 덩굴에서 가지 열릴 리 없다”와 같은 표현은 굳이 오이를 언급할 필요가 없음에도, 오이를 매개로 의미를 전달한다. 여름을 식히는 감각 궁중 요리의 하나인 오이선은 칼집을 낸 오이에 고기소를 넣어 익힌 후 장국을 부어 만든 음식이다. 요즘에는 다진 소고기, 달걀지단, 버섯 등을 소로 넣고, 식초와 설탕으로 조미한 물을 부어 상큼하게 먹는다. ⓒ 한식진흥원 말 속에 자리 잡은 채소, 오이는 자연스럽게 식탁에서도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매우 흔한 이 식재료는 지역마다 다른 모습으로 소비되었다. 수도권과 중부 지방에서는 표면이 매끈하고 색이 연한 백다다기오이를 주로 먹는다. 전라도에서는 짙은 청녹색을 띠는 취청오이를, 경상도에서는 가시가 발달한 가시오이를 즐겨 먹는다. 같은 오이라도 지역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갖는다. 이는 단순한 품종 차이를 넘어, 식재료가 지역의 기후와 지역민들의 입맛, 생활 방식에 맞춰 변주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조선오이’라고도 불리는 백다다기오이에서 ‘다다기’라는 이름은 종종 외래어로 오해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외래어가 아니라, 열매가 줄기에 다다귀다다귀 붙어 자라는 모습에서 비롯한 말이다. 이름을 생장 방식에서 따올 만큼 오이는 우리 일상과 멀리 떨어진 적이 없다. 오이는 늘 눈앞에서 자라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따서 먹을 수 있는 채소였다. 오이는 전체의 95%가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5%에 영양소가 포함되니, 절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영양가가 높은 채소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오이는 여름철에 유독 유리한 식재료로 꼽힌다. 물이 많으면서도 칼륨을 함께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땀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나트륨과 같은 전해질을 포함한다. 여름에 땀을 많이 흘리면 체내 전해질이 줄어들고, 사람은 본능적으로 짠 음식을 찾게 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보충은 쉽게 과잉으로 이어지고, 과도한 나트륨 섭취는 몸을 붓게 만든다. 여름철 오이 섭취는 수분을 보충하는 동시에, 칼륨이 나트륨의 배출을 도와 체내 균형을 다시 맞춘다. 부족과 과잉 사이를 오가던 몸이 잠시 제자리를 찾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이를 먹고 나면 몸이 가벼워졌다고 느낀다. 이는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몸의 상태가 실제로 조정되는 경험에 가깝다. 그러므로 오이는 영양을 따져 먹는 채소라기보다 균형을 되돌리는 채소다. 이러한 특성은 오이를 먹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오이는 별다른 손질 없이 있는 그대로 먹는 채소다. 우리가 흔하게 소비하는 양파, 마늘, 파는 대부분 조리를 거치고, 생으로 먹더라도 통째로 섭취하지는 않는다. 배추 역시 가공 과정을 통해 김치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감자와 고구마는 익혀 먹는 것이 기본이고, 당근이나 파프리카는 생식이 가능하지만 손질이 필요하다. 당근은 흙을 제거하기 위해 씻거나 껍질을 벗겨야 하고, 파프리카는 씨를 빼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먹어야 한다. 반면 오이는 겉면만 씻으면 곧바로 베어 물 수 있다. 이 간편함 때문에 오이는 다른 채소보다 우리 손과 입에 더 가까이 닿는다. 특히 여름철, 찬물에 씻은 오이를 베어 물면 갈증이 가시는 동시에 더위도 한풀 꺾인다. 등산길에 물 대신 오이를 챙겨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가지 저장 방식, 발효와 염장 오이는 수분이 많기도 하지만, 본래 차가운 성질을 지닌 채소다. 먹는 즉시 시원함을 느끼게 하고, 그 청량감이 비교적 오래 남는다. 이 감각은 특정 문화권에만 통용되지 않는다. 동양에서는 이를 음양오행의 틀 속에서 냉한 성질로 설명해 왔고, 영어에도 “cool as a cucumber”라는 관용적 표현이 있다. 직역하면 ‘오이처럼 차갑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오이가 주는 물리적 감각이 언어로까지 확장된 사례다. 냉한 성질을 지닌 오이는 여름에 가장 필요한 식재료다. 그리고 오이는 강한 햇볕과 넉넉한 수분 속에서 잘 자란다. 무더운 계절에 더위를 식혀주는 채소가 가장 풍성해지는 시기 역시 같은 계절이라는 점에서, 이 구조는 인간의 몸과 자연의 시간이 얼마나 오래 맞물려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여름 뙤약볕 아래 덩굴마다 오이가 다닥다닥 매달린 풍경은 그래서 하나의 축복처럼 보인다. 김치와 장아찌 사이 오이소박이는 오이에 채 썬 무, 양파, 부추, 당근 등의 소를 넣고 담근 김치의 일종이다. 오이소박이에는 연한 재래종 오이를 사용한다. 조선 시대의 여러 문헌에도 오이소박이를 담가 먹었던 기록이 남아 있어 예전부터 여름철에 즐겨 먹었음을 알 수 있다. ⓒ 한국관광공사 지금은 배추가 사시사철 생산되니 김치 역시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본디 김치는 철저히 계절의 논리를 따르는 음식이었다. 봄에는 민들레, 미나리, 달래, 돌나물 등의 봄나물로 김치를 담갔고, 여름이면 열무, 얼갈이, 깻잎, 고추, 오이로 김치를 담갔다. 식재료의 지형도에 따라 지역마다 다른 재료로 김치를 담그기도 했다. 경상도에서는 콩잎으로, 전라도에서는 갓으로 김치를 담그는 식이다. 제철 식재료를 그 시기와 지역 문화에 맞게 저장하고 소비하는 방식 속에서 김치 종류는 자연스럽게 늘어났고, 그 결과 오늘날 김치의 종류는 수백 가지에 이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오이소박이는 단순한 반찬이 아니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김치다. ‘소박이’라는 이름은 주재료에 소를 박아 넣는 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리법과 형태를 함께 가리킨다. 예전에는 가지나 무, 고추로도 소박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소박이 하면 오이소박이를 떠올릴 만큼, 오이소박이가 대표적인 형태로 남았다. 오이를 통째로 절여 소를 넣는 방식은 오이의 수분과 아삭한 식감을 가장 잘 살리는 조리법이다. 다만 오이소박이는 오래 두고 먹는 김치는 아니다. 오이는 수분이 많아 쉽게 무르고, 금세 익는다. 그래서 담근 뒤 수일 안에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대로 오이를 오래 두고 먹기 위한 방식도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오이지다. 오이를 통째로 소금이나 소금물, 혹은 간장물에 절이면 삼투압 작용으로 수분이 빠져나오고, 대신 염분이 스며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오이지는 높은 염도 덕에 여름철에도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우리는 저장 음식 하면 흔히 겨울 김장을 떠올린다. 늦가을에 수확한 채소를 갈무리해 염분을 이용해 저장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여름에도 오이지라는 저장 음식이 존재했다. 여름의 고온 환경에 맞춰 발효가 아닌 염장 방식을 선택했을 뿐이다. 호불호가 강한 채소 오이지는 단순히 저장 음식에 그치지 않는다. 절여진 오이를 꺼내 짠기를 빼고 그대로 먹거나, 갖가지 양념을 더해 무쳐 먹는다. 짠기를 적당히 남겨 냉국에 쓰기도 하고, 아예 절인 소금물로 냉국을 만들기도 한다. 김장 김치가 찌개와 찜으로 확장되듯 오이지는 냉국으로 이어진다. 오이는 이렇게 김치와 장아찌, 두 가지 저장 방식을 모두 품고 있는 식재료다. “장마에 오이 굵듯”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환경을 만나 빠르게 자라는 경우를 비유한 표현이다. 오이는 그만큼 잘 자란다. 햇볕과 수분이 충분한 여름철 한반도에서 오이는 어렵지 않게 성장한다. 그래서 오이는 늘 흔한 채소였다. 하지만 흔한 만큼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오이는 호불호가 강한 채소다. 쓴맛을 내는 성분에 민감한 사람에게는 강한 거부감을 주기도 한다. 특히 한국인 가운데 이 성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유전자를 가진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쓴 오이 보듯 한다”는 표현은 그 감각이 오래전부터 공유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오이를 둘러싼 감각 역시 말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오늘날 오이는 대부분 생으로 먹는 채소로 인식되지만, 과거에는 익혀 먹기도 했다. 궁중에서는 오이선을 만들어 먹었다. 절인 오이를 센불에 빠르게 볶은 뒤 고기와 달걀지단, 채소를 채워 넣는 방식이다. 사찰에서는 여전히 여름이면 오이 된장국을 끓여 먹는다. 뜨거운 국이지만 시원한 맛이 더해지는 독특한 음식이다. 조리 방식이 달라져도, 오이가 주는 감각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미국 코믹스 업계의 한국인 크리에이터들

Lifestyle 2026 SUMMER

미국 코믹스 업계의 한국인 크리에이터들 슈퍼 히어로는 더 이상 서구만의 문화적 현상이 아니다. 한류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한국인 크리에이터, 아티스트, 캐릭터들이 미국 코믹스의 세계에서 꾸준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들은 독보적인 비주얼 스타일과 내러티브 방식으로 코믹스 장르의 판도를 바꾸어 나가는 중이다. 짐 리 DC 코믹스 회장부터 차세대 아티스트와 커버 일러스트레이터에 이르기까지, 한국인 크리에이터들은 글로벌 슈퍼 히어로 산업의 창작 세계를 함께 넓혀가고 있다. 마블 코믹스의 한국인 슈퍼히어로 팀 타이거 디비전. 자세히 들여다보면 태극 문양 등 한국을 상징하는 다양한 요소와 디테일들을 발견할 수 있다. ⓒ 정민규 슈퍼 히어로는 현대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 중 하나가 되었다. 한때 코믹북이라는 틀 안에만 머물렀으나, 이제는 영화와 비디오 게임은 물론 패션과 스포츠 굿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디어와 소비재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한국 프로농구 유니폼에도 사용되는 등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슈퍼 히어로 프랜차이즈의 독주는 (2008)을 시작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탄생하면서 빠르게 진행됐다. 영화는 오래전부터 대중문화를 전파하는 촉매 역할을 해오긴 했지만, 슈퍼 히어로 장르를 통해 그 영향력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에서 전설적인 토니 스타크를 연기한 이후, 슈퍼 히어로와 빌런은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에서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 수십 억 달러 규모의 코믹스 산업의 기반은 바로 코믹북이다. 한때는 아이들이나 즐기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으나, 이제는 다양한 전통을 가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매체가 되었다.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고유한 만화와 그래픽 노블을 발전시켜 왔으며, 각각의 방식으로 현대 대중문화에 기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DC와 마블 같은 미국 코믹북 출판사들은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고, 세대와 국경을 넘어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현대판 신화와 전설을 탄생시켜 왔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문화가 세계 무대에서 그 위상이 높아진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이제 한국 문화가 전 세계에 소개될 때는 거의 항상 ‘K-’라는 접두사가 붙는다. K-팝, K-드라마, K-뷰티, K-패션, K-푸드 등 종류도 다양하다. ‘한류’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90년대였다. 당시는 해외 무대에서 국내 바둑 기사들이 두각을 나타내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한류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한국 드라마와 K-팝이 동아시아를 휩쓸면서부터였다. 이후, 2012년 싸이의 이 인기를 얻으면서 수십 년간 그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한류의 이러한 광범위한 영향력을 생각하면, 미국 코믹스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고 김정기 작가는 즉흥 라이브 드로잉 퍼포먼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세밀하고 생동감 넘치는 작업의 밑바탕에는 그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성이 있었다. ⓒ 연합뉴스 코믹북 스토리텔링의 다양성 미국 코믹스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계 인물은 단연 짐 리 DC 코믹스 회장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다섯 살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교양 과목으로 미술 수업을 수강하면서 그림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났다. 졸업 후 일러스트레이터의 길을 택한 그는 현대 미국 코믹스 산업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1987년 마블 코믹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1990년대 초 이미지 코믹스와 와일드스톰 프로덕션을 공동 창립하고, 이후 마블로 돌아갔다가 1998년 DC 코믹스에 합류하기까지, 그는 가장 성공적이고 오래 사랑받는 슈퍼 히어로 시리즈들의 부활과 확장에 있어 많은 역할을 했다. X-맨, 아이언맨, 판타스틱 포, 배트맨, 슈퍼맨을 비롯한 수많은 캐릭터를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하며, 현대 슈퍼 히어로 코믹스의 비주얼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바로 고 김정기다. 그는 탁월한 라이브 드로잉 실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고도로 세밀한 도시 풍경과 방대한 액션 장면을 즉흥적으로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영향력은 그의 방식을 배우고 코믹스, 영화, 게임 제작 현장에서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수많은 아티스트, 일러스트레이터, 콘셉트 디자이너들을 통해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2023년 경기도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문을 연 김정기뮤지엄은 그의 예술 세계와 창작 정신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의 업적만으로도 책 한 권을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다. 또한, 이들의 성과는 이미 전 세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되고 기록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수많은 한국인 및 한국계 미국인 크리에이터들이 업계에서 선구적인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렉 박, 재 리, 마이크 최, 프랭크 조, 앤디 박이 대표적이다. 앤디 박은 코믹북 아티스트보다는 마블 스튜디오의 비주얼 개발 디렉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현대 코믹스에 담겨 있는 목소리와 관점의 스펙트럼을 한층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배트맨이 한국을 찾아 악을 응징하는 이야기를 담은 『배트맨: 더 월드』의 한 장면. 전인표가 스토리를, 박재광이 그림을 맡았다. ⓒ 전인표, 박재광 현재 활동 중인 코믹북 아티스트 미국 코믹북의 제작 방식은 동아시아나 유럽의 모델과 상당히 다르다. 한국, 일본 등의 국가에서는 크리에이터 한 명이 글과 그림을 모두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미국에서는 코믹북 제작이 보통 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작가가 스크립트를 쓰면 펜슬러가 밑그림을 그리고, 잉커가 선을 다듬고, 컬러리스트가 색을 입히고, 레터러가 대사와 효과음을 페이지에 녹여낸다. 한 권을 완성하는 데 최소 대여섯 명의 손길이 필요한 셈이다. 이러한 분업 체계 덕분에 미국 코믹북 기업들은 거의 90년 동안 빡빡한 발행 일정(보통 시리즈당 월 1권, 24페이지 분량)을 유지하면서도 수많은 시리즈를 꾸준히 선보일 수 있었다.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국인 아티스트 중 하나가 정민규다. 마블에서는 『스타워즈: 닥터 아프라』와 『매그니피센트 미즈 마블』을, DC에서는 『나이트윙』과 『시티 보이』를 작업했으며, 『시티 보이』의 경우 그렉 박과 함께 공동 창작했다. 또 한 명의 주목할 만한 아티스트는 박재광이다. 그는 김정기처럼 라이브 드로잉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배트맨: 더 월드』와 그 후속작 『조커: 더 월드』에 참여했다. 전인표는 대기업 프로그래머라는 안정적인 커리어를 접고 작가의 길을 택했으며, 이 두 프로젝트에서 박재광과 함께 작업하며 DC의 아이코닉한 캐릭터들을 한국적 배경과 문화적 맥락 속에 녹여낸 단편 작품들을 썼다. 그는 현재도 한국인 크리에이터들과의 협업을 이어가며 새로운 스토리들을 탐색하고 있다. 2024년 출간된 『키드 저거너트: 마블 보이스 인피니티 코믹 #1』의 표지. 마블 유니버스에 새롭게 합류한 또 한 명의 한국인 캐릭터를 선보였다. 정민규가 그림을 그리고, 마이클 위감이 채색을 맡았다. ⓒ 정민규, 마이클 위감 커버 아티스트의 부상 미국 코믹스의 협업 제작 방식으로 인해 최근 그 중요성이 부쩍 커진 분야가 있다면 바로 커버 아티스트다. 코믹북 독자층이 청소년을 넘어 더 넓은 연령대로 확장되면서, 출판사들은 새로운 매출 증대 전략을 고민했다. 그중 하나가 배리언트 커버의 도입이었다. 같은 호에 여러 가지 버전의 표지 디자인을 함께 발행하는 방식이다. 이 표지들은 본편의 장면을 담기보다 독립적인 일러스트 작품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아, 컬렉터들이 여러 판본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한국인 아티스트들은 이 분야에서 특히 큰 활약을 하고 있으며, 우나영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시각적 모티프와 현대 슈퍼 히어로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 하는 그녀의 일러스트는 단연 눈길을 끈다. 엄규용, 이지형, 이인혁 등 실력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들도 전 세계 코믹북 독자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개성 있는 시각으로 서양의 비주얼 문화를 재해석해 미국 코믹스에 새로운 색채를 더하고 있다. 관능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매력을 담아낸 블랙 캣. 커버 아티스트 이지형이 그린 마블 코믹스의 한정판 파인아트 프린트이다. ⓒ 이지형 전통의 확장 한국인 크리에이터들의 약진은 캐릭터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 혹은 한국에서 영감을 받은 슈퍼 히어로들이 마블과 DC 유니버스 안에서 점점 더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실크, 루나 스노우, 태극기, 시티 보이, 아마데우스 조(토털리 어썸 헐크)와 같은 캐릭터들은 주류 슈퍼 히어로들의 내러티브 속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다양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벤져스나 X-맨과 유사하게, 주로 한국인 슈퍼 히어로들로 구성된 마블의 타이거 디비전 역시 이러한 트렌드를 잘 보여준다. 머지않아 한국인 슈퍼 히어로가 스크린에 데뷔하는 날도 올 듯하다. 미국 코믹스는 영화, TV, 팬 행사, 코스튬 플레이, 게임, 피규어 등과 함께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으며, 그 문화적 영향력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 크리에이터들은 이제 이 생태계의 중요한 일원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팝 아트 형식 중 하나인 코믹스에 새로운 예술적 접근과 서사, 캐릭터를 더해가고 있다. 슈퍼 히어로의 역사는 언제나 변화와 재창조의 연속이었다. 이제 점점 더 많은 한국의 크리에이터들이 새로운 흐름을 써 나가는 데 동참하고 있다.

스포츠 활성화 이끄는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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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활성화 이끄는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 과거, 국내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은 웃음과 재미를 주는 일반적 예능 프로그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스포츠 자체를 변화시킬 정도의 영향력을 갖기 시작했다. 팬덤을 결집시키고, 그 저변을 확산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종목을 부활시키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왼쪽부터 MBC의 여자 배구 예능 프로그램 , 축구를 소재로 한 SBS의 , 은퇴한 야구 선수들과 아마추어 야구팀의 대결을 담은 JTBC의 포스터. ⓒ MBC, SBS, JTBC 2025년 한국 예능 프로그램 중 최고의 화제작은 단연 이다. 이 프로그램은 세계적인 배구 스타 김연경이 은퇴 후 신인 감독에 도전하는 과정을 담았다.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낳으며, 제62회 백상예술대상 방송 부문에서 예능 작품상을 받는 등 다수의 상을 거머쥐었다. 비록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루어진 도전이었지만, 그녀는 사력을 다했다. 2부 리그가 없어 1부 팀에서 밀려나면 은퇴할 수밖에 없는 한국 여자 배구계의 현실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 밀려난 선수들로 ‘원더독스’라는 팀을 만들었다. 국내 프로 배구 여자부에는 현재 7개 팀이 운영되고 있는데, 김연경은 ‘언더’에서 ‘원더’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팀명에 담으며 원더독스가 제8 구단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프로그램 초반에는 팀워크가 생기지 않아 흔들리는 모습도 보였지만, 원더독스는 회가 거듭될수록 성장하며 진가를 발휘했다. 그리고 2024~2025 시즌, 프로 통합 준우승팀 레드스파크스와 우승팀 핑크스파이더스를 모두 꺾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줬다. 서사가 있는 예능 이 프로그램은 스포츠 예능임에도 실제 여자 배구에 영향을 미쳤다. 은퇴했던 선수들 중 몇몇은 프로팀과 실업팀에 입단해 다시 현역으로 뛰게 됐고, 감소 추세이던 여자 배구의 팬들이 급증했다. 관중들을 초청해 치른 마지막 경기는 3일 만에 약 1만 명이 신청해 전석이 매진될 정도였다. 스포츠 예능이 스포츠 자체를 부활시키는 힘을 발휘한 것이다. 이런 성공이 가능했던 건 스포츠 예능만이 구현할 수 있는 영상 연출과 스토리텔링 때문이었다.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선수들 개개인에게 마이크를 채움으로써 생생한 현장 상황이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었다. 또한 예능적으로 편집된 경기는 마치 한 편의 스포츠 영화를 보는 듯한 드라마틱한 성장 서사를 그려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부각됐고, 스타가 탄생했으며, 이들의 팬덤이 형성됐다. 또한 세계 정상급 선수였던 김연경 감독의 절묘한 전략과 전술에 따라 변화무쌍한 결과가 나타나는 과정을 방송으로 지켜본 팬들은 비로소 여자 배구의 묘미를 알게 됐다. 그들은 자연스레 실제 프로 리그 경기장을 찾는 관객이 됐다. 처럼 스포츠 예능이 해당 종목을 부활시킨 사례는 이미 2019년에도 존재했다. 당시 KBS2가 방영했던 은 한때 국민 스포츠로 불렸지만 그저 추억이 되고 만 씨름의 꺼져가는 불씨에 활활 불을 지폈다. 경량급인 태백(몸무게 80㎏)과 금강(몸무게 90㎏) 체급의 씨름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이 프로그램은 씨름에 아이돌 서바이벌 오디션 같은 연출을 덧붙였다. 잘생긴 외모에 탄탄한 몸을 가진 젊은 선수들의 매력과 개성이 방송을 타면서 팬덤이 생겨났다. 또한 기존 씨름 중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이내믹한 영상 연출이 박진감을 더했다. 아쉽게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파이널 매치는 경기 당일 무관중으로 치러졌지만, 티켓은 순식간에 전석이 매진되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스포츠 인구의 저변 확대 의 한 장면. 각 분야의 여성 연예인들이 축구팀을 결성해 리그를 펼치는 프로그램이다. 경기력 향상을 위한 훈련과 치열한 리그 운영이 시청자들을 몰입시키며 큰 호응을 얻었다. ⓒ SBS 이제 스포츠 예능은 더 이상 과거처럼 재미에만 집중하려 하지 않는다. 스포츠 종목 자체의 매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여러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들이 증명했기 때문이다. 한국 프로야구의 레전드로 불리는 김성근 감독과 은퇴한 선수들이 모여 실전 경기를 치르는 가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2022년 시작해 올해 초 138부작으로 종영된 이 프로그램은 특별한 연출 없이 야구 경기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을 불러 모았다. 상대적으로 비인기 종목인 여자 축구 붐을 불러일으킨 SBS의 (2021)도 마찬가지다. 여러 팀이 맞붙어 싸우는 경기 과정에서 성장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이 프로그램과 함께 tvN의 은 여성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2024년 첫 번째 시즌에서는 배우와 가수로 구성된 등장인물 4인이 철인3종 대회에 도전하기까지의 여정이 그려졌고, 이듬해 두 번째 시즌에서는 복싱 챔피언에 도전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여성들이 주축이 된 스포츠 예능은 실제 여성 스포츠 동호인들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던 축구와 야구, 복싱 같은 스포츠에 일반 여성들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스포츠 예능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면서 대중적인 스포츠 종목에도 변화가 생겼다. 과거 한국의 스포츠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가 대항 이벤트가 벌어질 때만 각광을 받았다. 인기 종목과 비인기 종목의 편중 현상도 뚜렷했다. 하지만 최근 대중들의 스포츠 취향은 훨씬 다양해졌다. 이 같은 현상에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들이 일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단순히 관람에 그치지 않고 직접 참여하는 생활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최근 글로벌 트렌드로 자리 잡아 한국에서도 붐이 일고 있는 러닝이 대표적이다. 저변이 넓어지면서 이제는 마라톤 같은 달리기 이벤트가 지자체의 홍보와 수익 모델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러닝 열풍을 반영한 프로그램도 방영됐다. 웹툰 작가인 기안84가 출연해 극한의 마라톤 도전기를 보여주는 가 바로 그 프로그램이다. 기안84가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랑스를 비롯해 북극에서 열리는 이색적이면서도 극한의 인내를 요구하는 마라톤에 참여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시청자들의 운동 욕구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국민 건강 증진에도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대중의 인식 전환 는 출연자들이 극한의 마라톤 환경에서 자신을 시험대에 올리고, 끝까지 도전해 내는 과정을 그린 예능 프로그램이다. 단순한 예능적 재미를 넘어,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진솔하고 묵직하게 담아내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 MBC 스포츠 예능은 또한 스포츠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도 바꿔놓고 있다. 과거에 한국은 엘리트 체육 위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포츠 중계 역시 몇몇 인기 종목에만 한정돼 있었고, 승패와 기록에만 주목했다. 그러나 스포츠 예능은 ‘성과주의’에서 벗어나 ‘과정’ 자체를 조명한다. 경기에서 지더라도 선수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역경을 어떻게 극복하고 성장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바라본다. 팀 스포츠의 경우에는 선수들 간 관계도 중요한 서사의 포인트다.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는 과정을 통해 팀이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스포츠 예능은 밀착한 카메라를 통해 담아낸다. 스포츠 예능이 스포츠 자체에 영향력을 미치게 된 데는 갈수록 늘고 있는 팬덤 소비의 경향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프로야구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건 젊은 여성 관중이 늘어난 것이 주요인이다. 여성 관객들은 스포츠 예능 같은 팬덤 콘텐츠의 등장과 더불어 급증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모든 걸 쏟아 넣는 취향을 가진 팬덤이 스포츠 분야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팬덤의 다양한 욕구를 채워주는 스포츠 예능은 앞으로도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잔혹함, 거짓말, 복수에 관한 섬뜩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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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함, 거짓말, 복수에 관한 섬뜩한 이야기 『사소한 거짓말』 박설미 작, 여현정 역 레이븐 북스, 2025 160쪽, 8.99 파운드 잔혹함, 거짓말, 복수에 관한 섬뜩한 이야기 박설미의 데뷔작 『사소한 거짓말』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작품에 적용된 서간체 소설(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등) 형식을 영리하게 활용하고 있다. 서간체는 한 번에 하나의 시점에 집중하면서 각 화자에게 선명하고 고유한 목소리를 부여한다는 장점이 있다. 서사의 층위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독자는 전체 그림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사소한 거짓말』은 이러한 전통을 충실히 잇는 작품으로, 대단원의 막이 내리기 전까지 독자를 흔들어 놓는다. 이 작품은 미라가 자신이 가르쳤던 남학생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된다. 첫 문장부터 긴장감이 너무도 팽팽해서 활자가 터질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미라는 유재의 가정 교사가 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발단은 유재의 형 유찬이 미라의 반려견 벨을 학대하고 죽인 사건이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더 큰 비극으로 이어지며 미라를 맹목적인 복수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다. 그런데 놀랍게도 답장이 날아온다. 유재의 어머니 지원이 답신을 보내오고, 공포와 긴장감은 한층 깊어진다. 이후 유재와 유찬의 서사가 차례로 펼쳐지고, 미라의 목소리로 마무리된다. 편지 대신 직접 찾아가는 장면으로, 독자는 한쪽의 목소리만 듣게 된다. 『사소한 거짓말』이 매력적인 이유는 네 명의 목소리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미라, 지원, 유재, 유찬은 각자의 경험과 세계관이 매우 다르며, 나름의 한계 안에 갇혀 있다. 그들 중 일부는 끝까지 편협한 시각을 버리지 못한 채 자신이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이 불완전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진실을 깨닫고 목표를 이루는 인물도 있다. 과연 그들 중 누구라도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까? 결국 『사소한 거짓말』은 인간 본성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작품이다. 사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무엇이 그들을 그 지경으로 몰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시점이 바뀔 때마다 이야기는 반전을 거듭하며, 독자가 확신했던 것들을 끊임없이 흔들어 놓는다. 시점이 하나씩 쌓이며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고 퍼즐 조각이 서서히 맞춰지면서, 진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있게 된다. 점점 고조되는 긴장감 때문이든, 박설미 특유의 술술 읽히는 문체 때문이든, 이 책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손에서 놓기 어렵다. 책을 덮은 후에도 칠흑 같이 어두운 밤, 어디선가 들려오는 섬뜩한 메아리처럼 잔상이 오래도록 맴돈다. 『장: 간장, 된장, 고추장으로 빚어낸 미식의 세계』 강민구, 나디아 조, 조슈아 데이비드 스타인 공저 아티장, 2024 216쪽, 35 달러 한국 요리의 맛, 그 비밀을 찾아서 강민구 셰프는 어릴 때부터 요리에 관심을 가졌다. 해외에서 셰프로 경력을 쌓은 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2014년 밍글스를 열었다. 한국과 서양의 식문화를 한데 어우른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가 성공하면서 그는 한식의 세계로 한층 더 빠져들었다. 정관 스님과의 만남을 통해 장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그는 장을 “테루아르를 가장 충실히 담아낸 재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2024년 『장: 간장, 된장, 고추장으로 빚어낸 미식의 세계』를 출간했고, 이 책은 그해 뉴욕타임스 최고의 요리책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장은 발효 대두를 기반으로 한 양념으로, 간장, 된장, 고추장이 가장 대표적이다. 한식을 즐겨 먹는 이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이름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장은 강 셰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은 비밀 재료”이다. 책의 앞부분은 이 비밀 재료에 대한 소개를 담고 있다. 강 셰프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2천 년에 걸친 장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각 가정에서 장 담그던 문화가 쇠퇴한 과정, 최근 전통 장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현상을 소개한다. 그다음으로는 간장, 된장, 고추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세히 알려준다. 집에서 장을 직접 담그는 방법이 아니라, 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며 단순한 재료들이 자연, 시간, 사람의 손길과 정성을 통해 신비롭게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한 끼 식사로 어울리는 요리에 대한 유용한 팁도 담겨 있고, 마지막으로 한식 입문자를 위한 필수 식재료 목록도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은 한식 애호가라면 익히 알 만한 재료들이지만, 고추장 파우더는 나에게 뜻밖의 수확이었다. 새로운 팝콘 시즈닝으로 시도해 볼 만할 것 같다. 물론 책의 핵심은 다양한 장을 활용한 레시피들이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주제로 각각 한 챕터씩 정리되어 있으며, 챕터 마지막마다 해당 장을 만드는 장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테루아르뿐 아니라 사람들과도 만나게 해준다. 레시피의 대부분은 밍글스의 메뉴가 아닌, 강 셰프가 가족과 지인을 위해 집에서 직접 만드는 요리들이다. 덕분에 훨씬 친근하고 부담 없이 도전할 수 있다. 장아찌, 해물파전, 강된장 비빔밥 외에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양념 치킨 등 한식 애호가라면 누구나 아는 레시피도 있다. 하지만 나를 신세계로 인도한 것은 장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한 레시피들이었다. 라구 소스에 간장을, 파스타 크림 소스에 된장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상상도 못 했던 조합들도 있었다. 그래놀라에 간장을, 초콜릿 무스에 고추장을, 크렘 브륄레에 된장을 쓴다니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퓨전 요리라고 생각한다. 화려한 기술이나 자극적인 재료의 조합이 아니라, 사람들의 식문화가 아무리 달라도 맛에는 국경이 없다는 깨달음, 바로 그것이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춘궁기의 생존 음식, 봄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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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궁기의 생존 음식, 봄나물 봄나물은 계절의 풍미를 전하는 별미다. 쑥 향이 올라오는 국 한 그릇, 달래 간장을 얹은 밥 한 숟갈, 냉이를 다져 넣은 된장찌개는 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다. 하지만 이 향긋한 감각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봄이 겨울만큼이나 혹독했던 우리 선조들에게 봄나물은 별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먹을거리였다. 봄이 되면 냉이, 봄동, 쑥 같은 제철 봄나물이 식탁에 오르기 마련이다. 봄나물은 비타민과 미네랄 등 영양소가 풍부해 봄철 활력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특유의 쌉싸름한 맛과 싱그러운 향은 겨우내 무뎌졌던 미각을 일깨운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겨울을 나게 해주던 묵은 곡식도 봄 앞에서는 바닥을 드러냈다. 가을에 파종한 보리는 늦봄이나 초여름이 되어야 수확할 수 있었고, 그 사이 공백은 길었다. 이 시기를 넘기지 못해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일이 적지 않았다. 배를 곯으며 보리가 여물기를 기다리는 고된 시간을 ‘보릿고개’라 부른 이유다. 보릿고개는 단순히 어떤 시기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삶의 문턱을 넘나드는 생존의 시험대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 지독한 보릿고개를 버티게 한 것이 바로 봄나물이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뜻밖의 이야기다. 기근이 심할 때 주식 대신 먹는 구황 작물은 전분 함량이 높아 빠르게 포만감과 에너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감자나 고구마, 옥수수, 메밀처럼. 반면에 봄나물은 가볍고 향긋해 그저 입맛을 돋우는 용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처음 봄나물을 캐서 먹기 시작한 선조들에게 그것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식량이었다. 그렇다면 전분 함량이 낮은 봄나물로 어떻게 허기를 달랬을까? 답은 양과 조합에 있었다. 봄이면 산과 들에서 나는 모든 먹을 수 있는 풀을 최대한 활용했다. 쑥, 냉이, 달래, 씀바귀, 두릅, 머위, 곰취, 참취 같은 산나물과 들나물은 밥, 국, 반찬, 죽, 전, 떡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식의 재료가 되었다. 열량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도 있었다. 칡뿌리를 찧어 물에 풀어 가라앉힌 앙금으로 만든 갈분이 대표적인 예다. 또 산에 흔한 소나무에서 전분 함량이 가장 높은 속껍질을 벗겨 말려 가루로 쓰기도 했다. 이렇게 얻은 전분성 재료를 나물과 섞어 죽을 쑤거나 떡을 빚었다. 주식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었지만, 허기를 달래고 몸을 유지하는 데에는 분명 도움이 되었다. ‘나물 서리’라는 것도 있었다. 가난한 부녀자들이 봄에 산과 들에서 나물을 잔뜩 따게 되면, 부잣집에 무작정 가서 광주리를 풀고 주저앉았다. 그러면 부잣집에서는 그 나물을 어쩔 수 없이 거두는 대신 곡식을 내주곤 했다. 봄나물은 그 자체로 일용한 양식이었으며, 부자로부터 곡식을 받아내는 자산으로 쓰였던 것이다. 이 시기의 음식은 미각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기준은 단순했다. 먹을 수 있느냐, 버틸 수 있느냐였다. 그렇기에 봄나물 요리는 자연스럽게 단순해졌고, 조리법은 최소한으로 정제되었다. 데치고, 무치고, 끓이고, 부쳐 먹는 방식이 주를 이룬 것도 그 때문이다. 봄나물로 짓는 밥과 국 곡식이 귀해질수록 밥에는 나물이 섞였다. 쑥, 냉이, 두릅이 들어간 밥은 오늘날 계절 미식으로 인식되지만, 본래는 밥의 양을 늘리기 위한 방식이었다. 나물을 잘게 다져 밥을 지으면, 적은 양의 곡식으로도 한 솥의 밥을 지을 수 있었다. 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봄이면 집집마다 나물국이 상에 올랐다. 냉잇국, 쑥국, 달래국은 찌개보다 물을 많이 넣고 맑게 끓여, 가장 흔한 재료였던 나물을 넉넉히 쓸 수 있었다. 국은 밥보다 물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재료로도 많은 식구가 나눠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때로는 나물국에 갈분이나 송기 등을 타 포만감을 높이기도 했다. 봄나물로 만든 국은 그렇게 밥상의 중심이 되었다. 춘궁기에 봄나물을 넣어 포만감 높은 국을 끓여 먹던 문화의 원형은 제주에 특히 또렷하게 남아 있다. 제주에 가면 흔히 접하는 향토 음식 고사리육개장과 몸국이 바로 그것이다. 예전에는 고사리육개장을 고사리 국이라 불렀다. 기후와 지형, 토양 등 여러 조건에서 양치식물이 자라기 좋은 제주에서는 이른 봄이면 곳곳에서 고사리를 꺾었다. 고사리와 메밀가루를 넣어 점도 높고 묵직하게 끓인 고사리 국은 추위를 물리치고 허기를 달래기에 알맞은 음식이었다. 고사리는 여러모로 유용한 구황 작물이었는데, 뿌리를 찧은 다음 전분을 받아 국수를 빚거나 전을 부칠 만큼 전분 함량이 높다. 모자반과 메밀가루로 걸쭉하게 끓인 몸국은 육지에서 나는 봄나물을 쓰지는 않지만, 해조류를 바다의 나물로 본다면 또 다른 형태의 봄나물 국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모자반은 겨울부터 이른 봄이 제철이어서 바다의 봄나물이라 할 수 있다. 걸쭉하고 묵직한 몸국 한 그릇을 먹고 나면, 여전히 북녘의 삭풍이 기세를 부리는 이른 봄의 추위도 한결 누그러지는 듯하다. 바람이 잦은 제주에서는 몸국이 오랫동안 바람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육지에서는 애탕국을 주목할 만하다. 애탕국은 쑥을 활용한 봄철 대표적 음식인 동시에, 고기가 들어가 과거에는 보양식에 가까운 음식이었다. 소고기 양지머리나 사태를 삶아 넉넉히 육수를 내고, 삶은 고기를 잘게 다진다. 쑥은 살짝 데쳐 물기를 꼭 짠 뒤 곱게 다진다. 다진 고기와 쑥으로 완자를 빚어 밀가루와 달걀을 입히고, 간장이나 소금으로 간한 육수에 넣어 끓인다. 쑥의 화사한 향과 고기의 단백질이 어우러진 이 음식은 단순한 나물국이 아니라, 봄을 넘기기 위한 한 그릇의 생존식이었다. 각양각색 반찬 예전에는 나물이 귀한 겨울철을 대비해 이른 봄, 제철 나물을 햇볕에 바짝 말려 저장해 두곤 했다. 나물을 말리면 수분이 빠지면서 영양분이 응축되고, 쫄깃한 식감이 살아나는 장점이 있다. 요즘에는 굳이 겨울철이 아니어도 별미를 즐기기 위해 말린 나물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 ⓒ 한국관광공사 나물 무침도 반찬의 자리를 넘어, 한 끼를 채우는 데 중요한 몫을 했다. 데친 나물을 무쳐 큰 그릇에 담아 놓고, 가족이 둘러앉아 나눠 먹었다. 나물의 양이 늘어날수록 밥의 양은 자연스레 줄었다. 굶주린 와중에도 선조들은 나물을 상성에 맞게 된장, 고추장, 간장, 소금 등으로 달리 양념해 잠깐의 미각적 즐거움을 놓치지 않았다. 나물 전 또한 빠지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밀가루가 귀하던 시절, 나물은 반죽의 중심 재료가 되었다. 잘게 썬 나물에 소량의 곡물 가루를 섞어 부쳐냈다. 밀가루가 남은 집은 밀가루를, 바닥난 집은 갈분이나 메밀가루, 도토리 가루 등을 썼다. 어떤 나물이든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점 또한 나물 전의 장점이었다. 씀바귀 전, 쑥전, 머위 전은 봄철 식탁에 흔히 올랐고, 많지 않은 기름으로 부쳐낸 나물 전은 허기를 달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오늘날처럼 배추김치를 사시사철 먹을 수 없던 시절, 봄에는 봄나물로 김치를 담갔다. 머위 김치, 달래 김치, 유채 김치, 봄동 김치 등은 오래 두고 먹기 위한 저장 식품이라기보다 제철에 바로 먹는 생김치에 가까웠다. 장아찌로 만들어 두는 경우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지금 손에 잡히는 것을 활용한 김치였다. 특히 돌나물로 담근 물김치는 향이 좋다. 죽과 떡, 나물의 확장 3월 하순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봄나물이 쏟아져 나온다. 이 시기에 전통시장에 가면 직접 캔 봄나물을 좌판에 벌여 놓고 판매하는 상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 한국관광공사 나물 전과 김치가 비교적 손이 가는 음식이었다면, 보릿고개에 죽은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였다. 적은 재료로도 많은 양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봄나물은 죽의 주재료가 되었다. 봄나물로 죽을 끓일 때는 전을 부칠 때처럼 특정 나물 하나에 기대지 않았다. 조화를 이루는 나물을 한데 넣고 푹 끓여 양을 늘렸다. 그중에서도 냉이 죽은 『본초정화』에 “눈을 밝게 하고 간을 이롭게 한다”라고 나온다. 이 책은 약용 식물을 소개하는 기존의 서적들을 편집해 만든 의서이다. 그런가 하면 방풍죽은 조선 시대의 문인 허균(1569~1618)이 우리나라 전국의 토산품과 별미 음식을 소개한 자료 『도문대작』에 등장하기도 한다. 죽은 허기를 달래는 음식이면서, 동시에 몸을 보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봄나물은 죽을 통해 다시 한번 역할을 넓혔다. 나물을 데치고 무치던 방식에서 나아가, 물과 함께 오래 끓이며 한 끼를 연장하는 재료가 된 것이다. 떡 또한 봄나물과 결합했다. 쑥떡은 오늘날에도 즐겨 먹는 대표적인 봄철 별미이다. 쑥은 떡의 색과 향을 더하는 재료로 인식되지만, 본래는 떡의 양을 늘리고 곡물 사용을 줄이기 위한 재료였다. 쑥을 많이 넣을수록 곡물 가루는 적게 들어갔다. 떡은 제사나 명절 음식이기도 했지만, 춘궁기에는 허기를 달래는 실용적인 음식이었다. 봄나물 문화는 단순한 계절 음식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을 관찰하고,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며, 부족한 자원을 나누는 방식에 대한 집단적 지식이었다. 어느 나물이 언제 돋고, 어떻게 손질해야 쓴맛이 덜한지, 어떤 조리법이 배를 더 오래 든든하게 하는지는 모두 경험을 통해 축적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봄나물을 향과 일시적 계절성으로 소비한다. 봄나물은 여전히 향긋하고, 여전히 소박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생존의 기억이 있다. 봄나물은 풍요의 상징이 아니라, 결핍을 견디는 기술이었다. 애탕국 한 그릇, 나물밥 한 공기의 소박함 속에는 긴 보릿고개를 건너온 식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K-팝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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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2025년 6월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는 전 세계 모든 연령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경이로운 영향력을 보여줬다.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중 하나인 이 제68회 그래미 어워즈 ‘베스트 송 리튼 포 비주얼 미디어’ 부문에서 수상하는가 하면, 가상 걸그룹 헌트릭스가 제79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축하 무대를 꾸몄을 정도로 이 영화의 인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올해 1월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튼호텔에서 열린 제83회 골든글로브 어워즈에서 매기 강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가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 2관왕을 차지했다. 수상 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오드리 누나, 이재, 레이 아미(왼쪽부터). ⓒ 연합뉴스 의 성공은 ‘성공’이라는 말로 부족하다. 가히 ‘현상’이라 할 만한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넷플릭스가 가지고 있던 기존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웠다. 우선 넷플릭스 최초로, 불과 공개 13주 차에 조회수 3억 회를 돌파했다. 이후 예정된 수순처럼 넷플릭스 역대 통합 조회수 1위에 올랐으며, 한번 탄력을 받은 누적 시청 그래프는 좀처럼 꺾일 줄 몰랐다. 아무리 늦어도 공개 3개월 정도가 지나면 상승세가 점차 둔화하는 일반적 흥행 패턴과는 차원이 다른 기세였다. 명확한 선과 악 구도, 빠른 이야기 전개, 매력적인 캐릭터 등 이 작품에는 대중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선호할 만한 요소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두를 한데 묶어 사람들을 모니터 앞에 오래 잡아둘 수 있게 만든 건 단언컨대 음악의 힘이었다. 그래서 의 흥행은 어쩌면 여타 애니메이션 영화보다 더핑크퐁컴퍼니의 대표 음원 ‘핑크퐁 아기 상어’와 비교하는 게 어울릴지도 모른다. 의 를 비롯해 이런 노래들은 특히 10대 이하 어린이와 청소년 시청자의 마음을 빠르게 사로잡았다. K-팝에 관한 진심 같은 노래나 영상을 반복 청취 및 시청하는 데 익숙한 시청자층의 열광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졌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계속해서 위기설에 시달리는 영화관에 가 직접 등판한 것이다. 그것도 작품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싱어롱 상영’의 형태로 말이다. 2025년 8월 23일 북미에서만 1,700개가 넘는 극장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약 1,000개 상영관을 매진시켰고, 개봉하자마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K-팝을 테마로 한 일종의 뮤지컬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싱어롱 이벤트가 이 작품과 궁합이 잘 맞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주인공 루미처럼 긴 보라색 머리를 하나로 땋고, 첫 곡 부터 영화의 하이라이트 까지 쉼 없이 고조된 분위기로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의 모습을 전하는 외신이 하루가 멀다고 전해졌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시작은 K-팝이었다. K-팝을 진심으로 좋아해 온 사람들 중 상당수는 라는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K-팝의 위력에 편승하려는 마케팅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K-팝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음악 자체보다는 K-팝이 보유한 팬덤의 폭발적 에너지를 탐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콧대 높은 영미권 미디어도, 긴 역사를 가진 유수의 음악 시상식도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던 그 힘은 아군과 적군을 전부 빨아들일 정도로 강력한 자기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K-팝 팬덤은 잿밥에만 관심 있는 이들에게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니었다. 하지만 는 그런 사례들과 확실히 달랐다. 작품을 보면 알았다. 사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단순하다. 비밀을 숨긴 히어로가 사연 있는 적을 만나 서로 교감하다 결국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한다는 이야기.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마음을 주었던 전형적인 히어로물의 공식이다. 다만 그 모두를 감싸는 포장지가 달랐다. 영화 곳곳에 나타난 K-팝과 한국 문화, 익숙한 서울 풍경까지 어디 하나 제작진의 진실된 마음이 어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상적 걸그룹의 재현 스토리만 보면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작품의 개성과 캐릭터의 독자성은 어디까지나 K-팝의 몫이었다.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대대로 이어온 역사와 전통의 ‘데몬 헌터’ 3인조 그룹의 면면부터 보자. K-팝,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짧은 시간 스쳐가는 그들이 누구를 모티프로 삼았는지 단번에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한국 걸그룹의 원조격으로 불리는 김시스터즈, 국내 최초의 댄스 걸그룹 세또래 또는 3인조 1세대 걸그룹 S.E.S.를 지나 태어난 ‘헌트릭스’는 한 치의 오차 없이 K-팝 걸그룹의 이상적 모습을 재현했다. 영화를 보며 유쾌하면서도 감성적인, 소탈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가족과 다름없는 단단한 자매애로 똘똘 뭉친 그들을 좋아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헌트릭스는 영화 내내 노래하고 춤춘다. 라이벌 그룹 사자보이즈도 마찬가지다. K-팝 아이돌 그룹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K-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하다. 에서 신인 보이 그룹의 필수 코스인 ‘청량 콘셉트’를, 에서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했다’ 선언하던 수많은 보이 그룹을, 에서 숨겨둔 카리스마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걸그룹을 떠올리지 않은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심지어 이 노래들 속에는 2020년대 들어 ‘케이팝 세계화’에 눈이 먼 ‘이지리스닝’ 유행 사이로 자취를 감춰 버린 K-팝의 그리운 원형이 하나씩 숨어 있었다. K-팝 팬들 사이에서 ‘교수님들의 조별 과제’라는 반응이 괜히 등장한 게 아니었다. 이 말은 ‘K-팝을 수십 년 연구한 전문가들이 팀을 이뤄 과제를 제출한 것 같은 수준’이라는 뜻으로, 그만큼 완성도가 높았음을 의미한다. K-팝의 정수를 담은 OST 의 OST는 가상의 아이돌 그룹들이 부른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K-팝 스타들을 뛰어넘는 음악적 성과를 거두며 돌풍을 몰고 왔다. ⓒ 넷플릭스 K-팝의 숨은 ‘오리지널리티’까지 놓치지 않은 OST의 주역은 더블랙레이블이다. 빅뱅, 2NE1, 블랙핑크를 프로듀싱하며 YG엔터테인먼트를 K-팝 3대 기획사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프로듀서 테디가 설립한 바로 그 레이블이다. 2021년부터 YG 산하에서 독립해 독자적 활동을 선언함과 동시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 프로젝트를 만난 셈이다. 앨범에 참여한 프로듀서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 영화가 무척이나 즐거운 프로젝트였다고 말한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협업과 K-팝의 성공 공식, 그 가운데에서도 빅뱅, 2NE1 등을 통해 영미권을 중심으로 좋은 반응을 가장 빨리 얻어본 이들의 에너지가 모인 셈이었다. BTS나 블랙핑크 같은 대형 그룹이 아니면 좀처럼 흥행이 쉽지 않다고 하는 북미에서 OST가 유독 좋은 반응을 이끈 이유이기도 했다. K-팝 성공 공식을 꿰고 있는 이들을 등에 업은 프로젝트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현상’에 있어 OST의 인기는 작품 그 이상이었다.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 8주 1위를 자랑하는 타이틀 곡 을 중심으로 OST의 거의 전곡이 사랑받았다. 앨범 가운데 8곡의 수록곡이 빌보드 100위 권에 동시에 진입하는 진풍경 가운데 3곡은 무려 톱 10에 이름을 올렸다. 힘이 빠지려나 싶을 때마다 음악과 영화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화제성을 견인했다. 골든 글로브도, 아카데미 시상식도, 그래미 시상식도 모두 참지 못하고 의 손을 들었다. 덕분에 2026년 상반기까지도 의 인기는 쉽게 식을 것 같지 않다. K-팝은 지금까지 ‘특정 팬덤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쌓아 올린 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K-팝이 낯선 이들에게 팬덤은 어디까지나 경외의 대상이었다. 세상은 그들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보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까지 사랑하게 만드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K-팝의 정수에서 뽑아낸 순정한 에너지가 그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손끝에서 영화가, 음악이 되어 더 먼 곳으로 뻗어가고 있다. 이해의 영역에만 존재하던 K-팝은 이제 서서히 수용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지금부터 시작될 K-팝의 이야기는 분명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젊은 거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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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거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2025년 10월 개봉한 영화 은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젊은 감독 윤가은이 6년 만에 선보인 신작이다. 한층 성숙해진 감독의 연출력과 등장인물들의 연기력에 호평이 쏟아지며, 평단과 관객들에게 두루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영화인들과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영화 관람을 독려하는 이례적인 일도 벌어졌다. 2025년 10월 개봉한 윤가은 감독의 은 평단과 관객들에게 두루 호평을 받으며, 낭트 3대륙 영화제 대상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거머쥐었다. ⓒ 바른손이엔에이 은 키스 장면을 상상하게 하면서 시작한다. 관객들은 검은 화면에서 들려오는 음향이 누군가가 키스하며 내는 소리라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비어 있던 스크린은 곧장 흥분한 연인의 얼굴로 채워진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두 남녀, 그중에서도 여자아이에게 맞춰진 초점은 이렇게 자신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이 소녀의 격정을 전부 받아낼 준비를 마쳤습니다.’라고. 이 선언은 윤가은 감독의 전작을 아는 이들에게 더 또렷하게, 마치 전작에 보내는 작별 인사처럼 들렸을 것이다. ‘키스’라는 행위는 과거 윤가은의 영화 속 풍경들과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윤가은 감독은 걸출한 데뷔작 (2016)과 후속작 (2019)은 물론 그 이전에 제작한 (2011)이나 (2013) 같은 단편들에서도 아이들이 친구, 가족, 사회와 맺는 관계를 들여다보는 데 중점을 뒀다.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묘사한 적은 없었다. 순하게 웃고, 말갛게 울며, 자아를 키워가는 유년기에 집중한 것이다. 하지만 여러 인터뷰에서 윤가은 감독은 줄곧 청소년, 특히 여성 청소년의 성과 사랑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밝혔다. 언젠가 자신이 동경해 온 장르인 하이틴 로맨스를 찍을 줄 알았다며 말이다. 영화 전문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그런 풋풋한 작품도 구상해 봤으나 완성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성과 사랑은 어떤 두려움, 공포, 불안, 걱정,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는 무엇이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누가 누구와 입 맞추는 것만으로는 끝맺을 수 없는 이야기가 시나리오로 스며들었다는 뜻이다. 은 그 당혹감에 대한 응답이다. 또 다른 폭력성 열정적인 키스를 마친 주인(서수빈)은 야한 만화를 그리는 친구와 장난친다.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는 아직 모르지만, 담임 교사와 진로 상담을 할 때도 능청스럽다. 집에서는 마술을 연마 중인 남동생, 약간의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는 유치원 원장 어머니와 산다. 아버지의 부재가 이 가족의 흉터와 연관이 있어 보이지만, 세 사람은 주어진 일상을 살 뿐이다. 이처럼 영화는 여느 교실에 하나쯤 있을 법한 씩씩한 인물로 주인을 소개한다. 조금 울퉁불퉁한 면모마저 그 나이에 걸맞은 개성으로 받아들여지도록. 그런데 주인의 급우 수호(김정식)가 교내에서 아동 성범죄자 출소 반대 서명 운동을 벌이고, 주인이 거기에 연명하기를 거부하면서부터 캐릭터에 얽힌 미스터리가 발동한다. 언뜻 문제없이 비치는 이 운동을 향해 거부를 넘어 분노를 표출하는 주인을 보며 관객은 묻고 싶어진다. 주인은 왜 그러는 걸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주인을 날 세우게 한 것은 서명 운동에 쓰인 언어다. 성폭력 피해자의 삶이 ‘파괴된다’는 문장으로 가해자의 복귀를 막으려는 수호를, 주인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자신이 친족 성폭력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서명하지 않음으로써 하고 싶은 말은 간명하다. ‘삼촌이 내게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했어도, 나의 삶은 파괴되지 않았고, 파괴되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의 존엄을 분명히 하는 것을 넘어서 ‘피해자다움’을 해체하려는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주인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학생들 앞에서 고백한 뒤 오해, 의심, 소외의 시간이 따라붙는다. 주인이 받는 익명의 쪽지가 그 상징물이다. 윤가은 감독은 가려진 발신자의 자리에 관객을 초대한다. 피해자를 피해자라는 정체성만으로 이해하려 드는 오만을 지적하다가, 이 영화마저 주인의 진심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물러나기도 한다. 그런 태도를 응축하고 있는 장면이 세차장 시퀀스다. 주인 모녀가 탄 자동차가 거대하고 시끄러운 세차 기계를 통과하는 동안, 주인은 소리를 지른다.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 엄마를 원망하다가, 세상을 나무라다가, 결국 그 모든 혼란을 응축한 존재인 자신을 발산하듯이. 자동차가 깨끗해지는 동안 주인의 음성은 들릴 듯 말 듯 뭉개진다. 영화는 주인의 마음속 얼룩도 조금이나마 지워졌기를 바라며, 엄마의 입을 빌려 말할 따름이다. “한 바퀴 더 돌까?” 중층적 시선 속 인물들은 성폭력이라는 사건을 각기 다른 형태로 통과한다. 누군가는 직접적으로 고통받았고, 누군가는 그의 가족으로서 죄책감을 느낀다. 또 다른 누군가는 비슷한 경험을 했음에도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 없어 두 번 괴롭다. 성폭력은 나와 무관한 타자의 일일 뿐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 모두가 이 영화를 마주한 관객의 속내를 차례로 대변하는 셈이다. 윤가은 감독은 그동안 어린아이들의 시선으로 인간관계와 사회를 그려내며 독자적 영화 세계를 구축해 왔다. 세 번째 장편영화인 은 이전 작품들에서 한 단계 나아가 친족 성폭력을 경험한 고등학교 여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감독의 주제 의식을 한층 확장하고 심화시켰다. ⓒ 바른손이엔에이 윤가은 감독은 익명의 쪽지를 통해 그들 각자가 품을 수 있는 의문까지 재현한다. 주인에게 어찌 그리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느냐고 따지며 조용히 있어 달라고 경고하던 무례함은 영화 끝에서 또 다른 고백으로 이어진다. 나도 너와 같은 일을 겪었다고. 그러나 너와 같이 살 수 없었다고. 너처럼 바로 서기 위해 너를 잊지 않겠다고. 윤가은 감독은 수십 명의 목소리로 마지막 쪽지에 적힌 문장을 관객에게 들려준다. 한 사람으로 특정되지 않는 그 목소리는 다정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내뿜는다. 즉 주인을 위협하던 익명의 목소리는 실은 다른 피해자의 것이었다. 주인도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수호의 동생이자 엄마의 학생인 여자아이를 꼬집어 멍들게 한 적이 있다. 영화는 이 두 가지 사실로써 관객을 시험하는 것만 같다. 피해자가 무결할 때만 연대할 것인가? 성폭력 피해자도 다른 종류의 가해자가 될 수 있지 않나? 주인은 ‘사랑’이 꿈이라고 적었다. 우리는 그 사랑을 함께 이루기 위해 무얼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의 탁월함은 여기에 있다. 포용과 지지 성폭력을 주제로 다룬 기존 영화들이 대체로 사회 고발적 성향을 드러냈던 데 반해 이 영화는 폭력의 순간을 재현하거나 절망의 깊이를 표현하는 대신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 현재의 일상을 어떻게 영위해 가고 있는지 섬세하면서도 비전형적인 시선으로 그려냈다. ⓒ 바른손이엔에이 2025년은 드물게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 모두 나온 해였다. 매해 신작을 발표하는 홍상수 감독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거장의 반열에 오른 예술가들 사이에서, 윤가은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영화 은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한국 영화’로 거듭 호명되었다. 이 영화는 2026년 2월 초 기준, 누적 관객수 약 20만 명을 기록했다. 한국 독립·예술 영화로서는 달성하기 어려운 스코어다. 봉준호, 연상호 등 유명 감독들과 김혜수, 김태리 같은 배우들, 그리고 수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홍보하며 응원하고 지지한 까닭이다. 토론토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바르샤바국제영화제, BFI 런던영화제, 홍콩아시안영화제 등 해외에서도 주목받았다. 평단과 대중의 애정을 두루 얻은 배경에는 성폭력 생존자의 실존을 헤아린 포용력도 있지만, 어렵다는 이유로 지나쳐 온 이야기를 툭 꺼내놓은 용기를 향한 지지도 있을 것이다. 윤가은 감독도 회고했다. “ 을 향한 환대도, 불편한 마음도 모두 감사하고 기적 같았다.” 이 영화를 통해 존재하지만 묻힌 생존자의 목소리를 드높인 윤가은 감독은 또 어떤 작품으로 우리의 눈을 번뜩 뜨이게 할까. 당장 2026년 공개될 단편 앤솔로지 속 그녀의 짧은 영화 를 기다리며 이 젊은 거장의 성장을 기대해 보자.

죽음의 행성에서 벌어지는 생존을 위한 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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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행성에서 벌어지는 생존을 위한 사투 『붉은 칼』 정보라 작, 안톤 허 역 혼포드 스타, 2025 220쪽, 14.99파운드 죽음의 행성에서 벌어지는 생존을 위한 사투 제국의 식민지 포로가 되어 비좁은 우주선에 몸을 싣고 다른 행성으로 가던 그녀는 한 소년 덕분에 힘을 얻는다. 담갈색 눈동자와 붉은 머리를 지닌 소년 또한 다른 식민지 출신이다. 이들이 마침내 도착한 낯설고 적대적인 하얀 행성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조건은 단 하나, ‘유령’이라 불리는 괴물 종족을 섬멸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주선의 문이 열리는 순간, 모든 희망은 하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지독한 안개는 포로들의 시야를 가리고, 소년이 갖고 있던 무기마저 무용지물로 만든다.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안개를 뚫고 날아온 날카로운 백색 광선이 소년의 몸을 어깨부터 허리까지 단숨에 두 동강 내버린다. 그녀는 절규하며 무릎을 꿇지만, 슬퍼할 여유조차 없다. 방금까지 그녀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또 다른 광선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는 빛을 반사하는 붉은 칼집에 든 칼 한 자루다. 천운으로 칼집이 적의 살상 광선을 반사해 낸 덕분에 그녀는 가까스로 유령 외계인을 무찌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안개 속에는 살상 광선으로 무장한 외계인들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고, 등 뒤에는 퇴각하는 포로를 사살하려는 무자비한 제국 군인들이 서 있다. 사면초가의 이 행성에서 그녀는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베테랑 번역가 안톤 허를 통해 영미권에 소개된 정보라 작가의 잔혹한 SF 소설 『붉은 칼』은 이처럼 강렬한 흡입력이 있다. 무심한 죽음이 도사리는 곳에서 생의 끈을 놓지 않는 무명의 주인공을 집요하게 쫓아가는 작품이다. 작가는 주인공을 집어삼킬 듯 휘몰아치는 차갑고 기계적인 폭력을 가감 없이 묘사하며, 독자들을 그 절박한 현장으로 밀어 넣는다. 각 장 사이에 배치된 짧은 에피소드들은 이 죽음의 행성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실체를 조금씩 드러내는 퍼즐 조각과 같다. 독자들은 아마 주인공보다 먼저 그녀가 처한 상황을 눈치채게 될 것이며, 이러한 ‘비극적 아이러니’로 인해 더욱 충격적인 결말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제 지켜볼 부분은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깨닫게 된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붉은 칼』은 여타 훌륭한 SF 소설들이 그러하듯, 긴장감 넘치는 서사 너머로 인간다움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포로들의 목숨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며 소모품처럼 전장에 내모는 제국의 비인간성은 언뜻 허구처럼 보이지만, 우리 현실과 맞닿아 있지 않았다면 이토록 강렬한 울림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전선 너머 맞은편에서 미지의 타인을 ‘괴물’이나 ‘유령’으로 낙인찍는 것 또한 인류 역사에서 자주 보았던 전쟁 선동 방식과 닮아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정체성 형성에서 ‘기억’의 역할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결국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이 이끄는 대로 그저 정해진 길을 따라 가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때로는 무력해 보일지라도,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나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우주선의 엔진 굉음과 처절한 전장의 소음이 잦아든 뒤에도, 이 작품은 당신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긴 여운을 남길 것이다. 『유에서 유』 오은 작, 안수현 역 블랙 오션, 2025 178쪽, 20.00달러 양날의 검을 가진 언어의 힘 영미권 독자들이 시집 『유에서 유』를 통해 오은의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역자는 “오은의 시는 일상적 언어의 사용을 넘어선 한국어 감각을 체험하게 만든다”라고 평했다. 하지만 매끄럽게 옮겨지지 않는 부분들이 있기에 바로 이 점이 번역가에게는 딜레마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독자들은 「너무」라는 시에서 왜 갑자기 나무가 언급되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 ‘너무(too much)’와 ‘나무(tree)’라는 글자가 얼마나 닮았는지를 알게 되면 비로소 이해가 갈 것이다. 또한 「만약이라는 약」은 ‘만약(if)’이라는 미련을 내려놓는 과정에 대한 성찰적인 작품으로, 한국어에서 ‘만약(manyak)’이 약(yak, medicine)의 한 종류처럼 들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제목의 의미가 훨씬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국내 시집의 전형적인 구성대로 『유에서 유』 역시 해설가의 평론으로 끝맺는다. 시인의 말놀이 방식을 명쾌하게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더욱 반가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안수현 번역가의 방대한 주석이 더해져 영미권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단순한 말놀이를 넘어 오은의 시는 여러 차원에서 깊은 울림을 준다. 「다움」과 「합평회」 같은 작품들은 사회 부조리에 대한 고발을 담고 있으며, 「청문회」는 마치 시인의 공개적 선언처럼 느껴진다. “거의 모든 단어에는 양날의 검이 있다”라는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코리안 밥상’ www.koreanbapsang.com 한국인의 밥상에 둘러앉다 ‘코리안 밥상’은 재미교포 노효선 씨가 자녀들이 어릴 때 먹었던 한국 음식을 직접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시작한 웹사이트이다. 한국 요리 입문자들이 손쉽게 시작할 수 있도록 ‘시작하기’ 링크가 준비되어 있다. ‘밥상’의 의미를 비롯해 밥, 반찬, 국, 찌개 등 한국 식사의 기본 요소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또한 한국 음식의 필수 식재료 정보, 초보자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레시피들도 함께 제공한다. 레시피 메뉴에는 훨씬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간식, 전채 요리부터 메인 요리, 슬로우 쿠커 요리, 채식 요리, 후식까지 카테고리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심지어 인기 드라마 등에 나왔던 음식을 만나볼 수 있는 ‘특별 이벤트’ 요리, 또는 한국과 미국 문화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홈파티’용 레시피도 확인할 수 있다. 각 레시피에서는 입맛을 돋우는 완성 요리 사진부터 음식에 대한 설명과 역사, 그리고 노효선 씨의 추억이 담긴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길한 음식, 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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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한 음식, 떡국 떡국은 대표적인 세시 음식으로, 고깃국물에 가래떡을 어슷하게 썰어 넣어 끓인다. 지역에 따라 재료나 조리 방법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음식이라는 점은 어디나 매한가지다. 요즘은 명절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적으로도 즐겨 먹는 별미가 되었다. 맑은 국물에 가래떡을 가늘게 썰어 넣고 끓이는 떡국은 설날에 먹는 절기 음식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평소에도 일품요리 형태의 한 끼 음식으로 널리 상용된다. ⓒ 한국관광공사 겨울이 오면 본능적으로 뜨끈한 국물 요리를 찾게 된다. 그중에서도 떡국은 특별하다. 한국인의 집단적 기억과 계절 감각을 함께 불러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설날 아침에만 맛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명절의 경계를 넘어섰다. 마트 진열대에는 간편식 떡국 상품이 늘어서 있고, 일반 식당이나 분식집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메뉴가 되었다. 그럼에도 설에 떡국을 먹지 않으면 마치 새해의 복 한 조각을 놓친 듯 허전하다. 그것은 아마도 떡국 한 그릇에 담긴 길하고 복된 기운을 우리 모두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를 세는 단위 떡국은 한 해의 복을 기원하는 음식이다. 근대기에 활동했던 문인이자 언론인인 최남선(1890~1957)은 1946년 한국의 풍속과 전통, 지리, 종교 등을 망라한 『조선상식문답』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 “설날에 떡국을 먹는 풍습은 매우 오래됐으며, 이는 상고 시대 이래 신년 제사 때 먹던 음복 음식에서 유래됐다”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음복이란 ‘복을 먹고 마신다’라는 뜻으로, 조상께 올린 제사 음식을 나눠 먹으며 복을 기원하는 전통을 말한다. 그가 언급한 상고 시대가 정확히 어느 시대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쌀밥을 짓는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쌀을 찧어 가루로 만든 뒤 떡으로 쪄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는 학자들의 의견이 모인다. 떡은 시간이 지나면 굳기 때문에 국물에 넣어 다시 데워 먹는 방식이 자연스레 자리 잡았을 것이다. 조선 시대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에서는 떡국을 ‘백탕’ 혹은 ‘병탕’이라 부르고 있다. 백탕은 국물이 희다는 뜻인데, 이는 단순한 색깔 묘사가 아니라 상징성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흰빛에서 청결과 순수를 떠올렸고, 한 해의 시작을 더럽힘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열고자 했다. 설날에 떡국을 먹는 행위는 그저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정화 의례에 가까웠다. 그래서 떡국을 조리할 때는 소고기든 닭고기든, 혹은 멸치 등의 해산물로 우려냈든, 색이 짙지 않게 맑고 흰빛을 유지하려 애썼다. 또한 병탕(餠湯)은 떡 ‘병(餠)’과 끓일 ‘탕(湯)’을 합친 용어로, 말 그대로 ‘떡을 끓여 만든 국’이라는 뜻이다. 한국인들은 생일과 무관하게 해가 바뀌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걸로 셈한다. 따라서 새해 첫날 먹는 떡국은 나이를 상징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내가 너보다 떡국을 더 먹었어”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내가 너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뜻이며, 삶의 경험과 식견이 더 풍부하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동국세시기』에도 옛사람들이 “병탕을 몇 사발이나 먹었느냐”라는 표현으로 나이를 물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떡국은 세시풍속의 음식이면서 동시에 생물학적 나이와 삶의 연륜을 재는 도구이기도 하다. 떡국의 주된 재료인 가래떡은 그 자체로 담백하고 쫄깃해 주전부리로 즐겨 먹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살짝 굳은 가래떡을 석쇠에 노릇노릇하게 구우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말랑해져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불에 구운 가래떡은 주로 조청이나 꿀을 발라 먹는다. ⓒ 한국관광공사 복을 비는 마음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1748~1807)은 풍속지 『경도잡지』에서 떡국을 “멥쌀로 떡을 쪄서 치고 비벼 긴 가닥을 만들고, 굳기를 기다려 엽전처럼 얇게 썰어 꿩고기와 함께 끓이는 음식”으로 묘사했다. 그의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먹는 떡국의 원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옛사람들은 생명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무병장수의 기원을 담아 가래떡을 길게 뽑았다. 그리고 그 떡을 엽전처럼 동그랗게 썰면서 재물과 풍요, 번영을 희구했다. 그렇기에 떡국은 단순한 겨울 음식을 넘어, 길한 음식으로서 특별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떡국은 한겨울에 꼭 필요한 실용적 음식이기도 하다. 소화가 더디고 체온을 유지하기 힘든 추운 계절에 가루 내어 익힌 떡은 부드러워 소화가 잘되었고, 흡수율이 높아 금세 에너지로 바뀌었다. 뜨끈한 국물과 함께 먹으면 몸이 데워져 새해 첫날 활기를 북돋기에 제격이었다. 국물 재료 선택에도 이유가 있었다. 농경 사회에서 소고기는 귀해 자주 쓰기 어려웠고, 대신 꿩이나 닭은 비교적 구하기 쉬운 단백질원이었다. 더불어 꿩·닭을 삶으면 국물이 맑고 기름기가 적어 백탕의 이미지와 잘 맞았다. 또 소화에 유리해 겨울철 보양 음식으로 적합했다. 특히 꿩은 예부터 “양기를 북돋아 몸을 덥힌다”는 인식이 있었고, 닭은 새벽을 알리는 동물로서 새해 시작과도 연결됐다. 하지만 야생 꿩은 구하기가 어려워, 일상적으로는 닭이 대체재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이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각 지역의 떡국 떡국은 지역색이 드러나는 음식이기도 하다. 지역마다 들어가는 재료가 다르기 때문이다. 개성은 조랭이떡국으로 유명한데, 양 끝을 비틀어 리본 모양으로 만든 조랭이떡은 특이한 모양새와 말캉하고 쫀득한 식감이 특징이다. 맑은 소고기 육수에 달걀지단과 김 가루를 고명으로 얹어 깔끔하고 절제된 풍미를 완성하며, 곁들이는 반찬으로는 담백한 동치미나 무김치가 어울린다. 함경도와 평안도 같은 북방 지역은 쌀이 귀해 떡 대신 만두가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떡만둣국이 흔했고, 국물은 멸치·다시마·건어물로 내어 구수하면서도 진한 맛을 냈다. 마늘·두부·대파가 고명으로 올라가고, 김치·젓갈 같은 저장 음식이 반찬으로 곁들여져 긴 겨울을 버티는 데 필요한 열량과 온기를 보충했다. 강원도의 떡국은 산과 바다를 동시에 품은 지리적 특성이 드러난다. 산간 지방에서는 황태나 북어를 푹 끓여 국물 맛을 내고, 바닷가에서는 오징어나 생선을 활용하기도 했다. 메밀 피로 빚은 만두가 들어간 떡만둣국이 흔했다. 충청도에서는 멥쌀가루를 익반죽해 작은 덩어리로 만든 반죽을 두툼하게 썰거나 손으로 뜯어 넣어 끓였다. ‘날떡국’ 또는 ‘생떡국’이라 불리는 이 독특한 떡국은 두께가 일정하지 않아 씹는 재미가 있다. 국물은 소고기·닭·멸치를 담백하게 끓여내는 경우가 많았다. 고명은 단출했지만, 무생채나 동치미 같은 곁들임 반찬이 어우러져 충청도 특유의 소박한 정서가 배어난다. 서울과 경기도는 여러 지역의 영향을 아우르며 표준형 떡국을 만들어냈다. 소고기 양지나 사골을 고아 낸 맑은 국물에 어슷하게 썬 가래떡을 넣고,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추는 방식이다. 달걀지단, 파, 김, 소고기를 채 썬 고명이 기본으로 올라가며, 깍두기나 동치미 같은 반찬이 곁들여진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떠올리는 전형적인 떡국의 형태이다. 전라도는 국물이 깊고 진하다. 그중 닭장떡국이라는 향토 음식이 유명하다. 원래는 꿩을 넣어 끓이는 것이 상례였지만, 꿩을 쉽게 구하기 어려워지자 그 맛을 대신하기 위해 닭을 활용했다. 토막 낸 닭에 파, 마늘, 생강 같은 향신채와 조선간장을 넣고 짭짤하게 조린 후에 이것을 물에 풀어 국물을 내고 떡을 넣어 끓인다. 짭조름한 국물이 떡에 스며들면서 국물 맛이 한층 진해지고, 담백한 닭고기와 어우러져 든든한 별미가 되었다. 경상도에서는 ‘꾸미(국이나 찌개에 넣는 고기)’라 불리는 고명이 떡국 맛을 좌우했다. 국물은 멸치·다시마 육수나 소고기 국물을 쓰지만, 짭조름한 꾸미로 맛을 보강했다. 간장에 졸인 고기, 두부, 달걀, 김 가루가 고명으로 올라가고, 바닷가 지역에서는 굴이나 해산물이 더해졌다. 울산에서는 독특하게도 구운 떡을 넣어 고소함을 더한 ‘굽은떡국’이 전해진다. 멥쌀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어 익반죽한 반죽을 기름 두른 팬에 전병처럼 넓게 구운 뒤, 이를 한입 크기로 잘라 멸치 장국에 넣어 끓이는 방식이다. 기름에 구운 떡 특유의 고소한 향과 쫄깃한 식감이 국물과 어우러져 별미를 이룬다. ‘굽은’은 구웠다는 뜻의 지역 사투리이다. 오늘날 식재료가 풍족해지고 세시풍속을 따르는 사람들이 줄면서 많은 명절 음식이 빛을 잃었다. 떡국 역시 가정간편식으로 사시사철 맛볼 수 있는 일상적 음식이 되었지만, 길하게 여기는 마음은 한결같다. 한국인들은 여전히 설날 아침 가족이 한데 모여 떡국을 나눠 먹으며 새해의 안녕을 함께 빌고 덕담을 나눈다. 조랭이떡국은 개성 지방의 향토 음식이다. 일반적으로 떡국은 긴 가래떡을 어슷하게 썰어서 끓이지만, 조랭이떡국은 리본 모양으로 떡을 만들어 끓이는 게 특징이다. 국물을 내거나 고명을 얹는 방식은 다른 떡국과 비슷하다. ⓒ 경향신문

지금 대중문화가 무속을 다루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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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중문화가 무속을 다루는 방식 최근 들어 한국 무속을 모티프로 삼은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부쩍 늘었다.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이고, 예능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또한 무속인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상투적 묘사에서 탈피해 새로운 시각으로 이들을 그려낸다. 무속을 매개로 한 한국식 오컬트는 무속인들이 신의 중재자로서 귀신을 달래고 위로한다는 점에서 서구의 오컬트 장르와 차별화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는 이러한 한국 무속의 특성을 잘 담아내며, 한국식 오컬트가 하나의 장르적 계보를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는 ‘K-팝’과 ‘데몬 헌터스’의 결합이 절묘한 애니메이션이다. 일반적으로서구의 오컬트 장르에서 데몬 헌터스는 구마 사제를 가리키지만, 이 작품에는 무당이 등장한다. 각자의 신을 섬기는 무당은 무속 의식인 굿을 진행하는 동안 접신하고 신탁을 전달한다. 선악 구도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구마 사제는 악령들과 싸우고 이를 물리치는 존재로, 어찌 보면 ‘파이터’에 가깝다. 하지만 무당은 악령들(한국에서는 원귀들)과 싸우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고 맺힌 한을 풀어줌으로써 응당 가야 할 저승으로 고이 보내준다. 그런 점에서 무당은 파이터라기보다는 ‘카운슬러’에 가깝다. 영매자인 무당의 역할이 구마 사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이러한 차이점은 사후 세계와 귀신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관점이 서구와 다른 데서 연유한다. 한국에서는 귀신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에는 무당의 후예인 헌트릭스 멤버들이 악령들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주인공 루미가 진우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이 싸움은 대결보다는 구원에 가깝다. 루미는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혼을 팔아 악령이 된 진우를 물리치는 게 아니라 구원해 주려 애쓴다. 루미의 태도는 무당의 본질적 역할과 맞닿아 있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의 헌트릭스가 무대에서 팬들과 교감하는 과정은 무당이 굿을 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이 의식은 전통적으로 춤과 노래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로 그 점에서 굿은 K-팝 아티스트들의 공연과 유사하다. 무당들이 굿으로 원혼을 위로해 주는 것처럼 K-팝 아티스트들은 춤과 노래로 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 국내 대중문화에서 무당이 긍정적 역할로 묘사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무당은 대개 ‘신병’이라 불리는 원인 모를 병을 앓다가 내림굿을 받고 신을 받아들이는 혹독한 운명을 지녔다. 1970~8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는 무당의 영적인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미신으로 치부했다. 자연히 TV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무당도 대개는 무섭고 이질적인 존재로 그려졌다. 하지만 최근 K-콘텐츠 속에 나타나는 무당들은 훨씬 밝아졌고 당당해졌다. 영화 에 등장하는 무당 화림(김고은)은 가죽 롱코트를 휘날리며 귀신과 맞서는 스타일리시한 모습을 선보인다. 화림 같은 젊은 세대 무당은 올해 상반기 방영된 SBS의 이나 tvN의 같은 TV 드라마에도 등장한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의 여주인공 여리(김지연)는 첫사랑 윤갑(육성재)의 몸에 빙의한 이무기 강철과 함께 왕가의 저주를 풀어내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동안은 서사적 필요에 의해 조연이나 단역으로 등장했던 무당이 판타지 액션과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올라선 것이다. 이는 현재 무당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말해준다. 이런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잘 보여주는 작품이 다.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이 작품은 대본집이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을 정도로 화제성이 높았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성아(조이현)는 ‘천지선녀’로 불리는 고등학생 무당이며, 저주받은 존재인 첫사랑 견우(추영우)를 사랑의 힘으로 지켜내는 수호천사 같은 역할로 나온다. 견우를 구하기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당이 지니는 ‘힐러’로서의 면모를 강조한다. 의 루미와 유사한 설정이다. 국내 OTT 플랫폼 티빙의 오리지널 시리즈 은 귀신 현상을 겪은 제보자들과 무속인들을 밀착 취재해 귀신과 무속이라는 주제를 다각도로 탐구한 다큐멘터리다.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는 점에서 호평받았다. 티빙 제공 새로운 접근 방식 젊은 세대 무당이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 시대적 변화는 라는 매우 독특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탄생시켰다. 일정 기간 한 집에 머무르고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의 인연을 찾아간다는 포맷은 여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무당과 점술가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자신의 영적 능력을 토대로 연애 상대를 선택한다는 신선한 발상은 시청자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성 출연자들이 태어난 일시만 보고, 그중에서 운명의 상대를 선택하는 오프닝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들은 자신이 모시는 신의 뜻이나 점괘를 통해 알게 된 운명의 상대와 자신이 본능적으로 끌리는 상대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다른 연애 프로그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재미를 제공했다. 출연자들의 수려한 외모와 언변 또한 젊은 세대 무당에게 호감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 프로그램은 2024년 첫 번째 시즌이 방영된 후 인기에 힘입어 올해 초 두 번째 시즌이 전파를 탔다. 장르적 분화 그렇다면 최근 몇 년 사이 무속인들이 호감의 대상이 된 이유는 뭘까. 우선 무속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라진 데 있다. 한국인들은 이제 무속을 음습한 미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카운슬링으로 여기게 됐다. 한마디로 과거에 비해 무속을 훨씬 캐주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 사람들은 무속인이나 점술사들을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찾는다. 도시 변두리의 후미진 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던 무당집과 점집도 이제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에 자리를 잡은 경우가 많다. 한편 젊은 세대가 무속에 호감을 갖는 이유로,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꿈을 펼치기 어려워진 사회 현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은 이전 세대들이 젊은 시절 느꼈던 것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무속을 통해 보다 직관적인 조언을 듣고 그를 통해 위안을 느낀다. 무속에 관한 젊은 세대의 관심과 호감은 이 소재가 대중문화에서 다양한 장르로 분화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이제 무속을 매개로 한 콘텐츠들은 사극, 로맨스, 액션 판타지로 그 영역을 넓혔다. 또한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에 더해 같은 애니메이션, 같은 다큐멘터리의 소재로도 등장한다. 한국의 전통 무속 신앙이 지닌 문화적 요소들이 더욱 다채로운 형태로 새롭게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구아진의 네이버 웹툰 는 절대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무당들의 이야기다. 도서출판 들녘에서 단행본으로도 출간됐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아 2022년 대한민국콘텐츠대상의 대통령상을 비롯해 다수의 상을 받았다. ⓒ 구아진, 투니드 엔터테인먼트, 도서출판 들녘

부당함에 맞서는 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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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함에 맞서는 일에 관하여 『서른의 반격』 손원평 작, 션 린 할버트 번역 하퍼비아, 2025 233쪽, 19.99달러 부당함에 맞서는 일에 관하여 손원평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인 이 책의 주인공은 ‘김지혜’다. 1988년생 여자 이름 중 가장 흔한 이름이기에, 그녀는 수많은 ‘김지혜들’ 속에 파묻힌다. 하지만 그녀에게 익명성은 오히려 편안하다. 무대에 선 사람들을 객석에서 지켜보면서, 조용히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서른 살이 된 김지혜는 대기업 DM그룹의 교육 계열사인 DM아카데미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원했던 인생은 아니었다. 꿈도 희망도 이루지 못했고, 미래는 불확실하기만 하다. 그런데 마치 맑은 하늘에 번개가 치듯 그녀의 일상에 한 남자가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바뀐다. 두 번째 인턴으로 채용된 이규옥이다. 물 같은 지혜에 비해 그는 불과 같은 성향이지만, 둘은 의외의 동지가 된다. 우쿨렐레 수강생 남은주와 고무인까지 합류하면서, 세상의 권위에 맞서고 정의를 구현하는 4인조가 탄생한다. 이들의 목표는 거창하지 않고, 방식도 유쾌하다. 갑질하는 상사를 상대로 협박문 느낌의 쪽지를 남기거나, 다리 밑에 낙서하고, 싫어하는 정치인에게 달걀을 던지는 정도의 소소한 장난이다. 처음엔 이 장난들이 나름대로 효과를 보인다. 체제가 전복되거나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의 일상은 조금 더 나아진다. 그런데 지혜는 점점 마음이 무거워진다. 진정한 변화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마침내 사상 최대의 계획을 실행할 기회가 찾아온다. 과연 4인조는 지혜가 바랐던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니면, 세상과 맞서 싸우기보다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이 현명하다는 현실주의자들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게 될 것인가? 지혜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서른을 넘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10대에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변화가 너무 많아 스스로를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다. 그 시기가 지나고 20대가 되면,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디디며 가능한 많은 경험을 쌓아가게 된다. 그러나 30대에 접어들면, 사회는 ‘이제 진지하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하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사회가 정해 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틀에 맞서서, 자신이 원하는 꿈을 좇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혜는 둘 중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최소한 모두에게 맞는 답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각자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자신만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읽고 얻은 메시지다. 독자마다 서로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손원평의 작품이 탁월한 이유는 모두에게 똑같은 해답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받아들인다. 앞으로도 분명 그녀의 인생에는 수많은 시련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녀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옥춘당』 고정순 작, 박애린 번역 레빈 퀘리도, 2025 128쪽, 21.99달러 사탕처럼 달콤하고… 깨지기 쉬운 추억 작가 고정순은 『옥춘당』에서 따뜻한 글과 아름다운 그림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쟁고아였던 두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다. 손녀인 정순은 방학이면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는데, 기억 속 할머니의 집은 ‘여름이 오래 머무는 곳’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세월을 피할 수는 없었다. 세상은 계속 돌아가지만, 모든 것에는 언제나 끝이 있기 마련이다. 작가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단어만 골라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간다. 대신 글 사이에 놓인 그림들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눈앞의 장면만이 아니라 마음의 여운까지 포착하며, 오래된 기억을 고스란히 불러낸다. 이야기의 끝에서 작가는 할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작은 실내화 한 켤레’를 떠올린다. 사람들이 세상을 떠날 때는 물건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기억 속에 다시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만들어 두고 가는 것임을 알려준다. 그 빈자리는 우리의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드라마빈스 www.dramabeans.com 전 세계 K-드라마 팬들, 모여라 2007년, ‘javabeans’라는 닉네임을 쓰는 한 여성이 K-드라마의 세계에 푹 빠졌다. K-드라마를 향한 애정을 함께 나눌 곳을 찾아 인터넷을 뒤졌지만, K-드라마가 제대로 주목받는 곳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직접 만든 사이트가 바로 ‘드라마빈스’다. 이 사이트의 주요 콘텐츠는 인기 드라마 요약이지만, 그 외에도 의 세계적 성공 등 드라마 현상에 관한 에세이, 드라마 업계 뉴스, 팬들을 위한 토론 게시판까지 다양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드라마빈스의 필진은 출신도 다르고, 살아온 길도 제각각이다. 이 사이트를 알게 된 경로 또한 각기 다르지만, 그들을 하나로 잇는 단 하나의 끈이 있다. K-드라마에 대한 사랑, 아니 어쩌면 집착에 가까운 애정이다. 현재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소위 ‘리캡 미니언’ 들은 대부분 드라마빈스의 초기 독자들로, 아끼는 사이트에 직접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꿈만 같다고 말한다. 이처럼 드라마빈스는 위에서 아래로 정보를 뿌리는 구조가 아닌, 팬에 의해, 팬을 위해 만들어진, 애정이 담긴 K-드라마 해설과 분석의 공간이다. 리캡 미니언들처럼 K-드라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겨찾기 해둘 만하다. 찰스 라 슈어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 봉지의 감성

Lifestyle 2025 AUTUMN

한 봉지의 감성 커피믹스는 뜨거운 물만 부으면 간편히 마실 수 있는 음료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점차 대중화됐고, 현재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들이 시장에 나와 있다. 사람들의 입맛과 인식이 변화하면서 2010년대 이후 소비량이 줄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커피믹스는 인스턴트커피와 설탕, 크림을 일정 비율로 한 봉지에 넣은 제품이다. 1976년 동서식품이 국내 최초로 커피믹스를 개발한 이래 현재는 맛과 건강을 고려한 다양한 종류의 커피믹스가 출시되고 있다. © 뉴믹스커피 믹스 커피는 인스턴트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넣어 조제해 먹는 방식의 커피이다. 믹스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누군가에겐 취향의 표현이고, 또 누군가에겐 위로의 언어이다. 한때는 서열과 관계를 상징했으며, 여성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기도 했다. 그 믹스 커피를 한 봉지에 담아낸 제품, 커피믹스가 탄생했다. 모두가 표준화된 맛을 즐기게 된 순간,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커피믹스는 단지 빠르고 간편한 커피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로 감정을 포장한, 한국식 커뮤니케이션이다.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물 속에서 퍼지는 그 맛은 어떤 시대의 감성을 품고 있다. 우수한 발명품 2020년 개봉한 영화 에는 유니폼을 맞춰 입은 여직원들이 누가 먼저 믹스 커피를 타는지 속도를 겨루는 장면이 등장한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여성 사원들은 저마다 커리어 우먼을 꿈꾸지만, 8년을 일했음에도 여전히 믹스 커피 타는 일이 주요 업무이다. 영화는 코믹한 장면 뒤에 시대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런가 하면 인스턴트커피와 크림, 설탕의 비율로 범인을 추적하는 장면은 커피 취향이 곧 정체성이던 시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정체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치며 수많은 고졸 여성들이 가장 먼저 정리 해고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여성이고 고졸이라는 이유로 저부가가치 인력으로 분류된 그들이 사라지자, 믹스 커피를 타고 회의실을 정리하며 일상의 틈을 메우던 손길 또한 함께 없어졌다. 남은 직원들은 곧 그 공백을 체감했다. 특히 믹스 커피를 직접 타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바로 그 시점에 커피믹스가 해결사처럼 등장했다. 봉지를 뜯어 컵에 넣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누구나 일정한 맛을 낼 수 있는 이 표준화된 취향의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효율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그 상징성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2017년 특허청이 설문 조사한 ‘한국을 빛낸 발명품 10선’에서 커피믹스가 5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보다 앞선 순위가 훈민정음, 거북선, 금속활자, 온돌 같은 역사적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작은 봉지가 지닌 사회적 파급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웃도어 아이템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왕실을 비롯한 일부 고위층만 즐기던 사치품이었다. 커피가 대중적인 기호 음료로 정착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였다. 미군 보급품을 통해 인스턴트커피가 암암리에 유통되고, 다방에서도 믹스 커피를 팔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퍼졌다.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커피를 물에 타 마시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다. 1970년에는 식품 제조 기업 동서식품이 국내 최초로 인스턴트커피를 선보였다. 그리고 6년 뒤인 1976년, 세계 최초로 커피, 크림, 설탕을 한 봉지에 담은 커피믹스를 출시했다. 낱개 포장된 이 발명품은 과거 ‘빨리빨리’ 문화로 상징되던 산업화 시대 한국의 성장 속도와 정서를 담은 생활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초창기엔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가정과 사무실에는 각각의 유리병에 담긴 ‘커피 삼총사(커피, 크림, 설탕)’가 갖춰져 있었고, 커피를 개인의 취향에 맞춰 타 줄 인력과 사회적 여유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커피믹스는 오히려 아웃도어 아이템이었다. 사람들은 믹스 커피를 만들어 먹기 어려운 야외에서 레저 활동 중 커피믹스를 마시며 당분을 충전했다. 1980년대 들어 등산과 낚시, 야유회 문화가 확산되면서 커피믹스 소비량도 점점 증가했다. 커피믹스가 그 편리성 덕분에 인기를 얻자, 이후 여러 기업들이 커피믹스를 생산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고, 전체 커피 시장에서 커피믹스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게 됐다. 상징의 스펙트럼 커피믹스가 야외에서 실내로 들어온 건 1997년 이후였다. 잉여 인력의 부재, 급박한 노동 환경, 그리고 정수기의 대중화는 커피믹스가 업무의 기본 세팅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예전처럼 누군가의 취향을 일일이 기억해 커피를 내어줄 필요 없이, 모두가 같은 봉지로 만족할 수 있었다. 이로써 커피는 더 이상 서열과 기호의 상징이 아니라, 생존과 자기 위로의 도구가 되었다. 해외에서의 인식 변화도 흥미롭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커피믹스는 한국만의 이상한 문화였다. 에스프레소, 블랙커피, 캔 커피 중심의 시장에서 커피믹스는 지나치게 달고, 아무런 감각도 감정도 없어 보였다. 커피는 예나 지금이나 취향의 영역이고 감성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 모든 걸 생략한 듯한 커피믹스가 환영받을 리 없었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믹스커피에 우유, 시나몬 가루, 바나나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제조하여 마시는 트렌드가 불고 있다. ‘달고나 커피’가 대표적이다. 그릇에 꿀을 넣고 색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거품기로 젓다가 커피믹스를 넣고 걸쭉해질 때까지 계속 저은 다음 우유에 부어서 마신다. © 한국관광공사 하지만 2010년대 들어 한국 드라마를 비롯한 K-컬처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외국인들은 커피믹스를 감성적인 음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 달달한 커피 한 잔을 매개로 나누는 대화가 그들의 감성을 건드린 것이다. 지금은 러시아, 동유럽, 인도네시아, 베트남, 대만 등지에서 박스째 수입하는 K-푸드가 되었다. 2016년 국내 한 여행사가 외국인 관광객 약 천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과반이 넘는(53%) 외국인들이 커피믹스를 ‘가장 맛있는 한국 차’로 뽑기도 했다. 믹스 커피를 한국의 차로 보는 시선이 흥미롭다. 한편 커피믹스는 생존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2022년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는 한 광산이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 당시 무너진 갱도에 고립된 광부들이 221시간을 버티게 해준 것이 바로 커피믹스였다. 이들은 커피믹스를 식사 대용으로 조금씩 나눠 먹으며 생명을 이어갔고, 구조 후 스스로 걸어 나올 만큼 건강했다. 커피믹스에 함유된 당분과 열량, 카페인의 각성 효과가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유용했는지를 보여준 극적인 사례다. 젊은 세대의 변화 최근 커피믹스는 다시 한번 새로운 얼굴로 나타났다. 배달 서비스 플랫폼 배달의민족 창업자로 유명한 김봉진 그란데클립 대표가 선보인 ‘뉴믹스커피’는 커피믹스를 시대감각에 맞게 재해석한 브랜드다. “커피는 원래 타 먹는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다방과 사무실을 오가던 옛 감성을 다시 불러냈다. 서울 성수동과 북촌의 쇼룸형 매장은 그 자체로 커피 문화의 회고적 감성을 재현한 공간이다. 이 브랜드의 등장은 단지 레트로 감성 때문만이 아니다. 원두커피가 처음 보편화됐을 때 사람들은 그 쓴맛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카페모카, 프라푸치노 같은 달콤한 음료가 인기를 끌었다. 이후 아메리카노의 깔끔한 쓴맛으로 점점 입맛이 이동했지만, 최근 들어 다시 달고 진한 커피가 돌아오고 있다. 크림 라테, 아인슈페너, 비엔나 라테 같은 음료의 유행은 젊은 세대의 기호 변화를 잘 보여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뉴믹스커피 성수동 매장 앞에서 제품을 시음해 보고 있다. 2024년 론칭한 뉴믹스커피는 ‘기념품 커피’, ‘디저트 커피’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브랜드이다. 군밤 맛, 시나몬 약과 맛, 팥빙수 맛 등 획일화되었던 기존 커피믹스의 맛을 다양하게 변주함으로써 커피믹스 문화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 뉴믹스커피 이러한 흐름 속에서 커피믹스는 다시 새로운 것이 되었다. 뉴믹스커피 매장을 찾는 외국인 비율이 높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SNS와 드라마에서 본 한국식 커피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그들을 뉴믹스커피로 이끈다. 발상의 전환 측면에서는 이보다 신선할 수 없는 뉴믹스커피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커피 한 잔조차 부담스러운 요즘 젊은 세대에게 커피믹스는 새로운 감정의 언어일 수 있다. 최근에는 커피믹스를 활용한 다양한 영상 콘텐츠도 활발히 유통된다. 커피믹스로 카페라테, 칼루아, 크림커피 등을 만드는 레시피 영상이 유튜브에 쏟아진다. 커피믹스 시장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진화하고 있다. 건강과 다이어트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당분이 거의 없는 제로 슈거, 고단백, 무지방 제품 등 기능성을 더한 제품들이 등장하면서, 기존 원두커피와 스페셜티 시장 사이에서 꾸준한 수요를 견인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통계에 의하면 2022년 기준, 국내 커피 시장에서 액상 커피 판매 비중이 35.6%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커피믹스 판매량도 24.8%를 기록해 아직도 믹스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2024년에는 커피믹스 판매량이 10년 만에 증가세로 전환됐다. 2024년 기준, 동서식품이 출시하는 커피믹스의 대명사 ‘맥심 모카골드’는 연간 약 57억 개가 팔렸다. 초당 약 180개가 팔린 셈이다. 이처럼 커피믹스는 여전히 한국인의 일상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효율과 위로의 상징이던 커피믹스는 다시 한번 새로운 세대에 의해 감정의 매개체로 재해석되고 있다. 취향의 서열을 해체하고, 감정을 연결하는 한국식 커피. 그 중심에서 커피믹스는 여전히 한 모금의 여유를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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