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에는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적들이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경주는 특별하다.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한옥으로 만들어진 게스트하우스에서 문을 열면 바로 앞에 거대한 고대 무덤인 대릉원이 보인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신라로 여행을 간 듯하다. 경주가 한국인의 사랑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진은 경주역사유적지구 중 대릉원 지구이다. 이곳에는 신라의 왕과 왕비, 귀족들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192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굴 작업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으며, 금관과 장신구를 비롯해 당대의 생활용품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 한국관광공사
경주는 과거 한반도의 고대 왕조 신라(B.C 57~A.D 935)의 고도(古都)였다. 삼국시대(B.C 1세기~7세기)를 거쳐 통일신라(676~935)에 이르기까지 고대 한반도에서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개 지구에 52개에 이르는 지정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어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이 원형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어 이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도시 전체가 역사지구로 세계유산이 된 사례는 터키 이스탄불이나 오스트리아 비엔나 등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다.
동궁과 월지는 왕자가 거처했던 공간이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외국에서 귀한 손님이 왔을 때는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신라 시대의 정원과 연못 조경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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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왕조의 궁궐터
경주역사유적지구 중 신라의 왕실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은 월성 지구와 대릉원 지구이다. 월성 지구의 주요 기념물은 월성 옛터, 흔히‘안압지’로 알려져 있는 동궁과 월지, 현존 최고(最古) 천문대로 일컬어지는 첨성대, 그리고 경주 김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서린 계림이 대표적이다.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을 말한다. 동서로 890m, 남북으로 260m 길이의 반달 모양 토성이고 둘레는 2,340m이다. 문무왕(재위 661~681) 때 인근 안압지, 임해전, 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규모가 확장되었다. 신라의 성장과 번영, 멸망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동궁과 월지는 별궁이 자리했던 궁궐터이다. 왕자가 거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역사적 자료와 연구를 통해 여러 전각을 복원하고 아름다운 야경을 조성해 관광객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다. 1970년대 이루어진 월지 발굴에서는 호수 밑바닥 진흙 속에 묻힌 3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그중 1,100여 점을 엄선하고 주제별로 나누어 상설 전시 중이다. 용면문와(龍面文瓦), 금동판 불상, 금동 초심지 가위 등에서 신라 왕실과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대릉원 지구는 세 그룹의 왕실 무덤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서 화려한 금제 부장품과 유리 제품, 도자기들이 발굴되었다. 그중 천마총은 자작나무 껍질에 날개 달린 말을 그린 천마도가 발굴된 고분이다. 그 상상의 동물이 지켰던 무덤의 주인이 궁금해진다. 한편 산성 지구에는 명활성이 있다. 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둘레 6㎞의 산성인데, 주로 왜구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외적(外敵)에 대항해 경주를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한 방어 시설이다.
고대 불교 예술의 정수
한반도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했다. 이후 기존의 여러 토착 신앙이 행해지던 남산이 불교 성산(聖山)이 되어 순례지로 탈바꿈했으며, 당대 최고 건축가들과 장인들이 이곳에 사찰과 암자를 지었다. 수십 기의 석탑과 석불이 남아 있는 남산 지구는 우리나라에서 불교 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사회 통합에 적극 활용했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지만, 대표적 호국 사찰이었던 황룡사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구층목탑(80m가량)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대 발굴에서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13세기 몽골 제국 침공 때 목탑을 비롯해 많은 문화유산들이 불타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황룡사 터는 맞은편에 위치한 분황사지와 함께 신라 불교의 정수가 담긴 황룡사 지구를 이룬다.
그런가 하면 경주 동남쪽의 토함산에 위치한 석굴암과 불국사에서는 통일신라의 불교 미술과 만날 수 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된 두 유산은 최고의 예술적 경지를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774년 완공된 석굴암은 지금까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비도(扉道)를 지나 돔 형태의 주실(主室)로 이어지는 공간마다 사천왕상과 여러 보살들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주실에는 3.45m 높이의 석가여래좌상이 연꽃 위에 앉아 있다.
용의 얼굴을 조각한 용면문와는 건물 지붕을 장식하는 건축 부재이며, 물의 신(神)인 용(龍)이 목조 건축물을 화재로부터 막아주기를 바라는 벽사의 의미도 있었다. 이 장식 기와는 삼국 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통일신라에 이르러 제작 기술이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사진은 황룡사지에서 발굴된 길이 18.5cm의 용면문와.
ⓒ 국립경주박물관
정신없이 신라 불교 예술의 정수를 감상하다 보면 왜 이곳이 세계유산에 드물게 적용되는 등재 기준 1번, 즉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으로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다. 서양에서 조각에 주로 쓰이는 대리석과 달리 까다롭다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기에 당대의 기술적 수준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한편 불국사에는 불교의 이상향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황룡사와 마찬가지로 호국 사찰이지만, 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깨끗한 세상인 불국정토(佛國淨土)를 이루겠다는 신라의 야심찬 꿈을 보여준다. 신라인들은 신라가 바로 부처의 나라라고 믿었기에 불국사는 부처님 나라의 사찰로서 곧 현세의 낙원을 의미한다. 8세기 건축 당시 모습 그대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청운교와 백운교를 지나 예배 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올라갈 수 있다.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신라 시대의 우수한 석공 기술을 엿볼 수 있는데, 대웅전 앞 완벽한 비례와 직선미를 보여주는 석가탑과 자유분방하면서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다보탑이 대비된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수난을 여실히 겪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의 일본이 조선(1392~1910)을 침략하면서 발발한 임진왜란(1592~1598) 시기 불국사의 목조 건축물은 방화로 모두 불타고 파괴되었다. 현재 모습은 1960~70년대에 석조물을 중심으로 다시 재건한 것이다. 석굴암의 경우 일제강점기(1910~1945)에 대대적인 해체와 복원을 거치면서 오히려 훼손의 위기에 놓였다. 근대에 와서야 전면적인 수리를 거쳤는데, 여기에 국제 사회의 도움이 있었다. 1960년 당시 한국은 석굴암에서 원인 모를 누수가 계속되자 유네스코한국위원회를 통해 국제적 전문가를 초빙했고, 유네스코의 기술 자문과 재정 지원을 통해 긴급 보수를 마칠 수 있었다. 프로젝트를 총괄한 헤럴드 J. 플렌더라이스(H.J. Plenderleith) 박사는 석굴암이 당시 완전히 원형을 잃어버릴 뻔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세계인의 도움으로 되살아난 석굴암이 한국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것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진다.
전 세계인의 핫플레이스
경주는 중장년층과 노년 세대에게 수학여행의 인기 명소였다. 인근 도시에서 소풍을 온 초등학생부터 전국 각지에서 온 중고등학생들까지 관광 버스로 항상 붐비는 곳이었다. 2박 3일 일정으로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이동해도 볼 것이 가득하니, 토함산의 구불구불한 길에 느끼는 멀미도 참을 만했을 것이다. 신라 귀족들이 술잔을 띄워 놀았다는 포석정에는 그를 따라해 보는 학생들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가득하곤 했다.
첨성대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 시대의 천문 관측대로, 선덕여왕 때 축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시대의 과학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유물로, 높이는 9.51m이다.
ⓒ 한국관광공사
지금 경주는 20~30대 젊은 세대의 핫플레이스로 거듭났다. 경주는 우스갯소리로 아무 땅이나 파도 유물이 나오는 곳이라, 일대의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법과 정책이 강력한 편이다. 한때 개발 바람이 불며 지나친 규제라는 반발도 있었지만, 지금은 지역 주민이 발 벗고 나서 마을과 문화유산을 지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덕분에 고층 건물의 방해 없이 신라 시대 고분을 볼 수 있고, 월지 전각에 올라 주변 경치를 둘러볼 수도 있다.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야경은 덤이다. 밤늦게까지 밝히는 조명 덕분에 안전하게 주요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으니 젊은 세대들의 인증샷이 끊이지 않는다. 기성 세대가 간직한 수학 여행의 추억이 시대의 변화와 함께 또 다른 모습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경주는 지금도 변하고 있다. 끊임없이 출토되는 유물과 함께 이미 발굴된 문화유산도 단장을 쉬지 않는다. 덩달아 거리 모습도 시대에 따라 빠르게 바뀌고 있다. 최고의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대릉원 옆 한옥 거리를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카페와 음식점, 게스트하우스 등이 들어서 있어 이채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과히 수천 년 전 시간과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다.
나아가 미래도 이야기된다. 2025년 10월 말 경주 개최로 예정된 제32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그것이다. 과거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속에서 미래를 보고 싶어 하는 전 세계 손님들로 경주는 더욱 바빠질 것 같다. 가급적이면 빨리 경주를 만나길, 그리고 미리미리 방문지 목록도 만들라고 당부하고 싶다. 경주에 담긴 천년을 만나는 데 시간은 항상 부족할 테니.
8세기에 완공된 석굴암은 경주 토함산 중턱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굴 사원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주위 벽면에 총 40구의 불상이 조각되었으나, 현재는 38구만이 남아 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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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KIM Jihon)유네스코한국위원회 정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