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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WINTER
토종 씨앗이 펼쳐내는 세계
토종 작물의 중요성을 알리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커지고 있다. 비영리단체 토종씨드림의 변현단 대표는 전라남도 곡성에 마련한 채종포에서 토종 씨앗을 증식해 전국에 보급하는 한편 토종 씨앗에 대한 농부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도 추진 중이다.
씨앗을 채취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작물을 볕에 말리고 있는 변현단 대표. 그녀는 점점 사라지는 토종 씨앗을 보존하기 위해 2008년 비영리 민간단체 ‘토종씨드림’을 설립했다. 이 단체는 토종 씨앗 수집부터 증식, 연구, 보급 등 다양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곡성 읍내에서 차로 20여 분을 달려야 도착하는 산속 농장. 이곳에는 변현단 대표가 현재 가꾸고 있는 토종 작물 200여 종이 자라고 있다. 그녀가 직접 지은 황토집 주변으로 씨앗 창고와 비닐하우스, 토종씨드림 사무실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주변에는 3,000평의 채종포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그녀는 2008년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은 토종 씨앗을 육종하고, 또 농가에 다시 나눠 싹을 틔우게 하는 일에 몰두해 왔다. 현재 그녀가 대표로 있는 토종씨드림은 약 4,000종의 토종 씨앗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 땅에서 시작된 자생종, 우리 땅에서 대를 이어 키운 재래종, 두 가지를 합쳐 토종이라 부른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작물은 대부분 작황을 위해 품종 개량을 거친 것들이다. 변 대표는 대가 끊겨가는 토종 씨앗들을 찾아내기 위해 전국을 샅샅이 훑는다. 먹을거리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혹독한 세상살이에서 살아남는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에는 충청북도 괴산에 갔어요. 요즘이야 구글 뷰로 보고 어디쯤 가면 좋을지 대충 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때는 아무 정보도 없이 무작정 찾아가 발품을 팔았죠.”
마을 초입부터 시작해 가장 깊숙한 안쪽까지 6개월간 이 잡듯이 뒤져 찾아낸 450여 종의 토종 씨앗이 시작이었다. 그 당시 재래 농법으로 농사를 짓던 할머니들이 대부분 80대의 고령이었음을 고려하면, 토종 씨앗의 마지막 세대를 찾아 그녀가 대를 이은 셈이다. 도시 빈민들의 자립을 위해 시작한 일이 이제는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먹을 권리’를 보호하는 일로 변모했다.
자립을 위한 길
변 대표가 농사를 시작한 이유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하며 살아온 그녀는 자칭 ‘도시 빈민’이 되어갈 무렵 농사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2004년경 경기도 시흥의 기초생활 수급 여성들과 연이 닿아 자활 공동체를 설립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목표는 여성 빈민들의 자립이었는데, 도시에서 생활하려면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하니 농사를 지어 내다 팔기로 했다.
“한번은 옥수수를 수확해서 그 씨앗을 심었는데, 아무것도 안 자라는 거예요. 그때 처음으로 문제점을 자각했어요.”
당시 심은 옥수수 씨앗은 종자 회사에서 파는 F1 종자로, 균일한 품질의 작물을 일시에 대량으로 수확할 수 있지만, 대신 재수확은 불가능하게끔 개량한 품종이었다. 한마디로 매년 종자를 새로 구매해야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종자였다.
“옥수수 종자 하나를 심으면 한 대에 최소 3개가 열려요. 옥수수 1개가 120알이고요. 옥수수 20알에 2,000원씩 판다고 치면 옥수수를 파는 것보다 종자를 파는 게 훨씬 더 이윤이 나죠. 농부들이 전부 씨앗을 사서 재배하고, 다음 해에 씨앗을 받을 수 없으니 악순환이에요.”
농사짓는 데 너무 큰 비용이 들어가자, 그녀는 비료를 제한하고 기계를 쓰지 않는 생태 농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화학 비료나 농약을 최소화하다 보니 잡초와 싸우는 것도 큰일이었죠. 어느 날, 밭에 한가득인 잡초를 보고 ‘저걸 언제 다 매냐, 그냥 확 먹어버릴까 보다’ 푸념했어요. 그런데 지나가던 동네 할머니가 한마디 툭 던지시더라고요. 그거 먹는 거라고. 식물도감을 찾아보니 잡초가 아니라 닭의장풀이었고, 어린잎과 줄기를 나물로 먹을 수 있는 걸 알았죠.”
토종 작물에 대한 변 대표의 관심은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상황에서 시작됐다. 식물도감을 찾아 뒤지던 그녀는 약용 식물에 대한 설명서인 본초 도감에 이어, 조선 시대의 의학 서적인 『동의보감』과 중국의 한의학 서적 『황제내경』까지 살펴보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상추 대신 토끼풀에 삼겹살을 싸 먹다가 생손앓이를 치유하고, 환삼덩굴로 샐러드를 해 먹다가 천연 수면제를 발견하게 됐다.
“결국 약식동원, 약과 음식은 근원이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토종 작물을 길러 전파한다는 건, 옛 선조들의 지혜와 문화까지 잇는다는 얘기에요.”
점차 사라지는 토종 작물
마트에서 파는 농산물들은 어찌 보면 반만 진실이다. 예를 들어, 시래기와 무는 원래 하나의 작물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품종이 분화되었다. 순전히 시래기를 얻기 위해 심는 무는 무청만 거두고 무는 버린다. 반대로 무를 얻기 위한 종자는 심어서 무만 취하고 무청은 버린다.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이 과정은 더 많은 수확량을 확보하기 위해 품종 개량을 한 결과다. 그 시작은 1900년대 초로 거슬러 오른다.
“구한말에 일본 농림수산성에서 조사해 기록한 우리 벼 품종이 450종이었어요. 1930년도가 되면 100종도 채 남지 않게 돼요. 일제강점기에 우리 땅에서 나는 작물을 일본 종자로 대체해 심도록 했기 때문이죠. 지금 우리가 먹는 단호박도, 고구마도 모두 우리 자생종이 아니에요. 일본에서 들여온 거죠.”
사진은 전통 방식으로 건조 중인 밭찰벼. 대나무 거치대에 작물을 거꾸로 걸어놓고 말리면, 줄기에 함유돼 있던 수분과 영양분이 건조되는 동안 벼 이삭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밥을 지었을 때 더 향긋하고 맛이 좋다.
일본뿐 아니라 각국 열강이 우리나라 토종 종자를 가져가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콩이다. 지금은 외국의 대규모 종자 회사들이 품종을 개량해 GMO 콩이 다수가 되었지만, 변 대표의 농장에 심긴 토종 콩은 어림잡아 30여 종은 족히 된다.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 여파로 땅이 피폐해졌죠. 전후에 늘어난 인구를 지탱하기 위해 높은 수확량을 목적으로 품종을 개발했어요. 1970년대에 통일벼가 개발된 배경이 바로 그거예요.”
이즈음부터 상업농과 재래농은 명확하게 분리되기 시작했다. 상업농은 종자 회사에서 씨앗을 사서 소품종 대량 생산으로 이윤을 꾀하고, 재래농은 전통적 방식으로 씨앗을 받아서 다품종 소량 생산을 지속한다. 식량난을 해결하고 상업농이 우선시되면서 토종 종자는 점차 사라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초기에 상업농을 하면서 토종 작물을 키우는 실험을 해봤어요. 요즘 배추는 속이 꽉 차서 김치 담글 때 속을 많이 넣기가 힘든데, 원래 배추는 그렇지 않아요. 좀 성근 대신에 안쪽까지 파랗고, 칼슘이 풍부하죠.”
고추도, 무도 요즘 우리가 흔히 먹는 것과 토종 작물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토지 대비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개량된 결과다.
살아남는 것과 아닌 것
변 대표가 밭을 둘러보며 소개해 주는 가운데 종종 냉이며 꾸지뽕 같은 것들을 따다가 건넸다. 그러면서 여러 그루의 나무를 심어도 어떤 건 날씨 때문에 번번이 죽는다며, 기후 변화로 인한 작태를 걱정했다.
“역사적으로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사태만 봐도 알잖아요. 같은 품종으로만 심다 보면 환경이 변할 때마다 농작물이 다 죽어요. 하지만 여러 가지를 심으면 그중 어떤 건 반드시 살아남아요. 토종 씨앗을 보존해 다양한 품종을 심는 것이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일이라는 얘기죠.”
토종 씨앗은 오랫동안 지역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뿌리내린 생물종으로 환경 변화에도 생존율이 높다. 변 대표가 지금까지 농가와 나눈 토종 씨앗은 자그마치 1만 종이 넘는다. 사진은 채종하기 전 건조 과정을 거치고 있는 두메부추.
오래전 토종씨드림 초창기에 씨앗 수집을 갔다가 있었던 일이다. 그녀는 강아지풀과 생김새는 비슷한데 뭔가 다른 풀을 발견했다. 동네 할머니에게 여쭤보니 ‘똘조’라고 했다. ‘똘’은 보통 야생 작물 이름 앞에 붙이는 말이니, 원예화되기 이전의 야생 조를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한국에 벼가 450종이라면, 동남아 지역에서는 조가 450여 종으로 그 수를 견줄 만큼 다양하다. 그녀는 “조가 볏과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물”이라면서 기후 변화에도 조는 살아남을 거라고 말한다.
변 대표는 언론사에 다니던 2001년, 인도의 생태운동가 반다나 시바를 인터뷰한 일을 터닝포인트로 간직하고 있다. 핵물리학자였지만, 토종 씨앗 운동가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우주 만물이 하나의 원소에서 시작한다면, 씨앗에서 모든 생명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는 깨달음이 생생하게 마음을 울렸다.
“토종 씨앗을 잇는 일에 모든 원리가 내재해 있어요. 제가 곡성으로 이사한 뒤 가장 먼저 공부한 게 물리학이에요. 그리고 지구과학, 생물학, 생리학, 병리학을 차례로 공부했죠. 농사를 지으려면 자연을 알아야 하니까요.”
젊은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세계를 누비며 문화 충격도 적잖이 받았다. 궁금한 것은 너무 많고, 궁금하면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변 대표는 구절초, 맨드라미, 연잎 등 토종 작물들의 꽃과 잎, 씨앗들을 덖거나 말려서 따로 보관한다. 차로 우려내 마시기 위한 용도로, 약과 음식은 근원이 같다는 그녀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책에서 공부한 거랑 사회에 나와서 보는 세상이랑 너무 다른 거예요.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것들에 관해 궁금해하는 건 당연하지 않아요?”
변 대표는 토종 씨앗을 받는 족족 일단 땅에 심고 본다. 그녀는 유전자 조작 콩이라도 땅에 계속해 심으면 본래의 성질이 나온다고 믿는다. 직접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7년에 걸쳐서 붉은 콩, 분홍 콩, 노란 콩, 검은콩, 흰콩까지 다 제 손으로 받았어요. 유전자라는 건 환경에 따라 그 성질이 나타나기도, 숨기도 해요. 결국은 다 하나의 씨앗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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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AUTUMN
분재로 세계를 감각하는 방법
바위틈이나 절벽처럼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나무는 살아남기 위해 교묘히 가지를 틀고 뿌리를 더욱 깊게 내리며, 크기를 더 키우지 않는다. 분재는 바로 여기서 영감을 얻은 작업이다. 유상경 씨는 한국만의 조화로운 미감으로 분재를 만들어 키우고 판매하며, 분재를 가꾸는 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식물 마니아 유상경 씨가 운영하는 ‘서간’은 식물을 매입해 그대로 판매하는 일반적인 꽃집과 달리 화분과 이끼, 돌 등을 활용해 식물을 작품처럼 디자인한 뒤 판매하는 공간이다. 오전에는 화훼 농장에 가서 식물을 구경하고 오후에는 식물을 돌보며 가꾸는 게 그의 주된 일상이다.
서울 서촌의 한적한 어느 골목,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디귿자 모양의 아담한 한옥이 펼쳐진다. 대부분 무릎 높이 아래로 자라는 작은 분재들이 점점이 늘어선 이곳, 서간은 유상경 씨가 운영하는 분재 가게이자 전시관이다. 마당의 자갈, 잡초, 한곳에 켜켜이 쌓아둔 기왓장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자연과 함께한 어린 시절
분재는 손바닥만 한 작은 화분에 나무나 풀, 이끼, 돌 등을 심고 배치하는 일 또는 그렇게 가꾼 화초나 나무를 말한다. 유상경 씨는 취미로 분재를 시작했는데 일이 커져 전시관으로 이어졌다. 그는 거의 매일 이곳에 상주하며 40여 개의 분재를 돌보는데, 하루 1~2시간이 꼬박 걸린다.
“어릴 때 전라남도 광양에 살았어요. 조경이 잘 된 동네였죠. 그래서 산이며 나무며 바다며 자연과 친숙하게 자랄 수 있었어요.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이사해서도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근처에 산을 타러 다니곤 했어요.”
말하자면 유상경 씨는 ‘덕후’다. 산에 오르거나 길을 걷다가도 눈에 들어오는 풀과 나무, 이끼 같은 사소한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마음에 드는 자연석을 수집하기도 했다. 독립해 혼자 살게 되면서는 본격적으로 집에 식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심심할 때면 혼자 식물원이나 농장에 자주 다녔어요. 오래된 화분을 사 모으기도 했고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게 되면서는 주말이면 종일 식물을 만졌어요. 나중에는 집에만 식물이 60~70종이 됐어요.”
집에 살아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몸가짐이 사뭇 달라지는 일이다. 점점 더 부지런해졌다. 가지도 직접 치고, 해가 잘 드는 곳에 두었다가 다시 서늘한 곳으로 옮겼다가, 분갈이를 여러 번 해주며 식물이 하루하루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보니 본격적으로 식물을 가꾸는 법을 배울 필요를 느꼈다.
“이 식물에 흙을 이걸 쓰는 게 맞는지, 가지를 이렇게 쳐도 되는 건지, 분갈이를 이렇게 자주 해줘도 되는 건지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알게 된 게 분재라는 장르예요.”
서울 서촌의 고즈넉한 골목길 끝에 자리한 서간은 느리게 움직이는 이 지역 특유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룬다. 유상경 씨는 이곳에서 분재 원데이 클래스와 정규반 수업을 진행한다. 때로는 브랜드와 협업해 팝업 스토어를 열기도 하고, 작가들의 작품 전시도 개최한다.
오해와 진실
분재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치스럽고 인위적인 취미로 오해받곤 한다.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우선 분재를 가꾸고 감상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파리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가지가 어떻게 뻗어져 나가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시간이 많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로 인식될 수도 있다.
“한번은 대학생 손님이 오셔서 분재 가격을 물어보더니,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다시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분이 정말 시간과 돈이 넘쳐서 분재를 사려는 게 아니죠. 저는 오히려 분재를 통해 여유로운 시간을 사는 거라 생각해요.”
또한 분재 하면 많은 이들이 철사를 칭칭 감아 수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혹은 식물이 비좁은 화분에 갇혀 원래 크기대로 자라지 못하고 간신히 생명을 유지한다고 생각한다. 유상경 씨는 서간에서 원데이 클래스도 운영하는데, 종종 분재에 대한 이러한 편견과 오해를 접한다. 그는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
“화분에서 식물을 키운다는 것부터가 인공이에요. 그렇다면 화분에 옮겨 심은 식물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요? 제한적인 환경에서 자라는 식물에게는 적절한 관리가 필요해요. 가지치기를 적당히 해주고, 필요하다면 철사로 가지를 교정해 서로 경쟁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거죠. 나무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나무에 해를 입히지 않아요. 나무에 하는 모든 일이 애정에서 비롯되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나무가 못나 보이는 계절도 있다. 여름에는 덥고 습해 병충해가 잦기 때문에 이파리가 시들해지는 경우가 많다. 분재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봄과 가을이다. 서간에 방문한 6월 말에는 철쭉이 꽃을 피웠다가 떨구고 딱 한 송이가 남아 있던 참이었다.
“좋아하는 수종이 따로 있지는 않아요. 보기에 예쁘면 다 좋아하는데, 못생겼으면 또 그런대로 좋아해요.”
식물의 줄기와 가지가 뻗어나가는 모양새에 따라 분재는 여러 종류로 나뉜다. 전나무나 삼나무처럼 줄기가 위로 솟아나는 것을 직간, 해송처럼 비스듬히 기울어서 자라는 나무를 사간, 줄기가 아예 바닥으로 늘어지는 것을 현애라고 한다. 이곳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형태는 나무줄기가 길고 가늘게 뻗어 끝부분에 이파리가 달려 있는 문인목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생긴 모양을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문인목이더라고요. 옛날 조선 시대 선비들이 즐기던 나무라는 뜻이죠. 뜻을 알고 나니 더 좋아요. 깊은 내공을 갖고 있지만 으스대지 않는 느낌이랄까요? 그게 제가 추구하는 이상향에 가까워요.”
서간에서는 대부분 한국 자생식물을 이용해 분재를 만든다. 특히 그는 꼭지윤노리나 애기범부채처럼 정감 있는 이름을 가진 나무에 더 애착을 느낀다. 그는 이왕이면 우리 자생식물을 위주로 분재를 하고자 다짐했고, 옛 선비들이 그린 수묵담채화 등을 보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한국의 미감을 꾸준히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투박한 미감
유상경 씨는 모든 식물이 제각각의 아름다운 실루엣과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분재라는 방식을 통해 각 식물의 특징과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한다. 사진은 유상경 씨가 핀셋으로 잎을 다듬고 있는 모습.
유상경 씨가 좋아하는 한국의 전통문화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수묵화이다. 여백이 많으며 모든 것이 조화롭게 그려진, 화려하진 않지만 슴슴한 맛이 있는 그림이다.
“나무도 별 볼 일 없이 그려져 있고, 산도 크긴 하지만 위압적이지 않아요. 그 안에서 인간은 아주 작게 존재하죠. 인간이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걸 깨닫는 순간 위안을 찾는 것 같아요. 서간에 와서도 사람들이 비슷한 순간을 경험했으면 좋겠어요.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식물을 보다 보면 나의 존재마저 없어지는 느낌. 아주 작은 점이 된 기분을 느끼다 갔으면 해요.”
한국 분재의 특징도 이와 비슷하다. 중국에서 유래된 분재가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려(918~1392) 시대 중기의 문헌들에 분재에 대한 기록이 있어, 대략 13세기쯤 이미 분재를 즐기는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분재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좀 더 자연스러운 미감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유상경 씨가 좋아하는 백자나 막사발에서 느낄 수 있는 투박한 미감에 가깝다.
“요즘 생각하는 한국의 멋은 한마디로 조화라고 생각해요. 하나하나가 존재감 없이 어우러지는 게 아니라,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있으면서 조화로울 때 더 아름답잖아요. 예를 들어 어떤 나무는 꽃이 지고 나면 볼품없어지죠. 그렇다고 해서 나무를 안 보이는 곳에 들여놓지 않아요. 그 시기마저 수용하는 게 한국의 멋이라고 생각해요. 내년에 또 가장 예뻐질 때를 기다리는 거죠.”
서간은 매주 목요일부터 일요일, 1시부터 6시까지 열려 있다. 혹한기나 혹서기에는 예약제로 운영할 생각을 하고 있다. 모두 이곳에 있는 나무, 그리고 나무를 감상하는 사람들을 배려해서다.
“요즘은 나무의 뿌리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늘 보는 건 줄기부터 이파리까지 윗부분이지만, 분갈이할 때 보면 뿌리가 무성해요. 살아남기 위해서 무언가를 부여잡고 있는 흔적이죠. 경이로운 마음이 들어요.”
서간 내부에는 곳곳에 분재가 놓여 있다. 봄과 여름에는 화사한 꽃을 만끽하고, 가을에는 붉게 익은 열매를, 그리고 겨울에는 나목을 감상하는 등 분재와 함께하는 일상은 언제나 즐거움이 끊이지 않는다.
유상경 씨가 분재에 사용하는 식물들은 대부분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식물들이다. 우리 고유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분재와 어울릴 만한 화분 수집은 물론 고가구와 인테리어 소품을 모으는 것도 그의 취미 생활이다. 사진은 스튜디오 한쪽에 놓여 있는 빈티지 지류함으로 그가 서울 일대를 샅샅이 뒤진 끝에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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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SUMMER
숨 고르기의 미덕
김차이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으로 제74회 에미상 스턴트 퍼포먼스 상을 받은 스턴트 배우이다. 그녀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누군가 대신할 수 없는 연기로 작품에 기여하며 성취감을 느낀다. 나이가 들어도 현장을 누비는 베테랑 배우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스턴트 배우 김차이는 경기도 하남에 위치한 베스트 스턴트팀(Best Stunt Team) 연습실에 출퇴근할 때마다 오토바이를 애용한다. 그녀를 비롯해 베스트 스턴트팀 배우들은 < 오징어 게임 >으로 비영어권 최초 에미상 스턴트 퍼포먼스상을 받았다.
당신은 김차이를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는 영화와 드라마 속 액션 장면에 숨을 불어넣는 스턴트 배우이다. 글로벌 히트작
(2021)에서 주인공들 중 하나인 새벽을 연기한 배우 정호연의 대역이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과 같은 해 11월 개봉한 영화
에서는 여우 역으로 개성 있는 액션을 선보이며 얼굴을 알렸다. 이 영화는 제20회 뉴욕 아시안영화제에서 다니엘 A. 크래프트 우수 액션시네마 상을 받았다. 또한
(2023),
(2023) 등 국내외에서 주목받은 한국 영화의 무술팀으로 활약했다.
최근에는 한소희, 전종서 주연의 영화
와 전도연, 김고은 주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촬영으로 바빴다.
는 김차이가 처음으로 참여한 영화
(2015)에서 함께한 두 배우들과 재회한 작품이라 더욱 뜻깊었다. 지난 10년 동안 성장을 거듭한 결과, 이제 그녀는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들의 액션 연기를 대신하는 스턴트 배우로 우뚝 섰다.
나만의 무기
이 여정의 시작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소극적인 어린아이였던 김차이에게 숨겨진 끼가 있음을 직감한 어머니는 딸을 연기 학원에 보냈다. 덕분에 그녀는 초등학생 때부터 과자 광고를 찍고 아역 배우가 되었지만, 연이은 오디션에 지쳐 사춘기 시절 잠시 방황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고등학교와 대학 연기과에 진학하며 배우의 꿈을 놓지 않았다. 기회를 잡으려면 나만의 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깨달음도 일찍 얻었다.
아크로바틱에 자신 있었고, 몸 쓰는 일에 늘 뛰어났던 그녀는 액션에 눈을 돌렸다. 배우는 넘쳤지만, 액션 전문 배우는 흔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작품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그녀는 액션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디서 액션 연기를 배울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남들보다 운동을 잘한다고 해서 감독의 부름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묵묵히 의지를 다지고 있었던 김차이는 대학 교양 과목으로 택한 호신술 강의를 듣던 중 인연을 만났다. 호신술을 가르치던 교수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달리 돋보이는 그녀를 눈여겨봤고, “격투기 선수로 키워 보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그는 액션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녀에게 당시 스턴트 배우로 활약하던 제자를 소개했다. 이들의 만남은 또 다른 스승을 모시는 기회로 연결되었고, 드디어 본격적으로 스턴트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대학에 다닌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아역 배우로 데뷔한 김차이는 어린 시절 태권도, 검도, 스피드 스케이팅 등을 즐겨 했고 자신의 강점과 특기를 살려 스턴트 전문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일에 대한 자긍심
김차이는 스턴트 배우로 일하면서 복합적인 감정의 터널을 통과했다고 고백했다. 오래전 계획한 대로 액션이라는 강점을 키울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정극 연기에 대한 갈증도 깊어졌다.
“대역이 아닌 ‘진짜 배우’로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언제나 마음 한쪽에 있었어요. 꿈을 꿈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아 조급했던 적도 있었고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널리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서 작품에 기여한다는 만족감이 크다고 강조했다. 스턴트 배우로서 자긍심을 다지게 한 동력은 트로피였다. 김차이는
을 함께한 스턴트 팀원들과 같이 제74회 에미상 스턴트 퍼포먼스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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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같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받은 상이라 더욱 놀라웠고 기뻤다. 쉽게 얻어진 상은 아니었다. 한여름엔 뙤약볕 아래에서 400여 명의 군중들과 호흡을 맞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시퀀스를 완성했다. 한겨울에는 살이 에이는 추위에도 맨살을 드러내야 했다.
그녀는 이 드라마에서 새벽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절박한 심경을 액션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호연 배우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펴봤고, 신체적 특징과 습관을 면밀히 관찰해 액션 연기에 반영했다.
“내가 살면서 이런 상을 받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김차이는 수상 후 3년이 흘렀음에도 그때의 벅찬 감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스턴트 배우들을 대표해서 받는 상으로 여겼다”는 말을 덧붙였다.
액션 베테랑을 향해
김차이는 액션, 스릴러 장르에 주로 출연하지만 사실 로맨스 영화를 즐겨왔다고 한다.
(2003)처럼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보며 혼자 펑펑 운 적도 있었다. 촬영 현장에서는 모든 에너지를 뿜어내지만, MBTI가 ‘I’로 시작하는 내향형 인간인지라 집에 가만히 누워 있는 걸 낙으로 삼는다. 그런 김차이의 곁에는 특별한 친구가 있다. 그녀가 중국에서 촬영을 하던 시기에 만나게 된 중국인 친구다. 그녀는 연출을 전공하면서 한국 영상 산업에 관심이 생겨 서울에서 어학연수 중이다. 2016년부터 우정을 쌓아온 두 사람은 급기야 룸메이트가 되기에 이르렀다.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친구가 요리를 해줘요. 중국인답게 따뜻한 차도 자주 내주고요. 처음에는 영어로 소통했는데, 점차 서로의 모국어에 익숙해지고 있죠.”
친구가 한국어를 배우는 동안 그녀도 중국어를 조금씩 익힌 덕분에 이제는 제법 의사소통이 수월해졌다고 한다. 친구의 안내로 상하이 여행을 다녀온 김차이는 그녀에게 한국을 알려주고 싶어 얼마 전 강릉 여행을 함께하기도 했다.
“여행을 하면서 그동안 나 자신을 일에만 너무 가두고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찾아오는 여유로운 시간을 중히 여기며, 앞으로 더 많은 곳에 가볼 계획이에요. 소소한 것에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도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 같아요.”
동료들과 풋살 팀을 꾸려 휴식하듯 운동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숨 고르기의 미덕을 깨우치자 목표를 대하는 자세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20대에는 “스턴트 연기의 특성상 30대 후반이면 은퇴해야 하는 게 아닐지 걱정이 많았다”던 그녀는 이제 환갑이 되어도 촬영장을 누비는 액션 베테랑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 꿈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배우로서 얼굴을 드러낸 자신을 상상하기도 한다. 다시 연기 공부를 열심히 해서 40대가 되기 전에 이름 있는 배역을 맡아보고 싶기도 하다. 그 바람을 전하는 김차이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세상은 넓어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외에서도 일해 보고 싶어요. 언젠가 할리우드에서 활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의 앞길은 창창하니까요!”
김차이 씨가 동료와 함께 훈련 중인 모습. 촬영 현장은 항상 안전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평소 동료들과 합을 맞추는 연습에도 최선을 다한다.
Lifestyle
2025 SPRING
문화의 차이를 즐기다
고베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나리카와 아야(Aya Narikawa) 씨는 오랫동안 아사히신문 문화 담당 기자로 활동했다. 그런 그녀를 한국으로 이끈 것은 바로 한국 영화였다. 그녀는 최근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박사 과정을 마치고, 한국과 일본 양국의 문화를 전파하는 일에 한층 더 힘쓰고 있다.
아사히신문 기자에서 영화 칼럼니스트로 변신한 나리카와 아야 씨가 홍대 앞에 위치한 독립영화관 인디스페이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 달에 4편가량 한국 영화를 감상하는 그녀는 독립영화에도 관심이 많아 이곳을 자주 찾는다.
한 편의 영화를 두 번 이상 관람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나리카와 아야는 2021년 개봉 20주년을 맞아 재개봉한 한국 영화 < 고양이를 부탁해(Take Care of My Cat) >를 다시 보면서 생각했다.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딱 20대 초반 시절의 나와 닮았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이다. 오사카에서 태어나 고치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녀는 일본을 떠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가족과 멀어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나로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나리카와 씨는 가까운 나라인 한국에서 그 바람을 이뤘다. 2002년에는 어학 연수생, 2005년에는 교환 학생으로 서울을 찾았던 그녀는 9년간 기자 생활을 했던 아사히신문을 떠나 2017년 한국에 정착했다. 오랜 시간 그녀를 사로잡은 한국 영화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가교 역할
나리카와 씨는 영화관을 운영했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함께 영화 감상을 즐겼고, 어학 연수를 계기로 한국 영화에 깊이 빠져 버렸다. 문화 담당 기자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일본에 방문한 한국 영화인들을 인터뷰하거나 그들의 통역을 도맡기도 했다. 한국어에 능통한 일본인이자 한국 영화 팬으로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갈증이 있었다.
“한국 드라마와 K-Pop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그에 비해 한국 영화에 대한 일본 대중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어요. 일본에서 < 설국열차(Snowpiercer) >가 개봉했을 때 제가 봉준호 감독을 인터뷰했는데, 봉준호 감독이니 기사를 크게 실어줘야 한다고 부탁하자 그게 누구냐고 묻던 아사히신문 데스크의 반응에 실망했던 기억이 나요. 한국 영화를 마음껏 깊이 취재할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직접 탐구를 시작해 보자는 마음으로 한국 유학을 결심했어요.”
주변에서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학생으로 돌아가겠다는 그녀의 선택에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나리카와 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영화로 배운 한국
나리카와 씨는 자신의 사연에 흥미를 느낀 한국 기자의 제안을 받아 수년째 중앙일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일본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 문화 이야기를 쓴다. 경기도 일산에 거주 중인 그녀는 부산, 전주, 제천 등 한국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다가 겪은 일에 대해서도 적었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아끼는 지역은 제주라고 한다. 제주도는 자연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상흔도 간직하고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최근 나리카와 아야 씨가 한국과 일본에서 펴낸 책들. 그녀는 한국에서 일본 책과 영화를 소개하는 북카페를 운영하는 것이 꿈이다.
그녀는 제주 해변에서 돌고래를 목격한 것도 행복했지만, 일본에서 온 가족들과 함께 4·3평화기념관(Jeju 4·3 Peace Memorial Hall)에 다녀온 일도 뜻깊었다고 한다. 이창동 감독의 < 박하사탕(Peppermint Candy) >(2000)으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처음 접했고, 오멸 감독의 < 지슬(Jiseul) >(2013), 류승완 감독의 < 군함도(The Battleship Island) >(2017), 장준환 감독의 < 1987 >(1987: When the Day Comes)(2017) 같은 영화를 보며 한국 현대사의 맥락을 익힌 그녀는 무작정 역사를 공부하는 것보다 재밌는 영화를 통해 다른 나라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이 더 효과적인 공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덕분에 그녀는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에서 재일코리안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연구소 주최로 ‘재일코리안 영화제’를 개최하며 뿌듯했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2025년 2월, 나리카와 씨는 마침내 박사 과정까지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했다. 박사 논문 주제는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영화 교류 양상 연구(South Korea-Japan Film Exchanges Since the Normalization of Diplomatic Relations)’였다. 한국과 일본의 다양한 매체에 한국 영화와 관련한 글을 기고하고, 방송에 출연해 양국의 문화를 알려온 그녀다운 선택이었다. 이 논문에는 재일코리안 촬영 감독 이병우(Lee Byung-woo), 일본의 한국 영화 배급사 시네콰논(Cinequanon) 대표 이봉우(Lee Bong-woo) 등의 사례도 언급된다. 모두 양국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던 시절부터 활동해 온 인물들이다. 나리카와 씨는 “지금보다 상황이 어려웠을 때 양국 교류에 나섰던 사람들이 택한 방법을 알아가면서 현재의 나도 해낼 수 있으리라는 용기를 얻었다”라고 곱씹었다.
논문 집필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아사히신문 선배 기자와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이병우 촬영 감독의 손녀를 만난 일이다. 재일코리안 영화인들에 관한 기록이 부족해 연구가 쉽지 않던 차에 이병우 씨의 손녀에게 귀중한 자료들을 전달받은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
“기자 생활을 하며 쌓았던 내공 덕분일까요? 제가 만나야 할 사람, 필요로 하는 자료가 있을 때 우연히 제 앞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일들이 한국 생활에도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북카페의 꿈
논문이 무사히 통과된 다음, 나리카와 씨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도쿄에 다녀왔다. 2020년 한국에서 출간된 후 2024년 10월 일본에서도 출간된 저서 『어디에 있든 나는 나답게』의 북토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나리카와 씨가 한국에서 써온 칼럼들을 묶어서 펴낸 책이다. 행사가 열린 공간은 ‘독서가의 거리’로 알려진 진보초의 한국 책 전문 서점 ‘책거리(Chekccori)’였다. 이날 서점 스태프들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양국의 문화를 전파 중인 나리카와 씨에게 근사한 상장을 만들어 선물했다. 상장에는 그녀에게 항상“차이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돼라”고 당부했던 어머니의 말도 인용되어 있었다.
나리카와 씨는 북토크 자리에서 많은 독자들에게 응원을 받았다. 그녀는 독자들의 질문을 듣고 5년 후 계획을 고민해 봤다고 한다.
“‘책거리’의 반대 버전, 그러니까 한국에서 일본 책과 영화를 소개하는 북카페를 운영해 보고 싶어요. 그곳에서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한 독립영화 상영회도 열고 싶고요. 이렇게 말하다 보면 도와주는 사람이 또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리카와 아야 씨가 운영하는 온라인 사이트. 영화 칼럼을 비롯해 신문에 연재하는 기사들과 자신의 일상 이야기를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있다.
자신만의 북카페를 상상하며 미소 짓는 나리카와 씨는 이제 자신을 걱정하던 일본 친구들에게서도 “정말 즐거워 보인다”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녀는 “일부러 즐거워 보이려고 애쓴 적이 없는데도 그런 말을 자주 들어서 신기하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말과 글로 나누는 동안 자연스럽게 웃는 법을 배운 것은 아닐까?
“타지에서의 삶이 어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에요. 그렇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위해 한 발짝 나가본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어요. 한번 해보고 나면 기대한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수 있어요!”
나리카와 씨는 작은 도전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고른 책들이 진열된 공간에서 신선한 일본 영화를 감상할 날이 매우 기다려진다.
Lifestyle
2024 WINTER
가족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
낯선 도시에서 실패 없는 식사를 하려면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라는 말도 있다. 어디로든 이동이 가능한 기사들은 곳곳에 위치한 가성비 좋은 음식점들을 훤히 꿰고 있을뿐더러 시간과 경험을 바탕으로 검증된 리스트이니 신뢰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감나무집 기사식당’은 맛집에 밝은 기사들의 발길이 밤낮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감나무집 기사식당 주인 장윤수 씨가 손님상에 내 놓을 음식을 서빙하고 있다.
한국에서 기사식당은 말 그대로 기사, 그중에서도 택시 기사들을 위한 식당이다. 기사들을 주 고객으로 맞이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우선 차를 댈 수 있는 넉넉한 주차 공간이 필요하다. 메뉴는 다양할수록 좋지만, 시간이 걸리면 곤란하다. 직업의 특성상, 새벽이나 밤중에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저렴한 가격, 푸짐한 양, 변함없는 맛이 더해져야 한다.
365일, 24시간 열려있는 식당
감나무집 기사식장의 주인인 장윤수(張倫秀) 씨의 하루의 시작은 매일 다르다.
“새벽부터 나올 때도 있고, 시장을 가는 날이면 좀 늦을 때도 있고. 시간을 정해두고 일을 하지는 않아요. 집에서 잠시 쉴 때도 모니터로 가게를 수시로 들여다봐요. 모니터링하다가 손님이 많다 싶으면 만사 제쳐두고 냅다 뛰어가죠.”
한국의 기사 식당은 주차장 구비, 푸짐한 한 상, 빠른 회전 등이 특징이다.
주차장, 식당, 살림집이 나란히 붙어 있는 구조다. 일과 휴식을 분리할 수 없는 이 구조는 장 씨에게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집이 가까워야 통제가 돼요. 바쁘다고 호출하면 금방 갈 수 있으니까. 24시간 전천후지.”
한 번에 70여 명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은 점심식간이면 순식간에 만석이 된다. 연중무휴, 24시간 영업 중인 감나무집이 문을 연 건 25년 전이다.
“다른 데서 한정식집도 하고, 갈빗집도 했는데 잘 안됐어요. 다 털어먹고 집으로 들어왔지. 여긴 우리 집이니까. 처음에는 함바집(건설 현장에 임시로 지어 놓은 식당)을 했어요. 일꾼들이 일을 일찍 시작하니까 우리도 새벽 장사를 했는데 그러다 보니 근처를 오가던 택시 기사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 사람들이 더 늦게까지 장사하면 좋겠다고 해서 24시간 문을 열기 시작한 거죠.”
언제 찾아가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데다 값은 저렴하고 음식은 맛있다. 국과 반찬도 매일 바뀐다. 당연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근처에 기사식당이 많았는데 순댓국, 설렁탕 같은 단일 메뉴만 있었어요. 우리는 백반집이었지. 당시 기사들은 대부분 형편이 좋지 않고 맞벌이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일하다 보면 집에서 밥을 못 챙겨 먹으니까, 집밥이 그리웠겠죠. 사 먹는 음식은 혼자 먹기도 어렵고, 비싸기도 했으니까요. 여기 오면 미역국, 된장국, 콩나물국처럼 집에서 늘 먹는 국과 반찬이 있으니까 좋아하더라고요.”
집에서 먹던 음식 그대로
장윤수 씨의 고향은 충청도이다.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대가족 속에서 살았다. 농사를 크게 짓느라 집은 언제나 일꾼들과 가족들로 북적거렸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할머니와 어머니는 늘 주방에서 밥을 짓고, 김치를 담그고, 나물을 무쳤다.
“맨날 다듬고 무치고, 그거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어요. 친구들이 놀러 오면 배추 뽑고 오이 따서 잘라보고 무쳐보고 짜다, 싱겁다, 이거 넣어보자, 저거 넣어보자면서 놀았죠. 국물 내고 밀가루 반죽해서 칼국수도 만들고…. 어른들이 먹어보고 맛있다고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어요. 엄마가 가서 공부하라고 혼내면 도망 다니고…. 재미있는 게 따로 있는데 공부가 되겠어요? 나는 요리사하고 음식 장사 하련다, 그거 하면서 재미있게 살련다, 생각했죠.”
집에서 해 먹던 음식 그대로 만들어 손님에게 내놓는다. 강원도에서 농사지은 콩으로 된장도 직접 담근다.
감나무집의 인기 메뉴인 돼지불백과 오징어볶음
“기사들에게 빨리 내놓을 수 있는 음식, 그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 저렴하지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뭘까 하고 연구 많이 했어요. 그래서 나온 게 돼지불백이죠.”
‘돼지불백’ 즉 ‘돼지불고기백반’은 이곳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이다. 메인 메뉴인 돼지불고기를 푸짐하게 쌈 싸 먹을 수 있게 상추, 배추같은 야채도 함께 낸다. 여기에 밑반찬 서너 가지와 계란프라이, 잔치 국수가 쟁반에 함께 나온다. 밥이 가득 담긴 밥솥이 식당 한쪽에 있어 추가로 주문하지 않아도 밥을 양껏 먹을 수 있다. 메인 메뉴인 돼지불고기를 제외한 나머지 반찬과 국 등도 리필할 수 있다. 식사 후에는 자판기의 무료 커피와 건빵으로 입가심도 할 수 있다. 연말에는 택시 안에 놓아둘 수 있는 작은 달력을 만들어 나눠준다.
“전에는 눈대중, 손대중으로 내가 간을 보면서 만들었는데, 우리 아들이 군대 가기 전에 내 레시피를 다 문서로 만들었어. 옛날 맛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거지.”
레시피와 일일 판매량은 ‘일급비밀’이다.
집 같은 식당, 가족 같은 손님
이전에는 감나무집을 찾는 손님은 단연 기사들이 많았는데, 요즘엔 일반인들의 비중이 훨씬 많다. 다양한 반찬을 맛볼 수 있는 백반집이 점점 사라져 있는 요즘, 집에서 해 먹는 것보다 가성비 있게 즐길 수 있어 젊은이들이나 아이가 있는 가족들도 많이 찾는다. 또 한국의 집밥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외국인 여행객들도 많이 찾는다.
장윤수 씨의 하루는 손님이 많은 때와 적은 때로 나뉜다. 매일 새벽 시장을 봐서 가게로 온다. 바쁜 아침 시간에는 식사를 거르고 손님이 뜸해지는 오후 두 시경에 점심을 먹는다. 세 시부터 일곱 시까지는 가능하면 휴식을 취한다. 휴대전화를 잠깐 들여다보고 모자란 잠을 보충한다.
주말 저녁 시간이 제일 바쁘다.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손님의 행렬이 새벽까지 이어진다. 주방과 홀을 오가며 손님들의 상을 살피면서 부족한 것은 채우고 필요한 것은 가져다준다. 어떤 걸 잘 먹는지, 무엇을 남기는지 체크하여 더하고 덜할 반찬을 정한다. 밤 열 시쯤 늦은 저녁 식사를 한다.
최근에는 택시기사뿐만 아니라 집밥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 한국의 집밥을 체험해보고자 하는 외국인 등 다양한 손님이 24시간 방문하고 있다.
평일에는 새벽 한 시쯤 식당을 나서지만 주말에는 새벽 서너 시가 되어서야 손을 털 수 있다. 남편은 함께 장을 보고 바쁜 시간이면 주차장도 관리한다. 엄마를 닮아 요리를 좋아하는 아들은 든든한 동지가 되어 함께 일한다. 일일 2교대 또는 3교대로 일하는 직원은 스무 명이 넘는데 십 년 넘게 일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모두가 가족이고 ‘한집에서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하는’ 식구이다. 집밥을 먹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까지.
돼지불백, 순두부찌개, 생선구이 세 가지로 시작한 메뉴는 이제 열 가지로 늘었다. 다양한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기사들을 위해 줄기차게 연구한 결과물이다.
“후회는 안 해요. 지금도 요리하는 거 좋아하고,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그렇게 행복해요. 여기에 밥 먹으러 오는 이들도 나한텐 식구나 다름없어요. 가족 밥 해 먹이는 일이 이렇게 좋아. 난 피곤한 줄도 모른다니까.”
“돼지불백 하나요!”
성미 급한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앉기도 전에 외친다. 장윤수 씨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번진다.
Lifestyle
2024 WINTER
석탄산업이 진 자리에 눈꽃여행을 피운 정선
정선은 사계절 모두 매력이 넘치는 고장이지만, 그중에서도 겨울 여행에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검디검은 저탄장(貯炭場)과 대비되는 순백색의 눈, 그리고 구름까지 벗 삼아 걷는 트레킹, 거기에 전국 최대 규모의 정선 오일장 등 토속적이면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산촌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강원도 정선군(旌善郡)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57년 3월 9일 열린 함백역(咸白驛) 개통식 때였다. 한국 정부를 대표해 이종림(李鍾林) 교통부장관과 김일환(金一煥) 상공부장관이 참석했다. 그런데 손님이 더 있었다. 월터 다울링(Walter C. Dowling) 주한미국대사와 왕둥위안(王東原) 주한자유중국대사가 그들이었다. 궁벽한 오지에 위치한 역 개통식에 주한 외국 대사들까지 참석했다. 그 이유는 함백역의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석탄산업의 중심지
함백역은 물론 당시 이 지역을 관통했던 함백선(咸白線) 철도는 주민 이동을 돕는 교통수단이기도 했으나, 주된 용도는 석탄 운반용이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석탄은 전기를 만들고, 공장을 돌리고, 학교를 운영하고,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난방에 필수 불가결인 에너지원이었다. 정선은 지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No. 1’ 에너지의 공급처였다. 정선이 있었기에 지금의 발전이 가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정선은 민영 탄광의 중심지였다. 한국 최대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東原炭座) 사북(舍北)광업소를 비롯해 삼척탄좌(三陟炭座) 정암(淨岩)광업소, 자미원(紫味院)탄광, 묵산(墨山)탄광 등 한창 때는 36개에 달하는 탄광들이 오랜 기간 활황을 이어왔다. 전국적인 엄청난 석탄 수요는 전에 없던 호황을 가져오기도 했다. 전국 택시 최고의 황금 노선이 정선 사북에 있다는 말이 돌았고, 한때 한 전자제품 대리점 기준 가장 많은 판매량을 자랑했던 곳도 이곳이었다. 심지어 “지나다니는 개도 1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던 곳이 정선이다.
구공탄 시장의 이름은 구멍이 9개인 연탄에서 유래했다. 시장 곳곳에서 구공탄과 광부를 테마로 한 다양한 예술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1980년대 중후반 들어서였다. 유가가 안정되는 데 반해 석탄 채굴 비용은 나날이 증가하고, 석탄 수요는 감소가 예상되는 시점이었다. 결국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이 도입되었다. 채산성이 맞지 않는 탄광은 폐광을 유도하는 조치였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347곳에 이르렀던 탄광 대부분이 1990년대를 지나며 문을 닫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태백(太白) 장성(長省)광업소가 2024년 9월 폐광됐고, 2025년에는 삼척(三陟) 도계(道溪)광업소가 문을 닫는다. 그 이후 한국 탄광은 민간이 운영하는 삼척 경동(慶東)탄광 단 한 곳만 남을 예정이다.
예술공간으로 되살아난 석탄 광산
그렇다고 광산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한국인 특유의 기질은 산업 대전환으로 버려진 공간마저도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시켜 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삼탄아트마인(SAMTAN ART MINE)이 대표적인 사례다.
삼탄(三炭)은 삼척탄좌의 줄임말이고, 아트는 말 그대로 예술이다. 1964년부터 2001년까지 무려 38년 가까이 운영되다 문 닫은 삼척탄좌 정암광업소를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낸 것이다. 독특한 것은 옛 산업 흔적은 최대한 보존하면서 그 위에 예술을 덧입혔다는 점이다. 아트 마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이다.
삼탄아트마인은 1964년부터 2001년까지 운영됐던 삼척탄좌 시설을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국내 첫 예술광산 시설이다.
제일 먼저 돌아볼 곳은 삼척탄좌 시절 종합사무동으로 썼던 삼탄아트센터본관이다. 일단 공동 샤워실부터가 압도적이다. 1천 명이 넘는 광부들이 한꺼번에 이용할 수 있는 대형 샤워실이다. 천정에는 네 방향으로 한 번에 물을 뿜어낼 수 있는 샤워기가 붙어 있다. 그 아래로 다양한 현대미술과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최근까지 다른 광산에서 석탄을 캐내던 광부의 모습을 찍은 사진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다.
검게 변한 작업화를 씻던 세화장과 작업복을 빨던 세탁실, 전체적인 기계설비를 관장 운영했던 종합운전실 등도 갤러리로 변신했다. 옛것과 새것, 산업시설과 예술 작품이 한데 어우러지니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한쪽에는 삼척탄좌의 영화로웠던 과거를 실제 채굴 도구와 당시의 사진, 자료 등을 통해 보여주는 박물관도 있다.
본관 뒤쪽에 있는 건물에는 레일바이뮤지엄(Rail by Museum)이 있다. 삼탄아트마인 입구에서 보이는 53m 높이의 육중한 철탑이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이다. 그 안에는 2기의 수직 권양기(捲揚機)가 설치되어 있다. 권양기는 캐낸 석탄을 지상으로 끌어올리거나 광부들이 수직 갱도를 오르내릴 때 사용하던 일종의 산업용 엘리베이터로, 한 번에 광부 400명씩, 석탄은 4분마다 20톤을 운송할 수 있는 시설이다.
권양기 바로 아래에 있는 지름 6m의 수직갱도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깊이 가늠이 안 될 정도다. 큐레이터에 따르면 수직갱도의 깊이는 지표면에서 땅속으로 무려 653m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서울의 롯데월드타워 높이가 556m이다. 중국 상하이타워가 632m,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아브라즈 알 바이트가 601m, 프랑스 파리 에펠탑은 324m 라고 하니, 수직 갱도의 깊이가 그제야 가늠이 된다. 그 앞에 서 있자니 지금의 한국을 일궈낸 ‘땅 속의 산업 전사들’이 경험했을 엄청난 지열과 습도, 그리고 끝 모를 공포감이 느껴지는 듯 하다.
금방이라도 레일 위를 움직일 것 같은 광차(鑛車, mine tub)와 컨베이어, 수직 갱도의 철 구조물과 강철로프 등 유기적으로 움직이던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해 두었다. 삼척탄좌 장암광업소의 옛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이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 되어 커다란 감동을 준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와 비슷한 공간이 하나 더 탄생할 예정이다. 옛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 들어서는 사북탄광문화공원이 그것이다. 2025년 상반기 개관을 목표로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한다.
구름도 탄식하며 넘는 길
삼탄아트마인과 사북탄광문화공원이 역사 유산을 활용해 예술과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경험할 수 있는 곳도 있다. 과거 석탄을 운반하던 길인 ‘운탄고도(運炭高道)’이다.
겨울 눈꽃 산행으로 인기 있는 함백산을 오르고 있는 등산객
운탄고도는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뚫은 고지대 도로’라는 뜻으로, 실제로 길이 지나는 곳의 평균 해발고도가 546m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만항재의 해발고도 1,330m를 따 공식 명칭은 ‘운탄고도1330’이다.
운탄고도는 정선을 포함해 크게 4개 지자체를 지난다. 정선 서쪽의 영월에서 시작해 정선과 태백을 지나 동해변에 위치한 삼척으로 이어지는 장장 173km가 넘는 길이다. 전체 9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핵심은 정선을 지나는 4코스와 5코스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에 걸맞게 석탄을 운반하던 당시의 흔적이 잘 남아 있고, 석탄산업 합리화정책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자연 회복 속도도 빠른 곳이어서다.
먼저 4코스는 정선 예미역(禮美驛)에서 출발해 꽃꺼끼재(화절령 花絶嶺)까지 이어지는 28.76km 구간이다. ‘운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길이지만, 지금은 천혜의 트레킹 코스라 해도 될 만큼 걷기 좋은 길이다. 특히 전지현(全智賢 Gianna Jun)과 차태현(車太鉉Cha Taehyun)이 주연한 영화
(2001)에 나오는 소나무가 있는 타임캡슐공원에서 새비재(鳥飛峙)를 오르다 보면 주변 풍광 덕에 트레킹의 묘미가 한껏 깊어진다. 평균 9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길로 403m에서1,197m로 고도가 꾸준히 높아진다.
함백산 만항재는 한국에서 차를 타고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도로다. 덕분에 고생스럽게 산을 오르지 않아도 편하게 설국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5코스는 꽃꺼끼재에서 만항(晩項)재까지 이어진다. 꽃꺼끼재를 지나자마자 있는 도롱이(도룡뇽)연못은 1970년대 석탄 채취로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생겼다. 이후 광부 남편을 둔 아내들이 연못에 사는 도롱뇽에게 남편의 무사귀환을 빈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연못 물이 빠지면 갱도가 침수됐거나 무너졌다는 뜻일 테고, 그러면 도롱뇽은 물론 광부들 또한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데서 유래한 이야기일 것이다. 5코스 길이는 15.7km로, 천천히 걸어도 6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해발고도 1,067m에서 한국에서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 1,330m 만항재까지는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고도가 점점 높아진다. 꽤 힘이 들 것 같지만, 오른쪽 산 밑 경관을 바라보면서 힘든 줄도 모르고 걷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4코스든 5코스든 운탄고도는 공통점이 있다. 세계 여느 트레킹 코스와 다르게 경사가 완만하고 표면이 평탄하다는 점이다. 애초 트레킹 루트로 개발한 것이 아니라 석탄 운반을 위해 대형 트럭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길이다 보니 그렇다. 그래서 트레킹만이 아니라 마운틴 러닝이나 산악자전거(MTB) 등을 즐기는 이들에게도 더없이 훌륭한 여행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노르딕 스키는 물론 눈썰매를 갖고 와 즐기는 여행자들도 있다. 또 중간중간 넓은 대지가 있어 텐트와 침낭 등을 구비해 걷는 백패커들의 성지로도 이름이 높아지고 있다.
과거 맑은 날에는 흩날리는 석탄 가루로 하늘과 땅이 까맸고, 비가 오면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는 말 그대로 진창길로 변했던 곳이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석탄 나르던 운탄(運炭)고도에서 구름(雲)도 탄(歎)식하며 넘는 길, 즉 운탄고도(雲歎高道)로 위상이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겨울에 운탄고도를 걷고 있노라면 발 위에는 흰 구름이, 발 아래는 흰 눈이 소복하게 덮여 있어 온천지가 하얗게 빛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병방치 전망대에서는 한반도 모양을 한 섬 둘레를 동강 물줄기가 감싸 안고 흐르는 비경을 만날 수 있다.
Lifestyle
2024 WINTER
LP로 맺어진 인연
커티스 캄부는 모험심으로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대학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오게 되었다. 12년 후 그는 자신이 두 개의 음반 레이블을 운영하고, 한국의 유명 뮤지션 박지하와 결혼하여, 중고 레코드 가게 두 곳을 운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울 마포구 상수역 근처에 위치한 두 번째 빈티지 음반 가게 모자이크 웨스트에서 음반을 듣는 커티스 캄부.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에는 스포티파이, 애플뮤직, 유튜브 뮤직 등의 플랫폼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손쉽게 스트리밍할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LP 앨범이 다시 유행하고 있으며, 그 추세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레코드산업협회에 따르면, 세계 최대 규모의 음악산업을 보유한 미국에서는 지난 해 LP 판매량이 CD 판매량을 앞섰다. 글로벌 팝 스타부터 한국 현대 음악가까지 많은 아티스트들이 LP로 앨범을 발매하고 있으며, 젊은 층이 LP 구매를 주도하고 있다.
서울에서 두 개의 빈티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커티스 캄부 씨에게는 이러한 트렌드가 낯설지 않다.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난 그는 17살에 고향을 떠나 파리로 갔다. 이후 전 세계를 돌아다니기로 결심하면서 뉴욕, 도쿄 등을 제쳐놓고 가장 낯선 도시인 서울을 택했다. 캄부 씨는 2012년 한국에 도착해 교환학생 과정을 마친 후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는 음악 덕분에 자신의 사업적 감각을 발견하게 되었다. 음악 애호가로서 몇 년 동안 중고 음반 업계 사람들과 인맥을 쌓으면서 그의 음반 컬렉션은 점점 늘어났다. 2020년에는 광희문 근처 신당동 뒷골목에 자신의 첫 번째 빈티지 레코드 숍인 모자이크를 오픈했다. 신당동 일대가 유명세를 타기도 전이었다. 첫 매장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온라인 판매 사업을 시작했고, 지난해 홍대 근처에 두 번째 오프라인 매장을 오픈했다. 재능은 있지만 해외에 판매 채널이 부족한 국내 아티스트들을 알리고 싶어서, 브레인댄스레코즈를 통해 한국 일렉트로닉 아티스트의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또한, 대한일렉트로닉스를 만들어 오래된 음반을 재발매하거나 국내 아티스트의 새 앨범을 발매했다. 그는 이 앨범에 대해 “세월의 흐름에 잊힐 뻔했다가 구해낸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매장도 관리하고, 벼룩시장에서 레코드를 찾고, 매주 사무실에 입고되는 수천 장의 레코드도 분류하느라 바쁘게 보내지만, 여유가 있을 때는 그의 오랜 취미인 디제잉을 즐기기도 한다.
음악은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나?
어렸을 때 어머니가 LP판과 CD를 가지고 계셔서 항상 음악을 찾았다. 어머니는 친구들이 준 믹스 테이프를 차 안에서 들으시곤 했다. 소울을 특히 좋아하셨고, 디페쉬 모드, 더 휴먼 리그 같은 영국 신스팝을 많이 들으셨다.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가 있는지?
젊었을 때는 힙합을 많이 들었다. 집에서는 주로 빅 웨더, 마빈 게이, 샤데이 등 정통 소울 음악을 즐겼다. 그러다 사이키델릭 록 장르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이것저것 다양하게 들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 한 장르만 듣다가 다른 장르로 넘어가곤 했다. 한국에 왔을 때는 아방가르드, 실험 음악, 일렉트로닉 음악 등 다소 특이한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 머무르게 된 계기는?
콕 짚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사회에서 나의 역할을 찾았다랄까. 한국의 음악 산업은 블루오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름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돕고, 사람들은 나에게 도움을 준다. 나만의 방식으로 사회에 녹아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정착하게 되었다.
졸업 후에는 어떤 일을 했나?
현대카드에서 스페이스 마케팅팀에서 일했고, 이후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로 부서를 옮겨 부매니저로 일했습니다.
어떻게 음반 레이블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주변에 해외 발매를 할 만한 수준의 아티스트들이 있었지만, 인맥이 없어서 해외에서 음반을 발매하지 못하고 있었다. 메이저 회사에는 인맥이 있는 분들이었지만, 언더그라운드의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배급사나 음반사 대표들을 꽤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음반을 발매 및 배급하기로 결정하고 진행하게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나에게 최고의 프로젝트는 퓨어디지탈사일런스(PDS)라는 밴드였다. 정말 실력이 좋은 친구들이었는데, 내가 그들을 만났을 때는 콘서트를 쉰 지 한참 됐을 때였다. 여전히 소음 실험을 하는 두 명의 남자들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밴드를 다시 모아 웰메이드 앨범을 발매하게 되었다. 앨범은 한 학생이 1990년대 후반 퓨어디지털사일런스 밴드에 대해 만든 아마추어 다큐멘터리를 리마스터링한 것이었다. 전부 영어로 번역하고 프로젝터를 구해 20년 만에 처음으로 라이브로 상영했다. 정말 많은 분이 찾아주셔서 전 좌석 매진을 기록했다. 큰 모험이었지만 나에게는 인생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
해외에서의 반응은 어땠나?
많은 분들, 특히 재미교포들로부터 감사하다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한국어가 유창하진 않았지만, 반응은 한결같았다. 자신에게 한국적인 정체성이 있다고 느끼고 있지만, 한국에도 비주류 문화를 함께 즐기는 커뮤니티가 있기를 바랐다는 것이었다.
어떤 계기로 빈티지 레코드 샵을 운영하게 되었는지?
원래는 퓨어디지탈사일런스의 2집 앨범을 발매하려고 했지만, 당시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배송비가 문제였다. 배급사에 보내면 손해가 막심할 것 같았다. 현대카드에서 이직하고 사회통합프로그램을 통해 거주 비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소소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몇 백만 원씩 투자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비자가 나온 후에는 지금의 빈티지 레코드 숍인 모자이크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서울 중구 신당동의 오래된 주택가 골목에 있는 모자이크 서울 ⓒ 모자이크
매장 위치로 신당동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신당동에서 멀지 않은 창신동에서 산 적이 있다. 그리고 자리를 빨리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예산이 많이 부족했는데 아내는 광희문 일대가 좋다고 했다. 그래서 부동산 몇 군데를 찾아다니며 물어봤지만, 그들에게서 “없어, 없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나는 나이 드신 분들을 많이 만나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나만의 기술이 있었다. 그 후 몇 주 동안 비타민 병 음료를 사 들고 부동산에 여러 번 찾아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왔다. 직접 가보니 아직 공개 매물로 나오지 않은 곳이었다. 가서 보자마자 느낌이 딱 왔다. 가격도 좋고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모자이크의 인기 비결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다양성과 퀄리티, 그리고 꾸준하게 새로운 앨범을 들여오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대량으로 레코드가 입고된다. 진짜 최고 중의 최고의 음반은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음반들만 들여오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객의 일반적인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지?
꽤 다양하지만, 20대~40대가 대부분이다. 40대는 40~49세까지 다양하다.
그와 직원들은 매장에 진열된 앨범과 책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손 글씨로 메모해 놓기도 한다.
두 매장은 어떻게 차별화되어 있는가?
1호점은 아프리카, 브라질, 레게, 희귀한 그루브(미국 1960~70년대, 소울, 펑크 등) 등 월드뮤직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재즈 음반도 많이 선보인다. 2호점은 좀 더 ‘길거리’ 음악에 가깝다. 힙합, 하우스, 테크노, 디스코, 1980년대 댄스 음악, 뉴욕에서 형성된 다양한 음악들과 얼터너티브 록, 인디, 뉴웨이브, 포스트 펑크, 펑크 메탈, 트래시, 하드록, 록 클래식도 다수 갖추고 있다.
매장을 찾는 손님들이 어떤 경험을 하기를 바라는지 궁금하다.
사람들이 레코드 매장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도서관과 비슷하다. 우리가 세심하게 나눠 놓은 다양한 장르별로 직접 음반을 찾아보고 들으면서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현재 함께 일하고 있는가.
5년 전에 만났다. 아내의 앨범을 발매하고 싶었지만 결국 발매하지는 않았다. 아내의 음반사에서 이미 역할을 잘하고 있더라. 아내는 그 분야에서는 꽤 유명인이다. 아마존 MGM 스튜디오에 개봉한
(2023)이라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기도 했다. 많은 프로젝트에서 협업 제안을 받고 있어서, 해외 작업에서는 내가 영어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고 있다.
그는 모자이크를 통해 많은 이들이 다양한 음악을 경험해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향후 계획이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중고 음반 산업이 하나의 비즈니스로서 제대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한국에서는 아직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정식 사업으로 인정받고 국내에 더 많은 매장이 생겨서 젊은이들이 일하고 싶어 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Lifestyle
2024 WINTER
지구가 좋아하는 제빵소
특별한 제빵소가 있다. 빵틀, 오븐 등 일반 제빵소와 사용하는 기구는 같지만 이곳에서는 밀가루 대신 플라스틱 병뚜껑으로 빵을 만든다. 버려진 플라스틱은 타르트가 되고, 카눌레도 된다. 사람이 먹을 순 없지만, 쓰레기가 새로운 쓸모를 가진 물건으로 탄생하는 순간이다. 지구가 건강해지는 제빵소 플라스틱 베이커리(廢高分子 製菓店 Plastic bakery)를 소개한다.
고순도 플레이크를 활용해 와플, 카눌레, 타르트 같은 다양한 형태로 만든 상품은 인센스, 화분, 트레이 등의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할 수 있다. ⓒ 플라스틱 베이커리
플라스틱(Plastic)이라는 단어는 ‘플라스티코스(Plastikos)’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원하는 모양으로 가공할 수 있는’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플라스틱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없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라. 텀블러, 의자처럼 눈에 보이는 물건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자동차 내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어디든 플라스틱이 있다.
플라스틱으로 굽는 빵
1907년 리오 베이클랜드(Leo Baekeland 1863~1944)가 플라스틱을 발명한 이후 1920년대 들어 합성 플라스틱을 본격 응용한 다양한 제품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플리스틱 베이커리가 문을 열었다. 플라스틱 베이커리는 폐플라스틱 병뚜껑을 빵 모양의 소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기업이다. 베이커리라는 사명처럼, 이곳에서는 빵을 굽듯 플라스틱을 굽는다. 100% 수제다. 사람이 직접 분쇄된 플라스틱을 계량하고, 일정 시간 굽거나 틀에 찍어낸다. 공정을 거친 폐플라스틱은 독특한 무늬의 빵으로 재탄생한다.
플라스틱 베이커리가 버려진 플라스틱 병뚜껑으로 빵을 굽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플라스틱 베이커리 박형호 대표(朴亨鎬 Park Hyong-ho)는 요리사도 미술 전공자도 아니다. 그는 대학에서 전기를 전공했지만, 대학원에서 스마트디자인엔지니어링을 공부하면서 지속 가능한 발전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대학원생 시절, 홍콩과학기술대학교와 홍익대학교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이 공동주최하는 순환경제디자인워크숍(Circular economy design workshop)에 참가했습니다. 홍콩에서 열린 그 워크숍에서 자원 순환이 전세계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이슈인지 알게 되었죠. 특히 플라스틱을 재활용해 가치 있는 자원으로 만드는 ‘프레셔스 플라스틱(Precious Plastic)’ 프로젝트에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이후 한국에서 자원 순환 프로젝트를 계획해 실천해 봐야겠다고 결심했죠.”
박 대표는 귀국 후 본격적으로 친환경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자 고심하던 어느 날, 그의 눈에 빵틀이 보였다. 당시 플라스틱 베이커리 사무실은 서울 중구 을지로의 방산종합시장 근처에 있었다. 방산종합시장은 각종 산업 부자재와 포장 용품 등을 판매하는 종합시장으로, 제빵 기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그곳에서 제빵 도구를 본 박형호 대표는 플라스틱을 빵처럼 굽는다면, 뭔가 재미있는 작품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플라스틱 베이커리의 시작이었다.
플라스틱 베이커리만의 도전과 협업
박형호 대표는 와플기기, 오븐 등을 이용해 플라스틱을 굽고 또 구웠다. 플라스틱에 열과 압력을 가하니 쉽게 변형됐다. 그러나 최적의 온도와 압력, 시간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온도가 너무 높으면 표면에 구멍이 생기고, 너무 낮으면 원하는 모양을 만들기 어려웠다. 그는 수백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플라스틱의 색, 물성에 꼭 맞는 최적의 온도와 압력, 시간을 찾았다. 금형의 파트 별 온도를 달리 조절하는 것도 플라스틱 베이커리만의 노하우다.
재료는 플라스틱 병뚜껑을 이용했다. 비교적 활발하게 재활용되는 투명 페트병과 달리 병뚜껑은 작고 따로 분리수거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재활용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형호 대표와 팀원들도 처음에는 인근 주택단지 분리수거장에 쪼그려 앉아 일일이 병뚜껑을 회수해 사용했다. 그러다 2023년부터는 춘천지역자활센터에서 병뚜껑을 직접 모아 씻어 말린 후 분쇄 플레이크 형태로 제공해 주고 있다.
플라스틱 베이커리는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통해 실용성과 심미성에 재활용이라는 의미까지 더해 지속가능한 내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 플라스틱 베이커리
플라스틱 베이커리는 고순도 플레이크를 활용해 와플, 카눌레, 타르트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진 상품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인센스, 화분 등 인테리어 소품으로 새로운 기능을 얻었다. 플라스틱 베이커리의 아이디어와 상품의 가치는 유수의 기업에서 먼저 알아봤다.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록시땅은 플라스틱 베이커리와 협업해 자사의 공병 플레이크로 타르트 모양의 재활용 비누 받침대를 제작했다. 실용성과 심미성에 재활용이라는 의미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컴퓨터 주변기기 전문기업 로지텍은 플라스틱 베이커리의 카눌레 모양 연필꽂이와 조약돌 모양 명함 거치대를 자사 제품과 함께 패키지로 선보였다. 기아자동차와 LG생활건강, 러쉬 등도 플라스틱 베이커리와 협업했다. 제품 전시와 임직원 및 일반인 대상 워크숍에 대한 의뢰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좋은 뜻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대중도 공감해 줄까?’, ‘잘 팔릴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이익이 남지 않는다면, 기업 운영을 이어갈 수도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다행히 제품을 선보인 후 많은 기업에서 협업을 제안해 준 덕분에 플라스틱 베이커리만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제품을 대량 생산하기보다는 플라스틱의 재활용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시도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제품’과 ‘작품’의 경계에 있겠다는 선택이었죠. 이처럼 상업성을 인정받으려는 욕심을 버렸더니 다양한 분야에서 계속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현재 플라스틱 베이커리에서는 기존 빵 모양 소품에 3D 펜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넣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상품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때 활용되는 필라멘트 또한 플라스틱을 재활용해 만든다. 최근에는 플라스틱 병뚜껑을 충전재로 쓴 빈 백(Bean Bag)도 선보였다. 또 재활용 제품을 활용한 공간 디자인도 선보인다.
플라스틱이 가진 가능성을 지속 가능성으로
플라스틱 베이커리에게 플라스틱이란 ‘가능성’의 또 다른 말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플라스틱은 이곳에서 무엇으로든 재탄생한다. 자연 분해되기 어렵다는 플라스틱의 단점이 오히려 기회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플라스틱이 가져올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도 박형호 대표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플라스틱을 오븐에 구워 만드는 카눌레, 타르트, 와플 등은 상품별로 굽는 시간과 온도가 다르다. ⓒ 플라스틱 베이커리
“플라스틱은 우리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여 주었습니다. 인간뿐만이 아닙니다. 무수히 많은 생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죠. 플라스틱이 상아의 대체제로 쓰이면서 코끼리의 멸종을 막았고, 목재 사용을 줄여 아마존 원시림 파괴 속도를 늦췄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플라스틱 ‘덕분에’가 아닌 ‘때문에’ 우리 삶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플라스틱이 인류의 멸망을 부추길 것처럼 여기죠. 플라스틱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면 당장 사람들에게 자극을 줄 수는 있지만 피로감이 쌓이고, 지속 가능한 프로젝트가 지속성을 잃게 됩니다. 그러니 플라스틱이 불러온 긍정적인 효과와 역사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좋겠어요. 그걸 인정해야만 플라스틱과 공생할 수 있습니다.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자연 순환이 어려운 플라스틱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입니다. 환경 문제를 감정적으로 바라보고 대응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쓸 것인가?’, 또 ‘어떻게 다시 쓸 것인가?’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박형호 대표는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활동하는 작가와 기업에 “충분한 고민과 연구를 거치라”라고 조언한다. 충분히 연구하지 않고 만든 물건은 오히려 새로운 쓰레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대표 역시 기존의 제빵 기법을 개선하는 동시에 새로운 형식의 자원 순환 방법을 발굴하고자 계속 노력할 계획이다.
“노 플라스틱 선데이(No plastic sunday), 우쥬러브(Would you love), 로우리트(Low-lit) 등 자원 순환에 관심을 두고, 각자의 영역에서 괄목할 성과를 내는 기업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플라스틱 베이커리도 브랜드로서 가치와 인지도를 높여 플라스틱의 순환 가능성을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가능과 불가능을 결정짓는 것은 인간의 선택이다. 플라스틱 베이커리는 ‘가능’을 선택한다. 플라스틱과 지구의 지속 가능성을 말이다. 그 선택은 분명 플라스틱에 제2의 전성기를 가져다줄 것이다.
Lifestyle
2024 AUTUMN
누구나 그리고 즐기는 민화의 즐거움
과거 민화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민화 수집가나 연구가들이 등장하고 민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화가들의 작품이 주목 받으며 관심이 높아졌다. 최근에는 취미로 민화를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고, 공모전, 아트페어, 갤러리를 중심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민화 강사 신상미 씨는 취미로 시작했던 민화의 매력에 빠져 지금은 민화를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
직장인에서 민화 강사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신상미 씨.
열의에 가득 찬 수강생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이 공간의 이름은 모리화(毷離畫)이다. 번민 모, 떠날 리, 그림 화 즉 ‘일상의 근심을 떠나 보내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민화’를 배운다.
민화는 조선시대 때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한 실용화이다.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을 위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이라는 의미에서 ‘민화’로 불린다.
한 겹 한 겹 색을 쌓다
신상미(申湘媄) 씨에게는 두 종류의 ‘날’이 있다. 수업이 있는 날과 수업이 없는 날. 일주일 중 사흘은 수업이 있고, 사흘은 없다. 나머지 하루는 ‘배우는 날’이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7시쯤 일어나 중학생인 딸을 학교에 보낸 후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작업실로 간다. 경복궁 근처에 있는 21평짜리(69m²) 오피스텔로,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처음에는 집에서 동네 분들 모아놓고, 돈도 안 받고 가르쳤어요. 본격적으로 수업을 해보자 마음먹고 일 년 전쯤 작업실을 얻었어요. 경복궁 근처라 임대료는 비싸지만, 그 덕분인지 전국에서 배우러 와요.”
작업실에 도착하면 전기차를 충전시켜 놓고 강아지들과 산책을 한다. 이후 작업실로 돌아와 작업용 앞치마를 메고 화분에 물을 준 다음 수업 준비를 한다. 첫 수업은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해 3시간을 꽉 채우고 끝이 난다.
“처음에는 책상 다섯 개를 놓고 시작했어요. 지금은 여덟 개가 되었죠. 한 클래스에 8명 정도 들어오시고, 총 여섯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어요. 자리가 나면 들어오려고 대기하고 있는 분들도 많아요.”
민화는 전공자, 비전공자의 차이가 별로 없다. 밑그림이 있어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골라 채색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추어도 쉽게 시작할 수 있고 결과물도 좋은 편이다.
신 씨의 수강생들이 그린 작품들. 같은 밑그림이라도 그리는 이의 취향과 선호하는 색 등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로 완성된다.
“민화는 가루 물감을 아교로 개어 한 겹 한 겹 색을 계속 쌓아가는 작업이에요. 한 작품 완성하는 데 몇 개월씩 걸리는데, 명상하듯이 천천히 하다 보면 계속하고 싶어지는 매력이 있어요.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문화죠. 다들 재미있게 다니세요.”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이 없어도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난다. 일상의 소소한 근심을 까맣게 잊고 온전히 몰두하는 시간이다.
밥 먹고 그림만 그렸다
민화 강사가 되기 전, 신상미 씨는 20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다. 대기업에서 벽지, 바닥재, 가구 필름 등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였다.
“2000년 초반, 컬러와 패턴 등 디자인이 다양한 장판(壯版 한국의 주택에서 방바닥에 까는 PVC로 된 시트) 시장이 어마어마했어요. 장판에 민화 나비를 넣어보고 싶어서 민화 작가를 소개받았어요.”
그것이 처음 만난 민화였다.
“직장을 정말 열심히 다녔어요.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일요일에도 일을 했죠. 그러다가 4년 전쯤 아이가 아파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어요. 수십 년 동안 매일 하던 일을 갑자기 안 하게 되니 스트레스가 컸어요. 몸도 마음도 엉망이었죠.‘이대로는 안 되겠다, 어디 가서 꽃이라도 그리자’ 하고 집 앞 공방을 찾아갔어요. 그때부터 민화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재미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정말 밥 먹고 그림만 그린 나날이었다. 한 곳에서 그릴 수 있는 민화가 한계가 있다 보니 화실을 서너 군데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그렸다. 그러다 보니 실력이 늘어갔다. 남들이 10년 걸려 배울 걸 2~3년 만에 익혔다. 어느 순간 병풍 하나 정도는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병풍 그리기를 시작했다. 1년쯤 걸리는 작업을 3개월 만에 끝냈다. 그때 그린 병풍으로 ‘제 15회 대한민국 민화공모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 정도면 화실을 차려도 될 것 같아 작업실을 열고 수강생을 받기 시작했다.
“저는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안 맞는 사람이더라고요. 뭔가를 시작하면 몸이 상할 정도로 몰두해요. 칭찬받고 싶고, 잘하고 싶고. 그림을 시작하면서 활력이 생기고 아이를 돌볼 시간도 생겨서 아이도 저도 건강해졌어요.”
빠른 시간 안에 민화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힌 이유 중 하나는 직장생활 때의 경험이었다. 벽지, 바닥재, 가구 필름 등을 디자인하면서 빨강, 노랑, 파랑으로 색을 조합하는 작업만 20년을 했다.
“제가 색을 만드는 데 특화되어 있었던 거죠. 민화는 정해진 색이 없어요. 같은 그림이라도 작가마다, 공방마다 색이 다르죠. 여러 색을 실험해 보고 칠해보면서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는 거예요. 오방색(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청색, 흰색, 적색, 흑색, 황색)을 화려하게 써야 민화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간색’이라고 불리는 중간색을 적극적으로 쓰는편이죠. 오방색은 한옥에는 어울리지만, 현대적인 인테리어와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제가 출품한 병풍도도 출품작 중 제일 어두운 그림이었어요. 요즘은 톤 다운된 노란색, 겨자색에 꽂혀 있어요.”
매주 화요일은 민화 명장 스승님께 전통 민화 그림을 배우러 간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1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듣는다.
“시상식 날 원로 선생님들께서 앞 줄에 앉아 계셨는데, 아빠랑 너무 비슷하게 생기신 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분한테 가서 ‘저 좀 받아주세요’ 했어요. 그림 속 꽃 하나, 나비 하나에도 다 의미가 있거든요. 그리다 보면 알고 싶어져요. 그래서 책도 많이 읽고 수업도 듣는 거죠. 수업 중간에 밥도 먹고 막걸리도 한잔하면서 선생님께 수업을 받고 있어요.”
어설픔도 맛이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작업실에 나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여기서 제 작업도 해야지 싶었는데, 점점 회사처럼 되다 보니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져요. 그래서 개인 작업은 집에서 해요. 그런데 이제는 화실 이름도 걸려 있고, 제가 가르치는 사람이 되니 그림에 힘이 들어가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그림 그리는 것이 예전만큼은 재미가 없어요. 회원들 그림 봐 드리고, 그 그림들이 점점 나아지는 걸 보는 게 훨씬 좋아요.”
수강생은 주로 40~50대 여성들이다. 작업대에 그림과 재료를 잔뜩 펼쳐놓고 수다를 떨며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인다. 그렇게 세 시간 동안 스트레스를 날린다.
민화는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는 그림이다. 그래서 전공자, 비전공자 할 것 없이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문화라고 말한다.
“혼자서 작업을 하면 그야말로 무념무상이에요. 쉬는 날에 종일 미적거리다가 저녁에 시작할 때가 많은데 정신차려보면 새벽이에요. 저희 엄마가 70대인데 엄마도 제 수강생이에요.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고, 아마추어의 어설픔도 민화의 맛이에요. 저희 화실은 아직 회원전을 연 적은 없지만, 회원전을 열면 작품도 잘 팔린다고 하더라고요.”
수강생들의 즐거움이 신 씨의 보람이자, 회사 다닐 때는 몰랐던 기쁨이 된다. 새벽 서너 시까지 그리고, 서너 시간 자고, 하루 아홉 시간 수업이 있는 날에는 한 끼 챙겨 먹기도 힘들지만, 모든 게 감사하다. 열정을 쏟았던 직장생활의 끝에 새롭게 찾은 길이 감사하고, 경력이 짧은 자신에게 배우기 위해 먼 길을 오는 사람들이 감사하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최근 아버지를 위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겨자색, 그리고 파란색으로요.”
Lifestyle
2024 AUTUMN
노잼도시 대전의 재발견
한반도에서 대전광역시는 중심에 있다. 위에서 내려오거나 아래에서 올라가도 그렇다. 게다가 주요 고속도로와 철도 노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부터 지금까지 대전은 한반도 교통의 길목이자, 중심에 있다.
ⓒ 대전관광공사
편리한 교통 입지는 이곳에 한국 최대의 과학연구단지가 자리잡는 계기로 작용했다. 인재를 모으는 데 유리하고, 여러 지역의 공업단지와 연계하기 좋으며, 근처 금강(錦江)에서 용수를 끌어다 쓰기에도 좋은 입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선 것이 1970년대 초반 첫 삽을 뜬 대덕(大德)연구단지, 지금의 대덕연구개발특구(INNOPOLIS DAEDEOK)다.
한국 최대 과학의 도시
1984년에 설립돼 오늘에 이르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한국 과학 발전의 초석 역할을 해오고 있다. 또한 1993년에 개최된 대전엑스포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대전하면 과학’을 떠올리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특히 대전엑스포에는 세계 108개국, 33개 국제기구, 국내 200여 개 기업이 참가해 88서울올림픽만큼이나 성대하게 치뤄졌다. 당시 학생이었다면 학교단체여행으로 대전엑스포를 방문한 덕에 대전엑스포 ‘꿈돌이’는 한때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대전 도심을 가로지르는 갑천 위의 엑스포다리는 당시의 추억을 여전히 전하고 있으며,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른 엑스포 과학공원은 대전시민들의 쉼터로, 엑스포 한빛탑은 야경 명소로 인기다.
대전엑스포93 기념관과 엑스포과학공원의 상징인 한빛탑, 물빛광장 음악분수 등이 있는 엑스포과학공원은 대전 시민의 휴식처이자 야경 명소가 되었다. ⓒ 신정식
2022년 12월말 기준, 현재 대덕에 위치한 연구기관 및 기업은 2,397개에 이르며, 국내외 특허 출원 건수만 119,683건에 달한다. 대덕연구개발특구는 한국 과학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온 구심점이자 이러한 과학 발전은 한국 경제를 성장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전에서 과학을 어렵지 않게 경험하고 싶다면 대덕연구개발특구 한복판에 자리한 국립중앙과학관을 방문하면 된다. 한국의 첫 우주발사체인 나로호를 실물 크기로 전시한 모형이 방문객들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고, 로봇으로 재탄생한 대전 과학 엑스포의 마스코트였던 꿈돌이를 만나볼 수 있는 등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과학이 즐거운 놀이가 되는 국립중앙과학관. 이곳에는 자연사, 인류, 천체, 과학기술,미래기술 등 과학을 흥미롭게 풀어낸 공간이 많다.
밀가루가 낳은 새로운 음식문화
대전의 음식문화는 밀가루와 함께 탄생하고 발전해왔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한국 기후의 한계 탓에 메밀가루나 칡전분만이 이 땅에서 면을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이(唯二)한 재료였다. 그런데 밀가루라는 새로운 식재료가 출현한 것이다.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전 국토가 파괴되어 주식인 쌀이 매우 부족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민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미국이 원조한 밀이나 옥수수 등으로 만든 식량을 섞는 혼분식(混粉食)을 장려했다. 애초 쌀로 만드는 음식일지라도 무조건 밀가루로 만든 재료를 섞도록 했다. 한국내 어느 식당에서든 설렁탕이나 돼지국밥 등을 주문하면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함께 말아져 나오는 것이 바로 이 시대의 흔적이다.
대전이 예부터 밀가루와 관련된 음식이 발전한 것은 부산항이나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미국산 밀을 제분해 전국으로 배송할 때 중간보관소 및 분기점 역할을 했던 교통 요지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1960~1970년대 대전 서쪽의 서해안 간척사업 당시에는 노임을 미국이 원조한 밀가루로 지급했다. 그 밀가루를 현금으로 바꿔주던 교환장이 대전에 들어선 것도 한몫했다.
이처럼 풍성한 밀가루 공급으로 다채로운 음식문화를 꽃피웠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칼국수다. 칼국수는 익반죽해 썬 밀가루 면을 숙성 과정 없이 해산물, 또는 고기 육수를 베이스로, 채소와 함께 끓여 먹는 음식이다. 특히 육수와 고명, 면 굵기 등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지금은 전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칼국수가 최초로 탄생한 곳이 바로 대전이었다. 누가 최초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1960년대 들어 각종 미디어에 전국 최초로‘대전 칼국수’라는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명성을 뽐내듯 2023년 말 기준 대전에는 칼국수 전문점이 무려 727개에 달한다. 이는 인구 1만 명당 5개 꼴로,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많은 수치다. 이와 같은 대전의 칼국수 자부심은 2017년 이래 매년 10월마다 열리는 대전칼국수축제로 이어지고 있다.
칼국수가 최초로 탄생한 대전에는 다양한 칼국수 전문점이 있다. 사진은 사골과 멸치육수를 베이스로 한 칼국수이다.
대전을 대표하는 베이커리
대전을 대표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2023년 연매출만 1,243억에 순이익 315억 원으로, 단일 베이커리로는 세계 최상급 실적을 쌓아가고 있는 성심당(聖心堂)이다.
성심당이 문을 연 것 역시 미국으로부터 밀 원조가 들어오기 시작한 1956년이었다. 앞서 1950년 벌어진 한국전쟁 당시 극적으로 월남한 이들 중에는 지금의 성심당을 창업한 부부도 있었다. 부부는 훗날 대전에 정착했는데, 당시 가톨릭 신부로부터 밀가루 두 포대를 받아 찐빵을 만들어 판 것이 성심당의 출발이 되었다.
전쟁의 포연을 헤치고 창업한 빵집 답게 이들 눈에는 사회적 약자들이 남달리 보였다 한다. 팔고 남은 빵을 빈곤에 허덕이던 이들에게 매일 같이 베풀기 시작했다. 창업 이래 7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남는 빵을 복지관에 기부하며, 기부할 빵이 부족하면 새로 만들기까지 할 정도다. 제품 개발에도 열심이다. 단팥빵의 달콤함과 소보로의 고소한 맛, 그리고 도너츠의 바삭한 느낌을 한 번에 맛볼 수 있는 튀김소보로 등 이전에 없던 제품들을 만들어냈다. 이 튀김소보로는 성심당을 대표하는 빵 중 하나로, 현재까지 무려 8천만 개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만약 대전 시내를 걷다가 수십 미터, 때로 수백 미터의 줄을 발견한다면 십중팔구 성심당 매장일 확률이 크다. 성심당 매장은 대전에만 있어 빵과 케이크를 맛보기 위해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무조건 대전으로 가야만 한다. 이 때문에 빵을 좋아하는 이른바 빵순이들의 퀵턴여행(바로 돌아오는 여행, 즉 짧은 당일치기 여행)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전국 최대의 칼국수 식당 수와 성심당 밖의 기나긴 대기 행렬은 절박했던 한국인들을 구제해낸 그 옛날의 밀가루가 이제는 ‘노맛 도시’ 대전을 ‘꿀맛 도시’로 재탄생시켰음을 증명하는 풍경이다. 오는 9월 28일부터 이틀 간 열릴 예정인 대전빵축제에서 대전 사람들의 이른바 ‘빵부심’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전의 명물인 성심당. 제철 과일이 산처럼 쌓인 시루케이크, 시그너처 빵 등을 구입하려 매일 인산인해를 이룬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이렇다 할 대표 관광지가 없어 그 동안 ‘노잼 도시’로 알려졌던 대전은 최근‘유잼 도시’로 변신하고 있다. 예컨대 20세기 초반부터 철도산업 종사자들이 모여 살았던 소제동 관사촌은 맛과 멋이 즐비한 거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물론 본래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은 아니었다. 전쟁과 신도시 개발로 소외된 이래 빈집만 2천 채가 넘는 곳이었다. 변화의 움직임은 2010년 한 예술가가 옛 철도원 관사를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면서 시작되었다. 대전에서 유일하게 근대기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 지역의 가치에 주목한 것이다.
연극제와 노래자랑 등 예술 활동을 진행하면서 과거에 머물러 있던 관사들이 하나둘 갤러리나 카페, 레스토랑 등으로 바뀌어갔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겉모습은 언뜻 낡고 허술해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울창한 대숲을 대문으로 삼은 카페부터, 온천탕을 옮겨온 것 같은 정원이 인상적인 레스토랑까지, 독특한 아이디어와 현대적인 디자인이 더해져 다른 지역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낯선 경관이 펼쳐진다.
이와 비슷한 공간인 테미오래도 있다. 1930년대 대전 원도심에 만들어진 근대건축물을 리모델링한 곳으로, 옛 충남도지사 공간을 비롯한 9개 관사를 활용해 대전의 근대 역사와 문화, 예술 전시를 볼 수 있는 복합문화 예술공간이다.
소제동에 있는 옛 관사촌의 원형을 살려 만든 카페거리. 외관을 비롯해 지붕, 천장, 기둥 등 핵심 구조물은 그대로지만 각 스폿마다 색다른 개성과 취향으로 꾸며져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문화와 어우러진 대전
대전이 단순히 교통 요지이자 맛있는 먹거리만 많은 곳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문화적 향취와 자연의 깊이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곳이 대전이다.
먼저 대전 도심에 자리한 전국 최대의 도심 속 수목원인 한밭수목원을 빼놓을 수 없다. 방문객들은 울창한 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거나 산책을 즐기기도 한다. 수목원은 이응노(李應魯; LEE, Eung-no; 1904-1989) 미술관과 대전시립미술관과도 접해있다. 그 중에서도 이응노 미술관은 『문자추상(文字抽象)』과 『군상(群像)』 연작 등 한국화를 기반으로 서양의 추상화를 동양 서예로 녹여내며 독특한 미술세계를 만들어간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응노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유독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그가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던 당시의 나이가 50대 중반이었다는 점이다. 명성과 부에 안주하며 살 수 있었음에도 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스스로 나아갔다.
더욱이 1960년대 후반 한국내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음에도 그는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대전교도소 등에 수감돼 있는 중에도 밥풀 등을 이용해 3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오히려 국경과 민족을 뛰어넘는 예술의 가치와 위대함을 찾아 더욱 열정적으로 그렸다.
그 중에서도 1970년대 후반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군상(群像)』 연작은 당시 한국은 물론 전세계 양심적인 시민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자유분방한 개인들이 모여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그림에서 한국인들은 오늘의 민주화된 한국을 만들어낸 에너지를 읽어냈다.
시민을 위한 지역 대표 미술관이자 이응노(Lee Ungno) 화백의 예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이응노 미술관 ⓒ ARCHFRAME.NET
시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인 개입과 노력 속에서 노맛에서 꿀맛, 노잼에서 유잼으로 이미지 자체가 바꾸어가고 있는 대전은 언뜻 보면 밋밋할 것 같지만 과학, 문화, 근현대, 예술, 자연 등 여행의 목적에 따라 스팟들이 즐비한 곳. 그렇기에 대전은 하루이틀만에 둘러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대전의 옛 지명이 크고 너른 평야를 뜻하는 ‘한밭’인 것처럼 대전을 여행한다면 그날의 여행 주제를 정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대전을 여행할 수 있다.
장태산 자연휴양림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메타세쿼이아 숲이 울창하게 형성되어 있어 이국적인 경관 더불어 산림욕을 즐기기에 좋다. ⓒ 한국관광공사
Lifestyle
2024 AUTUMN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미용실
일본인 나카야시키 겐타(NAKAYASHIKI KENTA, 中屋敷) 씨에게 미용사는 다양한 사람들과 따뜻하게 소통하는 직업이다. 그가 한국에서 활동한 지는 이제 6년 조금 지났지만, 이 나라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오래도록 같이 나이 들어가길 꿈꾼다.
나카야시키 겐타(NAKAYASHIKI KENTA, 中屋敷 健太) 씨에게 오는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그는 한 번에 한 명의 손님 만을 받는다. 오롯이 그 사람에게 집중하기 위해서다.
겐타 씨의 미용실에선 누구나 주인공이 된다. 동시에 여러 손님을 받는 대신 한 사람씩 예약제로 고객을 맞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두 사람이다. 가족이 함께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는 극소수의 손님에게 자신의 시간을 오롯이 내어준다. 미용실 창밖엔 나무들이 울창하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서울 강남구(江南邱)에 자리하고 있지만, 바깥에 작은 공원이 있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철마다 누릴 수 있다. 고객과 마음을 나누기에 더없이 좋다.
“미용사는 누군가와 만나서 가까워지는 직업이에요. 미용실 운영으로 큰돈을 벌기보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좋은 사람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서
한국에 오기 전엔 일본 도쿄의 번화가인 오모테산도(Omotesando 表参道)에서 미용사로 일했다. 그가 고용된 미용실엔 손님이 아주 많았다. 한 시간에 무려 14명이나 커트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밀려드는 고객들을 상대하기 바빠 그는 손님의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게 너무 부끄러웠다. 그가 미용사가 된 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어서였다. 그랬던 첫 마음과 너무 멀어져 있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했어요. 잠을 거의 못 잤죠. 그렇게 6년쯤 일하다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겨우 스물일곱 살에요. 계속 이렇게 살다 간 죽을 수도 있겠다 싶던 차에 새로운 기회가 생겼어요. 제가 일했던 미용실 부사장님이 한국에서 미용실을 차려보라고 권하셨거든요. 때마침 한국에 관심이 생겼던 터라 별 망설임 없이 날아왔어요.”
한국으로 이끈 한정판 운동화 한 켤레
그게 2018년이었다. 사실 그전까지 그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 그가 한국에 관심을 품게 된 건 한정판 운동화를 사러 도쿄의 한 매장에 들렀을 때였다. 어느 젊은 남성과 같은 신발을 동시에 집으면서 눈이 마주쳤는데, 머리부터 신발까지 일본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남성이 누구인지는 얼마 뒤 TV를 보다 알게 됐다. K-팝스타 지드래곤(G-Dragon 보이그룹 ‘빅뱅’의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이 바로 그였다. 미디어에 비친 그는 음악도 패션도 기존의 틀을 모두 뛰어넘고 있었다. 그런 아티스트가 존재하는 나라에 문득 깊은 호기심이 생겼다.
“도쿄 오모테산도가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라 여겨왔는데, 그보다 더 앞서나가는 곳이 한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이후로 우리 미용실에 오는 한국인 손님들을 유심히 봤어요. 일본으로 유학 온 손님도, 일 때문에 건너온 손님도, 하나같이 자기 삶을 멋지게 가꾸는 분들이더라고요. 이런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면 몇 년 안에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겠구나 싶었어요. 직접 가보고 싶어졌죠.”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인사말도 모르고 온 그에게 가장 큰 언어 선생님은 다름 아닌 고객이었다. 어학원을 찾아가는 대신 혼자 한국어 교재를 사서 공부하길 선택했지만, 손님들과의 대화 덕분에 그의 한국어 실력은 금세 늘어났다.
서울의 몇몇 동네에서 일하다 3년 전 이곳 도곡동(道谷洞 Dogok-dong)에 미용실을 냈다. 별도의 홍보를 하지 않고도 이전 미용실의 고객이 또 다른 고객을 소개해 줘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이곳의 고객들은 열 살이 안 되는 어린이부터 칠십 대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직업도 제각각이다. 그 덕분에 미용실에 가만히 있어도 드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그를 처음 만난 손님에겐 세번쯤 와줄 것을 권한다. 헤어 스타일, 모발 상태 등에 따라 처음부터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연을 이어가며 손님과의 합을 맞춰나가는 것이 그에겐 중요한 작업 중 하나다.
한국인의 정(情)에 빠지다
“일본 사람들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아요. 진심을 알기가 어렵죠. 하지만 제가 만난 한국인들은 거의 모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더라고요. 그래서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서 편할 때가 더 많아요. 제가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으니까요.”
그는 한국인들을 흥(興) 많고 정(情) 많고 화(火) 많은 사람으로 표현한다. 그 가운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한국인 특유의 정(情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이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한국인들이 자기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에 매우 놀랐다. 일본에선 누군가를 함부로 돕는 것이 큰 실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한국인들의 넓은 오지랖(이 일 저 일에 관심도 많고 참견도 많이 한다는 뜻)이 아주 좋다. 따뜻한 마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잘 아는 까닭이다.
“일본에선 미용사와 고객이 평생을 함께하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한국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 문화만큼은 일본의 것을 옮겨 오고 싶어요. 저는 우리 미용실에 처음 오는 고객들에게 지금 당장 손님 마음에 들게 해드릴 순 없다고 이야기해요. 손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함께 만들어갈 테니, 속는 셈 치고 세 번만 와 달라고 부탁하죠. 거의 모든 고객이 그 이야기를 따라줘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대신 그는 손님들이 건네 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매번 최선을 다해 들어준다. 미용사의 자질에는 고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절한 순간에 알맞은 공감을 표시하는 게 그만의 무기다. 고객의 머리를 예쁘게 해 주는 것만큼 고객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에서 그는 큰 보람을 느낀다.
차분하면서도 정돈된 나카야시키 겐타 씨의 성격을 닮은 듯한 미용실
일본에 있을 때보다 훨씬 적은 수의 고객을 만나는데도 그의 수면시간은 여전히 짧다. 새벽 네다섯 시에 잠들고 아침 여덟 시 반쯤 눈을 뜬다. 침대에서 벗어나면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패션 또는 헤어 관련 유튜브를 본다. 업계의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열 시쯤 미용실로 출근해 열한 시에 영업을 시작하지만, 퇴근 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손님들의 예약 시간이 제 각각이라서다. 별도의 휴일이 없는데도 그는 별 불만이 없다. 오늘은 또 어떤 만남을 갖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이 그보다 늘 더 크다.
손님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는 꿈
그의 고향은 일본 도호쿠 지방에 자리한 이와테현(岩手県 Iwate-ken)이다. 지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도 일찌감치 대도시에서의 삶을 꿈꿨다. 이왕이면 ‘멋’을 삶의 중심에 두고 싶었고, 만 18세에 도쿄 하라주쿠의 한 미용학교에 입학해 꿈을 향해 출발했다. 그 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는 동안 이자카야 서빙, 콜센터 상담원, 옷 가게 판매원 등 10여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그 경험들이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지금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선배에게 물려 받아 17년 째 사용하고 있는 그의 가위
“일본에서도 아직 활동해요. 세 명의 유명 아티스트와 한 팀의 아이돌 그룹을 담당하고 있어서 요즘도 틈틈이 일본에 가요. 그래도 한국에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요. 손님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는 게 꿈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국에서 계속 살게 될 것 같아요.”
그는 선배한테 물려받은 가위를 17년째 쓰고 있다. 모든 것들이 점점 빨라지는 시대에 오래된 가위를 손에 쥐고 오래가는 인연을 꿈꾸며 산다. 자기만의 속도를 지키는 그의 얼굴에 자기다운 행복이 흐르고 있다.
Lifestyle
2024 AUTUMN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지속 가능한 일상을 만드는 동구밭
소비자는 현명하다. 샴푸 하나도 성분, 가격, 제형 등을 까다롭게 따져보고 구매한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는지, 동물실험에 반대하는지 등 회사의 철학에 관한 기준도 명확하다. 동구밭((株)打勾吧, DONGGUBAT Inc)은 소비자의 깐깐한 기준을 충족하는 기업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도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장애인, 비장애인과 함께 지속 가능한 일상을 제안하는 기업, 동구밭을 소개한다.
동구밭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지속가능한 일상을 만들어 간다. 특히 발달장애인 근속년수 해결이라는 미션을 가지고, 매출이 늘어날 때마다 회사는 발달장애 사원을 추가로 고용하고 있다. ⓒ Donggubat Inc.
시골 마을 입구를 떠올려 보라. 야트막한 언덕 위 커다란 나무, 옆으로 펼쳐진 논과 밭, 구불구불한 오솔길. 따뜻하고 정겨운 이미지의 공간이 그려질 것이다. 한국에서는 동네로 들어가는 어귀를 ‘동구(洞口)’, 그곳에 자리해 사람들을 맞이하는 밭을 ‘동구밭’이라고 부른다.
이름처럼 동구밭은 사람들, 특히 발달장애인에게 포근한 자리가 되어주고자 만들어진 회사다.
동구밭에서는 장애인의 꿈이 자란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이 발표한 「2023년 하반기 장애인경제활동실태조사」에서 6대 장애유형별 경제활동상태를 분석한 결과를 살펴보면, 시각장애인 고용률이 43.3%로 가장 높고, 지체장애인(43.0%), 청각장애인(27.3%), 발달장애인(26.2%), 기타장애인(23.0%), 뇌병변장애인(12.2%)순으로 이어졌다. 장애인 취업자의 현재 직장(일자리) 근속기간도 전체 평균이 11년인 것과 비교해 발달장애인의 평균 근속기간은 4년 10개월로 짧았다. 언어, 인지, 운동, 사회성 등의 지연 및 이상을 보이는 발달장애인은 사회활동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들이 사회에 적응하고 경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사회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발달장애인이 직접 일해 수익을 내게 할 순 없을까?” 사업 초기 동구밭은 고민 끝에 비누를 만들기로 했다. 비누는 제조법이 간단하고, 적은 생산 비용과 인원만으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행히 시장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발달장애인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편, 친환경, 비건 등 소비자의 요구에 맞춰 고품질의 제품을 선보인 덕분이었다.
회사가 성장할수록 고용할 수 있는 장애인 수도 늘었다. 2024년 4월 기준 동구밭 임직원 수 130여 명, 발달장애인 직원 수는 50여 명에 이른다. 발달장애인 직원은 동구밭 자체 직무 역량 개발 프로그램을 거친 뒤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공장에서 제조, 배송 업무 등을 수행한다. 땅값이 비싼 도심에 공장을 둔다는 것은 회사 입장에서 분명 손해가 나는 일이다. 하지만 발달장애인 직원이 원활하게 출퇴근할 수 있도록 동구밭은 기꺼이 손해를 감수한다.
동구밭에 없는 세 가지
동구밭은 발달장애인을 고용하기 위해 태어난 회사다. 하지만 장애인 고용을 방패로 삼지 않는다. 즉 동구밭에는 핑계가 없다. “장애인이 만들었으니 부족해도 이해해 달라”라고 선의에 기대는 것이 아닌, 당당히 제품력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박상재(朴祥宰, Park Sangjae) 공동 대표는 이것이 “회사가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말한다.
“장애인과 오래 함께할 수 있으려면, 회사가 자체적으로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비자가 좋아서 다시 찾는 브랜드를 만들어야 했죠.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임상’이었습니다. 사실 설립 초기에는 비누 제작에 있어 전문가라고 할 만한 인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한계를 두지 않고 마음껏 연구‧개발할 수 있었어요. 전국 각지의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노하우를 전수받고요. ‘지구와 사람에게 해롭지 않아야 한다’라는 가이드라인만 엄격하게 두고 최적의 원료와 배합 방법을 찾기 위해 직접 부딪쳤습니다. 동구밭 샴푸바의 유사 제품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이러한 진심과 노력이 있었기에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동구밭은 동물성 원료를 사용하지 않고, 동물 실험도 하지 않는다. 대신 옥수수, 아보카도, 레몬, 케일, 가지, 다시마 등 식물 유래 성분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전성분과 원료 배합에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한 덕분에 동구밭의 생산공장은 프랑스 이브 비건(EVE Vegan®) 인증과 환경경영시스템 인증(ISO 14001)을 받았다. 천연 원료만을 고집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인체 안전성을 인증받은 성분인지를 먼저 꼼꼼히 따져 소비자의 건강과 안전을 지킨다. 저온 숙성 공법(Cold Press, CP)도 차별점이다. 해당 공법을 적용하면, 재료의 좋은 성분이 열에 파괴되지 않는 반면 보습력은 강해진다.
유기농 녹차를 함유한 비건 설거지바 ⓒ Donggubat Inc.
마지막으로 동구밭은 플라스틱 프리를 실천한다. 동구밭은 액체, 가루 등의 제품군 포장재를 제외하고는 성분, 패키지, 완충재 등에 플라스틱 사용을 배제한다. 대신 제품은 비접착 재생 용지 패키지에 담아 판매한다. 동구밭 제품 1개를 사용했을 때 줄일 수 있는 플라스틱 배출량은 16.2g. 현재까지 누적 판매한 제품 수를 대입해 계산하면, 총 381,251㎏의 플라스틱 배출을 막은 셈이다.
소비자는 이러한 동구밭의 제품을 신뢰하고, 회사를 지지한다. 동구밭은 현재 샴푸바, 린스바, 세안비누, 거품 입욕제, 설거지 비누 등 월 50만 개의 제품을 제조 및 판매‧납품하고 있다. 많은 회사가 협업을 제안하면서, 주문자위탁생산(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OEM)과 제조업자개발생산(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 ODM) 방식으로도 다양한 제품을 생산한다. 동구밭의 성장은 기업에 다음의 메시지를 남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일회용 여행용품을 대신하는 플라스틱 프리 고체 여행용 키트. 샴푸바, 린스바, 바디&페이셜바로 구성되어 있다. ⓒ Donggubat Inc.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지속 가능한 일상을 위한 노력
동구밭은 회사 밖에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 동구밭은 2021년 10월 서울 강동구 암사동 광나루한강공원에 400그루의 나무를, 이듬해 11월에는 산불 피해 지역인 강원도 강릉시에 1,250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2022년과 2023년 6월에는 산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피해목으로 인센스 홀더를 제작해 보급하기도 했다.
장애인의 날과 장애인 직업 재활의 날에도 캠페인을 진행한다. 지난 4월에는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 화장실 이용 인식개선을 위한 ‘모두의 화장실’ 캠페인을 전개했다. 캠페인 기간 내 특정 제품 매출의 1%를 기부하고, 서울시와 함께 수리가 필요한 공공 장애인 화장실을 개‧보수하기로 한 것이다. 이외에도 연중 많은 기업과 지속 가능 발전(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 ESG) 관련 협업을 기획‧진행하고, 사회복지단체에 물품 기부도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구밭은 직원의 50% 이상을 발달장애인으로 고용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더불어 발달장애인 고용 문제에 관심을 두고, 해결에 동참하는 회사가 더 많아지도록 본보기가 되고자 노력한다. 이를 위해 일반 회사에서 직원 능력을 발굴하고 적재적소에 투입하듯 동구밭은 발달장애인이 어떤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검토 및 연구하고, 그들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박상재 공동대표는 “발달장애인 고용에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선 장애인 직원만을 무조건 배려하거나 비장애인 직원을 역차별해선 안 된다. 강요가 아닌 설득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한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없는 브랜드 동구밭의 비누바를 만드는 모습. ⓒ Donggubat Inc.
“동구밭이 사회에 큰 변화를 이끌었다고는 아직 생각하지 않습니다. 갈 길이 멀죠. 다만 화장품, 생활용품 패키지나 기업 대표 명함에 점자가 인쇄되기 시작한 것을 두고 업계 사람들은 ‘동구밭 덕분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뿌듯합니다. 앞으로도 동구밭은 더 많은 발달장애인을 고용하고, 그들이 일할 수 있는 가능성과 사회의 관심을 키울 것입니다.”
스스로를 ‘마을 어귀’라고 칭했듯 동구밭의 노력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지속 가능한 일상을 만드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인간과 동물, 환경 등. 드넓은 동구밭 안에서 수많은 가치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날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