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ck by Brick
2025 SUMMER
조경가 정영선, 모두를 존중하는 조경
한국의 1세대 조경가 정영선(Jung Young-sun)은 서구에서 시작된 조경이란 개념을 한국의 땅과 기후, 그리고 한국인의 삶의 방식에 맞게 정착시킨 인물이다. 그녀의 대표작들은 자연과 인간, 장소와 시간이 서로를 존중하며 공존하는 풍경을 그려낸다. 그녀는 조경을 아름다움을 설계하는 기술이 아니라 모두의 삶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실천으로 여기며, 그 실천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겸허한 태도에서 출발한다.
원다르마센터는 원불교가 미국 포교 활동을 위해 뉴욕에 건립한 시설이다. 건축물과 경관이 하나의 유기체로 어우러지며 상생의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광활한 대지의 기존 질서를 그대로 존중해 설계되었다. 원다르마센터 제공
정영선과 그녀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2024)에서 ‘조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국토’이다. 그녀가 말하는 국토는 지정학적 범주나 경제적 개념이 아니다. 그녀는 국토를 시간과 기억, 생명과 감각이 중첩된 살아 있는 풍경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은 언제나 장소의 맥락을 읽는 것에서 출발하며, 이는 곧 국토를 구성하는 각각의 장소들이 지닌 고유성과 관계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1941년생인 정영선은 한국의 1세대 조경가이다. 그녀는 50여 년의 조경 인생 동안 우리 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자생종의 생물 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 하퍼스 바자 > 코리아 제공, 사진 표기식
정다운(Jung Dawoon) 감독의 다큐멘터리 < 땅에 쓰는 시 >의 한 장면. 선유도공원은 산업 시설물이었던 정수장을 다양한 공간적 체험이 가능한 장소로 탈바꿈시킨 사례이다. © 영화사 기린그림(Giraffe Pictures)
국토에 대한 인식
정영선에게 국토는 채워야 할 공간이 아니라, 비우고 들여다봐야 할 장소다. 그녀는 무분별한 도시화와 균질화된 개발이 국토의 고유한 풍경을 지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맞서 그녀는 조경을 통해 국토의 본래 결을 되살리고, 그 안에 스며 있는 역사와 생태, 사람의 흔적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다가간다.
서울식물원은 이러한 태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사례 중 하나다. 이 프로젝트에서 그녀는 기존의 습지와 수로, 버드나무 숲을 존중하며 인공적인 개입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흐름을 따라 정원을 구성했다. 관람객은 정형화된 식재가 아닌, 물과 식물이 어우러진 생태적 흐름을 경험하면서 국토의 원형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서울식물원은 다양한 식물 종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한편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도시의 일상적 공간에서 벗어나 어딘가 다른 곳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어졌다. 조경설계 서안(SeoAhn Total Landscape) 제공
이와 더불어 여의도샛강생태공원에도 정영선의 국토 인식이 스며 있다.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인 여의도에는 초고층 빌딩숲이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도회적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여의도 가장자리를 따라 흐르는 샛강 일대는 한때 콘크리트 제방에 갇혀 방치된 수로였으며, 생태적으로는 죽어 있는 공간에 가까웠다. 그녀는 이곳을 녹지 공간으로 만드는 데에서 나아가 본래의 자연성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도시와 생태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기존의 인공 구조물을 걷어내고, 샛강의 수질 정화와 호안 조성을 통해 강과 습지가 스스로 기능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 생태적 복원뿐 아니라 사람들의 접근성도 중요하게 여겼다. 행인들이 무심코 지나치던 둑길과 철로 주변을 걸으며 산책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고, 야생 식물과 조류가 살아 숨 쉬는 곳에 인간의 감각이 다시 접속할 수 있도록 연결 통로를 열었다. 이는 그간 잊혔던 국토성과 자연성이 어떻게 되살아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정영선은 국토를 감각과 경험의 장으로도 인식한다. 그녀는 땅을 걷고, 만지고, 냄새 맡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총체적 감각으로 국토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조경은 이러한 감각을 다시 연결하는 실천이며, 국토는 그러한 감각의 무대가 된다. 감각의 회복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옥상 정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녀는 문화 시설의 옥상이라는 비일상적 조건에서도 땅과 하늘, 바람과 식물, 사람의 움직임이 얽히는 생생한 풍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방문자들은 옥상 위에 펼쳐진 ‘대지’를 걸으며, 이곳이 위치한 광주라는 도시의 역사성과 자연의 숨결을 감각적으로 체험한다. 이는 단순히 흙이 깔리고 한국 고유의 수종이 식재된 정원이 아닌, 국토적 풍경의 수직적 확장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정영선이 말하는 국토는 ‘국가의 땅’이 아니라 삶과 시간, 감각과 기억이 쌓인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녀는 조경가의 역할을 단지 땅 위에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존재하던 것들을 다시 보이게 하고,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일로 파악한다. 국토는 그녀에게 있어 언제나 ‘다시 읽어야 할 시’이며, 조경은 그 시를 낭독하는 또 하나의 언어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은 빌딩 숲 사이에서 숲과 습지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조류학, 곤충학, 어류학, 식물학 등 각계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아 한강 변에서 가장 생태적인 공간으로 거듭났다. © 서울관광재단
공공성과 정치성
정영선은 조경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공공의 장소’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화려하고 기념비적인 공간이 아니라 걷고, 쉬고, 머물 수 있는 공간 말이다. 그녀는 그것이 조경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한다. 특히 그녀는 조경의 ‘정치성’에 주목한다. 즉, 조경은 사회의 구조와 권력의 흐름, 일상의 불균형을 드러내고 조율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의 프로젝트에서는 언제나 사용자의 관점이 중심이 된다. 벤치 하나, 나무 하나, 길 하나까지도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떻게 쓰일 것인지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특히 공공 프로젝트에서 이런 태도가 더 두드러진다. 특정한 계층의 미감을 위해 공간을 계획하기보다 누구나 평등하게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정영선은 조경을 공공성과 가장 깊이 맞닿아 있는 디자인 영역으로 본다. 그녀의 설계는 늘 사용자에 대한 세심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앉을 수 있고, 누구나 지날 수 있으며, 누구나 머무를 수 있는 장소. 그는 “조경은 삶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공간”이라 말한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조경, 누구에게도 편파적이지 않은 조경 말이다.
이러한 철학은 서울 곳곳의 공공 프로젝트에서 구현되어 왔다. 그녀는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경이 도시 속에서 어떻게 권력과 시선을 분산시키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며, 사회적 대화를 가능케 하는지를 고민한다. 조경을 사회를 조율하는 하나의 장치로 다루는 것이다.
정영선의 작업이 조용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 안에 기술을 넘어선 태도와 철학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조경은 그녀의 손에서 ‘풍경을 디자인하는 일’이 아니라, ‘삶을 위한 여백을 마련하는 일’로 확장된다.
복합 문화 시설인 예술의전당 설계를 위한 모형. 1980년대에는 경제 성장에 따른 생활 방식의 변화로 다양한 문화 기관과 레저 시설이 계획됐다. 특히 예술의전당은 여가 활동을 위한 장소를 조성하는 데 있어서 조경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한국적 조경
정영선의 작업에는 늘 묵직한 질문이 깔려 있다. “조경이란 무엇인가, 한국에서 조경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그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의 작업 속에서, 그리고 자연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 속에서 풀어내고자 노력해 왔다. 그녀의 철학은 2023년 세계조경가협회(International Federation of Landscape Architects, IFLA)로부터 제프리 젤리코 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주최 측은 선정 이유에서 “서양에서 유래한 조경의 낯선 개념을 한국적 토양과 경관에 맞게 해석했다”고 밝혔다. 이는 정영선이 보여준 조경적 감각이 단지 지역적 특색을 덧붙이는 토속주의가 아니라, 장소의 본질과 관계를 섬세하게 짚어내는 방식으로 조경의 세계적 언어를 갱신한 것임을 의미한다.
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호암미술관의 전통 정원 희원은 정영선이 전통적 요소를 본격적으로 구사하게 된 전환점이었다. 화계, 연못, 담장, 정자 등의 건축적 요소와 더불어 한국 전통 정원의 미의식이 곳곳에 구현되었다. © 호암미술관
그녀는 ‘한국적 조경’에 대해서 “조경은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야 한다”고 자주 언급한다. 건물, 나무, 물길, 동선 등 각각의 요소들은 그 자체로 목적을 갖기보다는 근경, 중경, 원경으로 이어지는 시선의 흐름과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다. 이때 그녀가 중시하는 개념이 바로 차경(借景)이다. 차경은 말 그대로 외부 자연 경관을 정원의 일부처럼 끌어들이는 전통적인 조경 기법이지만, 정영선에게 그것은 단순한 시각적 수법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태도, 자연을 향한 겸허한 시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영선의 조경은 흔히 말하는 ‘전통 재현’과는 다르다. 그는 전통의 형태나 상징을 복원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 한국인의 경관 인식과 자연관, 삶의 태도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구성한다. 그녀가 받은 제프리 젤리코 상은 단지 한 개인의 성취를 기리는 것이 아니다. 조경이라는 서양 중심의 공간 개념이, 한국의 경관과 철학 속에서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세계에 보여준 결과였다. 정영선은 자신의 설계가 “자연이 말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은 언제나 눈에 띄지 않지만, 자연이 항상 드러난다.
그녀의 작업은 땅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과 다시 관계 맺을 수 있도록 장면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녀는 그렇게, 오늘날의 땅 위에 담 너머 풍경의 조용한 아름다움을 다시 불러온다.
제주도에 위치한 오설록 티뮤지엄은 아모레퍼시픽이 차 문화를 소개하고 확산하기 위해 건립한 박물관이다. 정영선은 건축물 주변으로 제주의 차밭과 자연이 서로 어우러질 수 있도록 정원을 조성했다. © 김용관(Kim Yong-kw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