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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ertainment

미국 코믹스 업계의 한국인 크리에이터들

Entertainment 2026 SUMMER

미국 코믹스 업계의 한국인 크리에이터들 슈퍼 히어로는 더 이상 서구만의 문화적 현상이 아니다. 한류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한국인 크리에이터, 아티스트, 캐릭터들이 미국 코믹스의 세계에서 꾸준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들은 독보적인 비주얼 스타일과 내러티브 방식으로 코믹스 장르의 판도를 바꾸어 나가는 중이다. 짐 리 DC 코믹스 회장부터 차세대 아티스트와 커버 일러스트레이터에 이르기까지, 한국인 크리에이터들은 글로벌 슈퍼 히어로 산업의 창작 세계를 함께 넓혀가고 있다. 마블 코믹스의 한국인 슈퍼히어로 팀 타이거 디비전. 자세히 들여다보면 태극 문양 등 한국을 상징하는 다양한 요소와 디테일들을 발견할 수 있다. ⓒ 정민규 슈퍼 히어로는 현대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 중 하나가 되었다. 한때 코믹북이라는 틀 안에만 머물렀으나, 이제는 영화와 비디오 게임은 물론 패션과 스포츠 굿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디어와 소비재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한국 프로농구 유니폼에도 사용되는 등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슈퍼 히어로 프랜차이즈의 독주는 (2008)을 시작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탄생하면서 빠르게 진행됐다. 영화는 오래전부터 대중문화를 전파하는 촉매 역할을 해오긴 했지만, 슈퍼 히어로 장르를 통해 그 영향력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에서 전설적인 토니 스타크를 연기한 이후, 슈퍼 히어로와 빌런은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에서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 수십 억 달러 규모의 코믹스 산업의 기반은 바로 코믹북이다. 한때는 아이들이나 즐기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으나, 이제는 다양한 전통을 가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매체가 되었다.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고유한 만화와 그래픽 노블을 발전시켜 왔으며, 각각의 방식으로 현대 대중문화에 기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DC와 마블 같은 미국 코믹북 출판사들은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고, 세대와 국경을 넘어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현대판 신화와 전설을 탄생시켜 왔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문화가 세계 무대에서 그 위상이 높아진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이제 한국 문화가 전 세계에 소개될 때는 거의 항상 ‘K-’라는 접두사가 붙는다. K-팝, K-드라마, K-뷰티, K-패션, K-푸드 등 종류도 다양하다. ‘한류’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90년대였다. 당시는 해외 무대에서 국내 바둑 기사들이 두각을 나타내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한류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한국 드라마와 K-팝이 동아시아를 휩쓸면서부터였다. 이후, 2012년 싸이의 이 인기를 얻으면서 수십 년간 그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한류의 이러한 광범위한 영향력을 생각하면, 미국 코믹스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고 김정기 작가는 즉흥 라이브 드로잉 퍼포먼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세밀하고 생동감 넘치는 작업의 밑바탕에는 그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성이 있었다. ⓒ 연합뉴스 코믹북 스토리텔링의 다양성 미국 코믹스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계 인물은 단연 짐 리 DC 코믹스 회장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다섯 살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교양 과목으로 미술 수업을 수강하면서 그림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났다. 졸업 후 일러스트레이터의 길을 택한 그는 현대 미국 코믹스 산업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1987년 마블 코믹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1990년대 초 이미지 코믹스와 와일드스톰 프로덕션을 공동 창립하고, 이후 마블로 돌아갔다가 1998년 DC 코믹스에 합류하기까지, 그는 가장 성공적이고 오래 사랑받는 슈퍼 히어로 시리즈들의 부활과 확장에 있어 많은 역할을 했다. X-맨, 아이언맨, 판타스틱 포, 배트맨, 슈퍼맨을 비롯한 수많은 캐릭터를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하며, 현대 슈퍼 히어로 코믹스의 비주얼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바로 고 김정기다. 그는 탁월한 라이브 드로잉 실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고도로 세밀한 도시 풍경과 방대한 액션 장면을 즉흥적으로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영향력은 그의 방식을 배우고 코믹스, 영화, 게임 제작 현장에서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수많은 아티스트, 일러스트레이터, 콘셉트 디자이너들을 통해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2023년 경기도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문을 연 김정기뮤지엄은 그의 예술 세계와 창작 정신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의 업적만으로도 책 한 권을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다. 또한, 이들의 성과는 이미 전 세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되고 기록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수많은 한국인 및 한국계 미국인 크리에이터들이 업계에서 선구적인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렉 박, 재 리, 마이크 최, 프랭크 조, 앤디 박이 대표적이다. 앤디 박은 코믹북 아티스트보다는 마블 스튜디오의 비주얼 개발 디렉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현대 코믹스에 담겨 있는 목소리와 관점의 스펙트럼을 한층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배트맨이 한국을 찾아 악을 응징하는 이야기를 담은 『배트맨: 더 월드』의 한 장면. 전인표가 스토리를, 박재광이 그림을 맡았다. ⓒ 전인표, 박재광 현재 활동 중인 코믹북 아티스트 미국 코믹북의 제작 방식은 동아시아나 유럽의 모델과 상당히 다르다. 한국, 일본 등의 국가에서는 크리에이터 한 명이 글과 그림을 모두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미국에서는 코믹북 제작이 보통 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작가가 스크립트를 쓰면 펜슬러가 밑그림을 그리고, 잉커가 선을 다듬고, 컬러리스트가 색을 입히고, 레터러가 대사와 효과음을 페이지에 녹여낸다. 한 권을 완성하는 데 최소 대여섯 명의 손길이 필요한 셈이다. 이러한 분업 체계 덕분에 미국 코믹북 기업들은 거의 90년 동안 빡빡한 발행 일정(보통 시리즈당 월 1권, 24페이지 분량)을 유지하면서도 수많은 시리즈를 꾸준히 선보일 수 있었다.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국인 아티스트 중 하나가 정민규다. 마블에서는 『스타워즈: 닥터 아프라』와 『매그니피센트 미즈 마블』을, DC에서는 『나이트윙』과 『시티 보이』를 작업했으며, 『시티 보이』의 경우 그렉 박과 함께 공동 창작했다. 또 한 명의 주목할 만한 아티스트는 박재광이다. 그는 김정기처럼 라이브 드로잉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배트맨: 더 월드』와 그 후속작 『조커: 더 월드』에 참여했다. 전인표는 대기업 프로그래머라는 안정적인 커리어를 접고 작가의 길을 택했으며, 이 두 프로젝트에서 박재광과 함께 작업하며 DC의 아이코닉한 캐릭터들을 한국적 배경과 문화적 맥락 속에 녹여낸 단편 작품들을 썼다. 그는 현재도 한국인 크리에이터들과의 협업을 이어가며 새로운 스토리들을 탐색하고 있다. 2024년 출간된 『키드 저거너트: 마블 보이스 인피니티 코믹 #1』의 표지. 마블 유니버스에 새롭게 합류한 또 한 명의 한국인 캐릭터를 선보였다. 정민규가 그림을 그리고, 마이클 위감이 채색을 맡았다. ⓒ 정민규, 마이클 위감 커버 아티스트의 부상 미국 코믹스의 협업 제작 방식으로 인해 최근 그 중요성이 부쩍 커진 분야가 있다면 바로 커버 아티스트다. 코믹북 독자층이 청소년을 넘어 더 넓은 연령대로 확장되면서, 출판사들은 새로운 매출 증대 전략을 고민했다. 그중 하나가 배리언트 커버의 도입이었다. 같은 호에 여러 가지 버전의 표지 디자인을 함께 발행하는 방식이다. 이 표지들은 본편의 장면을 담기보다 독립적인 일러스트 작품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아, 컬렉터들이 여러 판본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한국인 아티스트들은 이 분야에서 특히 큰 활약을 하고 있으며, 우나영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시각적 모티프와 현대 슈퍼 히어로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 하는 그녀의 일러스트는 단연 눈길을 끈다. 엄규용, 이지형, 이인혁 등 실력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들도 전 세계 코믹북 독자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개성 있는 시각으로 서양의 비주얼 문화를 재해석해 미국 코믹스에 새로운 색채를 더하고 있다. 관능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매력을 담아낸 블랙 캣. 커버 아티스트 이지형이 그린 마블 코믹스의 한정판 파인아트 프린트이다. ⓒ 이지형 전통의 확장 한국인 크리에이터들의 약진은 캐릭터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 혹은 한국에서 영감을 받은 슈퍼 히어로들이 마블과 DC 유니버스 안에서 점점 더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실크, 루나 스노우, 태극기, 시티 보이, 아마데우스 조(토털리 어썸 헐크)와 같은 캐릭터들은 주류 슈퍼 히어로들의 내러티브 속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다양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벤져스나 X-맨과 유사하게, 주로 한국인 슈퍼 히어로들로 구성된 마블의 타이거 디비전 역시 이러한 트렌드를 잘 보여준다. 머지않아 한국인 슈퍼 히어로가 스크린에 데뷔하는 날도 올 듯하다. 미국 코믹스는 영화, TV, 팬 행사, 코스튬 플레이, 게임, 피규어 등과 함께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으며, 그 문화적 영향력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 크리에이터들은 이제 이 생태계의 중요한 일원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팝 아트 형식 중 하나인 코믹스에 새로운 예술적 접근과 서사, 캐릭터를 더해가고 있다. 슈퍼 히어로의 역사는 언제나 변화와 재창조의 연속이었다. 이제 점점 더 많은 한국의 크리에이터들이 새로운 흐름을 써 나가는 데 동참하고 있다.

스포츠 활성화 이끄는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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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활성화 이끄는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 과거, 국내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은 웃음과 재미를 주는 일반적 예능 프로그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스포츠 자체를 변화시킬 정도의 영향력을 갖기 시작했다. 팬덤을 결집시키고, 그 저변을 확산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종목을 부활시키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왼쪽부터 MBC의 여자 배구 예능 프로그램 , 축구를 소재로 한 SBS의 , 은퇴한 야구 선수들과 아마추어 야구팀의 대결을 담은 JTBC의 포스터. ⓒ MBC ⓒ SBS ⓒ JTBC 2025년 한국 예능 프로그램 중 최고의 화제작은 단연 이다. 이 프로그램은 세계적인 배구 스타 김연경이 은퇴 후 신인 감독에 도전하는 과정을 담았다.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낳으며, 제62회 백상예술대상 방송 부문에서 예능 작품상을 받는 등 다수의 상을 거머쥐었다. 비록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루어진 도전이었지만, 그녀는 사력을 다했다. 2부 리그가 없어 1부 팀에서 밀려나면 은퇴할 수밖에 없는 한국 여자 배구계의 현실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 밀려난 선수들로 ‘원더독스’라는 팀을 만들었다. 국내 프로 배구 여자부에는 현재 7개 팀이 운영되고 있는데, 김연경은 ‘언더’에서 ‘원더’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팀명에 담으며 원더독스가 제8 구단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프로그램 초반에는 팀워크가 생기지 않아 흔들리는 모습도 보였지만, 원더독스는 회가 거듭될수록 성장하며 진가를 발휘했다. 그리고 2024~2025 시즌, 프로 통합 준우승팀 레드스파크스와 우승팀 핑크스파이더스를 모두 꺾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줬다. 서사가 있는 예능 이 프로그램은 스포츠 예능임에도 실제 여자 배구에 영향을 미쳤다. 은퇴했던 선수들 중 몇몇은 프로팀과 실업팀에 입단해 다시 현역으로 뛰게 됐고, 감소 추세이던 여자 배구의 팬들이 급증했다. 관중들을 초청해 치른 마지막 경기는 3일 만에 약 1만 명이 신청해 전석이 매진될 정도였다. 스포츠 예능이 스포츠 자체를 부활시키는 힘을 발휘한 것이다. 이런 성공이 가능했던 건 스포츠 예능만이 구현할 수 있는 영상 연출과 스토리텔링 때문이었다.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선수들 개개인에게 마이크를 채움으로써 생생한 현장 상황이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었다. 또한 예능적으로 편집된 경기는 마치 한 편의 스포츠 영화를 보는 듯한 드라마틱한 성장 서사를 그려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부각됐고, 스타가 탄생했으며, 이들의 팬덤이 형성됐다. 또한 세계 정상급 선수였던 김연경 감독의 절묘한 전략과 전술에 따라 변화무쌍한 결과가 나타나는 과정을 방송으로 지켜본 팬들은 비로소 여자 배구의 묘미를 알게 됐다. 그들은 자연스레 실제 프로 리그 경기장을 찾는 관객이 됐다. 처럼 스포츠 예능이 해당 종목을 부활시킨 사례는 이미 2019년에도 존재했다. 당시 KBS2가 방영했던 은 한때 국민 스포츠로 불렸지만 그저 추억이 되고 만 씨름의 꺼져가는 불씨에 활활 불을 지폈다. 경량급인 태백(몸무게 80㎏)과 금강(몸무게 90㎏) 체급의 씨름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이 프로그램은 씨름에 아이돌 서바이벌 오디션 같은 연출을 덧붙였다. 잘생긴 외모에 탄탄한 몸을 가진 젊은 선수들의 매력과 개성이 방송을 타면서 팬덤이 생겨났다. 또한 기존 씨름 중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이내믹한 영상 연출이 박진감을 더했다. 아쉽게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파이널 매치는 경기 당일 무관중으로 치러졌지만, 티켓은 순식간에 전석이 매진되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스포츠 인구의 저변 확대 의 한 장면. 각 분야의 여성 연예인들이 축구팀을 결성해 리그를 펼치는 프로그램이다. 경기력 향상을 위한 훈련과 치열한 리그 운영이 시청자들을 몰입시키며 큰 호응을 얻었다. ⓒ SBS 이제 스포츠 예능은 더 이상 과거처럼 재미에만 집중하려 하지 않는다. 스포츠 종목 자체의 매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여러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들이 증명했기 때문이다. 한국 프로야구의 레전드로 불리는 김성근 감독과 은퇴한 선수들이 모여 실전 경기를 치르는 가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2022년 시작해 올해 초 138부작으로 종영된 이 프로그램은 특별한 연출 없이 야구 경기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을 불러 모았다. 상대적으로 비인기 종목인 여자 축구 붐을 불러일으킨 SBS의 (2021)도 마찬가지다. 여러 팀이 맞붙어 싸우는 경기 과정에서 성장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이 프로그램과 함께 tvN의 은 여성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2024년 첫 번째 시즌에서는 배우와 가수로 구성된 등장인물 4인이 철인3종 대회에 도전하기까지의 여정이 그려졌고, 이듬해 두 번째 시즌에서는 복싱 챔피언에 도전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여성들이 주축이 된 스포츠 예능은 실제 여성 스포츠 동호인들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던 축구와 야구, 복싱 같은 스포츠에 일반 여성들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스포츠 예능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면서 대중적인 스포츠 종목에도 변화가 생겼다. 과거 한국의 스포츠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가 대항 이벤트가 벌어질 때만 각광을 받았다. 인기 종목과 비인기 종목의 편중 현상도 뚜렷했다. 하지만 최근 대중들의 스포츠 취향은 훨씬 다양해졌다. 이 같은 현상에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들이 일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단순히 관람에 그치지 않고 직접 참여하는 생활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최근 글로벌 트렌드로 자리 잡아 한국에서도 붐이 일고 있는 러닝이 대표적이다. 저변이 넓어지면서 이제는 마라톤 같은 달리기 이벤트가 지자체의 홍보와 수익 모델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러닝 열풍을 반영한 프로그램도 방영됐다. 웹툰 작가인 기안84가 출연해 극한의 마라톤 도전기를 보여주는 가 바로 그 프로그램이다. 기안84가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랑스를 비롯해 북극에서 열리는 이색적이면서도 극한의 인내를 요구하는 마라톤에 참여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시청자들의 운동 욕구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국민 건강 증진에도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대중의 인식 전환 는 출연자들이 극한의 마라톤 환경에서 자신을 시험대에 올리고, 끝까지 도전해 내는 과정을 그린 예능 프로그램이다. 단순한 예능적 재미를 넘어,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진솔하고 묵직하게 담아내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 MBC 스포츠 예능은 또한 스포츠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도 바꿔놓고 있다. 과거에 한국은 엘리트 체육 위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포츠 중계 역시 몇몇 인기 종목에만 한정돼 있었고, 승패와 기록에만 주목했다. 그러나 스포츠 예능은 ‘성과주의’에서 벗어나 ‘과정’ 자체를 조명한다. 경기에서 지더라도 선수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역경을 어떻게 극복하고 성장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바라본다. 팀 스포츠의 경우에는 선수들 간 관계도 중요한 서사의 포인트다.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는 과정을 통해 팀이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스포츠 예능은 밀착한 카메라를 통해 담아낸다. 스포츠 예능이 스포츠 자체에 영향력을 미치게 된 데는 갈수록 늘고 있는 팬덤 소비의 경향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프로야구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건 젊은 여성 관중이 늘어난 것이 주요인이다. 여성 관객들은 스포츠 예능 같은 팬덤 콘텐츠의 등장과 더불어 급증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모든 걸 쏟아 넣는 취향을 가진 팬덤이 스포츠 분야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팬덤의 다양한 욕구를 채워주는 스포츠 예능은 앞으로도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K-팝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Entertainment 2026 SPRING

K-팝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2025년 6월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는 전 세계 모든 연령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경이로운 영향력을 보여줬다.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중 하나인 이 제68회 그래미 어워즈 ‘베스트 송 리튼 포 비주얼 미디어’ 부문에서 수상하는가 하면, 가상 걸그룹 헌트릭스가 제79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축하 무대를 꾸몄을 정도로 이 영화의 인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올해 1월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튼호텔에서 열린 제83회 골든글로브 어워즈에서 매기 강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가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 2관왕을 차지했다. 수상 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오드리 누나, 이재, 레이 아미(왼쪽부터). ⓒ 연합뉴스 의 성공은 ‘성공’이라는 말로 부족하다. 가히 ‘현상’이라 할 만한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넷플릭스가 가지고 있던 기존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웠다. 우선 넷플릭스 최초로, 불과 공개 13주 차에 조회수 3억 회를 돌파했다. 이후 예정된 수순처럼 넷플릭스 역대 통합 조회수 1위에 올랐으며, 한번 탄력을 받은 누적 시청 그래프는 좀처럼 꺾일 줄 몰랐다. 아무리 늦어도 공개 3개월 정도가 지나면 상승세가 점차 둔화하는 일반적 흥행 패턴과는 차원이 다른 기세였다. 명확한 선과 악 구도, 빠른 이야기 전개, 매력적인 캐릭터 등 이 작품에는 대중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선호할 만한 요소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두를 한데 묶어 사람들을 모니터 앞에 오래 잡아둘 수 있게 만든 건 단언컨대 음악의 힘이었다. 그래서 의 흥행은 어쩌면 여타 애니메이션 영화보다 더핑크퐁컴퍼니의 대표 음원 ‘핑크퐁 아기 상어’와 비교하는 게 어울릴지도 모른다. 의 를 비롯해 이런 노래들은 특히 10대 이하 어린이와 청소년 시청자의 마음을 빠르게 사로잡았다. K-팝에 관한 진심 같은 노래나 영상을 반복 청취 및 시청하는 데 익숙한 시청자층의 열광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졌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계속해서 위기설에 시달리는 영화관에 가 직접 등판한 것이다. 그것도 작품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싱어롱 상영’의 형태로 말이다. 2025년 8월 23일 북미에서만 1,700개가 넘는 극장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약 1,000개 상영관을 매진시켰고, 개봉하자마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K-팝을 테마로 한 일종의 뮤지컬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싱어롱 이벤트가 이 작품과 궁합이 잘 맞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주인공 루미처럼 긴 보라색 머리를 하나로 땋고, 첫 곡 부터 영화의 하이라이트 까지 쉼 없이 고조된 분위기로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의 모습을 전하는 외신이 하루가 멀다고 전해졌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시작은 K-팝이었다. K-팝을 진심으로 좋아해 온 사람들 중 상당수는 라는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K-팝의 위력에 편승하려는 마케팅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K-팝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음악 자체보다는 K-팝이 보유한 팬덤의 폭발적 에너지를 탐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콧대 높은 영미권 미디어도, 긴 역사를 가진 유수의 음악 시상식도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던 그 힘은 아군과 적군을 전부 빨아들일 정도로 강력한 자기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K-팝 팬덤은 잿밥에만 관심 있는 이들에게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니었다. 하지만 는 그런 사례들과 확실히 달랐다. 작품을 보면 알았다. 사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단순하다. 비밀을 숨긴 히어로가 사연 있는 적을 만나 서로 교감하다 결국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한다는 이야기.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마음을 주었던 전형적인 히어로물의 공식이다. 다만 그 모두를 감싸는 포장지가 달랐다. 영화 곳곳에 나타난 K-팝과 한국 문화, 익숙한 서울 풍경까지 어디 하나 제작진의 진실된 마음이 어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상적 걸그룹의 재현 스토리만 보면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작품의 개성과 캐릭터의 독자성은 어디까지나 K-팝의 몫이었다.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대대로 이어온 역사와 전통의 ‘데몬 헌터’ 3인조 그룹의 면면부터 보자. K-팝,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짧은 시간 스쳐가는 그들이 누구를 모티프로 삼았는지 단번에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한국 걸그룹의 원조격으로 불리는 김시스터즈, 국내 최초의 댄스 걸그룹 세또래 또는 3인조 1세대 걸그룹 S.E.S.를 지나 태어난 ‘헌트릭스’는 한 치의 오차 없이 K-팝 걸그룹의 이상적 모습을 재현했다. 영화를 보며 유쾌하면서도 감성적인, 소탈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가족과 다름없는 단단한 자매애로 똘똘 뭉친 그들을 좋아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헌트릭스는 영화 내내 노래하고 춤춘다. 라이벌 그룹 사자보이즈도 마찬가지다. K-팝 아이돌 그룹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K-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하다. 에서 신인 보이 그룹의 필수 코스인 ‘청량 콘셉트’를, 에서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했다’ 선언하던 수많은 보이 그룹을, 에서 숨겨둔 카리스마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걸그룹을 떠올리지 않은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심지어 이 노래들 속에는 2020년대 들어 ‘케이팝 세계화’에 눈이 먼 ‘이지리스닝’ 유행 사이로 자취를 감춰 버린 K-팝의 그리운 원형이 하나씩 숨어 있었다. K-팝 팬들 사이에서 ‘교수님들의 조별 과제’라는 반응이 괜히 등장한 게 아니었다. 이 말은 ‘K-팝을 수십 년 연구한 전문가들이 팀을 이뤄 과제를 제출한 것 같은 수준’이라는 뜻으로, 그만큼 완성도가 높았음을 의미한다. K-팝의 정수를 담은 OST 의 OST는 가상의 아이돌 그룹들이 부른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K-팝 스타들을 뛰어넘는 음악적 성과를 거두며 돌풍을 몰고 왔다. ⓒ 넷플릭스 K-팝의 숨은 ‘오리지널리티’까지 놓치지 않은 OST의 주역은 더블랙레이블이다. 빅뱅, 2NE1, 블랙핑크를 프로듀싱하며 YG엔터테인먼트를 K-팝 3대 기획사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프로듀서 테디가 설립한 바로 그 레이블이다. 2021년부터 YG 산하에서 독립해 독자적 활동을 선언함과 동시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 프로젝트를 만난 셈이다. 앨범에 참여한 프로듀서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 영화가 무척이나 즐거운 프로젝트였다고 말한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협업과 K-팝의 성공 공식, 그 가운데에서도 빅뱅, 2NE1 등을 통해 영미권을 중심으로 좋은 반응을 가장 빨리 얻어본 이들의 에너지가 모인 셈이었다. BTS나 블랙핑크 같은 대형 그룹이 아니면 좀처럼 흥행이 쉽지 않다고 하는 북미에서 OST가 유독 좋은 반응을 이끈 이유이기도 했다. K-팝 성공 공식을 꿰고 있는 이들을 등에 업은 프로젝트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현상’에 있어 OST의 인기는 작품 그 이상이었다.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 8주 1위를 자랑하는 타이틀 곡 을 중심으로 OST의 거의 전곡이 사랑받았다. 앨범 가운데 8곡의 수록곡이 빌보드 100위 권에 동시에 진입하는 진풍경 가운데 3곡은 무려 톱 10에 이름을 올렸다. 힘이 빠지려나 싶을 때마다 음악과 영화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화제성을 견인했다. 골든 글로브도, 아카데미 시상식도, 그래미 시상식도 모두 참지 못하고 의 손을 들었다. 덕분에 2026년 상반기까지도 의 인기는 쉽게 식을 것 같지 않다. K-팝은 지금까지 ‘특정 팬덤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쌓아 올린 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K-팝이 낯선 이들에게 팬덤은 어디까지나 경외의 대상이었다. 세상은 그들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보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까지 사랑하게 만드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K-팝의 정수에서 뽑아낸 순정한 에너지가 그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손끝에서 영화가, 음악이 되어 더 먼 곳으로 뻗어가고 있다. 이해의 영역에만 존재하던 K-팝은 이제 서서히 수용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지금부터 시작될 K-팝의 이야기는 분명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젊은 거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Entertainment 2026 SPRING

‘젊은 거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2025년 10월 개봉한 영화 은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젊은 감독 윤가은이 6년 만에 선보인 신작이다. 한층 성숙해진 감독의 연출력과 등장인물들의 연기력에 호평이 쏟아지며, 평단과 관객들에게 두루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영화인들과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영화 관람을 독려하는 이례적인 일도 벌어졌다. 2025년 10월 개봉한 윤가은 감독의 은 평단과 관객들에게 두루 호평을 받으며, 낭트 3대륙 영화제 대상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거머쥐었다. ⓒ 바른손이엔에이 은 키스 장면을 상상하게 하면서 시작한다. 관객들은 검은 화면에서 들려오는 음향이 누군가가 키스하며 내는 소리라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비어 있던 스크린은 곧장 흥분한 연인의 얼굴로 채워진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두 남녀, 그중에서도 여자아이에게 맞춰진 초점은 이렇게 자신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이 소녀의 격정을 전부 받아낼 준비를 마쳤습니다.’라고. 이 선언은 윤가은 감독의 전작을 아는 이들에게 더 또렷하게, 마치 전작에 보내는 작별 인사처럼 들렸을 것이다. ‘키스’라는 행위는 과거 윤가은의 영화 속 풍경들과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윤가은 감독은 걸출한 데뷔작 (2016)과 후속작 (2019)은 물론 그 이전에 제작한 (2011)이나 (2013) 같은 단편들에서도 아이들이 친구, 가족, 사회와 맺는 관계를 들여다보는 데 중점을 뒀다.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묘사한 적은 없었다. 순하게 웃고, 말갛게 울며, 자아를 키워가는 유년기에 집중한 것이다. 하지만 여러 인터뷰에서 윤가은 감독은 줄곧 청소년, 특히 여성 청소년의 성과 사랑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밝혔다. 언젠가 자신이 동경해 온 장르인 하이틴 로맨스를 찍을 줄 알았다며 말이다. 영화 전문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그런 풋풋한 작품도 구상해 봤으나 완성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성과 사랑은 어떤 두려움, 공포, 불안, 걱정,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는 무엇이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누가 누구와 입 맞추는 것만으로는 끝맺을 수 없는 이야기가 시나리오로 스며들었다는 뜻이다. 은 그 당혹감에 대한 응답이다. 또 다른 폭력성 열정적인 키스를 마친 주인(서수빈)은 야한 만화를 그리는 친구와 장난친다.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는 아직 모르지만, 담임 교사와 진로 상담을 할 때도 능청스럽다. 집에서는 마술을 연마 중인 남동생, 약간의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는 유치원 원장 어머니와 산다. 아버지의 부재가 이 가족의 흉터와 연관이 있어 보이지만, 세 사람은 주어진 일상을 살 뿐이다. 이처럼 영화는 여느 교실에 하나쯤 있을 법한 씩씩한 인물로 주인을 소개한다. 조금 울퉁불퉁한 면모마저 그 나이에 걸맞은 개성으로 받아들여지도록. 그런데 주인의 급우 수호(김정식)가 교내에서 아동 성범죄자 출소 반대 서명 운동을 벌이고, 주인이 거기에 연명하기를 거부하면서부터 캐릭터에 얽힌 미스터리가 발동한다. 언뜻 문제없이 비치는 이 운동을 향해 거부를 넘어 분노를 표출하는 주인을 보며 관객은 묻고 싶어진다. 주인은 왜 그러는 걸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주인을 날 세우게 한 것은 서명 운동에 쓰인 언어다. 성폭력 피해자의 삶이 ‘파괴된다’는 문장으로 가해자의 복귀를 막으려는 수호를, 주인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자신이 친족 성폭력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서명하지 않음으로써 하고 싶은 말은 간명하다. ‘삼촌이 내게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했어도, 나의 삶은 파괴되지 않았고, 파괴되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의 존엄을 분명히 하는 것을 넘어서 ‘피해자다움’을 해체하려는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주인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학생들 앞에서 고백한 뒤 오해, 의심, 소외의 시간이 따라붙는다. 주인이 받는 익명의 쪽지가 그 상징물이다. 윤가은 감독은 가려진 발신자의 자리에 관객을 초대한다. 피해자를 피해자라는 정체성만으로 이해하려 드는 오만을 지적하다가, 이 영화마저 주인의 진심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물러나기도 한다. 그런 태도를 응축하고 있는 장면이 세차장 시퀀스다. 주인 모녀가 탄 자동차가 거대하고 시끄러운 세차 기계를 통과하는 동안, 주인은 소리를 지른다.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 엄마를 원망하다가, 세상을 나무라다가, 결국 그 모든 혼란을 응축한 존재인 자신을 발산하듯이. 자동차가 깨끗해지는 동안 주인의 음성은 들릴 듯 말 듯 뭉개진다. 영화는 주인의 마음속 얼룩도 조금이나마 지워졌기를 바라며, 엄마의 입을 빌려 말할 따름이다. “한 바퀴 더 돌까?” 중층적 시선 속 인물들은 성폭력이라는 사건을 각기 다른 형태로 통과한다. 누군가는 직접적으로 고통받았고, 누군가는 그의 가족으로서 죄책감을 느낀다. 또 다른 누군가는 비슷한 경험을 했음에도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 없어 두 번 괴롭다. 성폭력은 나와 무관한 타자의 일일 뿐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 모두가 이 영화를 마주한 관객의 속내를 차례로 대변하는 셈이다. 윤가은 감독은 그동안 어린아이들의 시선으로 인간관계와 사회를 그려내며 독자적 영화 세계를 구축해 왔다. 세 번째 장편영화인 은 이전 작품들에서 한 단계 나아가 친족 성폭력을 경험한 고등학교 여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감독의 주제 의식을 한층 확장하고 심화시켰다. ⓒ 바른손이엔에이 윤가은 감독은 익명의 쪽지를 통해 그들 각자가 품을 수 있는 의문까지 재현한다. 주인에게 어찌 그리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느냐고 따지며 조용히 있어 달라고 경고하던 무례함은 영화 끝에서 또 다른 고백으로 이어진다. 나도 너와 같은 일을 겪었다고. 그러나 너와 같이 살 수 없었다고. 너처럼 바로 서기 위해 너를 잊지 않겠다고. 윤가은 감독은 수십 명의 목소리로 마지막 쪽지에 적힌 문장을 관객에게 들려준다. 한 사람으로 특정되지 않는 그 목소리는 다정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내뿜는다. 즉 주인을 위협하던 익명의 목소리는 실은 다른 피해자의 것이었다. 주인도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수호의 동생이자 엄마의 학생인 여자아이를 꼬집어 멍들게 한 적이 있다. 영화는 이 두 가지 사실로써 관객을 시험하는 것만 같다. 피해자가 무결할 때만 연대할 것인가? 성폭력 피해자도 다른 종류의 가해자가 될 수 있지 않나? 주인은 ‘사랑’이 꿈이라고 적었다. 우리는 그 사랑을 함께 이루기 위해 무얼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의 탁월함은 여기에 있다. 포용과 지지 성폭력을 주제로 다룬 기존 영화들이 대체로 사회 고발적 성향을 드러냈던 데 반해 이 영화는 폭력의 순간을 재현하거나 절망의 깊이를 표현하는 대신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 현재의 일상을 어떻게 영위해 가고 있는지 섬세하면서도 비전형적인 시선으로 그려냈다. ⓒ 바른손이엔에이 2025년은 드물게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 모두 나온 해였다. 매해 신작을 발표하는 홍상수 감독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거장의 반열에 오른 예술가들 사이에서, 윤가은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영화 은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한국 영화’로 거듭 호명되었다. 이 영화는 2026년 2월 초 기준, 누적 관객수 약 20만 명을 기록했다. 한국 독립·예술 영화로서는 달성하기 어려운 스코어다. 봉준호, 연상호 등 유명 감독들과 김혜수, 김태리 같은 배우들, 그리고 수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홍보하며 응원하고 지지한 까닭이다. 토론토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바르샤바국제영화제, BFI 런던영화제, 홍콩아시안영화제 등 해외에서도 주목받았다. 평단과 대중의 애정을 두루 얻은 배경에는 성폭력 생존자의 실존을 헤아린 포용력도 있지만, 어렵다는 이유로 지나쳐 온 이야기를 툭 꺼내놓은 용기를 향한 지지도 있을 것이다. 윤가은 감독도 회고했다. “ 을 향한 환대도, 불편한 마음도 모두 감사하고 기적 같았다.” 이 영화를 통해 존재하지만 묻힌 생존자의 목소리를 드높인 윤가은 감독은 또 어떤 작품으로 우리의 눈을 번뜩 뜨이게 할까. 당장 2026년 공개될 단편 앤솔로지 속 그녀의 짧은 영화 를 기다리며 이 젊은 거장의 성장을 기대해 보자.

지금 대중문화가 무속을 다루는 방식

Entertainment 2025 WINTER

지금 대중문화가 무속을 다루는 방식 최근 들어 한국 무속을 모티프로 삼은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부쩍 늘었다.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이고, 예능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또한 무속인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상투적 묘사에서 탈피해 새로운 시각으로 이들을 그려낸다. 무속을 매개로 한 한국식 오컬트는 무속인들이 신의 중재자로서 귀신을 달래고 위로한다는 점에서 서구의 오컬트 장르와 차별화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는 이러한 한국 무속의 특성을 잘 담아내며, 한국식 오컬트가 하나의 장르적 계보를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는 ‘K-팝’과 ‘데몬 헌터스’의 결합이 절묘한 애니메이션이다. 일반적으로서구의 오컬트 장르에서 데몬 헌터스는 구마 사제를 가리키지만, 이 작품에는 무당이 등장한다. 각자의 신을 섬기는 무당은 무속 의식인 굿을 진행하는 동안 접신하고 신탁을 전달한다. 선악 구도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구마 사제는 악령들과 싸우고 이를 물리치는 존재로, 어찌 보면 ‘파이터’에 가깝다. 하지만 무당은 악령들(한국에서는 원귀들)과 싸우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고 맺힌 한을 풀어줌으로써 응당 가야 할 저승으로 고이 보내준다. 그런 점에서 무당은 파이터라기보다는 ‘카운슬러’에 가깝다. 영매자인 무당의 역할이 구마 사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이러한 차이점은 사후 세계와 귀신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관점이 서구와 다른 데서 연유한다. 한국에서는 귀신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에는 무당의 후예인 헌트릭스 멤버들이 악령들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주인공 루미가 진우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이 싸움은 대결보다는 구원에 가깝다. 루미는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혼을 팔아 악령이 된 진우를 물리치는 게 아니라 구원해 주려 애쓴다. 루미의 태도는 무당의 본질적 역할과 맞닿아 있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의 헌트릭스가 무대에서 팬들과 교감하는 과정은 무당이 굿을 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이 의식은 전통적으로 춤과 노래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로 그 점에서 굿은 K-팝 아티스트들의 공연과 유사하다. 무당들이 굿으로 원혼을 위로해 주는 것처럼 K-팝 아티스트들은 춤과 노래로 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 국내 대중문화에서 무당이 긍정적 역할로 묘사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무당은 대개 ‘신병’이라 불리는 원인 모를 병을 앓다가 내림굿을 받고 신을 받아들이는 혹독한 운명을 지녔다. 1970~8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는 무당의 영적인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미신으로 치부했다. 자연히 TV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무당도 대개는 무섭고 이질적인 존재로 그려졌다. 하지만 최근 K-콘텐츠 속에 나타나는 무당들은 훨씬 밝아졌고 당당해졌다. 영화 에 등장하는 무당 화림(김고은)은 가죽 롱코트를 휘날리며 귀신과 맞서는 스타일리시한 모습을 선보인다. 화림 같은 젊은 세대 무당은 올해 상반기 방영된 SBS의 이나 tvN의 같은 TV 드라마에도 등장한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의 여주인공 여리(김지연)는 첫사랑 윤갑(육성재)의 몸에 빙의한 이무기 강철과 함께 왕가의 저주를 풀어내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동안은 서사적 필요에 의해 조연이나 단역으로 등장했던 무당이 판타지 액션과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올라선 것이다. 이는 현재 무당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말해준다. 이런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잘 보여주는 작품이 다.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이 작품은 대본집이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을 정도로 화제성이 높았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성아(조이현)는 ‘천지선녀’로 불리는 고등학생 무당이며, 저주받은 존재인 첫사랑 견우(추영우)를 사랑의 힘으로 지켜내는 수호천사 같은 역할로 나온다. 견우를 구하기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당이 지니는 ‘힐러’로서의 면모를 강조한다. 의 루미와 유사한 설정이다. 국내 OTT 플랫폼 티빙의 오리지널 시리즈 은 귀신 현상을 겪은 제보자들과 무속인들을 밀착 취재해 귀신과 무속이라는 주제를 다각도로 탐구한 다큐멘터리다.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는 점에서 호평받았다. 티빙 제공 새로운 접근 방식 젊은 세대 무당이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 시대적 변화는 라는 매우 독특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탄생시켰다. 일정 기간 한 집에 머무르고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의 인연을 찾아간다는 포맷은 여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무당과 점술가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자신의 영적 능력을 토대로 연애 상대를 선택한다는 신선한 발상은 시청자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성 출연자들이 태어난 일시만 보고, 그중에서 운명의 상대를 선택하는 오프닝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들은 자신이 모시는 신의 뜻이나 점괘를 통해 알게 된 운명의 상대와 자신이 본능적으로 끌리는 상대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다른 연애 프로그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재미를 제공했다. 출연자들의 수려한 외모와 언변 또한 젊은 세대 무당에게 호감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 프로그램은 2024년 첫 번째 시즌이 방영된 후 인기에 힘입어 올해 초 두 번째 시즌이 전파를 탔다. 장르적 분화 그렇다면 최근 몇 년 사이 무속인들이 호감의 대상이 된 이유는 뭘까. 우선 무속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라진 데 있다. 한국인들은 이제 무속을 음습한 미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카운슬링으로 여기게 됐다. 한마디로 과거에 비해 무속을 훨씬 캐주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 사람들은 무속인이나 점술사들을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찾는다. 도시 변두리의 후미진 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던 무당집과 점집도 이제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에 자리를 잡은 경우가 많다. 한편 젊은 세대가 무속에 호감을 갖는 이유로,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꿈을 펼치기 어려워진 사회 현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은 이전 세대들이 젊은 시절 느꼈던 것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무속을 통해 보다 직관적인 조언을 듣고 그를 통해 위안을 느낀다. 무속에 관한 젊은 세대의 관심과 호감은 이 소재가 대중문화에서 다양한 장르로 분화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이제 무속을 매개로 한 콘텐츠들은 사극, 로맨스, 액션 판타지로 그 영역을 넓혔다. 또한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에 더해 같은 애니메이션, 같은 다큐멘터리의 소재로도 등장한다. 한국의 전통 무속 신앙이 지닌 문화적 요소들이 더욱 다채로운 형태로 새롭게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구아진의 네이버 웹툰 는 절대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무당들의 이야기다. 도서출판 들녘에서 단행본으로도 출간됐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아 2022년 대한민국콘텐츠대상의 대통령상을 비롯해 다수의 상을 받았다. ⓒ 구아진, 투니드 엔터테인먼트, 도서출판 들녘

K-팝의 최전선, 팝업 스토어

Entertainment 2025 AUTUMN

K-팝의 최전선, 팝업 스토어 K-팝 신에서 팝업 스토어가 성행 중이다. 기존에는 앨범 발매를 홍보하기 위한 단순한 이벤트 성격이 짙었지만, 최근에는 유수의 브랜드들과 협업해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거나 뮤지션의 세계관을 스토리텔링해 전달하는 등 콘텐츠가 창조적으로 진화하면서 팬덤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 aespa WEEK – #Whiplash_mood 〉는 에스파의 미니 5집 앨범 < Whiplash > 발매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팝업 스토어이다. 에스파의 세계관 및 앨범 콘셉트를 키네틱 아트로 재해석했으며, 공간 전체가 살아 숨 쉬는 듯한 공감각적 연출로 팬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2024년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서울 성수동에서 열렸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제 팝업 스토어가 없는 K-팝은 허전하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었다. 불과 4~5년 사이 일어난 일이다. 단기 운영되는 임시 매장으로, 상업 브랜드와 좋은 상성을 보이며 빠르게 성장한 이 새로운 마케팅 방식은 K-팝과도 궁합이 꽤 좋았다. 새것이라면 뭐든 반가운 K-팝 업계 특유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자연스럽다. 자리를 잡아도 너무 잘 잡아 이제는 “잘 만든 팝업 스토어 하나가 웬만한 타이틀곡이나 뮤직비디오보다 낫다”는 소리가 팬들 사이에서 종종 들려올 정도다. 안정감과 소속감 어느새 K-팝의 필수 요소가 되어 버린 팝업 스토어는 지난 몇 년간 K-팝을 산업으로 보는 시각 아래 활발하게 호명되었다. 특히 지금까지 없던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K-팝 산업 속에서 비즈니스 확장이나 수익 구조 다각화를 가능케 해 가치를 인정받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가수와 팬이 직접 만날 수 없었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팝업 스토어가 부쩍 성장한 점만 봐도 그렇다.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서는 안 되는 인류 초유의 사태 속에서, 팝업 스토어는 K-팝 팬덤이 ‘우리’로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K-팝 팝업 스토어와 일반 팝업 스토어의 차이가 생긴다. 후자가 팝업 대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그로 인해 형성된 잠재 고객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전자는 이미 탄탄하게 구성된 팬덤과의 깊이 있는 교류를 핵심으로 한다. 예를 들어 신상품을 알리기 위한 팝업 스토어를 생각해 보자. 일반 팝업 스토어는 제품의 호감도와 인지도를 높여 궁극적으로 해당 제품의 판매량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반면 K-팝 팝업 스토어는 새롭게 발매된 앨범을 통해 팬덤을 한자리에 모으고, 콘텐츠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강한 소속감과 몰입감을 느끼게 하는 데 집중한다. 수익화는 대부분 현장 머천다이즈 판매로 이뤄진다. 2025년 3월 더현대서울에서 열린 < G-DRAGON Media Exhibition: Übermensch >는 지드래곤의 정규 3집 < 위버멘쉬(Übermensch) > 발매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미디어아트 전시다. VR, AI 기반의 음성 인터랙션, 홀로그램, 초대형 미디어 파사드 등 신기술을 기반으로 기획된 이 전시는 팬들에게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제공했다. 또한 지드래곤의 오랜 상징인 데이지꽃 조형물을 곳곳에 설치해 일관된 디자인을 완성했다. ⓒ 셔터스톡 요컨대 K-팝 팝업 스토어는 직접 만지고 경험하는 팬 행위의 가장 진보적인 형태이다. 지금껏 대표적인 K-팝 오프라인 콘텐츠로 군림해 온 콘서트와 팬 사인회 그 어떤 것도 가수가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가수, 즉 IP의 힘이 유난히 강한 K-팝 산업에서 직접적인 IP 노출 없이도 이 정도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팝업 스토어가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다. 그런 점에서 K-팝 팝업 스토어는 좋아하는 뮤지션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팬들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이벤트들과 비슷한 속성을 지닌다. K-팝 팝업 스토어의 서막 그동안 K-팝이 강력한 IP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을 펼쳐온 만큼 팝업 스토어의 원조를 찾기는 쉽지 않다. 전시와 체험, 교류와 제품 판매가 모두 이루어지는 K-팝 팝업 스토어의 속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다만 ‘오프라인에서 가수 없이 색다른 방식으로 콘텐츠를 즐기는 공간’이라는 특성을 생각하면, 2015년 서울 이태원 드로잉 블라인드에서 열린 f(x)의 정규 4집 <4 Walls> 앨범 발매 기념 전시회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당시만 해도 K-팝과 전시회를 연결한다는 게 상당히 생소했는데, 앨범 발매 전 빔프로젝터를 통해 천장을 포함한 사방 벽면에 멤버들의 티저 사진과 영상을 공개하며 화제를 모았다. K-팝의 기본적 홍보 방식인 티저 프로모션과 전시 형태를 융합한 이 행사는, 지금은 한없이 체급을 불린 K-팝 팝업 스토어의 체험판이자 프로토타입이라 할 만하다. 흥미로운 건 당시 f(x)의 전반적 아트 디렉팅을 진행한 인물이 이후 그룹 뉴진스를 만든 민희진이라는 점이다. 뉴진스는 여러 면에서 2020년대 K-팝의 변화를 주도한 아이콘으로 불리는데, 그중 브랜드와 협업해 이를 효과적으로 풀어낸 팝업 스토어의 흥행도 빼놓을 수 없다. 2022년 8월, 더현대 서울에서 열린 뉴진스의 데뷔 기념 팝업 스토어는 현재 나타나고 있는 K-팝 팝업 스토어 전쟁의 서막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어마어마한 대기 줄을 비롯해 상투적인 K-팝 머천다이즈 형태에서 벗어난 패셔너블한 디자인과 구성으로 분야를 막론한 각계각층의 큰 관심을 모았다. 뉴진스는 이후에도 디저트 브랜드 누데이크, 애니메이션 등 대중의 예상을 뛰어넘는 창조적인 협업으로 끝없이 뉴진스 붐을 이어 나갔다. 2023년 발매한 EP 발매 프로모션 관련 팝업 스토어에는 10만 명이 넘는 누적 관객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팝업’의 재정의 팝업 스토어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면서, K-팝 그룹을 보유한 크고 작은 기획사들 모두가 분주해졌다. 가수의 사진만 활용하거나 머천다이즈 판매에만 눈에 불을 켠 팝업 스토어는 설 자리가 없어진 지 오래다. 보다 적극적으로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고 있다. 일례로 최근 SM엔터테인먼트와 산리오코리아가 협업한 ‘Where is KEY? with HELLO KITTY’가 눈에 띈다. 샤이니 키의 시그니처 캐릭터 복실이와 산리오 캐릭터 헬로키티가 등장해 동화 같은 스토리라인을 펼쳐낸 이 팝업 스토어는 2D와 3D라는 다른 차원의 두 콘텐츠가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뉴진스의 미니 2집 < Get Up > 발매 기념으로 열린 < 버니랜드 >는 글로벌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와 디지털 IP 플랫폼 기업 IPX가 협업해 선보인 팝업 스토어다. 2023년 7월부터 8월 말까지 서울 낙원동, 홍대, 강남 등지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됐으며 뉴진스의 정체성을 담은 특색 있는 공간 연출과 체험형 콘텐츠로 큰 화제를 일으켰다. 사진은 낙원동 악기 상가에 마련된 체험 공간. 아트포인트(Artpoint) 제공 그뿐만이 아니다. K-팝 팝업 스토어는 이제 공간도, 차원도 넘어선 곳으로 개념을 넓혀 나가고 있다. 세븐틴의 대표적인 오프라인 이벤트 ‘SEVENTEEN STREET’는 제한된 실내 공간을 넘어 한강 세빛섬이나 성수동, 압구정동 일대를 무대로 삼은, 천장 없는 거대한 팝업 스토어라 할 수 있다. 2025년 상반기 큰 화제 속에서 마무리된 플레이브의 2주년 기념 팝업 스토어 ‘Happy Plave Day’는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그룹의 특징을 십분 발휘했다. ‘직접’ 만날 수 없는 가수와 팬 사이의 한계는 팝업 스토어라는 물리적 공간과 데뷔 2주년이라는 기념일을 통해 흥미롭게 극복되었다. 멤버들의 필체가 담긴 축하 리플릿과 손 편지, 직접 그린 그림을 실물로 완성한 축하 케이크, 독자적 기술을 활용해 멤버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운영한 라이브 포토존 등 팬과 가수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로 꼼꼼하고 세심한 기획력이 돋보였다. 그렇다. K-팝 팝업 스토어의 핵심은 ‘함께’다.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시공간을 통해 가수와 팬, 팬과 가수, 팬과 팬 모두가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을 더 공고히 다진다. 공통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한 팀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유대감과 커뮤니티의 현신 앞에서 ‘팝업’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가 재정의되고 있다.

전 세계를 울린 가족 드라마

Entertainment 2025 SUMMER

전 세계를 울린 가족 드라마 방영 내내 국내외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 폭싹 속았수다 >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한국적 정서가 물씬한 이 드라마는 국내를 넘어 세계 각국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 폭싹 속았수다 >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을 아우르며 주요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는 드라마다. 촬영지를 찾아 인증샷을 찍거나 드라마를 테마로 한 이벤트가 열리는 등 현재까지도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 넷플릭스 올해 3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16부작 드라마 < 폭싹 속았수다 >는 한반도 남쪽에 자리한 아름다운 섬 제주를 배경으로 광례에서 애순을 거쳐 금명으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가족사를 그려냈다. 이 드라마는 전 회차를 한꺼번에 공개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4회씩 순차적으로 방영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첫 회부터 최종회까지 흡인력과 화제성을 잃지 않으며 시청자들을 몰입시켰다. 특히 OTT 플랫폼의 주 이용층인 20~30대뿐만 아니라 중장년층과 노년층 시청자들까지 불러들이면서, 그동안 젊은 세대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던 OTT 서비스의 장벽을 허물었다. < 폭싹 속았수다 >는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력을 비롯해 김원석 감독의 짜임새 있는 연출과 임상춘 작가의 탄탄한 극본이 삼박자를 이루며, 작품성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근래 한국 드라마들 중 최고의 작품’이라는 극찬이 무색하지 않게, 지난 5월 열린 제61회 백상예술대상에서도 8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으며 최종적으로 작품상, 극본상 등 4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그런가 하면 글로벌 평론 사이트 IMDb에서 9.2점, 로튼토마토에서는 토마토미터 100%의 평점을 받았다. 이는 역대 한국 드라마 중 가장 높은 점수다. 이 수치는 < 폭싹 속았수다 >가 국내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국적 감성 < 폭싹 속았수다 >는 첫 회부터 한국인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바다 깊숙이 들어가 고된 물질을 하는 애순의 엄마 광례의 모습에서 저마다 자신의 어머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초반부의 시대적 배경이었던 1960~70년대는 경제 발전이 최상의 과제였던 재건의 시기였다. 이 시대를 살았던 한국의 어머니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억척스럽게 일하며 자식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키워내려 했다. 주인공 애순이 어린 시절 급장 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고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급장이 됐을 때 광례는 애순에게 “엄마가 가난하지, 네가 가난한 거 아니야. 쫄아붙지 마. 너는 푸지게 살아.”라고 위로했다. 그 말은 한국전쟁 이후 생존이 절실했던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가진 소망이었다. 광례는 딸에게 푸지게 살라고 했지만, 정작 자신은 거친 물질로 생계를 이어가다 겨우 스물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광례는 자신의 꿈이나 성공 같은 것은 사치에 불과했던 생존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열 살에 엄마를 잃고 생활력 없는 새아버지의 아이들을 돌보며 살아야 했던 애순의 삶도 모질기는 마찬가지였다. 애순에게는 지긋지긋한 섬을 떠나 대학도 가고 시인도 되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소처럼 밭을 일궈 수확한 양배추를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잇는 고된 삶만을 허락할 뿐이었다. 생존과 생계의 시대를 지나 부모 세대의 꿈을 현실화한 건 다음 세대이다. 애순의 딸 금명은 결국 애순이 그토록 바라던 섬을 떠나 최고의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고군분투 끝에 인터넷 강의 회사를 차려 성공을 거두고, 엄마의 꿈이었던 시집 발간도 대신 이뤄준다. 금명의 성공 스토리는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지는데, 행복과 불행이 끝없이 교차하는 복잡한 인생사를 통해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고통과 절망, 기쁨과 열망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시청자들이 온전히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래서 드라마가 공개된 후 오랜만에 펑펑 울었다는 시청 후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편적 테마 < 폭싹 속았수다 >는 지극히 한국적인 드라마다. 제주 방언을 그대로 사용한 제목에서부터 이미 드러나듯 지역적 정서가 깊게 밴 작품이다. 작품 제목인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 방언으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사실 제주 방언은 타 지역의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낯선데, 이 작품에는 한국인도 알아듣기 어려운 제주 사투리로 가득한 대사가 계속 이어진다. 여기에 더해 제주 지역의 토속적 문화, 여성들에게 버거웠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질풍노도 같았던 한국 현대사가 간접적으로 펼쳐진다. 18개 언어로 더빙되어 전 세계 시청자와 만난 이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 번역과 더빙에 심혈을 기울였다. ⓒ 넷플릭스 그런 연유로 이 드라마가 넷플릭스에서 막 공개됐을 때만 해도 세계적 반향을 일으킬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더욱이 자극적인 장르물들이 적지 않은 넷플릭스에서 따뜻한 가족 이야기가 과연 통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방영 내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들이 쏟아졌고, 넷플릭스 순위 집계에서도 비영어권 1위, 전체 3위를 기록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대부분의 국가들은 물론이고 남미권에서도 열풍이 불었다. 브라질에서는 한 마트에서 마지막 회를 다 같이 모여 단체 관람하는 이색적인 풍경도 펼쳐졌다. SNS에서도 해외 팬들의 이른바 ‘나의 관식’ 인증 릴레이가 유행처럼 번졌다. 평생 가족을 위해 몸을 혹사해 무쇠 같던 몸이 어느새 닳아버린 남자 주인공 관식은 당대를 살았던 한국 아버지들의 전형적 모습이다. 그런가 하면 아내 애순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순정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 캐릭터에 몰입한 팬들은 ‘당신의 아빠가 당신의 관식일 때’라는 제목으로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거나 커플 사진에 “나는 나만의 관식이랑 결혼할 것입니다.”라는 글귀를 붙였다. “나는 이미 나만의 관식과 살고 있다”며 다정해 보이는 부부의 사진을 올린 경우도 있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한 관식의 삶에 대한 감동을 릴레이 인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결국 국가, 언어, 문화가 달라도 ‘가족’이라는 보편적 테마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이 가장 한국적인 드라마가 세계인들의 ‘인생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한국형 가족 서사의 가능성 근대화 과정에서 남다른 가족주의 시대를 거쳐온 한국인들에게 가족 서사는 오랜 전통을 지닌 소재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1인 가구가 전체의 30%에 다다르게 된 한국은 가족보다는 개인의 삶을 더 중시하는 풍조로 변화했다. 이러한 사회상은 드라마에도 반영되어, 가족 드라마보다는 멜로물이나 장르물이 한국 드라마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다. 특히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의 등장 이후 보다 보편적인 서사에 무게중심이 쏠리면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스릴러 같은 장르물이 더 많이 쏟아졌다. 그런 점에서 < 폭싹 속았수다 >는 최근 흐름에서 빗겨나 있는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젊은 날의 꿈과 좌절, 가족 간 갈등과 화해, 예상치 못한 이별 등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들을 그려내며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 넷플릭스 문화적 할인(cultural discount)은 한 문화권의 문화 상품이 다른 문화권으로 진입할 때 언어, 관습, 종교 등 문화적 차이 때문에 가치가 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하지만 SNS와 유튜브가 공유되면서 문화적 할인은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다. 글로벌 시청자들이 한국 드라마를 함께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이색적인 풍경은 문화적 장벽이 점차 무너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는 곧 차별화된 로컬 문화를 깊이 있게 담아내는 콘텐츠가 글로벌 성취의 관건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취향과 관심사가 다원화된 시대에 전 세계 모든 대중들이 열광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 폭싹 속았수다 >의 이례적 성취는 가족 서사가 한국 콘텐츠 산업에서 중요한 매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임영웅과 영웅시대

Entertainment 2024 WINTER

임영웅과 영웅시대 임영웅(林英雄 Lim Young-woong)의 서사는 단순한 성공의 이야기를 넘어섰다. 그의 노래는 음률을 넘어 대중의 삶에 위로와 용기를 불어넣으며, 팬덤은 그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퍼뜨리는 등불이 되어주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따뜻한 공동체는 우리에게 진정한 영웅이 무엇인지 새삼 일깨운다. 임영웅의 팬은 대부분 중장년 층이다. 이들은 팬덤 활동을 통해 공동체를 만들어가며, 봉사와 기부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한다. ⓒ 물고기뮤직, CJ ENM 일본에서 새롭게 형성된 대중음악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형성된 한국의 ‘트로트’는 임(사모하는 사람)과 고향을 잃은 아픔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 당대인의 큰 호응을 얻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트로트가 한국 대중음악의 한 장르이면서 한국 전통 창법과 일본, 유럽,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을 결합한 장르로 소개되었다. 부침을 겪으면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은 트로트는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대중음악 장르로 자리하고 있다. 영웅의 탄생 요즘 국내 트로트의 대세는 단연코 임영웅이다. 그는 2016년 디지털 싱글 < 미워요 >로 데뷔한 그는 2017년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 아침마당 >의 ‘도전 꿈의 무대’에서 5연승을 하며 이름을 알리더니, 2020년 TV조선의 트로트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본격적인 전성기의 문을 열었다. 이후 이듬해 발매한 <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My Starry Love, 我如同星光般的爱) >가 MBC 음악 프로그램 < 쇼! 음악중심(Show! Music Core, Show! 音乐中心) >에서 1위를 차지함으로써 독보적인 인기를 입증했다. 트로트 곡이 음악 프로그램에서 정상에 오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한국 최대 음원 플랫폼인 멜론에서 누적 스트리밍 100억 회를 달성했는데, 이는 BTS에 이어 두 번째이고, 솔로 가수로는 최초다. 그의 공연 실황을 담은 영화 <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 >은 지난 2024년 8월 28일 개봉한 이후 357,858명의 관객수를 기록했다. 창간 20주년을 맞이한 스타뉴스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갤럽과 함께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그는 ‘21세기 가장 사랑받은 트로트 가수’ 1위에 올랐다. 막강한 팬덤을 거느리며 이른바 ‘임영웅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여타 트로트 가수들과 차별화된다. 콘서트 공연 실황을 영화로 담은 < 임영웅 |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 > 포스터 ⓒ 물고기뮤직, CJ ENM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국민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할 당시 임영웅의 감미롭고도 부드러운 노래는 불안한 많은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 내일은 미스터트롯 > 방송 당시 실시간 국민 투표 7,731,781표에서 전체 득표수의 25%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이루어낸 성과이니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때의 유행인가 했는데 그 인기가 벌써 몇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데다 오히려 날로 높아가니 일시적인 신드롬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영웅의 일대기를 닮은 삶 임영웅의 출현은 이름 그대로 영웅의 탄생이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그의 개인 서사는 많은 사람에게 연민과 공감의 감정을 불러왔다. 임영웅의 서사는 영웅의 일대기 구조와도 닮아있다. 영웅의 일대기를 비범한 탄생, 고난과 성장, 조력자의 도움, 위기 극복 후 승리자가 되는 것으로 볼 때,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임영웅의 개인 서사를 설명하는 데 이러한 영웅의 일대기가 유효하다. 모든 영웅의 서사에서 나타나는 고난과 역경을 임영웅의 성장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일차적 고난은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임영웅의 나이 5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임영웅의 가족은 큰 시련을 겪었다. 경연 당시 임영웅은 아버지가 잘 불렀다는 배호(裵湖 Bae Ho)의 1969년 리메이크곡 로 대중의 큰 공감을 받았는데, 노래에 개인적인 서사가 더해져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더해 그는 긴 무명 시절이라는 고난을 겪었다. 가요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음식점 서빙부터 공장, 마트, 편의점 등에서 일하며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는데도 한 달 수입이 30만 원이었고, 데뷔 이후에도 겨울에 군고구마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음악을 포기하지 않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고난은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었는데, 발라드에서 트로트로 주 장르를 바꾸고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은 그에겐 모험이면서 동시에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의 거라는 말을 증명하듯, 그는 오디션을 통해 실력은 물론이고 성실함과 겸손함까지 보여주며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인 고전적 영웅과 달리 현대의 영웅은 꾸준한 노력과 인내를 통해 성공을 이룬다. 오디션이라는 경쟁적 시스템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임영웅은 노력과 열정으로 성공을 이루어낸 현대의 영웅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게 있다. 바로 임영웅이 영웅으로 우뚝 서는 데 도움을 준 조력자다. 그가 영웅이 될 수 있던 건 조력자 덕분인데, 그 조력자가 바로 임영웅의 팬이라 할 수 있다. 중장년층의 버팀목이 되다 현재 그의 공식적인 팬카페 ‘영웅시대’의 회원 수는 20만 명을 넘었다. 임영웅의 팬은 아이돌의 팬 못지않게 충성도가 높다. 임영웅 팬의 특징은 여타 트로트 가수들의 팬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전 세대에 걸쳐 다양한 연령대가 고루 분포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역시 주축은 50대와 60대의 중장년층 여성들이다. 중장년층의 여성들은 중년 이후에 찾아오는 갱년기나 자녀가 독립하여 집을 떠난 후 양육자가 느끼는 슬픔이나 외로움을 뜻하는 ‘빈 둥지 증후군’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임영웅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텅 빈 가슴에 어느 날 들어온 임영웅은 그들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자 버팀목이 되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실제로 임영웅의 팬 중 많은 이들이 소위 ‘팬질’을 시작하면서 우울증과 불면증이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아무 의미와 즐거움을 찾을 수 없던 그들은 팬 활동을 하며 존재 이유를 찾고 자신처럼 고립된 여성들과 연대하며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고립에서 연대로, 소외에서 공감으로 나아가며 ‘다시’ 살기를 시작한 셈이다. 중장년층 여성들의 정신 건강을 책임지고 모든 가정의 화목과 평화에 이바지하였으니, 그의 업적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하다. 2024년 5월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콘서트 현장. 이 날 콘서트에는 그의 팬인 ‘영웅시대’ 약 10만 명이 함께 했다. ⓒ 물고기뮤직, CJ ENM 물론 이는 단지 임영웅의 팬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다른 가수의 공연 현장에서 종종 만나는 중장년층의 여성들은 자신의 스타를 위해 연계하고 연대한다. 그런데 임영웅의 팬이 여타 팬들과 다른 점은 일단 그 규모 면에서 우리나라 1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다른 가수가 아닌 임영웅을 선택하였을까? 임영웅의 개인적인 서사가 지닌 힘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 더해 그가 보여주는 노래와 태도가 팬들의 공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기존 트로트와 비교할 때 그는 비장하거나 비극적인 걸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몸짓이나 과잉된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창법에서 그는 담담과 덤덤 사이를 오가며 말하듯이 노래한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대중에게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2020)나 (2021) 같은 노래에는 남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으며 허세를 부리는 남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노래, 창법, 태도 등에서 ‘부드러운 남성성’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주효하였다. 또한 임영웅의 팬은 기부와 봉사 활동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기부의 형태도 다양하여 청소년 자립 지원 기부, 장애인 가정에 기부, 소아암 환아를 위한 기부 선행을 이어가며 팬덤의 선한 영향력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임영웅의 인성과 실력,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팬들이 만드는 수많은 미담은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고, 그래서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결국 임영웅이란 이름은 한 개인의 성공을 넘어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희망이 되어 가고 있다.

마니악한 장르를 대중적으로 만든 K-오컬트의 세계

Entertainment 2024 AUTUMN

마니악한 장르를 대중적으로 만든 K-오컬트의 세계 올해 개봉한 장재현(張在現 Jang Jae-hyun) 감독의 영화 < 파묘 (破墓 Exhuma) > (2024)는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최근 한국의 오컬트 영화는 공포적인 요소를 극대화하기보다, 다양한 요소를 결합하여 대중이 즐길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오컬트가 마니악한 장르라는 편견을 깨고 있다. 수상한 묘를 이장한 풍수사와 장의사, 무속인들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담은 오컬트 영화 < 파묘 (破墓 Exhuma) >(2024). 오컬트 장르에 대중적이고 오락적인 재미요소를 더해 K-오컬트를 완성했다는 평이다. ⓒ 주식회사 쇼박스 과거 “뭣이 중한디”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었던 영화 < 곡성(哭聲, The Wailing) >(2016)은 680만 관객을 기록하며 K-오컬트가 거둘 수 있는 최대의 성공으로 여겨진 바 있다. < 곡성 > 개봉 1년 전에 개봉한 장재현 감독의 이 거둔 540만 관객 흥행을 넘어선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장 감독이 다시 들고 온 영화 < 파묘 >는 그 기록을 갈아치웠다. 1,190만 관객이 영화에 열광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컬트 장르를 고집해 온 장재현 감독만의 색깔이 분명히 느껴지는 대목이고, 그것이 이러한 놀라운 흥행을 가능하게 한 저력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건 바로 마니악한 장르로 여겨지던 오컬트를 대중적으로 해석해 낸 그만의 방식이다. 오컬트에 장르적 재미를 더하다 < 파묘 >는 무당(巫堂 한국에서 신을 섬겨 길흉을 점치고 굿을 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과 풍수사(風水師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좋은 터를 잡아 주는 사람) 그리고 장의사(葬儀師 장례 의식을 전문적으로 도맡아 하는 사람)가 등장하고 이들이 귀신 같은 존재들과 사투를 벌이는 내용으로 분명 오컬트 장르의 색깔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특이한 건, 오컬트 특유의 마니아적인 공포 속으로 관객들을 빠뜨리기보다는 훨씬 더 대중적이고 오락적인 장르물의 재미요소를 더했다는 점이다. 영화가 입소문을 탄 후 관객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MZ세대 무당 화림(김고은 金高銀 Kim Go-eun)과 봉길(이도현 李到晛 Lee Do-hyun), 어딘지 정감이 가는 꼰대 풍수사 상덕(최민식 崔岷植 Choi Min-sik), 감초 같은 해학이 묻어나는 장의사 영근(유해진 柳海真 Yoo Hai-jin)을 일컬어 ‘묘벤져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오컬트 특유의 공포물이 갖는 오싹함이 있지만, 이들 묘벤져스의 장르적인 재미를 따라가면 마치 저 귀신과 치고받고 싸우는 액션물 같은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게다가 영화 후반부로 가면 묫자리를 잘못 써서 흉흉해진 집안 이야기를 넘어서 일제 잔재의 과거사를 파헤치는 이야기까지로 확장된다. 일제의 쇠말뚝에 의해 끊긴 민족정기를 잇기 위해 묘벤져스가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는 냉혹한 일본의 정령과 싸우는 민족적인 영웅처럼 그려진다. 이러한 장르적 재미를 더한 영화는 공포를 줄이는 대신 대결 구도를 선명히 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장르적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 됐다. 이것은 < 검은 사제들 >, < 사바하(Svaha: The Sixth Finger) >(2019)에 이어 < 파묘 >까지 이른바 장재현 감독의 오컬트 3부작에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특징이다. 그리고 이건 최근 K-오컬트라는 지칭이 생길 정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한국적 오컬트의 특징이기도 하다. 범죄물과 결합한 K-오컬트 K-오컬트는 죽음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종종 범죄물과 결합하는 양상을 보이곤 한다. SBS에서 방영된 김은희(金銀姬 Kim Eun-hee) 작가의 드라마 < 악귀(Revenant) >(2023)가 대표적인 사례다. 미스테리한 댕기를 만진 후 귀신이 든 주인공과 귀신을 보는 민속학자 그리고 강력범죄수사대 경위가 연달아 발생하는 의문의 죽음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다뤘다. 여기서 악귀는 자신이 깃든 자의 욕망을 들어주면서 점점 존재가 커지고, 주인공이 가진 세상에 대한 욕망과 분노에 반응한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만으로 실제 악귀가 그걸 실행해내는 걸 알게 된 주인공은 민속학자의 도움을 받아 악귀와 싸워나가게 된다. 이건 오컬트의 소재로 종종 등장하는 저주를 악귀라는 존재로 해석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범죄와 오컬트의 결합은 일찍이 김홍선 감독의 드라마 < 손 the guest >(2018)에서도 시도된 바 있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귀신에 빙의된 자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이를 막으려는 이들의 협업을 그렸던 작품이다. 이 두 드라마는 범죄물이 접목된 K-오컬트로서 도저히 인간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잔혹한 범죄들에 대한 비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처럼 K-오컬트는 그저 자극적인 공포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의미까지 담아내기도 하는데, 보다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K-오컬트가 되기까지 오컬트라고 하면 악령 같은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하고 이에 맞서는 사제들의 구마 의식 같은 것을 소재로 하는 장르로 받아들여지곤 했지만, K-오컬트는 여기에 한국적인 토속적 색깔을 더해 넣는다. < 파묘 >에도 등장하지만, K-오컬트의 단골 소재처럼 나오는 무속인들의 굿 장면이 대표적이다. 고조되는 북소리와 흥분시키는 춤사위를 더해 강력한 에너지를 경험하게 해주는 무속인들의 세계는 영화 < 곡성 >에서도 등장해 세계인들을 매료시킨 바 있다. 인간의 세계와 귀신의 세계 사이를 잇는 존재로서 무속인들이 보여주는 한국의 샤머니즘은 전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K-오컬트만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 파묘 >는 영화 스토리 뿐만 아니라 가죽 자켓, 실크 셔츠, 청바지, 컨버스 운동화 등 기존 무속인의 틀을 깨고 주인공 무속인 화림의 개성을 살린 스타일링도 관객의 주목을 받았다. ⓒ 주식회사 쇼박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오컬트라는 장르를 구마 의식이나 사제, 악령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칭한다면, 과거 1998년에 개봉한 < 퇴마록 >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는 3명의 퇴마사가 등장하는데, 여자의 혼이 봉인된 칼을 사용하는 무사, 기도로 악마와 싸우는 신부 그리고 부적술과 독심술을 사용하는 아이가 그들이다. 즉 서구의 신앙과 우리네 토속신앙을 접목하려는 K-오컬트의 노력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K-오컬트의 또 하나의 특징은 < 파묘 >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보다 대중적인 장르들을 결합해 B급 장르라는 한계를 넘어서려 한 점이다. < 퇴마록 >이 오컬트 장르가 아니라 판타지 액션 장르로 대중들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2015년 방영된 장재현 감독의 역시 사제복마저 멋진 수트처럼 소화해 낸 장르적인 해석으로 500만 관객을 넘기는 흥행을 기록했다. 악령이 든 소녀의 구마의식을 그린 오컬트 영화 < 검은사제들(The Priests) >(2015). ⓒ 영화사 집 K-오컬트는 토속신앙이나 민담, 설화 같은 고전에서 재해석해 낸 캐릭터들 같은 한국적인 색채를 더해 넣으면서, 동시에 마니악한 B급 장르가 아닌 보다 대중적인 장르로 접근하려는 특징을 보인다. 그래서 로컬 색깔이 갖는 차별성은 물론이고 글로벌하게 이해되는 장르의 보편성까지 아우르는 세계가 되었다. 이것은 현재의 글로벌 콘텐츠 시장이 요구하는 것으로서 K-오컬트가 왜 경쟁력을 갖게 됐는가를 설명해 준다.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신세계

Entertainment 2024 SUMMER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신세계 버추얼 아이돌 신드롬이 불고 있다. 이들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아이돌 그룹으로 여느 아이돌처럼 앨범을 내고 SNS로 일상을 공유하며, 팬들과 소통한다. 팬들은 버추얼 아이돌의 실체를 궁금해하기보다 이들의 음악과 춤에 집중한다. 지금 버추얼 아이돌은 현실 세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며 새로운 생태계로 주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 VLAST 2024년 2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백화점 더현대 서울이 온통 가상의 존재로 뒤덮였다. 오픈 이래 최대 규모라는 미디어 아트도 대단했지만, 백화점 지상과 지하를 모두 점령한 버추얼 아이돌의 기세가 놀라웠다. 이 날 참여한 버추얼 아이돌은 6인조 걸그룹 이세계아이돌(ISEGYE IDOL)과 5인조 보이그룹 플레이브(PLAVE), 그리고 6인조 걸그룹인 스텔라이브(StelLive)까지 무려 세 팀의 버추얼 아이돌이 동시에 대형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가로 33m, 세로 5m 규모의 LED를 통해 30분간 송출된 이들의 공연은 팬은 물론 그날 현장을 찾은 누구나 관람할 수 있도록 무료로 진행되었다. 또 지난 3월 9일에는 플레이브가 인기 걸그룹 르세라핌(LE SSERAFIM), 가수 비비(BIBI) 등을 제치고 MBC 음악방송 < 쇼! 음악중심 >에서 1위를 차지했다. 버추얼 아이돌이 국내 공중파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 3월 9일 플레이브는 버츄얼 아이돌 최초로 국내 공중파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했다. 플레이브는 팬들을 위해 1위 인증샷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 VLAST 버추얼 아이돌 신드롬 버추얼(Virtual), 즉 ‘가상’이라는 점 때문에 이들이 현실에서 얻는 인기까지 가짜라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 이들의 인기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일부 마니아 문화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좋아하는 팬들의 팬심은 결코 버추얼이 아니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2023년 9월, 인천 송도달빛축제공원에서는 국내 최초 메타버스 연계 오프라인 뮤직 페스티벌인 ‘이세계 페스티벌’이 열렸다. 버추얼 걸그룹인 이세계아이돌과 버추얼 유튜버, 버추얼 아티스트를 비롯해 현실 아티스트 등 총 16팀의 아티스트가 음악으로 가상세계와 현실을 연결했다. 메타버스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메타버스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 페스티벌을 찾은 현장 방문객은 20,000여 명에 달했으며, 극장 동시 상영 객석률은 95.7%를 기록하며 화제가 됐다. 또 2023년 12월 28일, 국내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에서는 이세계아이돌 관련 웹툰 ‘마법소녀 이세계아이돌’ 단행본 펀딩이 진행됐다. 목표 금액은 2천만 원이었다. 펀딩이 시작된 지 24시간 만에 25억 원이 모였고, 한 달 뒤 최종 모금액 41억 9,889만 원을 달성했다. 텀블벅에서 진행한 국내 크라우드 펀딩 사상 최고 모금액이었다. 이제 데뷔 갓 1년을 넘긴 버추얼 보이 그룹 플레이브의 사례도 놀랍다. 2024년 2월 발표한 이들의 두 번째 미니 앨범 < ASTERUM : 134-1 >은 발매 첫 주에만 56만 9,289장이 팔렸다. 이는 버추얼 보이 그룹이 거둔 최초이자 최고 기록이었고, 그 비교 대상을 일반 보이 그룹으로 넓혀도 그룹별 최고 기록 17위에 달하는 상당한 수치였다. 2023년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한 엔데믹 분위기 속 오프라인이 다시 강조되며 케이팝 아이돌 그룹 초동(발매 첫 주 판매량)이 전반적으로 하락세에 들어선 가운데 거둔 성과이기도 했다. 이들이 케이팝계에서 주목받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23년 발표한 데뷔 앨범 < ASTERUM : The Shape of Things to Come >은 초동 판매량 20만 장을 넘기며 업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2024년 현재, 한국의 버추얼 아이돌을 둘러싼 거의 모든 지표가 이들이 자신만의 생태계를 확실히 다져가고 있다는 증거를 명확히 가리키고 있다.   현실과 가상세계가 음악을 통해 연결된다는 컨셉으로 열린 이세계페스티벌(ISEGYE FESTIVAL)은 국내 최초 메타버스 연계 오프라인 뮤직페스티벌이다. 해당 무대에서 공연하는 이세계아이돌(ISEGYE IDOL)의 모습. ⓒ 패러블 엔터테인먼트 버추얼 아이돌의 시작 버추얼 아이돌이 문화산업계에 이토록 빠르게 자리할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팬데믹의 영향이 컸다. 지난 몇 년간 전 세계에 걸친 팬데믹은 문화예술계 대부분의 영역을 초토화했지만, AI(인공지능), 메타버스 등 기술을 중심으로 한 흐름에 있어서만은 21세기의 지난 모든 시간을 합해도 부족할 만한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인간과 인간이 직접 만나서는 안 되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가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비극이 진행되는 동안 기술은 개척할 수 있을 만한 모든 업계의 빈틈을 호시탐탐 노렸다. 마침 세상은 IP(지적재산권) 소유자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기술과 IP를 결합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으며, 대부분의 도전이 그렇듯 살아남은 일부를 제외한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버추얼 아이돌은 그렇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 가운데 하나였다. 특색 있는 버추얼 아이돌 사실 버추얼 아이돌, 나아가 버추얼 휴먼에 대한 산업과 대중의 욕구는 이전부터 꾸준히 있었다. 한국인이라면 아마 버추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가장 먼저 사이버 가수 아담(Adam)을 떠올릴 것이다. 1998년 1월 데뷔한 그는 당시 대세를 이루던 세기말 감성과 호응하며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2020년 등장한 걸 그룹 에스파(aespa)는 데뷔 초 현실 멤버 4명에 가상 세계에 존재하는 그들의 아바타 4명을 합한 8인조 그룹이라며 자신들을 홍보했고, 2021년에는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없이 사람을 닮은 비주얼을 자랑한 버추얼 인플루언서 로지(Rozy)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다만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버추얼 아이돌은 과거의 버추얼 휴먼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버추얼 휴먼의 경우 크게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형과 3D로 구현된 실사형으로 나눌 수 있다. 앞선 사례들이 사람에 가까운 실사형이었다면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버추얼 아이돌 그룹 대부분은 캐릭터 형이다. 더현대 서울 팝업에 참여한 세 그룹 역시 멤버 모두 캐릭터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실사형의 경우 그래픽 기술 구현을 하기 까지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소요된다. 팬과 빠르고 가깝게 교류할수록 호감을 얻는 아이돌 산업의 기본 규칙을 생각하면 꽤 치명적인 단점이다. 또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을 지나치게 닮은 경우 느끼는 불쾌한 감정을 뜻하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도 무시할 수 없다. 실사형과 캐릭터형으로 이들의 외양을 나누고 나면, 이제는 속성을 따져볼 차례다. 최근 버추얼 아이돌계 가장 큰 성공 사례로 주목받는 이세계아이돌과 플레이브를 보자. 흔히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쉽게 말해 이세계 아이돌은 ‘버추얼’에 플레이브는 ‘아이돌’에 방점을 찍으며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나가고 있다. 버추얼과 유튜버의 합성어인 ‘버튜버(VTuber)’ 멤버를 앞세운 이세계아이돌은 그룹 결성 및 운영, 활동 방식까지 자신들이 속한 버튜버 세계의 공식을 기본으로 한다. 서바이벌을 통해 아이돌 그룹으로 탄생시킨 팀 서사부터가 버추얼과 아이돌 사이의 새로운 연결 고리 그 자체다. 이 연결 고리는 비단 아이돌 뿐만이 아닌 앞서 언급한 ‘이세계 페스티벌’ 같이 음악계 전반을 아우르는 페스티벌 영역까지 확장되는 중이다. 한편 플레이브는 단지 외양만 캐릭터일 뿐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 보이 그룹과 전혀 다르지 않은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플레이브는 여느 아이돌 그룹처럼 앨범을 내고 음악 방송 무대에 서며 라디오에 출연한다. 영상통화로 진행되는 팬 이벤트도 열고 팬들과 소통하는 실시간 라이브 방송도 주기적으로 제작한다. 플레이브의 이 같은 특징은 이들의 소속사가 버추얼 캐릭터 전문 회사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원천 기술은 버추얼 캐릭터와 인간 사이의 감도 높은 결합이다. 인간의 매력과 버추얼 캐릭터의 매력이 지금까지 존재한 적 없는 새로운 시너지로 승화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자신들의 노래를 직접 작사/작곡하는 등 활발히 참여하며 실력파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지금껏 없던 길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버추얼 아이돌의 미래 아이돌, 캐릭터, 유튜버, 음악이 혼재하는 세상. 그곳에 버추얼 아이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현시점에서 이들은 쉽게 정의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실제로 버추얼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들조차 자신들이 사랑하는 세계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아직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이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 그것 하나만은 명쾌한 사실이다. 팬들은 버추얼 아이돌이 어떤 세계에서 왔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중요하지 않다. 또 멤버 뒤에 있는 실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며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버추얼 아이돌의 모습 그대로와 그들의 음악, 춤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실존하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일반 팬심이나 덕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앞으로 버추얼 아이돌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알기 위해선 결국 그를 좋아하는 팬들의 마음을 편견 없이 똑바로 바라보는 게 가장 쉬운 지름길일 것이다.

새로운 K-코미디의 흐름

Entertainment 2024 SPRING

새로운 K-코미디의 흐름 최근 한국의 코미디, 이른바 K-코미디에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 레거시 미디어에서 탈피해 유튜브 같은 뉴미디어로 주 무대가 바뀌면서 형식도 내용도 변화했다. < 피식대학(Psick University) > 은 그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피식대학의 인기 콘텐츠인 피식쇼에 가수 전소미가 게스트로 출연한 모습이다. 국내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캐나다 싱어송라이터 다니엘 시저, 미국 아티스트 미스치프 등 국내외 명사들이 게스트로 출연한다. 지난해 2023 백상예술대상에서 유튜브 채널로서는 최초로 TV 부분 예능 작품상을 받았다. ⓒ 메타코미디 “제 생각에는 코미디와 예술은 정말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시대가 변하게 되면 새로운 예술가들이 탄생하기 마련이죠. 이를테면 후기 인상주의처럼요. 우리는 유튜브의 반 고흐, 폴 고갱 그리고 폴 세잔입니다.” 유튜브 채널 < 피식대학 > 에 2021년 11월 업로드 된 콘텐츠 ‘더 토크’에서 “코미디는 뭐라고 생각하느냐”라는 MC의 질문에 개그맨 이용주가 답한 말이다. 그는 함께 < 피식대학 > 을 이끄는 김민수, 정재형 그리고 자신을 각각 ‘유튜브의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폴 세잔’이라 칭했다. < 피식대학 > 이 던지는 출사표 인터뷰 형식의 ‘더 토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코미디다. 유튜브라는 글로벌 플랫폼에 걸맞게 글로벌 토크쇼를 표방하고 있다. 그래서 외국 여성이 MC를 맡아 영어로 인터뷰를 진행한다. 물론 중간중간 콩글리시와 한국어가 사용되지만, 이들의 태도는 마치 미국의 유명 토크쇼에 출연한 것처럼 자신만만하다. 과도한 자신감으로 시작부터 자신들을 ‘세계에서 제일가는 최고의 코미디 그룹’이라고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이건 코미디면서 동시에 이들의 새로운 출사표처럼 여겨진다. 달라진 시대에 달라진 예술가가 나오듯, 자신들 역시 새로운 코미디를 열어가겠다는 것이다. 이 다소 황당해 보이는 토크쇼는 ‘더 피식 쇼(The PISIC SHOW)’라는 이름으로 < 피식대학 > 의 대표 콘텐츠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채널 구독자 수 293만 명(2024년 3월 기준)에 달하는 < 피식대학 > 은 한때 주말 저녁만 되면 온 가족을 TV 앞으로 모이게 했던 공개 코미디의 시대가 저물면서 급부상했다. KBS < 개그콘서트 > , SBS < 웃찾사 > , MBC < 개그야 > 까지 한동안 스타 개그맨들이 탄생했던 코미디 프로그램들은 한 때 공개 코미디의 전성시대를 구가했지만,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프로그램이 하나둘 폐지됐다. 급기야 지난 2020년 6월, 끝까지 버텨왔던 < 개그콘서트 > 마저 폐지되면서 공개 코미디 시대가 끝을 맺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23년 11월 < 개그콘서트 > 가 부활했지만 그 힘이 예전 같지는 않다. 그저 KBS라는 공영방송으로서 코미디의 명맥을 잇는다는 명분에 머무는 정도다. 공개 코미디의 시대가 저무는 사이, 여기서 빠져나온 개그맨들은 유튜브에 둥지를 틀고 새 길을 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개 코미디가 갖는 ‘서바이벌 구조’ 때문에 역량을 마음껏 펼치지 못했던 개그맨들이 유튜브에 개인 채널을 꾸리는 방식으로 시작됐다. 이후 유튜브에 적응된 코미디 콘텐츠들이 생겨나 인기를 끌면서 점점 채널 자체가 브랜드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한사랑산악회’나 ‘05학번이즈백’, ‘B대면데이트’ 같은 히트 코너를 만든 < 피식대학 > 이나 ‘장기연애’ 같은 하이퍼 리얼리즘의 성격을 가진 스케치 코미디를 만든 < 숏박스 > 가 대표적이다. 피식대학 콘텐츠 ‘05학번 이즈 백’에서 파생된 ‘05학번 이즈 히어’는 2005년 캠퍼스를 주름잡던 이들이 중년이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20년대 한국의 30대가 당면한 사회상과 신도시 기혼 부부의 일상을 섬세하게 모사하여 시청자들의 공감과 인기를 얻었다. ⓒ 메타코미디 산악회에 소속되어 있는 중년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그린 피식대학의 ‘한사랑 산악회’는 주변에 정말 있을 법한 아저씨들의 모습을 다양한 캐릭터와 디테일을 살려 보는 재미를 더했다. ⓒ 메타코미디 달라진 미디어 플랫폼, 달라진 코미디 형식 달라진 미디어 플랫폼은 그 위에 얹어지는 코미디에도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공개 코미디는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펼치는 콩트 코미디에 머물러 있었다면, 유튜브 같은 새로운 미디어에서의 코미디는 배경부터 일상으로 옮겨졌다. 초창기에는 일상에서 펼쳐지는 몰래카메라가 인기를 끌더니 이후에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하이퍼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스케치 코미디가 전성시대를 구가하는 중이다. 또 개그맨 곽범, 이창호가 이끄는 < 빵송국 > 에서는 보정카메라를 이용해 탄과 제이호라는 2인조 보이 그룹 매드몬스터를 만들었다. 부캐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이 만들어지면서 이른바 ‘세계관 코미디’라는 장르가 생겨났다. 세계관이 갖는 과몰입은 그 가상 설정이 마치 진짜인 듯 몰입해 주는 팬들에 의해 실제 현실에서의 커머셜로 이어지기도 했다. 매드몬스터를 캐릭터로 한 굿즈 상품 같은 것들이 이벤트로 판매되기도 했던 것. 이처럼 레거시 미디어에 머물러 무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코미디들은 유튜브라는 열린 세계를 만나 그 소재나 형식 또한 다양해졌다. < 피식대학 > 의 ‘피식쇼’ 같은 코너는 유튜브라는 글로벌 플랫폼 덕분에 가능한 인기 토크쇼가 되었다. BTS RM에서부터 박재범, 손석구 등 국내의 내로라하는 스타들은 물론이고 글로벌 스타나 명사들도 출연할 정도로 인기다. 그래서 영화 <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의 배우 크리스 프랫이나 영화감독 제임스 프랜시스 건 주니어에게 세계 최고의 쇼에 출연한 기분을 묻고, 소설 「개미」의 저자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개미투자자의 미래를 묻는 식의 토크 코미디의 세계가 열렸다. 또 각각의 채널을 운영하면서도 이미 개그맨 선후배들로 연결된 이들의 관계는 다양한 협업을 통한 세계관의 또 다른 결합을 가능하게 했다. 일종의 유튜브를 플랫폼으로 하는 코미디 유니버스가 열린 것이다. 이후 유튜브에서 이미 확고한 브랜드를 갖고 있는 채널들이 모여 하나의 코미디 레이블인 메타 코미디가 설립되기도 했다. 유튜브를 기반으로 하는 코미디 레이블이 의미 있는 건, 그간 개인 채널로 산재해 있던 유튜브 코미디를 하나로 연합함으로써 실질적인 비즈니스가 가능하게 됐다는 점과 이로써 레거시 미디어의 코미디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코미디를 선언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매드몬스터’는 빵송국의 구독자 수를 폭발적으로 높인 대표 콘텐츠다. 스마트폰 카메라 앱의 뷰티 필터 효과를 이용해 2인조 보이 그룹을 컨셉으로 활동했다. ⓒ 메타코미디 K-코미디, 글로벌 반향 가능할까 우리가 영국의 코미디언이자 배우였던 찰스 스펜서 채플린 주니어의 연기나 영국의 대표 시트콤 중 하나인 < 미스터 빈 > 을 보며 웃고 즐겼던 것처럼 코미디에 그 시대나 국가, 언어의 장벽이 있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이들 코미디가 언어보다 보다는 원초적인 몸의 언어를 활용하고 있는 특징을 보면 언어적, 문화적 장벽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웃음에는 그 문화권만이 갖는 독특한 정서 같은 것들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튜브 같은 글로벌 플랫폼은 오히려 이러한 정서적 장벽들을 허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피식쇼가 미국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로 활동하는 월터 홍을 만났을 때, 그는 이 쇼에서 어설픈 영어를 하는 개그맨들을 콕 짚어 “영어가 구리다”고 말하면서 언어유희를 하는 대목이 그렇다. 이용주가 ‘소개’라는 단어를 ‘Cow Dog’라고 표현하자, 월터 홍도 맞장구를 치며 ‘Cow Crab’이라고 하는 과정에서 한국어와 영어의 언어 장벽을 웃음이라는 코드로 승화시키기 때문이다. 웃음의 기원 중에는 낯선 이들이 야생에서 만났을 때 서로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즉 웃음에서 서로 다른 문화나 정서, 언어 같은 건 애초 넘지 못할 장벽이 아니라 넘어서야 하는 장벽으로서 존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 피식대학 > 같은 자칭 ‘세계에서 제일가는 최고의 코미디 그룹’이 앞으로 이 유튜브 같은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어떤 행보를 그려갈 것인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건 K-코미디가 글로벌을 향해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웃음을 매개로 그간 장벽으로 여겨졌던 것들을 허물어가는 길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250이 만든 뽕의 새로운 세계

Entertainment 2023 WINTER

250이 만든 뽕의 새로운 세계 250은 가장 한국적인 음악이지만 모두가 외면하고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 뽕짝이라는 장르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탄생시켰다. 그의 확고한 음악 세계가 담긴 앨범 (2022)은 한국 대중음악계를 넘어 세계가 집중했으며, 지금도 그 영역을 계속해서 넓히고 있다. 가수이자 DJ, 작곡가, 그리고 프로듀서인 250은 2023년 한국 대중음악에서 단연 돋보이는 주인공이다. 한국인의 고유 정서인‘뽕’이라는 장르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여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었다. ⓒ 비스츠앤드네이티브스 매콤한 국물과 꼬불꼬불한 뜨거운 면을 호호 불어먹는 매력이 있는 라면. 당신이 한국의 라면을 끓이는 데 처음 도전했다고 생각해 보자. 적정량의 물을 끓이고, 건더기스프와 면을 넣고…. 그런데 아뿔싸, 라면 맛의 핵심인 빨간 분말스프 가루를 넣는다는 걸 완전히 잊었다. 그것을 한국식 라면이라 부를 수 있을까? 라면에서 가장 중요한 분말스프를 빼놓고는 라면의 맛을 논할 수 없는 것처럼,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한국 대중음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있다. 바로 뮤지션이자 프로듀서인 250이다. 이견이 없는 올해의 음악인 그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맵고 뜨거운 인물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250은 지난해 발표한 정규 1집< 뽕 > 으로 한국의 그래미상으로 불리는 제20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고 영예인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음악인’, ‘최우수 일렉트로닉 앨범’, ‘최우수 일렉트로로닉 노래’ 등 네 개 부문을 석권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둘째, 그는 데뷔 1년 만에 한국 음악계를 뒤집어 놓은 신인 케이팝 그룹 ‘뉴진스’의 여러 곡에 참여한 프로듀서다. 250은 한국에서 구시대적이라고 폄훼하는 음악 장르인 ‘뽕짝’을 베이스로 일렉트로닉 음악이나 힙합 요소를 더하여 완전히 독창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250은 특유의 진지한 표정으로 앨프리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1899~1980) 감독의 영화< 이창(Rear Window 裏窓) > (1954)을 보았는지를 기자에게 물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영화< 이창 > 에서부터였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저는 수년 동안 뽕짝의 본질을 탐구하고 저의 음악과 접목해 보려고 했지만, 그 답을 찾는 것이 순탄치 않았어요. 답을 찾던 중 영화< 이창 > 에서 영감을 받았고< 이창 > (2018년 싱글 앨범)이란 곡을 쓰게 되었죠. 어떤 투명한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뽕’과 ‘비(非)뽕’이 서로 마주 보는 느낌이랄까요.” 뽕과 비(非)뽕, 과거와 현재, 세련됨과 촌스러움 따위가 멀리서 대면하는…. 그 형이상학적인 ‘창’은 250의 음악 세계를 설명하는 키워드다. “‘뽕’은 오묘한 단어입니다. 여러 면에서 한국인에게 특별한 감흥을 주죠. 트로트를 속되게 이르는 말인 ‘뽕짝’은 사실 북소리를 표현하는 의성어 ‘쿵짝’에서 비롯되었어요. 영어로 하면 ‘Boom Clap’ 같은 거죠. 하지만 ‘쿵짝’은 다른 장르에서도 통용될 수 있으니, 뭔가 더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쿵’이라는 말을 ‘뽕’으로 바꾼 겁니다. 자기비하적 측면이죠. ‘뽕’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이미지도 있어요. 1986년 상영된 성인 영화< 뽕(Mulberry) > 이요. 당시 크게 흥행하여 다양한 후속작이 나오기도 했죠. 그리고 한국에서 마약을 뜻하는 은어이기도 하고요. 우스꽝스럽거나 낯간지럽거나 어둡거나….이렇게 다층적이면서 복합적인 상징과 느낌들이 ‘뽕’, 이 단 한 음절에 축약된 겁니다.” 애수와 낭만, 즐거움이 담긴 음인 뽕짝은 한국에서 사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문화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애초에 ‘뽕’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로 담고 있으며, 일상에서 거의 쓰이지 않은 단어인 것처럼 말이다. 250은 음지에서 저평가받고 있는 뽕짝을 대중음악 세계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새로운 음악의 성취를 거둔 셈이다. 250이 탐구한 음악 세계 250은 한서대학교에서 영상 음악 제작을 전공했다. 20대부터 한국 공중파 TV 드라마의 음악을 만들었고,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전자음악 성지(聖地)인 클럽 케잌샵(cakeshop)에서 DJ로도 활약했다. 그때부터 “유별난 음악을 트는 이가 등장했다”라는 입소문이 클러버들 사이에 돌기 시작하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이후 SM엔터테인먼트의 의뢰를 받아 NCT127, BoA, f(x) 같은 메이저 케이팝 가수의 원곡에 대한 정식 리믹스 음원을 발표했다. 또 힙합 팬들이 열광하는 래퍼 이센스의< Everywhere > 와< 비행 >등을 프로듀스 했다. 그러다 그가 2018년부터 저예산 다큐멘터리 시리즈< 뽕을 찾아서 > 를 내놓기 시작했을 때만해도 음악업계에서는 “비트만 잘 만드는 줄 알았더니 코미디도 제법이다”라는 식의 가벼운 반응들이 다수였다. 2018년 싱글< 이창 > , 2021년 싱글< Bang Bus > 가 조용히 회자되더니 마침내 2022년 3월, 정규 1집 앨범< 뽕 > 이 발매되자마자 음악 팬과 평단은 그의 독창적인 음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 시작했다. 250은 미국 뉴욕의 할렘에 힙합이 흐르거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파벨라 펑크(favela funk) 장르가 울려 퍼지듯 뽕짝은 마치 한국이란 문화권의 배경음악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부연했다. 청각적으로도 ‘게토(ghetto 특정 민족이 사회의 주류 민족과 고립되어 살아가는 것)화’한 요소들이야말로 힙합 프로듀서이자 클럽 DJ 출신인 250이 뜻밖에 발견한 뽕짝의 매력이다. “대단한 연주자 또는 50인조 오케스트라가 오래전에 녹음해 둔 샘플을 후대에 조악한 장비로 구현해 낸 힙합곡들…. 거기서 풍기는 특유의 멋이란 게 있잖아요. 뽕짝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뽕짝을 탐구하면서 느낀 또 한 가지는 뽕짝이 한국의 식문화와도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뜨거워야 잘 먹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김치찌개나 전골처럼 맵고 뜨거워야 ‘잘 먹었다’라고 느끼는 것처럼요. 저 역시 얼마 전에 벨기에에 일주일 정도 다녀왔는데, 귀국하자마자 매니저와 김치찌개를 먹으러 기사식당에 갔어요. 한국인에게는 어정쩡한 것보다는 화끈한 것이 통하는 것처럼 ‘뽕짝’도 그런 점이 있어 통하는 것 같아요. 저는 뽕짝이 확실하게 슬픈 곡조, 그리고 확실하게 신나는 그 무언가가 투박하게 결합된 매력적인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250이 ‘뽕’의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경부터다. 케잌샵 DJ 시절, 동료들과 단합대회를 다녀오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뽕짝 음악이 담긴 리믹스 테이프를 샀다. 서울로 돌아가 이 음악을 리믹스 해보자며 장난처럼 의기투합한 게 시작이었다. 그 장난 같은 시작이 250을 장난이 아닌 뽕짝의 경지까지 끌고 온 셈이다. 익숙한 뽕짝의 맛 250이 만든 익숙한데 낯설고 촌스럽지만 신묘하며 힙하기 이를 데 없는 ‘뽕’의 세계에 가장 열성적인 관객은 10~20대의 젊은 세대다. 뽕짝이 한국인의 일상 가까이 녹아 있던 20세기와는 오히려 가장 거리가 먼 세대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고 예쁘게 깎여 있는 시대에 살고 있죠. 그래서 도심의 반듯한 계단보다는 서울 변두리에 오래전 지어진 건물의 울퉁불퉁한 계단에 열광하며 필름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최근 빌보드 차트에서도 컨트리 장르가 득세하고 있죠. 한국 음원 차트에 트로트가 최근 몇 년 사이 인기를 끈 것과 비슷한 현상일 수 있죠.” 250이 요즘 음악 말고 빠져 있는 것도 일종의 ‘구닥다리’다. 1970~1980년대 상영된 홍콩 영화인< 소권괴초(笑拳怪招, The Fearless Hyena) > (1979년)를 비롯한 성룡(成龍 Jackie Chan)의 초기작에 나오는 비논리적 액션 장면들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언젠가는 영화음악에도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A Quiet Place) > (2018)처럼 사람들이 소리에 극도로 집중해야 하는 영화,< 인셉션(Inception) > (2010)처럼 스케일이 큰 영화,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인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 1928~2020)가 참여한 작품처럼 선율로 승부하는 영화 등 모두 욕심이 나네요.” 마침 그의 저예산 다큐< 뽕을 찾아서 > 는 2023년 여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큰 스크린에서 공식 상영됐다. “제게 특별한 롤모델이란 없습니다만, 그저 음악 프로듀서인 퀸시 존스(Quincy Jones)나 작곡가이자 뮤지션인 류이치 사카모토(さかもとりゅういち Ryuichi Sakamoto, 1952~2023) 같은 분들처럼 이런 음악, 저런 작업 등 음악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50의 다음 프로젝트는 한국 성인영화 시리즈물의 속편 제목처럼< 뽕 2 > 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벌써 계획하고 있는 차기작의 제목은< 아메리카 > 이다. “ < 뽕 > 으로 한국 음악을 제대로 해봤으니까 이제 미국 음악을 해봐야죠. 제가 학창 시절에 동경했던 미국, 그리고 즐겨 듣던 미국 음악에 대한 환상을 담은 앨범이 될 수도 있겠어요.” 7년여간 탐구한 뽕에 대한 정의는 250의 안에서도 계속 변해왔다. 지금, 이 시점에 그가 내리는 뽕의 정의는 이렇다. “뽕짝이란 마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한국의 라면스프의 맛 같은 걸지도 모르죠. 김치찌개를 끓이다가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 싶으면 라면스프를 조금 넣잖아요. 그럼 ‘아는 맛’ 나오잖아요. 라면스프가 고급스러운 레시피도 아니고 정답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익숙한 맛이고 입에 감기는 어떤 만족스러운 맛이라는 점은 확실하죠.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한국인이 공통으로 찾는 마지막 한 조각이랄까요.” 250이라는 이름은 그의 본명인 이호영과 비슷하게 불리길 바라며 ‘이오영’이라 썼는데, 모두가 ‘이오공’이라 부르면서 250이 되었다. ⓒ 세종문화회관 그는 첫 앨범< 뽕 > 으로 한국대중음악상에서 4관왕을 차지했다. 특히 최우수 일렉트로닉 앨범과 최우수 일렉트로로닉 노래 부분 수상은 ‘뽕’이 일렉트로니카 뮤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뜻깊다고 전한다. ⓒ 비스츠앤드네이티브스 임희윤 (Lim Hee-yun, 林熙潤)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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