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수(Ahn Sang-soo)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한글의 조형미를 탐구해 온 디자이너이다. ‘안상수체(Ahnsangsoo Font)’를 비롯해 그가 발표한 파격적 글꼴들은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2007년에는 타이포그래피 분야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남긴 공로로 독일 라이프치히시가 제정한 구텐베르크 상을 받았다.
< 홀려라, 홀리리로다 >. 2025. 종이에 실크 스크린. 100 × 70 ㎝.
신세계갤러리에서 열린 안상수 개인전 <날개이상, 홀려라 홀리리로다> 전시작 중 하나. 자신의 사진을 타이포그래피 작품으로 제작했다.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제공
어린아이들이 처음 학교에 들어가 한글을 배울 때 사용하는 국어 공책은 네모 칸으로 이뤄져 있다. 한 줄에 8칸, 혹은 10칸이다. 연필을 움켜쥔 아이들은 그 칸에 맞춰 글자를 쓰느라 안간힘 쓴다. 어른들은 옆에서 훈수를 둔다. 맞춰 써라, 똑바로 써라, 튀어나가면 안 된다.
1985년, 디자이너 안상수가 완성한 글꼴 안상수체는 네모틀 안에 맞춰 적는 것이 옳은 줄로만 알았던 한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깼다. 안상수체는 기존 네모틀에서 벗어나 아래로, 옆으로 삐쳐 나간 글씨체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글꼴 개발 회사에서 “이게 글자냐?” 하고 난색을 표해 세상에 못 나올 뻔도 했지만, 1991년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아래아한글에 기본 글꼴로 탑재된 후 사용자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혁신은 ‘근본’에서 탄생했다.
“훈민정음 해례에서 ‘초성, 중성, 종성 글자를 음절 단위로 좌에서 우, 위로부터 아래로 쓴다’고 설명한것처럼 한글 합자(合字) 원리에 충실하게 만든 것이 안상수체입니다. 최고의 디자이너는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죠. 한글 창제는 아이폰 출시만큼이나 당시에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거예요.”
안상수는 안상수체가 초성, 중성, 종성이 모두 같은 크기인 평등의 서체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 글꼴은 형태적으로는 모음의 세로 기둥이 받침의 정가운데에 맞닿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한자 문화권의 영향으로 글자를 네모반듯하게 모아 적었던 고정관념을 깼고, 너무 얌전히 갇혀 있던 한글을 깨웠다.
포스트모더니즘 서체
글자는 사람을 닮는다. 안상수체는 안상수를 꼭 닮았다. 1952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난 그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면서 디자인에 발을 들였다. 학보사 편집장을 지낼 적에는 자신이 그린 만화를 연재했다. 대학신문을 인쇄하는 과정에서 좌우가 뒤집힌 활자를 지켜봤고, 그때부터 글꼴에 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LG전자 디자인연구소의 전신인 금성사 디자인실에 입사한 ‘대기업 직원’이 되고 나서도 잡지 창간과 편집 작업을 이어갔다.
글자에는 시대가 담긴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권위주의와 획일성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안상수체는 민주화와 다양성에 대한 목소리가 드높았던 시대정신의 한복판에서 태어났다. 네모틀을 벗어난 글자들은 기존 질서에 대한 작은 저항이자 새로운 시대를 향한 몸짓이기도 했다. 해체주의 담론이 한국에 막 도입될 무렵 탄생한 안상수체는 한국 디자인에서 거의 처음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실현한 상징적 작업이 됐다.
젊은 안상수는 반듯한 네모틀에서 자꾸만 벗어나려 했다. 30대 중반이었던 1988년에는 친구 금누리와 함께 홍익대학교 앞 골목에 일렉트로닉 카페를 열기도 했다. 조각가 금누리는 유명한 지휘자 금난새의 동생이다. 이들은 카페에서 영화 상영부터 PC 통신 동호회 모임, 서울과 로스앤젤레스를 연결한 실시간 통신 미술까지 선보였다. 이곳은 PC방의 시초로 꼽히며, 인디와 젊음의 상징인 홍대 앞 문화의 산실이 됐다.
안상수를 만나 물었다. 디자인이 뭡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멋을 짓는 일이죠. 옷도 짓고, 밥도 짓고, 집도 지어요. 의식주 모두가 ‘짓는’ 것입니다. 죄도 짓고, 시(詩)도 짓는 것이니 ‘짓다’라는 동사는 어마어마하게 중요합니다. 멋이라는 감각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고, 멋의 범주에서 보자면 촌스러운 것까지도 멋이 됩니다. 멋을 부리는 게 아니라 멋을 짓는 게 디자인입니다.”
안상수체.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에 근거하여 설계된 간결하고 기하학적인 탈네모틀 글자체이다.
마노체. 안상수체 이후 세벌식 모듈 글꼴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졌는데, 그중 마노체는 선 모듈로 이루어진 글꼴이다.
이상체. 안상수체를 해체한 다음 재배열하여 만든 글꼴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의 전위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미르체. 정사각형 모듈을 조립하여 설계한 글꼴이다. 모듈을 쌓거나 변형하는 방식으로 글꼴에 공간 개념을 적용했다.
안상수의 문자 그림
2012년 정년 퇴임으로 홍익대학교를 떠난 다음 날부터 안상수는 항상 같은 차림이다. 상하의가 붙은 점프슈트, 일명 작업복을 입고 머리엔 비니를 쓴다. 정체성은 일관성에서 나온다. 문자가 일관성 있는 사회적 약속이듯 안상수는 자신의 외양을 디자인했다.
한국 추상미술의 시작에 김환기가 있다면, 한국 디자인 전시의 첫 문은 안상수가 열었다. 삼성문화재단 리움미술관의 전신 로댕갤러리(Rodin Gallery)가 디자인 관련 전시로 가장 처음 기획한 것이 바로 2002년 개최한 안상수의 <한∙글∙상∙상>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파리, 오펜바흐, 홍콩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17년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이 대규모 회고전 <날개.파티>를 개최했으며 이 전시는 해외 순회전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4월부터 6월까지 청담동 신세계갤러리에서 개인전 <날개 이상, 홀려라 홀리리로다>를 열었다. 2017년 개인전을 기점으로 시작된 ‘홀려라’ 연작은 한글에 민화적 요소를 더한 문자도 화풍이다. 자음 ‘ㅎ’이 등장하는 추상화가 ‘하하’ 웃고 ‘흑흑’ 울다가 ‘헉’ 하고 놀라기도 하고 ‘헐’ 하며 맥 빠지기도 한다. 혼(魂)과 흥(興)과 한(恨)까지 있으니 ‘ㅎ’ 하나가 관람객을 들었다 놨다 가지고 논다.
“우리 글자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형태가 ‘ㅎ’이에요. 웃음부터 울음까지 ‘ㅎ’이 연상시키는 것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하나’, ‘한국’, ‘흙’처럼 한국적 정체성이 담긴 단어가 있는가 하면 행복과 해피(happy), 하늘과 헤븐(heaven)도 ‘ㅎ’ 소리로 통합니다.”
현대 미술가 에드 루샤, 바버라 크루거, 제니 홀저 등이 활자를 작품에 활용한다. 하지만 그들의 글자가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하는 반면 안상수의 문자 그림은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 대신 해석과 감각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 전시는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1910~1937)의 타계일인 4월 17일 개막했는데, 안상수는 개막식 퍼포먼스로 이상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로 시작하는 이상의 소설 「날개」는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로 끝맺는다. 안상수의 호 ‘날개’는 여기서 왔다. 미술을 하려다 건축가가 된 이상은 안상수의 이상(理想)이다. 그가 박사 논문 「타이포그래피적 관점에서 본 이상 시에 대한 연구」에 썼듯 그는 이상을 우리나라 최초의 타이포그래피스트로 여긴다.
< UV_한글도깨비 >. 2025. 캔버스에 UV 인쇄, 아크릴 물감. 145 × 97 ㎝.
한글 자음 ‘ㅎ’과 ‘ㅇ’을 각각 두 개씩 결합하여 도깨비 형상처럼 보이게 제작한 작품이다. 안상수는 1990년대 초부터 전국의 도깨비 문양을 찾아다니고 그것을 도안으로 만드는 등 도깨비를 예술적 상징으로 되살리기 위해 탐구해 왔다.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제공
40주년 프로젝트
안상수체는 출시 이후 다양한 방법을 통해 확장되고 있다. 예컨대 이상체는 낱글자를 모아쓰지 않고 풀어서 늘어놓는 방식이고, 미르체와 마노체는 세벌식 모듈 글꼴에 대한 실험의 결과물이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국내외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을 초청해 안상수체 구조에 맞춰 한글 디자인을 맡겼어요. 내가 뭔가를 하기보다는 그들을 통해 한글을 퍼뜨리는 게 더 의미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외국인들이 전혀 다른 상상력으로 한글을 디자인했는데 정말 탁월했고 재미있었어요.”
2024년 10월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안그라픽스에서 열렸던 전시 < 안체 프로젝트 > 전경. 안상수체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세벌식 조합형 글꼴을 제작하는 프로젝트이다.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제공
2024년 10월 열렸던 전시 <안체 프로젝트>를 두고 그가 한 말이다. 올해는 안상수체가 태어난 지 40주년이다. 그는 이 글꼴의 확산을 위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안상수체 40주년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넷플릭스 다큐 시리즈에서도 소개된 타이포그래피 분야의 거장 폴라 셰어(Paula Scher), 20세기 디자인계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네빌 브로디(Neville Brody) 등 14명이 이미 안상수체를 활용한 서체를 선보였다. 올해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무인양품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하라 켄야 등 여럿이 참여할 예정이다. 올해 전시는 10월 9일 한글날을 전후해 개막할 계획이다. 더불어 ‘아티스트’ 안상수의 개인전은 올해 일본 도쿄 츠타야서점, 내년 중국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으로 이어진다.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사전 프로그램인 < 정거장-이미지 커뮤니티 >의 그래픽 디자인에 활용된 AG이상체.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