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는 다양한 식물이 살아가는 자연의 보고다. 오랜 기간 섬의 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종으로 진화한 수십 종의 고유종을 비롯해 한반도 내륙에서는 볼 수 없는 식물들도 자생한다. 울릉도의 독특한 식물 생태계는 그 자체로 곧 섬의 역사이기도 하다.
섬나무딸기는 울릉도 산지에서 흔하게 자라는 식물이다. 한반도 내륙의 산딸기보다 꽃과 잎이 대형인 것이 특징이다. 지면에 소개된 세밀화들은 한국식물화가협회 소속 회원들의 작품이다. 2007년 창립한 한국식물화가협회는 정기전, 공모전, 해외 교류전 및 출판 활동 등을 통해 보타니컬 아트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 김예숙(Ye Sook Kim)
울릉도는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식생을 자랑한다. 현재 울릉도에는 약 500종의 관속식물(물과 양분을 전달하는 관다발을 가진 식물)이 존재하며, 그중 50여 종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산식물이다. 울릉도의 특산식물은 약 250만 년 전 섬이 형성된 이래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쳤다. 어떤 식물들은 한반도 내륙에 있는 종(種)과 유사하지만, 몇 가지 다른 형질을 나타내며 아직 종 분화 단계에 놓여 있다. 육지의 조상종과 완전히 구별되는 것들도 많다. 이는 울릉도의 지형적, 지질학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울릉도는 신생대에 형성된 대양도(大洋島)이다. 대륙의 일부였다가 대륙판 이동이나 해수면 상승으로 육지에서 떨어져 나간 섬이 아니라, 바닷속 화산 활동으로 불쑥 솟아올랐다는 얘기다. 울릉도는 한 번도 육지와 연결된 적이 없는 섬이었다. 울릉도에서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내륙 지역과도 약 140㎞나 떨어져 있다. 이 말은 지금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식물들이 오랜 세월 고립된 상황에서 독자적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한반도의 식물 분포 구역을 대체로 북부, 중부, 남부, 제주도, 울릉도로 분류한다. 같은 화산섬이지만 울릉도는 제주도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양상을 보인다.
생존을 위한 투쟁
화산 폭발로 생성된 뜨겁고 척박한 땅 위에서 처음에는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토양도 없거니와 물과 양분도 부족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들이 떠오른다. 현재 울릉도에서 자라는 특산식물의 씨앗은 어디서 왔을까? 울릉도에 자리 잡은 개척종들은 하나의 계통일까, 아니면 두 개 이상의 계통이 종 분화에 관여했을까? 그리고 개체군 내에서 종 분화의 정도는 어느 정도일까?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보자.
울릉도 해안가에서 자생하는 선모시대는 1997년 신종으로 발표된 식물이다. 개체 수가 많지 않아 보호가 필요하다.
© 전병화(Jeon Byeong Hwa)
섬노루귀는 한반도 내륙에 분포하는 노루귀보다 잎이 3배 이상 크고 씨방 및 열매에 털이 없는 특징이 있다.
© 정진안(Jin Ahn Joung)
처음에는 주로 이끼류, 지의류 같은 생물들이 바위 위에 정착했을 것이다. 이들이 바위를 분해하고 유기물을 축적하면 토양이 조금씩 만들어진다. 시간이 더 흐른 뒤에는 가까운 대륙에서 씨앗들이 바람이나 해류를 통해 흘러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또 새들도 씨앗의 운반책이 되었을 것이다. 대륙에서 건너온 선구종들은 매우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 분명하다. 처음 울릉도에 도달한 식물들은 씨앗이나 포자가 작고 가벼우며 생존력이 강했을 것이다. 대부분 바위 지형인 데다가 건조한 대기와 고온, 강풍 등으로 주변 환경이 열악했으니 생존을 위해 뿌리가 잘 발달했을 것이다. 또한 짝이 없어도 번식 가능한 자가 수분 능력이나 무성 생식 등으로 자손을 널리 퍼뜨릴 수 있도록 적응력을 키웠을 것이다. 생존에 성공한 작은 수의 개체들은 정착지 주변 공간으로 확장해 개체군을 형성했을 터이고, 어떤 한 종이 개척에 성공하면 다른 종들이 연이어 들어와 또 정착을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이렇게 초본류가 자라기 시작하고, 죽은 식물체가 쌓이는 과정이 반복되면 토양이 두터워지고 비옥해진다. 그리고 섬 전체가 초기 생태계를 형성한다. 이후에는 작은 나무들과 함께 곤충, 조류, 소형 포유류가 살기 시작하면서 먹이 사슬이 형성되고 생태계가 조금 복잡해진다. 그렇게 해서 점점 숲이 커진다. 울릉도는 오랜 세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생태계가 안정화되는 단계에 도달했다.
그런데 극소수의 개체들이 정착에 성공하더라도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의 특성상 개체군의 유전자 다양성은 매우 낮을 수밖에 없다. 한정된 지역 안에서 생존한 개체군들은 긴 지질학적 시간이 지나면서 돌연변이, 유전적 부동(浮動), 자연선택 등을 통해 새로운 형질들을 얻게 되고, 처음의 선구종들과는 형태학적으로 매우 다른 새로운 종으로 분화되었다.
추산쑥부쟁이는 울릉도 추산리 해안가에서 발견되어 2005년 신종으로 발표되었으며, 이름도 지명에서 유래했다. 자연 교잡종이라는 특징이 있다.
© 신항숙(Shin Hangsuk)
너도밤나무는 경사가 가파른 울릉도 산지에서 잘 자라고, 산림 생태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나무이다.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는 수종이다.
© 김홍주(Hongju Kim)
울릉도만의 독특한 양상
식물분포학적으로 울릉도는 매우 특이한 곳이다. 우선 울릉도에는 동백나무(Common camellia)나 후박나무(Thunberg’s bay-tree) 같은 난대성 상록활엽수와 만병초(Short-fruit rosebay) 같은 한대성 식물이 함께 자란다. 이러한 공존이 가능한 이유는 울릉도가 해양성 기후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위도상에 있는 강릉이나 포천 등 다른 내륙 지방과 달리 울릉도는 난류의 영향을 받아 온난다습한 기후를 보인다.
그리고 울릉도에는 한반도 내륙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식물들이 대규모 군락을 이루며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태하마을의 너도밤나무(Engler’s beech) 군락지가 있다. 낙엽활엽수인 너도밤나무는 일본 열도에서도 생육한다. 그러나 울릉도의 너도밤나무는 잎이 타원형이고, 가장자리에 잔톱니가 있으며, 꽃차례가 다소 짧은 편이라 일본산 너도밤나무와 다르다. 또한 수피가 회색빛으로 약간 갈라지는 것도 차이가 난다. 태하마을에는 너도밤나무와 함께 울릉솔송나무(Ulleungdo hemlock)와 섬잣나무(Ulleungdo white pine) 군락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우산마가목은 성인봉 정상부 주변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수종이다. 2014년 신종으로 발표되었다.
© 권수현(Su Hyun Kwon)
또한 울릉도에는 환경에 맞게 진화된 고유종이 많다. 울릉도 생태계를 살펴보면, 많은 식물들이 육지의 것들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생김새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생물의 진화에는 방향성이 있다. 왜성화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형화로 진행되기도 한다. 울릉도는 후자의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울릉도 전 지역에서 자라는 섬나무딸기(Ulleungdo raspberry)는 내륙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산딸기(Korean raspberry)가 조상이다. 생김새는 둘이 비슷하지만, 섬나무딸기가 키가 더 크고 잎과 꽃도 대형이다. 크기 외에 다른 점이 더 있다. 울릉도에는 사슴이나 산토끼 같은 초식성 포유동물이 없기 때문에 섬나무딸기가 외부 위험에 방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육지의 산딸기와 달리 섬나무딸기는 줄기에 가시가 없다. 섬나무딸기는 최소 두 번의 독립적인 진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밝혀졌다. 섬노루귀(Ulleungdo liverleaf)도 그렇다. 내륙에 분포하는 노루귀(Asian liverleaf)가 소형에 낙엽성인 것과 달리 섬에서 지리적 격리를 통해 진화한 섬노루귀는 잎이 노루귀보다 3배가량 크고 상록성이다.
한편 추산쑥부쟁이(Chusan aster)는 유전자 교류를 통해 잡종화 현상을 보였다는 점에서 진화의 또 다른 현주소를 보여주는 식물이다. 추산쑥부쟁이는 울릉도 해안가에서 섬쑥부쟁이(Ulleungdo aster), 해국(Seashore spatulate aster)과 함께 섞여서 자란다. 꽃 크기, 잎 모양, 총포 모양 등이 섬쑥부쟁이와 해국의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어 두 종들의 자연 교잡종으로 추정된다. 추산쑥부쟁이는 2005년 추산마을에서 처음 발견되어 신종으로 발표되었다.
가을에 흰 꽃이 피는 울릉국화는 개체 수가 많지 않아 천연기념물로 보호된다. 나리분지에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다.
© 김정아(Kim jung a)
생물 다양성의 지표
식물 분류학자들은 새로운 종으로 추정되는 식물을 발견했을 때 기존의 문헌과 표본을 대조해서 뚜렷한 형태학적 차이점이 있으면 신종으로 발표한다. 울릉도 식물에 대한 연구는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대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Takenoshin Nakai)에 의해 처음으로 진행됐다. 앞서 언급한 너도밤나무 등 목본류와 섬나무딸기, 섬노루귀 등 초본류는 100여 년 전 당시 나카이 다케노신에 의해 학계에 신종으로 보고되었다. 그런 연유로 울릉도 특산식물임에도 불구하고 학명에는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가 신종으로 발표한 식물들은 이 외에도 수십 종이 더 있다.
말오줌나무는 울릉도 산지 및 해안가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해풍에 견디는 힘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김홍주(Hongju Kim)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조사가 시작됐는데, 이 시기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식물의 분류학적 측면에서 연구가 수행됐다. 이후에는 생태학적 측면의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1990년도에 시작한 휴먼 게놈 프로젝트의 눈부신 기술 발전 덕분에 유전자 분석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식물 분류학 분야에도 접목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울릉도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에 대한 연구도 보다 심화되고 있다.
섬기린초는 5월에서 10월까지 노란 꽃이 모여서 핀다. 울릉도 암석지를 비롯해 독도에서도 볼 수 있다.
© 권수현(Su Hyun Kwon)
예컨대 1922년 나카이에 의해 발견된 섬초롱꽃(Korean bellflower)은 울릉도 전역에서 자라고 있는 특산식물이다. 섬초롱꽃의 조상종은 대륙의 초롱꽃(Spotted bellflower)이다. 몇 년 전 섬초롱꽃이 독도에서도 발견되었다. 이후 국립생물자원관이 독도산 섬초롱꽃의 엽록체 유전자형을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독도에 서식하는 섬초롱꽃이 울릉도 섬초롱꽃의 기원에 징검다리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처럼 울릉도의 특산식물들은 하나의 종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방식이 아닌, 원래의 종이 새로운 종으로 바뀌는 진화 과정을 대부분 보인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드문 독특한 사례이다. 울릉도에 사는 특산식물 중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지정한 적색목록종(red lists)에는 섬개야광나무(Ulleungdo cotoneaster), 섬시호(Ulleungdo hare’s ear) 등을 비롯해 많은 수가 등재되어 있다. 이처럼 울릉도 특산식물은 단지 한 지역이나 국가의 자원을 넘어, 지구의 생물 다양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로서도 의미가 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자생지 보호와 관리, 종 보전 및 증식, 위협 요인 해소 등 다양한 방면에서 협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