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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SPRING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

‘나주반’은 전라남도 나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반이다. 김춘식은 1940년대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춘 나주식 소반의 명맥을 이은 장인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우연한 기회에 나주반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지금까지 약 70년 동안 나주반을 지키고 있다.

국가무형유산 소반장 기능보유자인 김춘식 장인은 맥이 끊어져 사라질 뻔한 나주 소반의 명맥을 잇고 발전시켰다. 그는 수백 개의 헌 상을 해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이를 통해 나주 소반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소반(小盤)은 나무로 만든 작은 밥상을 말한다. 좌식(坐式) 주거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식생활부터 각종 의례에 이르기까지 여러 용도로 음식을 담아 운반하던 부엌 가구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소반을 사용해 왔다. 5~6세기경 제작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여러 유형의 소반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으며, 신라(B.C 57~A.D 935)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도 타원형 소반이 있다. 조선 시대(1392~1910)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보면 국가에 소속되어 상을 만드는 별도의 기관이 있었고, 제작 과정이 분업화되어 다양한 형태로 생산해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반의 종류는 산지, 형태, 용도에 따라 약 60여 종으로 분류된다. 특히 생산지에 따라 지역색이 뚜렷해 황해도의 해주반(海州盤), 전라도의 나주반(羅州盤), 경상도의 통영반(統營盤) 등으로도 구분한다. 해주반과 통영반은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성이 뛰어난 반면, 나주반은 소박한 짜임새로 견고함과 간결함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상은 우리 문화의 근간이 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옛날 어머니들은 상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아이의 탄생을 기원했고, 삼신상을 차려 안전한 출산을 빌었다. 출생 후 백일에는 백일상, 돌에는 돌상을 차려 아이의 건강과 행복을 염원했다. 자라면서는 생일상, 결혼 때는 혼례상을 거쳐 나이 육십에 이르러 환갑상을 받고, 죽은 후에도 오래도록 제사상을 받는다. 이처럼 상은 출생 이전부터 죽음 이후까지 삶을 관장하고 이어주는 도구였다.

원형 호족반. 소나무. 36 × 36 × 26 cm.
소반은 생산지, 형태, 용도, 재료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사진은 상판이 둥그런 호족반이다. 호족반의 다리는 위는 굵고 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지다가 끝부분이 위로 살짝 올라간 형태이다. 호족반의 재료는 주로 느티나무, 소나무, 은행나무를 사용한다.
솔루나리빙 제공

앉아서 받는 밥상

소반을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기술을 지닌 장인을 소반장(小盤匠)이라고 한다. 김춘식(Kim Chun-sik, 金春植) 장인은 일제강점기 이후 거의 사라진 전통 나주반을 복원해 냈다. 재료로는, 주로 여자들이 음식상을 차려서 운반한다는 점을 배려해 무늬는 아름다우나 무거운 느티나무보다는 가볍고 단단한 은행나무를 많이 사용한다.

“목공예의 기본은 소반이지요. 임금님도 소반에 먹고, 양반이나 서민도 소반을 사용했습니다. 머슴에게도 개다리소반에 밥을 차려주었죠. 거지가 밥 빌러 와도 소반에 차려내는 것이 우리의 인심이었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 단아한 소반에 오르면 초라해 보이지 않습니다.”

김 장인은 소반의 아름다움 이전에 소반에 담긴 문화를 강조한다. 서양식 식탁은 음식을 먹기 위해 사람이 식탁으로 가야 하지만, 소반은 앉아서 기다리면 음식이 사람에게 온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존중의 의미이다.

“식탁에 다 같이 둘러앉아 밥 먹는 것도 좋지만, 늦게 들어온 식구에게 밥상을 차려 들여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넓은 식탁에서 혼자 먹는 것과 일인용 소반을 받아서 먹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지요.”

반월반. 은행나무. 43 × 31 × 28 cm.
반달 모양의 상판에 세 개의 평평하고 넓적한 다리가 달린 소반이 반월반이다. 다른 상과 합체하여 쓰거나 벽면에 붙여 장식용으로 사용하곤 했다.
나주반전수교육관 제공

당초문 나주반. 은행나무. 50 × 36 × 29 cm.
나주반은 대개 간결하게 제작하지만, 더러는 운각에 문양을 넣기도 했다. 짜임새가 견고해 상판이 휘거나 갈라지는 일이 거의 없어 상대적으로 큰 소반이 많은 편이다. 상판이 널찍해서 책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나주반전수교육관 제공

헌 상을 스승으로

김 장인이 소반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다소 의외다. 1936년생인 그는 같은 연배의 장인들이 10대에 도제(徒弟)로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과는 달리,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 20대 초반 나주 영산포에 공방부터 냈다. 누구 밑에 들어가 기술부터 배운 게 아니라, 기술자를 고용해 소반을 만들어 팔았던 것이다.

“목수 일을 하던 팔촌 형님이 연장을 물려주며 ‘상을 만들면 먹고 살만은 하다’고 해서 무작정 공방부터 열었어요. 그때만 해도 잘살든 못살든 어느 집이나 장롱은 없어도 상 없는 집은 없었으니까요.”

당시 솜씨 좋은 목수들은 전국을 떠돌며 더 나은 조건의 공방에 머물며 일하곤 했다. 그는 그런 기술자들을 채용해 곁에서 배워가며 상을 만들었다. 단순한 목물상(木物商)이던 그가 맥이 끊긴 나주반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공방을 차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받은 특별한 주문 때문이었다.

“한번은 서울에서 손님이 찾아왔어요.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제사상을 사정상 잃게 됐는데, 그게 나주에서 만든 상이라는 거예요. 그것과 똑같이 만들어 달라며 자세한 그림과 함께 선금까지 내고, 얼마가 걸리든 부탁한다고 했어요.”

아직 기술을 갖추지 못한 그는 나주반의 마지막 장인으로 알려진 이운연(李雲衍 1895~1972) 선생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하지만 선생은 고령으로 이미 손을 놓은 상태였다. 이운연은 일제강점기 조선 예술에 매료됐던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과 그 예술』(1922)에서 극찬했던 소반장 이석규(李錫奎 1866~1940)의 아들이다.

결국 그는 서울 손님이 부탁한 숙제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참에 전통 나주반의 원형을 알아보기로 하고, 꾀를 내서 헌 상을 수리한다고 알리고 다녔다. 이윽고 집집마다 창고에 묵혀둔 오래된 상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방에서는 기술자들이 막상을 만들고, 정작 사장인 그는 공방 옆 헛간을 빌려 헌 상을 해체하고 보수하고 조립하는 일에 매달렸다.

“웬만큼 먹고사는 집에 한두 개쯤은 있었던 옛날 상들이 엄청 들어왔어요. 그것들을 받아 연구해가며 고치기를 십여 년 하다 보니 나주반을 직접 짤 수 있게 된 거죠. 내 스승은 바로 그 헌 상들입니다.”

배움의 한을 풀다

전통 소목이 그렇듯이 소반도 모든 이음 부분에 쇠못을 사용하지 않는다. 먼저 나무판에 본을 대고 밑그림을 그린 후 재단해 상판을 만들어 대패질한다. 김 장인은 대패질이야말로 상의 품질을 가름할 첫 단추라고 강조한다.

그다음 상의 테두리 부분인 변죽을 만드는데, 이는 상판의 휘어짐과 갈라짐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준다. 해주반과 통영반이 상판을 파내서 변죽을 만드는 반면, 나주반은 변죽을 따로 만들어 상판에 홈을 파서 끼운다. 변죽을 돌려서 끼운 다음 상판과 다리를 연결하는 운각(雲脚)을 조각해 상판에 고정시키는데, 이때 접착제 외에 대나무못을 따로 만들어 박아서 고정하는 것도 견고함을 자랑하는 나주반만의 특징이다. 나주반의 운각은 보통 구름 문양이나 당초문이 많이 쓰인다. 상다리를 만들어 운각에 끼운 다음 다리와 다리 사이의 수평을 잡아줄 족대(足臺)를 연결하고 중간 가락지(中帶)를 만들어 다리 사이에 둘러준다.

상판을 대패질하고 있는 김춘식 소반장. 재단한 부재를 대패질한 다음 사포로 문질러 결을 다듬으면 상판이 완성된다.

대나무로 만든 못은 상판에 운각을 고정시킬 때 사용한다. 하나의 운각에 보통 4개의 대나무 못이 쓰인다.

백골 상태의 소반이 완성되면, 옻칠을 하고 말려서 사포로 문지르기를 7~8회 반복한다. 김 장인은 특히 옻칠에 자부심을 내비친다. 옻칠은 습기에 강해 나무를 보호하는 기능적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은은하고 아름다운 광채가 돌게 해준다. 이렇게 상 하나를 완성하는 데 40~60일 걸린다고 한다.

그는 재현해 낸 전통 나주반 70점을 모아 1977년 광주학생회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일반에 공개했다. 이 전시는 당시 방송 뉴스에 소개될 만큼 화제가 되었고, 나주반을 세상에 알린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공방은 존폐 위기에 내몰리기 일쑤였다. 전통 공예 장인들 다수가 그렇듯이 옛것은 지키기가 더 어렵다. 한때 직원이 열여덟이던 공방은 차압을 당하거나 작품이 경매에 넘어가기도 했다.

“좋은 나무가 나오면 빚을 내서라도 무조건 사놔야 하는데, 그 나무들은 십 년 이상 묵혀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쌓인 나무만큼 빚인 거죠.”

그는 1986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유산 나주반장으로 지정되면서 공방을 접었고, 이후로는 전수 교육과 제작에만 힘을 쏟고 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소학교만 겨우 마친 그는 나주반을 만나면서 배움의 한을 풀었다고 한다. 2011년엔 오랜 염원이던 작품 전시실과 공방을 갖춘 나주반전수교육관이 세워졌고, 마침내 2014년 국가무형유산 소반장으로 지정되었다. 그는 전승에 대한 고민도 일찌감치 해결했다. 4남 1녀 중 막내아들인 김영민(Kim Young-min, 金鈴民)이 국가무형유산 전승교육사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구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그에게 소회를 묻자 눈시울이 붉어지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일등 공신은 제 아내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어요. 진짜 소중한 보물은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가 봅니다.”

2024년 12월 9일, 그와 62년을 해로한 이상순(李相順) 씨가 세상을 떠났다.

다양한 형태로 조각된 운각들이 벽에 걸려 있다. 나주반의 운각은 구름 문양과 당초 문양이 가장 많이 쓰인다. 상판의 형태와 상관없이 운각은 보통 두 쌍이 들어간다.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 작가
이민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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