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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즈, 지역을 해석하는 또 다른 방식

Features 2026 AUTUMN

굿즈, 지역을 해석하는 또 다른 방식 한때 ‘관광 기념품’으로 통칭했던 지역 상품이 이제 ‘로컬 굿즈’라 불리며 진화하고 있다. 로컬 굿즈는 단순히 여행을 추억하기 위한 기념품이 아니다. 각 지역의 오래된 이야기와 잊힌 자원, 생활 문화가 동시대적 감각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고, 때로는 그 물건이 여행자의 발길을 이끌기도 한다. 지금 로컬 굿즈는 형태와 종류의 변화를 넘어, 지역을 발견하고 경험하는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전통 소재와 생활 풍습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브랜드 옥산백의 액막이 옹기 소금. 한국인의 액막이 풍습을 라이프스타일 굿즈로 재해석했다. ⓒ 옥산백 여행지에서는 들뜬 마음에 덜컥 샀지만, 막상 집에 와서 보면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난감한 기념품이 있다. 관광 기념품은 오랫동안 디자인과 용도 면에서 대부분 천편일률적이었고, 어느 지역에 가든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큰 변화가 일고 있다. 우선 명칭부터 ‘관광 기념품’ 대신 ‘로컬 굿즈’라 불리기 시작했다. 소장 욕구를 자극할 만큼 디자인은 물론 실용성까지 갖춘 상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1998년부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우수 관광 기념품을 발굴·육성하기 위해 매년 공모전을 개최해 왔다. 이 공모전의 수상 작품집만 봐도 변화가 뚜렷하다. 과거에는 전통문화를 반영한 공예품이 주를 이뤘다면, 지금은 지역 정체성을 담으면서도 동시대 트렌드와 감성에 부합하는 제품들이 많아졌다. 또한 종류도 한층 다양해졌다. 이제는 지역 먹거리까지 로컬 굿즈의 한 축을 담당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변화의 핵심은 무엇을 상품으로 만드느냐보다 지역을 어떤 시선으로 해석하느냐에 있다. 감태 전문 브랜드 바다숲이 선보인 디저트. 감태 크림을 넣은 웨이퍼와 캐러멜 등 지역의 식재료를 친숙한 디저트 형태로 출시했다. ⓒ 바다숲 서사가 담긴 스토리텔링 경주 최부잣집 가양주의 전통을 바탕으로 2022년 출시된 교촌도가의 대몽재 1779. 가문의 접빈 문화와 지역의 역사를 담은 상품이다. ⓒ 하우스 오브 초이 경주 교촌마을의 명문가 최부자댁 옆에는 교촌도가라는 양조장이 있다. ‘대몽재 1779’는 이곳에서 빚는 술이다. 최부자 가문이 대대로 전승해 온 양조법을 바탕으로, 직접 재배한 찹쌀과 손수 띄운 누룩을 사용해 100일간 저온 숙성해서 만든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상품의 형식이다. 이곳은 흔한 공예품이나 고택 미니어처 같은 ‘보는 물건’ 대신 ‘마시는 물건’을 선택했다. 그 밑바탕에는 최부자 가문이 오랫동안 중시해 온 접빈(接賓) 문화가 깔려 있다. 사람을 맞고 대접하는 삶의 태도가 술이라는 형식과 만났다는 얘기다. 교촌도가를 운영하는 하우스 오브 초이의 최재용 대표는 “대몽재 1779의 뿌리가 된 가양주는 본래 제례(祭禮)와 손님맞이에 쓰이던 술이었다. 우리는 대몽재 1779를 통해 전통적인 예법과 사람을 환대하고 베푸는 문화를 이어가려 한다”고 말한다. 대몽재 1779는 신라(BC 57~AD 935) 천년의 수도 경주에서 태어난 술답게 신라 토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병을 디자인했다. 한 가문의 생활 문화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경주의 역사까지 확장된 셈이다. 제주의 오두제는 같은 원리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브랜드 이름은 ‘제주도(Jejudo)’의 알파벳 순서를 역순으로 배열한 것인데, 글자를 돌탑처럼 쌓아 올리는 데서 착안했다. 서울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정지솔 대표가 제주로 이주해 만든 브랜드로, 관광지로 소비되는 제주 대신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제주를 이야기하겠다는 뜻을 이름에 담았다. 그가 처음 만든 물건이 ‘머들 크레용’이다. 머들은 제주 사투리로, 밭에서 나온 돌을 한데 모아 쌓은 돌무더기를 뜻한다. 흔히 지나치기 쉬운 이 돌무더기는 역설적으로 제주에 돌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준다. 제주 사람들은 척박한 화산섬의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삶을 꾸려가야 했다. 그래서 돌에는 그들의 노동과 생존의 역사, 공동체의 기억이 담겨 있다. 이것이 머들 크레용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제주 하면 바로 떠오르는 감귤이나 돌하르방이 아닌, 누구도 관광 상품의 소재로 눈여겨보지 않았던 대상을 골랐다는 점에서 대몽재 1779와는 출발점이 다르다. 하지만 지역에 축적된 삶의 방식과 기억을 물건에 담았다는 점에서 도착지는 같다. 크레용이라는 익숙한 사물을 선택한 덕분에 물건은 두 가지 얼굴을 갖는다. 쌓아 놓으면 제주의 돌 문화를 보여주는 오브제가 되고, 손에 쥐면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된다. 오두제는 이 외에도 제주에서 오래전부터 쓰이던 생활 도구와 민속 문화를 오늘의 물건으로 다시 만든다. 제주 로컬 브랜드 오두제가 제작한 머들 크레용. 천연 재료와 미네랄 안료를 사용해 감귤, 바다, 곶자왈, 모래, 화산석 등 제주에서 볼 수 있는 다섯 가지 풍경을 각각의 색으로 표현했다. ⓒ 오두제 잊힌 자원의 부활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만큼이나 지역에서 오랫동안 쓰였지만 관심에서 멀어진 자원을 다시 발견하는 일도 중요하다. 올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서산 가로림만 갯벌에는 주로 겨울철에 수확하는 해조류 감태가 자란다. 양식이 어려운 감태는 전량 자연산에 의존하며, 조직이 연약해 손으로 조심스레 채취해야 한다. 수고로운 채취 과정과 온도 변화에 까다로운 보관상의 문제점 탓에 대량 생산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지역민의 식탁에만 올랐던 식재료다. 바다숲은 이러한 감태를 30년간 다뤄온 브랜드다. 2015년 서산시가 감태 가공 분야 명인으로 지정한 송철수 선생은 장기 보관과 유통이 가능한 형태로 상품 개발을 거듭했고, 지금은 딸 송주현 대표가 2대째 이어가고 있다. 이로써 갯벌에 방치되다시피 했던 해조류가 미슐랭 레스토랑 셰프들이 찾는 식재료가 되고, 파리에 위치한 르 봉 마르셰(Le Bon Marché)와 갤러리 라파예트(Galeries Lafayette) 백화점까지 들어갔다. 최근 내놓은 디저트 선물 세트는 바다숲의 이력에 한 줄을 더했다. 얇게 구운 웨이퍼 두 겹에 감태 크림을 넣은 샌드, 설탕 대신 조청으로 단맛을 낸 감태 캐러멜이 그것이다. 감태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도 과자는 안다. 설명이 필요한 재료를 설명이 없어도 되는 형식에 담는 것, 사라져가던 특산물이 널리 유통될 수 있었던 이유다. 안동포(安東布)를 사용하는 의류 브랜드 여여도 비슷한 자리에 있다. 안동포는 조선(1392~1910) 시대 궁중 진상품이었을 정도로 품질 좋은 직물로 유명했다. 이에 국가유산청은 역사성과 예술성을 고려해 삼베짜기를 2019년 국가무형유산 신규 종목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 소비자들에겐 안동 삼베는 수입 리넨만큼 친숙한 소재가 아니다. 여여는 이 오래된 소재를 ‘헴프(hemp)’라는 현대적인 언어와 감각으로 다시 제시한다. 같은 대마를 원료로 한 섬유라도 '삼베'라 부를 때와 '헴프'라 부를 때 사람들이 느끼는 이미지의 결은 사뭇 다르다. ‘삼베’라고 하면 흔히 노인들이 입는 여름용 옷이나 상복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여여가 한 일은 결국 소재 자체를 바꾼 것이 아니라, 소재가 놓이는 맥락을 바꾼 것이다. 여여는 최근 서울 북촌에서 열린 팝업 스토어에서 의류뿐 아니라 헴프크리트 소재로 제작한 인센스 홀더를 함께 선보이며 헴프를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제안했다. 바다숲과 여여는 지역의 자연 자원이 외면받는 이유가 품질이나 가치 때문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오래된 자원을 어떤 언어와 형식으로 오늘의 소비자 앞에 다시 내놓느냐다. 이런 재해석은 종교 문화나 생활 풍속에서도 나타난다. 트렌드와 만난 굿즈 3대째 목탁을 만드는 영천목탁이 선보인 사각 목탁 키링.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 확산 중인 ‘힙한 불교’ 트렌드를 반영해 목탁을 일상적인 액세서리로 풀어냈다. ⓒ 영천목탁 목탁은 사찰에서 스님들이 불공을 드릴 때 두드려 소리를 내는 불교 용품이다. 영천에는 3대째 목탁을 만드는 공방이 있다. 영천목탁이다. 살구나무를 골라 건조하고 삶고 깎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목탁이 완성되기까지 약 3년이 걸린다. 좋은 목탁은 어느 한 과정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장인의 오랜 시간과 손끝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이렇게 대를 이어 목탁을 만들어온 공방이 최근 내놓은 물건은 뜻밖에도 키링이다. 오방색을 입힌 사각 목탁 키링과 미니 목탁은 전통 목탁을 단순히 작게 축소한 데 그치지 않고, 목탁에서 소리가 나는 원리와 구조를 적용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실제 목탁만큼은 아니지만, 두드리거나 가방에 달고 다니면 소리가 난다. 이런 변신의 배경에는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된 이른바 ‘힙불교’가 있다. 명상이나 사찰음식 같은 불교문화를 현대적 라이프스타일로 소비하는 흐름을 뜻한다. 서울국제불교박람회에서도 불교의 상징과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굿즈가 큰 인기를 끌고 있고, 영천목탁 역시 그 흐름 속에서 목탁을 키링이라는 일상용품과 연결했다. 그러나 이들의 키링이 단순히 유행에 올라탄 불교 굿즈에 그치지 않는 것은 3대에 걸쳐 축적한 기술과 감각을 작은 물건 안에 남겼기 때문이다. 옥산백의 ‘액막이 옹기소금’도 유사한 맥락이다. 이곳은 백옥을 비롯한 전통적 소재와 생활 문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내는 브랜드다. 액막이는 액운을 막고 평안을 기원하는 오랜 풍속인데, 부정(不淨)을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소금을 작은 옹기에 담아 집 안에 두는 소품으로 만든 것이 액막이 옹기소금이다. 이 제품은 주로 카카오톡 선물하기를 통해 주고받고, 구매 후기에는 예뻐서 마음에 든다거나 인테리어용으로 좋다는 말이 따라붙는다. 과거의 풍습에 오늘의 취향과 소비 방식을 겹쳐 새로운 굿즈로 만든 셈이다. 2026년 7월, 서울 북촌 코너갤러리에서 열린 여여의 팝업 《As It Is — 있는 그대로》에 전시된 안동포 의류. 라이프웨어 브랜드 여여는 전통 직물인 삼베를 현대적인 헴프 웨어로 재해석한다. ⓒ 여여 굿즈에서 경험으로 괴산의 에트 하우스는 굿즈가 물건을 넘어 공간과 경험으로 확장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곳은 식사와 휴식 같은 일상적 행위를 자연 속에서 경험하도록 한다. 정해진 체험 코스는 없다. 그저 잔디밭에서 쉬거나 흙을 만지며 놀고, 제철 채소로 만든 음식을 맛보거나 이곳에서 재배한 허브로 차를 만들어 마시는 일이 전부다. 여기서 판매하는 제품 역시 공간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편안시럽’은 매실청에 민트와 유칼립투스 오일을 더해 만든 시럽이다. 맛본 사람마다 다시 찾는다는 이 제품은 공간을 경험해 본 사람에겐 이곳의 자연과 감각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제품을 먼저 접한 사람에게는 에트 하우스라는 장소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굿즈가 장소를 기억하게 만드는 매개체를 넘어, 사람을 그 장소로 불러들이는 계기로 작동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오늘의 로컬 굿즈는 공간의 경험을 물건에 담고, 다시 그 물건을 통해 사람과 장소를 연결한다. 충청북도 괴산에 위치한 에트하우스 전경. 이곳은 자연과 계절의 감각을 만끽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며, 굿즈의 개념을 ‘경험’으로 확장했다. ⓒ 박상준 김예린 자유기고가

예술가여, ‘굿즈’하라

Features 2026 AUTUMN

예술가여, ‘굿즈’하라 굿즈는 작가의 예술관을 일상으로 옮겨 놓는 작업의 확장판이자, 창작 생태계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원동력이다. 아티스트 굿즈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세상에 나온다. 자체 브랜드를 내세워 작업 세계를 굿즈로 확장하기도 하고, 인기 아이돌과 손잡고 K팝과 미술의 랑데부를 모색하는 작가도 있다. 유명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해 대중적 파급력을 넓히는가 하면, 소셜 미디어에서 얻은 인기를 발판으로 오프라인에 진출하기도 한다. 나난의 대표작 〈 Long Long Time Flower 〉의 ‘감사 에디션’. 소중한 사람에게 전하는 감사의 마음이 오랫동안 시들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제작했다. 나난 제공, 사진 사이이다 예술가는 가난하다? 이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고가에 작품이 거래되는 일부 작가를 제외하면, 작품 판매만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힘들다는 점에서 여전히 많은 예술가가 넉넉하지 않다. 하지만 온라인을 무대로 자기 홍보가 활성화된 시대가 아닌가. 어떤 예술가들은 갤러리나 딜러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대신 온라인에서 관람객들과 직접 소통하는 길을 선택한다. 특히 굿즈는 더 많은 대중에게 작가의 이름을 알릴 기회가 되며, 판매 수익은 생계에 보탬이 될 뿐 아니라 작업을 지속하는 자원이 되기도 한다. 또한 굿즈는 원화를 구입하기 어려운 예술 애호가들에게 작품 세계의 일부를 소장하는 기쁨을 안긴다. 이처럼 굿즈는 예술의 문턱을 낮추는 동시에 작품이 전시장 밖 일상과 만나는 방식을 새롭게 제안한다. 김선우와 불가리의 협업 상품. 불가리 세르펜티 75주년을 기념해 2023년 진행된 ‘세르펜티 인 아트’ 프로젝트에서 자신의 시그니처 도도새를 활용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김선우 제공 굿즈, 작업의 또 다른 이름 예술가들이 굿즈를 통해 대중에게 다가서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브랜드 컬래버레이션을 통해서다. 이러한 방식으로 최근 대중에게 인지도를 높인 대표적 작가 중 하나가 ‘도도새 아티스트’라 불리는 김선우 다. 그는 17세기에 멸종한 도도새에게 현대인의 모습을 투영한다. 천적이 없는 모리셔스 섬의 안락한 환경에 적응하며 비행 능력을 잃은 도도새는 인간과 외래종의 유입 이후 끝내 지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김선우는 현실에 안주한 채 꿈과 개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도도새에 투영한다. 하지만 작가는 도도새를 귀엽고 친근한 캐릭터로 되살려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는 여행자로 탈바꿈시킨다. 화폭에서 부활한 도도새의 힘찬 날갯짓은 우리도 어두운 현실을 딛고 다시 비상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건넨다. 도도새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김선우는 여러 기업들과 럭셔리 브랜드들의 러브콜을 받으며 두터운 팬덤을 쌓았다. 한편 어떤 작가들에게 굿즈 제작은 완성된 작품을 상품화하는 일이 아니라, 작업의 세계를 다른 매체로 확장하는 창작 행위다. 나난 은 꽃과 자연을 매개로 회화, 오브제, 퍼포먼스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작가다. 꽃은 로맨틱한 선물이지만, 신경 쓰지 않으면 금세 시들어 버린다. 나난의 대표작 시리즈는 우리에게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을 선사한다. 종이로 만든 알록달록한 꽃과 갖가지 모양의 풀잎을 겹겹이 포개 화병에 꽂으면, ‘눈으로 맡는 향기’가 집 안을 가득 채우는 마법이 펼쳐진다. 박혜인 은 ‘유리의 연금술사’다. 2015년부터 ‘글로리홀(Gloryhole Light Sales)’이라는 이름으로 예술 창작과 상업 활동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글로리홀이란 작업 과정에서 성형 중인 유리를 다시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재가열하는 화로다. 작가는 뜨거운 화로 속에서 불과 유리가 만나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생의 약동을 떠올렸다. 말랑말랑하게 녹아 불 속에서 춤추던 유리는 그녀의 손을 거쳐 비정형의 조명 기기로 탄생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원형이나 타원형이 아니라, 마치 유령이나 식물처럼 신비로운 생명체를 닮은 형태다. 박혜인에게 조명은 단순히 빛을 발하는 사물이 아니라 유리의 물성을 탐구하는 조형적 실험이다. 그녀는 파이프 끝에 녹은 유리를 감아올려 입으로 부는 글라스 블로잉, 토치의 불꽃으로 유리를 가열해 형태를 빚는 램프워킹 등 전통적인 유리 공예 기법을 활용한다. 여기에 물질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을 더해 전통과 동시대가 교차하는 자신만의 조명을 창조한다. 빛과 유리를 주 매체로 작업하는 박혜인의 조명 작품 〈 ShimmerClear 〉. 미술 작품과 생활 조명의 경계를 탐구한 작업이다. 박혜인 제공 K팝 아이돌과 함께 이미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입힌 강아지 모양의 세라믹 괄사와 스트링 파우치. 아일릿 미니 4집 (2026)의 괄사 세라믹 오브제 버전에 포함된 구성품이다. 이미미 제공 박지은 은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보호하는 네 명의 수호신 ‘사천왕’을 동시대 여성 캐릭터로 번안해 왔다. 전통 불화의 등장인물이 대부분 나이 든 남성으로 그려지는 데 문제의식을 느끼고,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21세기 버전의 사천왕도를 구상했다. 그렇게 탄생한 시그니처 캐릭터가 ‘소녀사천왕’이다. 기존 사천왕의 상징성에 현대인의 취향과 일상 감각을 결합했다. 중생의 말에 귀 기울이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이어폰을 끼고, 세상을 굽어보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선글라스를 쓰는 식이다. 인물마다 별자리와 MBTI를 설정하는가 하면, 비건이나 논바이너리 등의 정체성을 부여해 동시대의 다층적인 면모를 반영한다. 소녀사천왕은 그림뿐 아니라 컵, 연하장, 마스킹 테이프, 스티커 등 다양한 굿즈로도 제작되었다. 그런가 하면 박지은은 2024년 걸그룹 아이브의 뮤직비디오에서 2D 원화의 작화 총괄과 캐릭터 디자인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민화 속 호랑이와 두루마리, 산수화 등 한국 전통 회화의 모티프를 살리면서, 소녀사천왕 특유의 당당한 기세에 아이브 멤버들의 개성과 의상 포인트를 섬세하게 녹여냈다. 이미미 는 드로잉을 바탕으로 귀엽고 키치한 그림을 그린다. 그를 대표하는 색깔은 단연 핑크다. 연분홍, 진분홍, 살구색, 형광색 분홍 등 화면 위에 다채로운 분홍빛의 스펙트럼이 활짝 펼쳐진다. 그 핑크빛 세계에서는 꽃과 풀, 강아지와 고양이, 만화 주인공, 뽀글뽀글 파마머리의 아이가 행복하고 귀여운 에너지를 발산한다. 고전적인 공주 서사가 왕자의 구원을 기다리는 수동적 여성상을 그려왔다면, 이미미의 소녀들은 혼자서도 생기발랄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작가는 2024년부터 세상에 하나뿐인 티셔츠를 만들어 왔다. 좋아하는 캐릭터의 한정판 티셔츠를 구하기 어려웠던 경험을 계기로, 흰 티에 패브릭 마카로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짱구, 둘리, 파워퍼프걸, 보노보노, 하울 등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자신만의 드로잉 언어로 재해석한 수작업 티셔츠를 온라인에서 선보였다. 소셜 미디어에서 입소문을 탄 그의 작업은 2025년 걸그룹 아일릿과의 협업으로 이어졌다. 이미미는 멤버 한 명 한 명의 이미지와 개성을 연구한 뒤 각자에게 어울리는 고양이 캐릭터를 창안해 옷에 녹여냈다. 아일릿은 이 옷을 입고 TV 음악 프로그램 에서 신곡 를 불렀는데, 때마침 그날 음악 방송 첫 1위를 차지했다. 아이브의 두 번째 EP 앨범 타이틀곡인 (2024) 뮤직 비디오 티저를 위해 박지은이 제작한 작품. 전통 회화 양식으로 표현한 아이브의 세계관을 두루마리 형태에 담았다.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제공 온라인에서 손끝의 일상으로 2026년 DDP 《키크니 특별전: 그렸고 그런 사이》에서 선보인 ‘키크니 프렌즈’ 피규어. 작가의 일러스트레이션 속 캐릭터들을 입체적인 굿즈로 구현했다. 키크니 제공 온라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스타툰 작가 키크니 는 ‘언어의 마술사’다. 기발한 위트와 언어유희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콘텐츠를 선보인다. 대표작은 시리즈. 사람들이 댓글로 원하는 장면을 요청하면 유머와 말장난이 짭짤하게 섞인 한 컷 만화로 답한다. 가령 ‘회사 가기 싫은 상황’을 그려달라는 의뢰에 직장인들이 ‘회’ 사 가기를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식이다. 황당하고 웃긴 만화만 그리는 건 아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세상을 떠난 반려동물과 얽힌 사연에는 가슴 먹먹한 위로를 담아 수많은 독자의 눈시울을 적신다. 재치와 공감을 두루 갖춘 콘텐츠로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120만 명을 훌쩍 넘어섰고, 그 인기는 자연스럽게 굿즈로 이어졌다. 자체 제작한 달력부터 브랜드 협업 상품, 개인전과 연계된 한정판 기념품까지 특유의 재치를 담은 굿즈가 ‘키크니 파워’를 입증했다. 그림비 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를 무대로 영향력을 넓혀 온 일러스트레이터다. 젊은 부부의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이나 반려묘와 함께하는 한때 등 평범하고 사소한 풍경에서 반짝이는 장면을 포착한다.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오밀조밀한 그림체와 따뜻한 파스텔 색감으로 표현해 젊은 세대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행복을 붙잡은 그림은 주변 세계를 조금 더 따뜻한 시선과 여유로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한다. 포근한 감성이 담긴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온라인 화면을 뚫고 나와 손에 잡히는 굿즈로도 변신했다. 엽서와 아트 포스터를 비롯해 키링, 스티커, 티셔츠, 스마트폰 케이스까지 그림 속 일상이 우리의 진짜 일상으로 쑥 들어왔다. 그림비와 오덴세 디자인 스튜디오가 2021년 《In the Pool》 전시를 위해 협업한 글라스웨어. 여름 휴양지에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림비 제공 이현 『아트인컬처』 편집장

굿즈는 물건이 아니라 관계다

Features 2026 AUTUMN

굿즈는 물건이 아니라 관계다 한국의 굿즈 문화는 1990년대 중후반 K-팝 아이돌 팬덤의 성장과 함께 하나의 소비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후 굿즈는 웹툰, 영화,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를 비롯해 미술과 문학 같은 장르로도 확산되며 문화 상품을 관통하는 공통 언어가 됐다. 최근에는 일상적 소비 영역까지 외연을 넓히며, 특정 팬덤을 넘어 보편적 소비문화의 양상을 보인다. 서울시립미술관의 2026년 한국 근대 거장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를 위해 제작된 굿즈.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의 작품을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이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풀어냈다. ⓒ 일상의실천 오늘날 굿즈 산업의 원형 중 하나는 중세 유럽의 순례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순례자들은 성당과 수도원에 방문하면 납과 주석 합금으로 만든 순례 배지, 메달, 십자가 같은 기념품을 구매해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것은 단순히 여행 기념품이 아니었다. 자신이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믿는 사람인지,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이 점은 현재의 굿즈 문화와도 맞닿아 있다. 굿즈 산업의 맹아는 20세기 초에 찾아볼 수 있다. 영국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는1903년 자신의 동화 주인공인 피터 래빗을 인형으로 만들고, 이후 다양한 캐릭터 상품을 선보였다. 굿즈가 본격적으로 산업의 영역에 들어선 것은 1930년대 미국에서였다. 디즈니가 미키마우스 같은 인기 캐릭터를 다양한 상품에 적용하며 라이선싱 사업을 체계적으로 확장하면서부터다. 이후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굿즈 시장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라이선스 글로벌’의 2025년 조사에 의하면, 월트디즈니 컴퍼니는 자사가 보유한 슈퍼 IP를 활용해 2024년 전 세계에서 약 620억 달러 규모의 상품 판매를 이끌어냈다. 현재 굿즈 산업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에서는 1960년대부터 애니메이션과 만화 캐릭터를 활용한 상품화 사업이 본격화됐다. TV 애니메이션 을 바탕으로 1980년 출시돼 선풍적 인기를 끈 건담 프라모델은 캐릭터 상품 시장의 성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1970~80년대 들어서는 아이돌 팬 문화가 확산되면서 관련 상품 소비도 활발해졌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팬시 산업을 통해 굿즈 문화의 토양이 형성됐고, 1990년대 중후반 1세대 아이돌이 등장하면서 본격화됐다. 당시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룹을 상징하는 색깔의 풍선을 들거나 우비를 입고 공연장과 방송국을 찾았다. H.O.T.는 흰색, 젝스키스는 노란색, 신화는 주황색, god는 하늘색 등 각 그룹마다 고유한 색이 있었고, 이러한 응원 용품은 팬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 외에도 브로마이드, 향수, 음료 등 다양한 상품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아이돌 굿즈가 팬덤 소비의 한 축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팬덤이 키운 한국형 굿즈 미국에서 IP 라이선싱이, 일본에서 애니메이션과 오타쿠를 기반으로 한 굿즈 소비가 시장을 키웠다면,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굿즈가 팬덤의 결속을 강화하고 팬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매개체로 발전했다. 이러한 특징은 다른 콘텐츠 산업에서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웹툰과 웹소설의 경우 캐릭터와 세계관을 중심으로 영상, 게임, 출판, 굿즈 등 여러 분야로 IP를 확장해 왔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 중 하나가 이다. 추공작가의 웹소설로 출발한 이 작품은 웹툰과 애니메이션, 게임으로 잇달아 영역을 넓혔으며, 팝업 스토어도 열려 작품 세계가 오프라인까지 확장됐다. 팬들은 웹툰과 애니메이션을 보고, 게임을 즐기고, 팝업 스토어를 찾아 굿즈를 구매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과 캐릭터를 거듭 만난다. 이때 굿즈는 팬들이 작품 세계에 지속적으로 머물게 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2026년 창원에서 열린 전시형 팝업 스토어에서는 AR을 활용해 작품 속 ‘그림자 군단’을 소환하는 체험을 제공했고, 즉석 사진을 부착한 개인 헌터증을 발급해 팬들의 몰입감을 한층 높였다. 팬덤을 토대로 성장한 굿즈 문화는 이제 대중문화를 넘어 다양한 장르로 확산 중이다. 미술 분야에서는 전시와 함께 굿즈를 기획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고, 출판 쪽에서도 책갈피나 북커버, 문진(文鎭) 등 이른바 ‘독서 굿즈’가 책과 함께 하나의 소비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굿즈는 문화·예술 전반에서 콘텐츠와 팬을 이어주는 중요한 접점이 되었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2021) 시즌 1의 공식 굿즈인 스페이스 래빗 인형. 드라마 촬영을 위해 사전 제작돼 소품으로 활용됐으며,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일반에도 판매되었다. ⓒ 스튜디오 드래곤 일상으로 들어온 굿즈 편의점 브랜드 GS25가 출판사 민음사, 캐릭터 브랜드 ‘오늘의 귀여움’과 협업해 출시한 빵이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과 시집 표지 디자인을 패키지에 적용하고, 책 모양 책갈피 20종을 랜덤으로 넣어 문학 작품을 굿즈와 연결했다. ⓒ GS리테일 굿즈를 사기 위해 캐릭터 전문 매장이나 팝업 스토어처럼 특별한 장소를 찾아가야만 하는 건 아니다. 집 앞 편의점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의점은 식음료와 생필품을 판매하는 공간이지만, 다양한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제작한 굿즈를 선보이는 유통 채널이기도 하다. 일례로, 1990년대 말 처음 등장한 포켓몬빵은 빵 안에 애니메이션 의 캐릭터 스티커를 넣어 판매한 상품이다. 2022년 SPC삼립이 이 제품을 재출시하자, 스티커를 모으려는 사람들이 편의점으로 몰리면서 품귀와 오픈런까지 연출됐다. 때로는 편의점이 직접 굿즈 기획에 참여하기도 한다. CU는 2025년 한국프로축구연맹,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와 손잡고 애니메이션 를 테마로 한 머플러와 티셔츠, 키링 등 다양한 한정판 굿즈를 선보였다. 그런가 하면 협업 대상도 기업이나 기관에 국한되지 않는다. GS25는 같은 해 유명 유튜브 크리에이터 ‘잠뜰TV’ 와 함께 디오라마 아크릴 스탠드, 키링 등을 출시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편의점은 이제 일상에서 굿즈를 발견하고 수집하는 또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 굿즈의 변화는 판매 장소의 확장에만 그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이제 굿즈는 반드시 손에 잡히는 물건일 필요조차 없어졌다. 중요한 것은 물성이 아니라 좋아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증명하고 소유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굿즈의 형식이 물리적 상품에서 디지털 형태로 이동한 대표적 사례가 디지털 포토 카드다. 2023년 데뷔한 걸그룹 트리플에스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포토 카드를 선보인다. 팬들은 공식 앱에서 포토 카드를 모으고 서로 교환하며, 이를 통해 얻은 투표권으로 그룹의 유닛 구성이나 타이틀곡 선정에도 참여할 수 있다. 굿즈가 소장하는 물건에서 팬과 아티스트의 관계를 매개하는 디지털 자산으로 확장된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굿즈의 개념 자체도 바꾸고 있다. 한솔제지가 K-팝 앨범 콘셉트로 제작한 샘플북. 실제 앨범 패키지처럼 구성해 고급 화보 용지의 인쇄 품질을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K-팝 굿즈의 문법을 제지업계에도 적용한 사례다. ⓒ 스튜디오 고민 굿즈라는 세계 2021년 첫선을 보인 넷플릭스 예능 의 굿즈. 커플이 되어 ‘지옥도’를 벗어나 ‘천국도’로 향하는 프로그램의 설정을 캐리어와 여권, 항공권 등 여행을 연상시키는 물건으로 제작했다. ⓒ 넷플릭스, 사진 제공 씨네핀하우스 굿즈 소비는 때로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이미 비슷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데도 새로운 상품이 나오면 다시 지갑을 열고,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인데도 한정판이라는 이유로 줄까지 서서 구매한다. 사람들이 굿즈에 끌리는 이유는 물건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에 있다.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키링을 가방에 달고, 전시 포스터를 벽에 붙이고, 응원하는 스포츠팀의 유니폼을 입는 일은 자신의 취향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동시에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서로를 알아보게 하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굿즈를 매개로 자연스럽게 소속감과 유대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희소성도 굿즈의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오늘만’, ‘한정 수량’, ‘이번 전시만 특별히’ 같은 홍보 문구는 놓치고 싶지 않은 심리를 자극한다. 무언가를 빠짐없이 모으고 싶어 하는 완결 욕구 역시 굿즈 소비를 추동하는 힘이다. 하나의 디자인을 여러 버전으로 만들어 시리즈로 선보이면, 한 세트를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랜덤 포토 카드와 시리즈형 굿즈가 반복 구매를 이끄는 것도 같은 이유다. 굿즈는 기억을 붙잡아 둔다. 공연이나 전시, 팝업 스토어에서 산 작은 물건 하나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날 그곳에 있었던’ 경험을 되살려준다. 추억이 손에 잡히는 형태로 남는다는 얘기다. 결국 굿즈는 그저 플라스틱이나 종이로 만들어진 기념품이 아니다. 정체성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게 하며, 특별한 순간을 간직하게 하는 ‘또 하나의 세계’다. 한국적 모티브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패브릭 브랜드 그린플레어의 액막이 북어 키링 ‘복태’이다. 액운을 막고 복을 기원하며 북어를 걸어두는 풍습을 오늘의 감각으로 풀어냈다. ⓒ 그린플레어 디자인 스튜디오 오이뮤와 플라스틱 재활용 브랜드 노플라스틱선데이가 협업해 개발한 한자 ‘복(福)’ 키링. 내부에 NFC 칩을 넣어 스마트폰을 태그하면 매일의 운세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디지털 기술과 환경적 가치가 어우러진 굿즈이다. ⓒ 오이뮤 이승윤건국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K-팝의 새로운 구원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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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의 새로운 구원 투수 최근 들어 K-팝 음반 판매량이 감소하는 가운데 굿즈가 K-팝 시장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K-팝 굿즈는 단순한 소장용 기념품을 넘어 패션과 생활용품의 영역까지 파고들었으며, 아티스트의 세계관과 미감을 체험하는 매개체로 진화 중이다. 블랙핑크는 올해 8월 데뷔 10주년을 기념해 국립박물관 상품 브랜드 뮷즈와 협업한 ‘블랙핑크 헤리티지 컬렉션’을 선보였다. 사진은 그중 하나인 달항아리로, 전통적인 달항아리의 형태에 그룹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색과 이미지를 입혔다. ⓒ YG PLUS 만약 당신이 ‘굿즈’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면, 아마도 현재 K-팝 또는 일본 대중문화의 팬이거나 한때 팬이었던 사람일 것이다. 팬덤 문화가 빠르게 발달한 일본에서는 팬덤 관련 상품 전반을 굿즈라 불렀고, 이 용법은 한국에도 그대로 흘러들었다. 그러므로 굿즈라는 말은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떠돌아다니다 자리 잡은 상용어이다. 국내 유통업계에서는 보통 기획 상품을 ‘MD(Merchandise)’로 지칭하지만, K-팝을 소비하는 사람 가운데 굿즈를 굳이 MD로 바꿔 부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팬들 사이에서는 굿즈가 일상화된 단어라는 얘기다. 굿즈는 2026년 현재 K-팝 산업에서 가장 큰 화두다. 굿즈가 높은 부가가치와 지속적 수익을 창출하는 핵심 사업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K-팝의 새로운 성장축 K-팝을 대표하는 엔터테인먼트 기업 하이브가 2026년 2월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하이브의 상품 및 라이선싱 매출은 2023년 약 3,256억 원에서 2024년 약 4,202억 원으로 29.1% 증가한 데 이어, 2025년에는 약 5,706억 원으로 다시 35.8% 늘었다. 이는 비단 하이브만의 성장세는 아니다. 흔히 K-팝 3대 기획사로 불리는 SM 엔터테인먼트, YG 엔터테인먼트, JYP 엔터테인먼트도 마찬가지다. 각 사의 활동 자료를 취합한 YG 엔터테인먼트의 2026년 공시 자료에 의하면, 이들 4개 기업의 상품 및 라이선싱 합산 매출은 2024년 8,034억 원에서 2025년 1조 705억 원으로 약 33% 증가했다. K-팝 굿즈 시장의 빠른 성장세가 단순한 성장 이상의 의미를 갖는 건, 이러한 현상이 지금까지 K-팝 시장을 앞장서 이끌어 온 음반 시장의 하락세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K-팝 음반 판매량은 세계 시장 확대와 코로나19 특수를 주요 동력으로 삼아 2023년 ‘꿈의 1억 장 시대’를 달성했다. 그러나 이후 감소세로 돌아서며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 최상위 인기 아티스트 중심으로 판매가 집중되는 쏠림 현상, 팬덤의 다량 구매에 의존해 온 마케팅 등이 한계에 달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또한 듣지도 않는 앨범을 순위 경쟁과 이벤트 참여 때문에 중복 구매하면서 발생하는 플라스틱 폐기물, 음반 생산 및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 등 K-팝 소비로 인해 야기되는 환경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유지해 온 관성을 버리고 당장 앨범 판매 방식을 전부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진퇴양난 속에서 30여 년의 K-팝 역사 동안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K-팝 위기론’이 다시 고개를 들려는 찰나, 구원 투수가 등장했다. 그게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인 굿즈다. 아직도 K-팝 굿즈를 응원봉이나 인화 사진, 포토 카드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머릿속 K-팝 굿즈 목록을 어서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하기 바란다. 2026년 기준, K-팝 굿즈 시장은 신세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화려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치는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2025년 6월부터 8월까지 열린 BTS 진의 첫 단독 월드 투어 ‘#RUNSEOKJIN_EP.TOUR’를 위한 공식 굿즈 중 하나. 록 밴드를 연상시키는 펑키하고 자유로운 느낌을 담아 하우스 어덜유스가 디자인했다. ⓒ 하우스 어덜유스 팝업 스토어가 바꾼 굿즈의 문법 에스파의 첫 정규 앨범 < Armageddon >(2024)을 CD 플레이어 형태로 구현한 버전이다. CD 플레이어와 앨범을 하나로 결합해, 음악을 듣는 경험까지 앨범 콘셉트의 일부로 삼았다. 첫 예약 판매 당시 1시간 30분 만에 품절됐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 SM엔터테인먼트 서서히 성장하던 K-팝 굿즈 시장을 급격한 호황으로 이끈 건 2020년대 들어 흥행한 K-팝 팝업 스토어의 힘이 컸다. 이전까지만 해도 굿즈는 공연장이나 소속사가 직접 운영하는 자사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소소하게 판매되었다. 그러다가 새 앨범 발매나 데뷔 기념일 같은 다양한 이유로 개최되는 대형 팝업 스토어와 함께 쑥쑥 성장해 나갔다. K-팝 아이돌의 강력한 IP를 활용한 체험형 공간이자 팬덤의 결속력을 높이는 기회가 된 팝업 스토어는 코로나19로 멈춘 월드 투어와 단독 콘서트, 팬 미팅의 빈자리를 너끈히 메웠다. 오프라인 이벤트 취소와 함께 닫혔던 소비 심리가 폭발적으로 반응하면서, 인기 그룹의 팝업 스토어가 10만 명이 넘는 누적 방문객을 기록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뮤지션의 세계관과 서사를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신한 팝업 스토어의 눈부신 발전 속에서, 굿즈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좋은 음악, 멋진 퍼포먼스, 재미있는 자체 제작 콘텐츠처럼 잘 만든 굿즈 역시 그 자체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뮤지션의 이미지를 끌어올렸다. 이제 각 기획사는 앨범 콘셉트나 비주얼만큼이나 센스 있는 굿즈 만들기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이 본격적인 경쟁의 시작에는 그룹 뉴진스가 있었다. 이들이 데뷔한 2022년까지만 해도 K-팝 무대는 강렬한 퍼포먼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뉴진스의 등장은 K-팝 레이더의 방향을 ‘음악’과 ‘미감’으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소비자의 눈높이도 한층 높아졌다. 단지 아이돌 얼굴이나 이니셜이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신이 나서 구매 버튼을 누르는 시대는 지나갔다. 팬들은 자신이 아끼는 가수가 질 높은 굿즈를 만들길 바랐고, 대중의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한 굿즈는 비단 ‘내 가수’의 것이 아니더라도 K-팝에 관심 있는 사람들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는 화젯거리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헬로키티로 유명한 산리오와 협업해 팬덤 상품의 느낌을 현저히 줄인 NCT, 팬덤 상품이라는 느낌 없이 쿨하고 스포티한 콘셉트의 의류를 선보여 온 르세라핌 등이 있다. 여기에 더해 블랙핑크의 제니 는 2025년 10월 9일 한글날을 기념해 한글 글꼴 ‘젠 세리프(ZEN SERIF)’를 무료로 배포했다. 이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굿즈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될 정도다. (좌)로제 의 < APT. >가 세계적 히트를 기록한 후 국내외 팝업 스토어 운영을 위해 제작된 굿즈. ⓒ 크리스탈 스튜디오 (우)NCT DREAM의 앨범 < DREAM( )SCAPE >(2024)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요소를 모티브로 제작한 키링. ⓒ 크리스탈 스튜디오_for fdcrp 앨범이 굿즈가 되다 아일릿 싱글 1집 < NOT CUTE ANYMORE >(2025)의 리틀미미 버전. 완구 회사 미미월드의 리틀미미 인형에 아일릿의 콘셉트를 결합한 것으로, 아일릿의 소속사 빌리프랩과 크리에이티브 그룹 타입파운더가 디자인에 참여했다. ⓒ 빌리프랩, 사진 제공 타입파운더 최근에는 굿즈형 앨범도 주목받고 있다. 이 유행을 선두에서 견인한 이들을 꼽자면 뉴진스와 샤이니의 키(KEY)를 들 수 있다. 뉴진스의 경우 첫 EP < New Jeans >(2022)를 가방 형태로도 내놓았다. 동그란 모양에 검정, 하양, 빨강 세 가지 색으로 출시된 이 가방은 뉴진스 팬은 물론 유행에 민감한 패셔니스타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키는 앨범 콘셉트를 패키지 디자인까지 치밀하게 확장하는 대표적인 가수이다. 나 같은 레트로 SF 영화의 미학을 재해석한 미니 앨범 < BAD LOVE >(2021)는 광선총 장난감을 연상시키는 패키지로 눈길을 끌었다. 이듬해 발표한 정규 2집 < Gasoline >에서는 VHS나 플로피 디스크 등 21세기에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지난 시대의 매체를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반영해 자신만의 독특한 미감을 어필했다. 이렇게 기존 통념을 깬 디자인은 나날이 진화하며 K-팝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2024년 가장 큰 화제는 에스파가 첫 정규 앨범 < Armageddon >을 발표하며 내놓은 CD 플레이어형 앨범이었다. 판매가가 14만 5천 원으로 꽤 높게 책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3차 예약 판매까지 진행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외에도 데이식스의 < The DECADE >(2025)는 인이어 버전으로, 소녀시대 태연의 < Panorama: The Best of TAEYEON >(2025)은 마이크 형태의 블루투스 스피커 형태로도 출시됐다. 그런가 하면 엔믹스의 < Fe3O4: FORWARD >(2025)는 조개 모양으로 레트로하게 디자인된 MP3 플레이어로도 판매되었다. 또한 국내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캐릭터 ‘리틀 미미’ 인형을 활용한 아일릿의 < NOT CUTE ANYMORE >(2025)나 스트레스 볼이 들어 있는 르세라핌의 < SPAGHETTI >(2025)도 요즘 트렌드를 반영한 발 빠른 움직임으로 평가되었다. 가방에 인형 키링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시대, 날개 달린 별 모양의 위츄(WICHU) 마스코트로 캐릭터 인형 앨범 시장에 일대 파란을 불러일으킨 엔시티 위시(NCT WISH)의 활약도 눈부시다. 굿즈에서도 결국 모든 것은 ‘감각’으로 귀결된다. 지금의 K-팝 시장은 무엇이든 감각적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적자생존의 장이 되었다. 무얼 내놓든 팬이라면 기꺼이 구매할 것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전 세계 한류 팬이 2억 명을 넘어선 지금, 자신이 누군가의 팬이라는 걸 굳이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소속감은 충분히 느끼고 싶은,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곳이 미학적으로도 훌륭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팬들이 늘고 있다. 지금 K-팝 굿즈는 IP의 힘만 믿고 게으름을 부리다가는 금세 도태되어 버릴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다.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문화유산을 가장 가까이하는 방법

Features 2026 AUTUMN

문화유산을 가장 가까이하는 방법 문화유산과 전통문화를 동시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상품들이 나날이 인기를 얻고 있다. 박물관과 유적지에서 감상하던 유물을 모티브로 만든 이 상품들은 과거에 머물던 유산을 현재의 일상으로 불러들인다. 나아가 K-컬처의 새로운 자원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기업 하이브와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이 함께 선보인 BTS 정규 5집 의 공식 상품.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유물인 성덕대왕신종의 문양을 재해석했으며, 2026년 상반기 진행되었던 뮷즈 브랜드 협업 중 가장 큰 관심을 받았다. ⓒ 빅히트 뮤직 & 하이브 국립중앙박물관의 약진이 거세다. 이곳은 지난해 관람객 수 650만 명을 돌파했다. 국제 미술 전문지 『아트 뉴스 페이퍼(The Art Newspaper)』가 올해 3월 발표한 ‘2025년 관람객 수’ 조사에 의하면 루브르박물관 904만 6,000명, 바티칸박물관 693만 3,822명에 이어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람객이 가장 많이 찾는 박물관 세계 3위에 올랐다. 올해도 1월부터 5월까지 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을 집계한 결과 외국인을 포함해 총 325만 5,160명이 방문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5.2% 증가했고, 그중 외국인 관람객의 증가율은 약 57.8% 늘었다. 이런 수치는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뮷즈’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깊어졌다. 뮷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 국립경주박물관 등 전국 13개 소속 박물관들이 소장한 문화유산을 모티브로 한 상품 브랜드이다. ‘뮤지엄’과 ‘굿즈’를 합쳐서 만든 이름으로, 관람객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제공하고 박물관을 자주 찾고 싶은 곳으로 느끼게 하겠다는 의미가 담겼다. 2022년 론칭한 뮷즈는 불과 몇 년 사이 이제 줄을 서서 구매할 정도로 경쟁력을 갖춘 브랜드가 되었다. 기념품에서 브랜드로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시리즈는 뮷즈를 대표하는 스테디셀러이다.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의 제품이 개발되었으며, 2026년 상반기까지 누적 판매량 6만 1,000개를 돌파했다. ⓒ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규모가 큰 국공립 박물관부터 작은 사립 박물관까지 기프트 숍은 어디에 가나 대부분 존재한다. 그런데 유독 국립중앙박물관의 뮷즈가 이토록 화제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전까지 박물관에서 판매하는 상품은 보통 ‘기념품’이나 ‘문화 상품’이라 불렸다. 유명한 유물의 사진을 프린트한 엽서나 문구류처럼 단순한 상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뮷즈는 1차원적 해석을 넘어, 독특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으로 호기심과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생소했던 이름이 어느새 익숙한 고유명사로 널리 사용될 만큼 대중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또한 해외에 한국의 문화유산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도 하고 있다. 그 전환점이 된 것이 바로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 유물인 반가사유상은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뺨에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 전시장 내 ‘사유의 방’에서 만날 수 있는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각각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됐다. 이 오래된 유물들을 본뜬 미니어처는 출시되자마자 큰 화제를 일으켰고, 이후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의 제품으로 확장됐다. 이 외에도 목조건물에 여러 빛깔로 무늬를 그려 장식하는 단청(丹靑)을 키보드와 접목한 ‘단청 키보드’,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김홍도 (1745~1806 추정)의 풍속화 속 취객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술잔으로 불러들인 ‘취객 선비 3인방 변색 잔 세트’처럼 대담한 시도와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녹인 상품으로 인기를 견인했다. 자체 개발하거나 공모를 통해 선정한 상품 외에도 브랜드나 K-팝 뮤지션들과의 협업은 뮷즈의 화제성을 넓히는 한 축이다. 특히 올해 상반기에는 엔터테인먼트 기업 하이브와 함께 개발해 선보인 BTS 컬래버레이션 상품이 주목받았다. BTS의 정규 5집 발매를 기념해 제작된 이 상품들은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성덕대왕신종의 문양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BTS의 완전체 복귀에 맞춰 출시된 이 상품들은 박물관 상품관에서만 이틀 만에 약 4,300만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 협업은 뮷즈가 동시대 대중문화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그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의 뮷즈 구매는 외국인도 예외가 아니다. 올해 상반기 외국인 고객 매출은 약 10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두 배 가까이 성장했다. 이들에게는 국내에서 주목받는 상품들뿐만 아니라 박물관 방문을 기념할 수 있는 마그넷 같은 뮷즈가 인기다. 뮷즈는 해외로도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일례로 2025년에는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의 이건희 컬렉션 전시와 연계해 뮷즈를 선보였으며, 올해에는 LA한국문화원에서 문화유산을 모티브로 한 뮷즈들을 소개하는 특별전이 열렸다. 이처럼 뮷즈는 국경을 허물며 K-컬처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다. 2026년, 김구(1876~1949)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국가유산진흥원이 선보인 문화 상품.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의 삶과 정신을 굿즈로 해석했다. ⓒ 국가유산진흥원 전통 목조 건축물을 장식하는 단청 문양을 기계식 유선 키보드에 적용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디지털 기기에 문화유산을 접목한 상품이다. ⓒ 국립박물관문화재단 뮷즈를 만드는 사람들 2026년 뮷즈 공모 선정작인 ‘금강산 색동 공기’는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오방색을 활용해 한국적 미감을 담아낸 상품이다. 케이스에는 자개로 금강산을 형상화했다. 출시 후 여러 차례 품절됐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국립박물관문화재단 뮷즈를 만들고 운영하는 주인공은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 시대를 마감하고 2005년 용산에 신축 개관하면서 전시관 외에 공연장과 식음료장 등 문화·편의 시설이 크게 확충됐다. 이에 앞서 공연과 문화 상품 개발, 편의 시설 운영 등을 담당하기 위해 2004년 ‘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단’이 설립됐고, 이듬해 박물관 개관과 함께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2011년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따라 ‘국립박물관문화재단’으로 새롭게 출범했는데, 박물관 상품 개발은 재단의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재단 내 부서 중에서도 상품기획팀이 이 사업을 지휘한다. 상품기획팀 최임자팀장은 뮷즈의 지향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관람객들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판매하는 상품들을 모두 똑같은 문화 상품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요. 우리는 국립박물관만의 정체성을 담기 위한 새로운 뭔가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문화 상품이라는 일반적인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박물관 상품이라는 독자성을 부여하기 위해 ‘뮷즈’라는 브랜드를 만들었죠. 론칭 이후 여러 가지 다양한 상품을 개발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을 만들든 유물의 의미와 가치를 어떻게 잘 전달하느냐입니다.” 뮷즈 개발은 보통 한 해의 전시 스케줄과 맞물린다. 전시를 통해 소개되는 주요 유물의 특징을 고려하고, 그것을 시류에 맞게 디자인해 상품을 만들어낸다. 때로는 공모전을 통해 상품을 발굴하거나 외부 업체의 수탁 상품들을 선정하기도 한다. “요즘 유행하는 게 뭔지 시장 조사를 정말 많이 해요. 하지만 아무리 디자인이 뛰어나고 트렌드가 잘 반영돼 있더라도, 유물의 스토리와 동떨어진 상품은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취객 선비 3인방 변색 잔은 디자인, 아이디어, 실용성, 유물의 가치가 모두 조화롭게 잘 어울린 제품이에요. 그래서 인기 아이템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상품 개발 실무를 직접 맡고 있는 김나정 (Na Jung Kim) 대리의 말처럼 수없이 쏟아지는 상품들 가운데 대중적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처럼 문화유산을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신경 쓸 것들이 많다. 자칫 잘못하면 의도가 왜곡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화유산 상품의 확장 문화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상품은 비단 뮷즈만이 아니다. 국가유산진흥원 역시 국가유산을 바탕으로 한 문화 상품 브랜드 ‘K-Heritage’를 운영한다. 대표 상품으로는 ‘조선왕실등 만들기 키트’가 있다. 궁중 야간 연회에서 사용되었던 사각 유리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DIY 상품으로, 2020년 출시 이후 꾸준한 인기를 얻으며 K-Heritage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가 하면 2025년 문을 연 서울역사박물관 뮤지엄 숍도 새로운 굿즈 명소로 부상 중이다. 브랜드 이름은 따로 없지만,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유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특화 상품과 전시 연계 상품 등 110여 종의 상품을 선보였다.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문화유산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가 계속될수록 관람객들이 문화유산을 향유하는 방식 역시 다양해질 것이다. 조선 시대 화가 김홍도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술 취한 선비 세 사람을 모티브로 만든 소주잔 세트. 차가운 술을 따르면 취기가 오른 듯 캐릭터의 얼굴이 붉게 변한다. ⓒ 이민희 조선 시대 궁중 야간 연회에서 사용하던 사각 유리등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DIY 키트. 2020년 출시 이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국가유산진흥원의 대표 문화 상품이다. ⓒ 국가유산진흥원 박의령 자유기고가

한식 파인 다이닝의 지속가능한 미래

Features 2026 SUMMER

한식 파인 다이닝의 지속가능한 미래 최정윤은 약 30년 동안 현장과 이론, 국내와 해외를 아우르며 한식의 경계를 넓혀온 요리 연구가이다. 세계 무대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한식의 미래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2023년 비영리 사단법인 난로학원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2025년에는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 한국 의장으로 임명되어 한국과 세계의 미식계를 잇는 가교 역할도 하고 있다. 서울 북촌에 자리한 찻집 해온에서 그녀를 만났다. 최정윤 난로학원 의장은 한국 미식 문화의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만드는 일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조선 시대 한양(현재의 서울)에서는 날씨가 쌀쌀해지는 음력 10월이면 선비들이 모여 숯불을 지핀 화로에 고기를 구워 먹으며 풍류를 즐기던 풍속이 있었다. 이를 난로회라 한다. 최정윤 의장은 여기에서 착안해 2022년 난로회라는 미식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국내 내로라하는 셰프들을 비롯해 각계 전문가들이 이 모임에 다녀갔다. 지금까지 40회 이상, 600명 넘게 참여한 이 모임은 한식의 현재와 미래에 질문을 던지는 공론의 장이 되었다. 최 의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 세대의 한식 인재를 양성하고 글로벌 교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이듬해 난로학원을 설립했다. 서울 조선호텔과 하얏트호텔 리젠시 퍼스 호주의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활동했던 그녀는 2007년 전설적인 레스토랑으로 회자되는 스페인 엘 불리와 요리과학연구소 알리시아 재단에서 경험을 쌓으며 식재료와 음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안목을 길렀다. 이후 2010년부터 올해 봄까지는 국내 대표적 식품 기업 중 하나인 샘표의 ‘우리맛연구중심'을 이끌며, 한식의 뿌리인 전통 장을 현대적으로 정립하는 연구에 매진해 왔다. 이곳은 과학적인 프로세스를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한식을 연구하는 기관이다. 그런가 하면 2023년에는 뉴욕의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아토믹스의 박정현 셰프와 함께 10년의 연구 끝에 집필한 영문 한식 조리서 『더 코리안 쿡북』을 세계적 예술 출판사 파이돈에서 발행하며, 한식의 가치를 전 세계에 증명해 보였다. 지난해부터는 세계 최고 권위의 미식 평가 가이드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의 한국 의장으로서, 글로벌 미식계에서 한국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오피니언 리더로 활약 중이다. 미슐랭 가이드가 보수적이며 엄격한 관점으로 톱 레스토랑을 선정하는 데 반해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은 트렌드를 이끄는 화두를 던지는 레스토랑에 방점을 둔다. 최근 국내에서 파인 다이닝 문화가 급부상하고 있다. 요인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경제 성장률이 일정 시점에 도달하면 경험 경제 시대가 도래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GDP가 3만 달러를 돌파한 게 2017년인데, 그즈음 때맞춰 미슐랭 가이드 서울판이 발간된 게 의미심장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셰프들의 도전이 주효했다고 본다. 한국은 1980년대만 해도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는데, 1989년 해외 여행 자유화 이후 유학을 다녀오거나 해외 선진 레스토랑을 경험한 셰프들이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 땅에 파인 다이닝을 뿌리내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 한식 파인 다이닝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오랫동안 보유해온 자산이 있다. 한식의 핵심적 키워드인 발효다. 우리가 한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해외 미식가들과 유수의 셰프들이 가장 눈을 반짝이는 대목이 바로 발효다. 그들에게는 우리처럼 가가호호 집에서 김치를 담가 먹을 정도로 발효가 일상화된 문화가 없었던 거다. 더불어 2010년대 초반, 미식 업계에서 ‘산미’가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이 점이 발효 미학과 맞아 떨어진다. 엘 불리와 알리시아에 몸담고 있던 시절, 스페인 최고의 셰프들이 내게 힌트를 줬다. 한국의 발효를 미학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샘표에 입사한 것도 발효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쌓고 싶어서였다. 그간 다양한 국적의 셰프들과 교류했는데, 각 나라마다 한식에 매료되는 지점이 달랐을 것 같다. 유럽 셰프들이 발효를 연구자 같은 태도로 접근한다면, 일본 셰프들은 재료를 존중하는 우리의 태도에 공명하면서도 한국식 대담함과 투박함에서 신선함을 느끼더라. 동남아 셰프들은 발효와 매운맛이라는 공통의 언어에서 빠르게 접점을 찾았다. 난로학원은 한식 레스토랑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전통 한식 문화를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난로 아카데미’를 운영한다. 사진은 난로 아카데미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김명성 발효연구소의 메주이다. 메주는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을 담그는 원료이다. 난로학원 제공 해외로 진출한 한식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도 큰 화제다. 현지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생각의 시작점을 바꿔야 한다. 식당이란 건 결국 손님들에게 사랑받아야 살아남는다. 손님이 원하는 게 무엇이냐가 본질이 된다. 문화라는 건 사람들이 향유하면서 나온 결과물이지, 고정된 무언가가 아니다. 예를 들어 고추장찌개는 한식일까? 아마 조선 시대 선비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이 고추장을 대중적으로 먹기 시작한 시기를 통상 19세기 무렵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고추장과 라면, 떡볶이가 대표적인 한식으로 인식되지 않나? 현지화도 같은 맥락이다. 변화와 발전, 새로운 조합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고정관념에 갇히면 외면받고 고립되면서 결국 소멸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고추장과 라면이 붐이지만, 매운맛은 시작에 불과하다. 일단 매운맛을 통해 한식을 경험하게 되면, 차츰 한식의 깊고 넓은 세계에 빠져들 수 있을 거라 본다. 기본적으로 한식은 한 상에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 먹는 ‘공간 전개형’ 식문화다. 코스에 따라 서빙되는 파인 다이닝의 ‘시간 전개형’ 식문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 간극이 충돌하지 않고 섞일 수 있을까? 파인 다이닝에서는 요리의 온도나 셰프의 창의적 의도 등 정교함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한식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파인 다이닝의 정교함을 접목하려는 시도가 많다. 예컨대 2026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 14위인 온지음에서는 메인 음식을 나눠먹을 수 있도록 서빙하거나 각 코스마다 어울리는 김치를 페어링해 준다. 시간의 문법과 공간의 문법은 경쟁하는 게 아니라 호응한다. 서양 파인 다이닝 역시 엄격한 코스 방식에서 벗어나 공유와 커뮤널 다이닝으로 확장하는 추세다. 한 상의 동시성과 풍요로움을 잘 번역하면, 파인 다이닝의 문법을 한층 넓힐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현재 한식 파인 다이닝 업계가 풀어나가야 할 가장 큰 과업은 무엇인가? 첫째로 인력이 너무 부족하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처우 개선도 시급하다고 본다. 단순히 일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가장 빠르게 한식을 확산하는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 식당에서 일해본 외국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한식당을 차리는 경우도 왕왕 접한다. ‘한식이 잘된다’는 얘기는 다음 세대들이 한식을 계속 먹느냐, 그리고 한국 바깥에서 한식을 얼마나 즐기느냐의 종적, 횡적 의미를 모두 내포한다. 둘째로 로컬의 확산이다. 쉽게 말해 서울 말고 다른 지역의 식문화를 고루 선보여야 한다는 거다. 파인 다이닝이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각 지역의 고유한 음식 문화가 다양하게 발전하며 미식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데, 한국은 아직 부족하다. 하지만 2024년 부산이 미슐랭 가이드 평가 대상 도시로 추가되면서, 우리에게도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한다. 올해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에서 54위를 차지한 ‘산’의 셰프 중 한 명이 부산 출신인데, 메뉴에 부산의 향토 음식인 돼지국밥이 있다. 본인의 정체성과 이야기를 국제적인 감각으로 풀어내는 셰프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한식 파인 다이닝의 지난 10년을 신선함과 스펙터클로 요약할 수 있다면, 이제는 깊이와 축적을 향해 나아갈 시기다. 지속 가능성이 가장 큰 화두라 할 수 있다. 난로학원을 설립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다. 어디에 방점을 두고 있는가? 셰프들이 식당을 차리면 열 곳 중에 일곱 곳이 문을 닫는다. 요리와 경영은 전혀 별개의 분야다. 그래서 난로학원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멘토링이다. 미식뿐 아니라 파이낸스, 마케팅, 브랜딩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교류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문화 산업으로 봤을 때도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플랫폼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의 경우만 봐도 미식의 힘이 패션과 영화, 와인, 럭셔리와 얽혀 200여 년간 성장해 왔다. 일본 음식 역시 디자인과 공예, 콘텐츠와 함께 발전했다. 음식이라는 건 외딴 섬이 아니다. 난로학원에서 하는 일은 한식이 오래 설 수 있는 생태계를 짓는 거다. 엘 불리 레스토랑과 요리과학연구소 알리시아 재단을 이끌었던 셰프 페란 아드리아가 2025년 난로학원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한국의 셰프들과 함께 전라남도 장성에 위치한 백양사 천진암에서 정관 스님에게 한국 발효 문화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난로학원 제공

한국적 파인 다이닝의 원류 - 조선 왕실의 연회

Features 2026 SUMMER

한국적 파인 다이닝의 원류 - 조선 왕실의 연회 애피타이저에서 메인 디시를 거쳐 디저트로 이어지는 파인 다이닝의 코스 방식은 19세기 초 프랑스 파리의 귀족 계급과 고급 레스토랑에 도입되어, 19세기 중후반 기본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시선을 조선(1392~1910) 왕실의 연회로 돌리면 뜻밖의 사실과 마주치게 된다. 조선 왕실은 이미 15세기 이래 코스 방식으로 음식을 제공하고, 전국에서 최고의 식재료를 조달하며, 전문 요리사 조직을 운영하는 정교한 연회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 1848. 종이에 채색. 141.5 × 49.5 cm(한 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848년 당시 임금이었던 헌종(재위 1834~1849)이 할머니 순원왕후의 육순(60세)과 어머니 신정왕후의 망오(41세)를 경축하기 위해 개최한 궁중 연회의 모습을 담은 8폭 병풍 그림이다. 그중 이 장면은 창덕궁에서 헌종이 주관하여 거행한 의례를 묘사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왕실에서는 규모가 큰 연회를 ‘진연’ 또는 ‘진찬’이라 불렀다. 이는 왕과 왕대비(선왕의 비)·왕비의 생일 전후에 열리는 잔치인데, 진연이 진찬에 비해 상대적으로 스케일이 컸다. 18세기 이후에는 규모와 관계없이 모든 연회를 진찬이라고 지칭했다. 진연 혹은 진찬이 왕과 왕대비, 왕비의 매해 생일마다 열린 것은 아니었다. 왕의 경우에는 즉위 20·30·40주년에, 생일은 20·30·40·50·60세가 되었을 때 치렀다. 또한 70세까지 장수한 남성 관료 출신들이 입회했던 기로소에 왕이 들어가면 이를 축하하는 연회도 열렸다. 기로소는 연로한 고위 관료들의 친목을 위해 설치된 기관으로, 조선 시대 관리들은 이곳에 들어가는 것을 영예롭게 여겼다. 성대하게 거행된 행사였기에 진연과 진찬에는 수많은 인원과 물자가 동원되었고, 경비도 매우 많이 들었다. 그래서 왕은 신하들의 요청을 거부하다가 세 번째 요청이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 행사가 자신과 관련될 경우, 두 번은 거절하고 세 번째에 허락하는 관행이 있었다. 왕의 윤허가 떨어지면, 행사 주관자는 잔치 전반을 준비하고 진행할 각 부서의 관원들로 임시 조직을 꾸렸다. 이 조직을 통해 일정, 참석자, 규모, 상차림 등 세세한 내용이 확정됐다. 왕실 연회의 기획과 준비 국립고궁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조선 왕실의 연회 상차림 재현 모습이다. 잔치의 주인공 뒤에는 일월오봉도나 십장생도 같은 병풍을 세우고, 앞에는 잔치의 규모와 주인공의 신분에 맞게 음식상을 차렸다. 또한 꽃으로 장식한 항아리와 촛대 등을 배치해 잔치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문제는 적어도 10년에 한 번은 열리는 왕실 잔치를 준비할 대형 부엌이 궁궐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저장 음식을 마련하는 소주방, 떡과 과자를 주로 만드는 생과방이 궐내에 있긴 했지만, 연회 음식을 장만하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이처럼 큰 부엌이 없었던 이유는 유학 이념이 왕과 왕비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부부라 할지라도 서로의 역할에 엄격한 구별이 있어야 하며, 생활도 따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과 왕비는 각자의 공간에서 따로 살았으며, 평소 식사도 혼자했다. 각각의 처소 근처에 작은 부엌이 마련돼 있었기에 큰 부엌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왕실 연회를 앞두었을 때는 행사장 근처에 야외 임시 주방이 설치됐다. 잔치 음식을 담당한 사람들은 물품 공급 부서인 사옹원에 속해 있던 남성 요리사 숙수였다. 숙수들의 직급과 직무는 다섯 가지로 나뉜다. 재부는 왕실 식사를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였고, 선부는 왕의 일상식을 책임지는 요리사였다. 조부는 음식의 간을 맞추는 일을, 임부는 밥이나 죽 같은 요리를, 팽부는 고기나 채소 삶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이들 아래에 구이, 밥과 국, 술과 음료, 떡과 과자를 각각 담당하는 실무자들이 있었다.음식을 만드는 전 과정이 분업화돼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연회 장소였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에는 수백 명이 참석할 수 있는 실내 연회장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왕실 잔치는 왕의 업무 공간인 정전이나 대비와 왕비의 침전인 내전에서 열리곤 했다. 하지만 이 전각들도 규모가 작아, 대청에서 앞마당 전체에 이르는 공간에 마루를 깔아 연회장을 만들었다. 이 임시 연회장은 참석자들의 안전을 위해 왕실의 목수들이 대거 동원되었으며, 행사 반년 전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열구자탕’이라고도 불리는 신선로는 왕실 잔치에 빠지지 않았던 화려한 궁중 음식이다. 굽 부분에 숯불을 넣을 수 있는 화로가 있어, 어육과 채소 등 여러 가지 재료를 넣은 뒤 육수를 붓고 끓여 먹는 음식이다. 사진은 국가유산진흥원이 운영하는 궁중 음식 다이닝 한국의집이 올해 봄에 선보인 신선로 요리이다. 국가유산진흥원 한국의집 제공 코스로 제공된 음식 왕실 연회가 개최되면 보통 다섯 번에 걸쳐 진행됐다. 남성 관료들만 참석하는 연회, 왕실 여성들이 참여하는 연회, 왕실의 남녀 친인척만 참석하며 밤에 이루어지는 연회, 그리고 행사 주관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과 마지막으로 뒤풀이에 해당하는 야연이 있다. 이 다섯 종류의 연회에서 중심 행사는 참석자들이 연회의 주인공에게 술이나 음료를 바치는 단계이다. 이것을 ‘진작’이라 한다. 진작을 몇 번이나 하는가는 연회의 규모와 직결됐다. 진작의 횟수는 홀수로 시행됐는데, 아홉 번이 최대치였다. 하지만 조선 시대 왕들은 검소함을 내세웠으므로 보통 다섯 번이나 일곱 번으로 한정했다. 한편 진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공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참석자들 중에서는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 제일 먼저 주인공 앞으로 나와 축하의 말과 함께 술이나 음료를 올렸다. 그러면 시중을 드는 여자 나인이 안주상을 주인공 앞으로 옮겼다. 이때 음식은 술과 음료에 맞춰 어울리는 것으로 준비됐으며, 몇 종류의 음식이 오르느냐 또한 연회의 규모에 따라 달랐다. 아랫사람에게 잔과 안주상을 받은 주인공은 참석자들을 격려하며 고마움을 표현하고, 그들에게 마실 거리와 먹을거리를 나눠 주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연회장 남쪽에 자리 잡은 악대가 곡을 연주했고, 무대 가운데에서는 무용수들이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춤을 췄다. 이후 주인공과 참석자들에게 차, 과일, 과자가 놓인 상을 제공하면서 연회가 마무리되었다. 주로 다식(쌀, 밤, 콩 등의 곡물을 가루 내어 꿀이나 조청에 반죽해서 만드는 과자)·정과(과일, 생강, 연근, 인삼 등을 꿀에 조려 만든 음식)·유밀과(밀가루나 쌀가루 반죽을 모양 내 말린 다음 기름에 튀겨 꿀을 발라 만든 과자)와 함께 전복이나 꿩고기, 문어를 말려서 만든 포가 상에 놓였다. 이 단계에서 연회의 주인공은 참석자들을 비롯해 이번 잔치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데 참여한 모든 관리와 일꾼들에게 음식과 선물을 내렸다. 주인공이 자리를 떠나면 비로소 연회가 끝났다. 궁궐에서 사용했던 수저집들이다. 수저를 보관하는 기능적 용도 외에도 붉은 비단에 장수와 건강을 상징하는 문양이나 글귀를 수놓아 사용자의 안녕을 기원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왕실 잔치나 제사에 사용되었던 은제 주전자이며, 18~19세기 궁중 연회를 기록한 문헌들에도 등장한다. 몸체의 한쪽 면에는 상상 속의 동물인 삼족오가, 다른 쪽 면에는 달에서 절구를 찧는 토끼 모습이 선각으로 묘사되었다. 높이 29 ㎝, 바닥 지름 9.5 ㎝.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등급과 품격의 시각화 1892년 고종(재위 1863~1907)의 생일을 기념해 열린 잔치에서는 고종에게 9번의 안주상이 차례로 바쳐졌다. 사진은 당시의 안주상을 궁중음식문화재단이 모형으로 재현한 것으로, 은행과 홍합, 전복 등으로 만든 음식을 상에 올렸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파인 다이닝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음식의 품격을 상차림과 기물로 시각화하는 것이다. 조선 왕실의 연회는 이 원리를 식탁 위에 정교하게 구현했다. 진작마다 올리는 안주상과는 별도로, 연회의 주인공과 주요 참석자들 앞에는 큰 식탁에 음식이 차려졌다. 가령 순조(재위 1800~1834)의 탄생 40주년과 재위 30주년을 기념하여 1829년 창덕궁에서 열린 잔치에서 순조는 46그릇의 음식이 차려진 큰 상을 받았다. 왕후에게는 34그릇, 세자와 세자빈에게는 각 31그릇, 공주에게는 25그릇의 음식이 제공되었다. 식탁에 오른 음식의 가짓수는 왕정 사회의 신분 질서에 따른 것이다. 메뉴는 육류·어류·채소가 고루 배치된 균형 잡힌 구성이었다. 가령 1902년 고종 황제(재위 1863~1907)의 기로소 입소를 축하하며 열린 잔치에서 황제의 식탁에는 63가지의 음식이 차려졌는데, 그중에서 재료와 요리법이 겹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왕실 연회의 음식 재료와 분량은 연회가 끝나면 낱낱이 기록되어 서너 권의 의궤로 만들어졌다. 의궤란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자세하게 적은 책이다. 이 기록은 조선 왕실 연회 음식의 매뉴얼이자, 훗날 다시 재현할 수 있는 레시피 구실을 했다. 조선 왕실의 연회는 최상급 식재료, 전문 요리사 조직, 코스 방식, 신분에 따라 차등화된 격식, 그리고 음악과 무용이 어우러져 오늘날 파인 다이닝의 모든 핵심 요소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물론 조선 왕실의 연회와 서구의 파인 다이닝을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전자는 유학적 예법과 왕실의 정치적 권위를 실현하는 의례적 장치인 반면 후자는 상업적 미식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아름답고 정교한 왕실 연회는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단절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파인 다이닝이 서구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거두면, 조선 왕실의 연회 속에서 한국 음식 문화의 긴 계보와 수준 높은 경지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연회의 술과 음료, 그리고 다양한 음식은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음식 문화가 오래전부터 세계 여느 왕실 못지않은 품격과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역사적 증거다.

새로운 얼굴의 한식, 익숙한 맛의 색다른 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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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얼굴의 한식, 익숙한 맛의 색다른 문법 국내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가파른 성장에는 한식이 있다. 미식업계의 권위 있는 주요 상을 수상한 레스토랑 대부분이 파인 다이닝에 한식을 접목한 곳들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미국 등 서양에서도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면 해외에서 굳이 한국 레스토랑에 시선을 둘 이유가 없다. 이 점은 한국 레스토랑의 장점이자 특별함이다. ‘숙수’는 조선 시대 궁중에서 음식을 담당하던 남성 요리사를 일컫는다. 권우중 셰프는 자신의 성씨인 ‘권’과 ‘숙수’를 합쳐 레스토랑 이름을 짓고, 한식의 본질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소반에 음식을 내는 상차림은 가장 한국적인 방식으로 한식의 품격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이다. 권숙수 제공 서양식 고급 정찬인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문화가 한국에 정착한 지는 20여 년 됐다. 2000년대 초중반 소득 수준이 높아지며 미식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커졌고, 그 시기 서구의 파인 다이닝 문화를 학습한 셰프들이 하나둘 독립형 레스토랑을 차리면서 국내 파인 다이닝 문화가 본격화됐다. 서양이나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에 견줘 역사가 짧은 편이다. 하지만 짧은 역사에도 성장 속도는 빨랐다. 100년 역사가 넘는 미식 안내서 ‘미슐랭 가이드’ 별점을 받은 레스토랑이 한국에 수두룩하다. 매년 순위를 발표하는 미식 행사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도 이름을 올리는 레스토랑이 늘고 있다. 다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전 세계 레스토랑 순위를 발표해 권위를 확보한 프랑스 미식 가이드 ‘라 리스트’에도 한국 레스토랑 진입 속도가 빠르다. 정관 스님이 죽순을 손질하고 있다. 한국 사찰 음식의 대가로 통하는 정관 스님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에 출연해 해외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국내외 정상급 셰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지난해에는 사찰 음식에 담긴 지혜와 레시피를 정리한 첫 에세이 『정관 스님 나의 음식』을 출판했다. ⓒ 베로니크 회거, 윌북 제공 다시 쓰인 한식의 언어 파인 다이닝 식문화는 스타 셰프를 배출하기 마련이다. 국내에선 대표적인 인물이 강민구 셰프다. 그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한국에서 유일하게 미슐랭 가이드 별 3개를 받은 요리사다. 미국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잠시 일한 적 있지만 유학파는 아니다. 국내 대학의 조리학과를 졸업하고 현장에서 실력을 쌓았다. 그의 레스토랑 ‘밍글스’는 2014년 문을 열었다. 당시 한식 DNA를 심은 그의 메뉴에 식도락가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밍글스 이전에 한국 파인 다이닝의 시초가 된 정식당의 단품들과 차별성이 있을지 의문을 가졌다. 정식당의 임정식 셰프는 서양식 플레이팅에 비빔밥 같은 우리네 음식을 담아 한식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바 있다. 하지만 밍글스에 대한 식도락가들의 우려는 오산이었다. 한식의 기본인 장을 이용한 디저트 ‘장트리오’는 스테디셀러가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디저트 크렘 브륄레에 우리네 장과 고춧가루 등을 섞어 만든 후식이었다. 이질적인 식재료인데 묘하게 맛의 궁합이 맞았다. 코스엔 한식의 향취가 넘실거렸다. 하지만 진한 한식 맛은 아니었다. 발걸음 겨우 뗀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컨템포러리 한식’ 세계로 진입한 맛이었다. 그는 기자와의 만남에서 “막상 한식을 하려니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했다”고 말했다. 배움에 목말랐던 그는 한식 스승을 간절히 찾아 나섰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는 셰프들의 스승으로 불리는 조희숙 선생과 사찰음식 명장 정관 스님을 만났다. 조희숙 선생은 대학 졸업 후 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서울 특급 호텔 주방장을 지낸 한식 전문가다. 한식이 세계적으로 부각되면서 명성이 더욱 높아진 실력자다. 2020년엔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 ‘아시아 최고 여성 셰프’로 선정되기도 했다. 강민구 셰프는 조희숙 선생에게 간청했다. 자신을 비롯해 요리사들을 위한 한식 수업 모임을 꾸려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맺은 조희숙 선생과 강 셰프의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정관 스님과의 인연은 그의 실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정관 스님은 넷플릭스 시리즈 에 출연해 세계에 한식을 알린 사찰음식 대가다. 한국의 사찰음식은 다른 아시아권 사찰식과 달리 수행을 기본으로 하며, 극강의 식도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정신이 빠진 먹거리는 그저 허기를 채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인간의 역사가 표표히 흐르는 문화로서, 먹거리에는 생각과 철학이 깊이 스며 있다. 강민구 셰프는 정관 스님을 통해 한식의 정신 한 축을 깨우쳤다. 지금 밍글스는 더 깊어진 한식의 맛을 선보인다. 당도가 높고 향이 진한 제주도 구좌읍 당근, 외국인 관광객들이 열광하는 참기름, 한우, 매실 고추장, 오미자, 찹쌀 등 우리 땅에서 나는 식재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찹쌀밥에 잘 익힌 서해안 대하 구이를 곁들인다. 여기에 전통주인 막걸리로 만든 소스를 더한다. 한우 스테이크엔 전통 육류 요리 중 하나였으나 근래에는 길거리 음식으로 인기가 높은 순대가 함께한다. 초창기의 밍글스가 서양식에 한식을 살짝 가미한 음식을 선보였다면, 현재의 밍글스는 조연의 자리를 박찬 세련된 한식이 주인공이다. 그의 이런 행보는 다른 셰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강민구 셰프의 밍글스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서로 다른 것들을 조화롭게 버무리는 데 무게중심을 둔다. 전통 한식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현대적인 테크닉을 유연하게 결합함으로써 한식 파인 다이닝의 지형을 바꾼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된다. ©HUBLOT 식탁에 오른 ‘지역’과 ‘전통’ 권우중 셰프가 운영하는 ‘권숙수’는 부침이 심했던 고급 외식업계에서 용케 잘 버틴 컨템포러리 한식 레스토랑이다. 그는 초창기부터 반상을 코스에 내는 등 한식의 전통적 매력을 강조했다. 그는 종종 “진짜 한식 셰프이고 싶다”고 말한다. 유행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는 장도 직접 담근다. 그가 조부의 생가에서 장을 담그는 날이면 레스토랑 전 직원이 동원된다. 직원들은 흥이 난다. 한 해 레스토랑 영업의 승패는 장맛에 달렸다. 메주(콩을 삶아 절구에 찧은 다음 뭉쳐서 덩이로 만든 다음 발효·숙성시키는 것. 된장, 간장, 고추장의 재료) 양만 해도 80장이 넘는다고 한다. 메주는 한식의 근간인 장의 처음이자 끝이다. 김은희 셰프의 ‘더 그린 테이블’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국내 여성 셰프의 수는 과거에 견줘 늘었지만, 여전히 적다. 2010년대 말 이른바 스타 셰프로 명명되며 방송을 누빈 이들 대부분이 남성이었다. 그런 풍토에서 살아남은 여성 요리사가 바로 김 셰프다. 그녀는 본래 프렌치 레스토랑 셰프였다. 2007년 문을 연 그녀의 레스토랑은 미국 요리학교 CIA에서 자신이 갈고 닦은 프랑스 요리를 선보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김 셰프는 몇 년 전 화려한 번화가인 강남 지역에서 종로구 원서동으로 레스토랑을 옮기며 변신했다. 이곳에서는 창밖으로 고풍스러운 창경궁이 보인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고급 한식 뷰 맛집’으로 알려진 이유다. 그녀는 우리 땅에서 자란 제철 채소의 맛을 강조한 샐러드, 오래 끓여야만 감칠맛이 우러나는 국 스타일의 수프, 연근으로 만든 한 입 거리나 장아찌 등을 낸다. 그녀는 몇 년간 한식 수련에 매달렸다. 대한불교조계종이 운영하는 사찰음식 전문 교육 기관 향적세계의 전 과정을 마쳤다. 요즘 새롭게 조명되는 한식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엔 ‘솔밤’, ‘비움’, ‘주은’, ‘테이블 포포’, ‘이타닉 가든’ 등이 있다. 이곳들의 공통점은 각 지역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제철 식재료를 직접 공수해 오거나 사장됐던 지역 음식의 조리법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릇이나 실내 장식에도 한국적 미감을 담기 위해 신경 쓴다. 올해 미슐랭 가이드 별을 처음으로 획득한 레스토랑 주은은 박주은 셰프가 진두지휘한다. 우리 전통 도기와 한국 풍광을 미디어아트로 구현한 실내 장식이 돋보인다. ‘세븐스도어’를 통해 이미 여러 해 동안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순위에 오른 김대천 셰프는 몇 년 전 비건 콘셉트의 레스토랑 비움을 열어, 소박하고 절제된 한식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 비움에 들어서면 마치 궁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엄태준 셰프가 이끄는 솔밤은 다른 요리사들도 메뉴를 경험해 보기 위해 예약 경쟁을 벌이는 곳이다. 누룩으로 숙성한 금태를 숯불에 구운 생선 요리, 합자장을 발라 구운 전복 요리 등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 순서대로 나온다. 합자장은 한국인들조차 생소하다. 토종 홍합을 삶고 졸이는 과정을 수십 번 반복해 만드는 통영의 전통 장이다. 농축된 맛이 일품이다. 이타닉 가든은 손종원 셰프가 총괄한다. 그는 두 번째 시즌과 JTBC의 요리 예능 프로그램 등에 출연해 최근 인기가 급상승 중이다. 그도 전통 조리법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그 조리법에 자신만의 감성을 담는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잡채를 한입에 쏙 들어오는 둥근 크기로 빚어낸다. 에 손 셰프와 함께 출연했던 김성운 셰프는 자신의 레스토랑 테이블포포에서 고향인 충청남도 태안의 식재료를 마음껏 펼쳐놓는다. 기하학적 형태의 그릇 위에 한 입 거리 요리가 정갈하게 놓여 있다. 스와니예의 이준 셰프는 기승전결이 있는 무대 공연처럼 한 끼 식사가 고객들에게 추억으로 남기를 바란다. 그가 그릇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다. 이 그릇은 하패리목공소의 이재하 작가와 협업하여 제작했다. ⓒ 신동민 이타닉 가든의 손종원 셰프는 제철 식재료와 전통 식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집중한다. 이타닉 가든의 여름 메뉴 중 하나인 호박 잡채는 말린 애호박에 다양한 품종의 호박과 호박꽃을 버무려 전통 잡채를 새로운 감각으로 접시에 담았다. ⓒ 조선팰리스 서울 강남, 럭셔리 컬렉션 호텔 음미해야 느낄 수 있는 맛 한식 파인 다이닝이 짧은 기간 다채로운 변화를 꾀하는 가운데 시류에 아랑곳하지 않고 굳건히 자신을 지켜온 레스토랑들도 있다. 이런 곳들은 외국인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예컨대 서울 서촌에 자리한 ‘온지음’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포함해 새롭고 개성 강한 문화를 좇는 힙스터들 사이에서 명소로 통한다. 경복궁 돌담을 마주하고 있는 온지음은 조은희·박성배 셰프가 이끈다. 이들의 한식은 한복의 우아함을 장착한 듯한 맛이다. 방풍죽, 탕평채, 진주식 갈비찜, 봄나물 비빔밥 등 이름만 들으면 언뜻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먹어 보면 깊은 맛이 일품이다. 이곳은 그럴 듯해 보이는 화려한 조어로 맛 자랑에 나서길 거부한다. 소박한 음식 이름 속에 한식의 진수가 있다고 믿는다. 메이필드호텔의 한식 레스토랑 ‘봉래헌’도 온지음 못지않게 정통 한식을 강조하는 곳이다. 이곳을 이끄는 이는 이금희 조리장이다. 그는 1980년대 말부터 국내 특급 호텔 한식당에서 일하며 실력을 쌓았다. 봉래헌의 구절판, 나물, 전 등은 한식의 원형을 경험해 보고 싶은 외국인들이 환호할 만한 맛이다. 지난 3월, 45년 만에 새로 단장한 ‘한국의집’은 앞서 언급한 조희숙 선생이 고문으로 있는 곳이다. 이곳 또한 기품이 있는 한식 맛을 선보인다. 한식은 천천히 음미할수록 맛의 정수가 드러난다. 장, 김치 등 재료 자체가 발효라는 시간의 힘이 작동해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련된 서비스까지 더해진 파인 다이닝 한식 레스토랑은 경험의 새로운 경지를 선물한다. 온지음의 다양한 메뉴들을 한 그릇에 담아본 모습이다. 온지음은 고조리서와 전통 조리법에서 영감을 받은 음식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테이블에 올린다. 재료 본연의 순수성을 지키면서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담백한 맛을 추구하는 것이 이곳의 스타일이다. ⓒ 온지음 비움은 채식 중심의 한식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며, 사람과 자연이 상생하는 음식을 지향한다. 김대천 셰프는 자연의 순리와 조화를 따르면서, 계절과 땅의 기운이 담긴 요리를 선보인다. 사진은 한식 도시락으로, 울릉도와 지리산, 제주 등 천혜의 자연환경에서 자란 식재료로 만든 나물 반찬과 몸에 좋은 잡곡밥이 담겨 있다. 비움 제공

호텔의 시대에서 셰프의 시대로 – 한국 파인 다이닝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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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의 시대에서 셰프의 시대로 – 한국 파인 다이닝 연대기 한국의 현대사는 유난히 압축적이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으며, 이제는 문화와 기술 분야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의 식문화 또한 역동적인 변화의 흐름 속에서 성장해 왔다. 특히 최근에는 소수 계층을 중심으로 향유되던 파인 다이닝이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며, 대중문화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안성재 셰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경력을 시작해 현재 모수 서울과 모수 홍콩을 운영 중이다. 모수 서울은 2023년판 미슐랭 가이드 서울에서 별 3개를 획득했으며, 재료의 섬세한 뉘앙스를 감각적으로 표현해 낸다고 평가받는다. 사진은 한 입 거리 요리인 캐비아 쌀 타르트. 모수 제공 국내에서 파인 다이닝이 자리를 잡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업계 종사자를 제외하고는 용어 자체도 낯설었다.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서울에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40곳이 넘고, 한국 셰프들은 글로벌 미식 무대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다. 국내 파인 다이닝 역사는 유럽이나 일본처럼 오랜 세월 다듬어진 미식 문화의 토대 위에 서있지는 않다. 하지만 응축된 서사를 써내려 가고 있는 셰프들의 노력과 시대의 흐름이 현재의 파인 다이닝 신을 재편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특급 호텔에서 태동한 미식 문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인테리어는 셰프가 추구하는 요리 철학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적 장치이자 미식 경험 설계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사진은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밍글스의 내부 모습이다.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강민구 셰프의 철학이 엿보이는 공간이다. ⓒ 밍글스 우리나라 고급 미식의 역사는 특급 호텔에서 시작됐다. 한국 관광·호텔 산업의 본격적 태동기인 1970~80년대, 서울 호텔 신라와 조선호텔, 롯데호텔 등 이 시기의 특급 호텔 레스토랑은 프랑스 요리와 서양식 코스 다이닝을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각인시키며, 현대적 고급 외식 문화의 출발점이 됐다. 이곳들은 주로 비즈니스 접대나 외교 행사를 위한 공간이었고, 일반 대중은 좀처럼 가까이하기 어려운 세계였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경제 성장과 함께 해외 여행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미식 선진지의 고급 레스토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국내에서도 유사한 식사 문화를 찾기 시작했다. 또한 TV 매체와 잡지를 통해 서양 요리 문화와 유명 셰프의 이야기가 소개된 것도 이 무렵이다. 자연스레 고급 식사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고, 그 수요는 천천히, 꾸준히 쌓여 갔다. 유학파 셰프들의 등장 2000년대 초반, 결정적인 변화의 씨앗이 뿌려졌다. 미국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 프랑스 르 꼬르동 블루, 일본 츠지조리사전문학교 등 세계 유명 요리학교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젊은 셰프들이 레스토랑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이 가져온 것은 요리 기술만이 아니었다. 제철 식재료를 선별하는 안목, 한 끼 식사를 하나의 서사로 설계하는 감각, 셰프가 예술가로 인정받는 문화까지 함께 들어왔다. 레스토랑의 입지도 달라졌다. 개인의 철학을 녹여내기 어려운 호텔을 벗어나 셰프의 이름을 내건 ‘오너 셰프’ 중심의 레스토랑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서울 청담동과 도산공원 일대는 국내 파인 다이닝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됐다. 유학파 셰프의 등장은 중요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고급 식사의 기준이 ‘어느 호텔에서 먹느냐’에서 ‘누구의 요리를 먹느냐’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셰프의 이름이 레스토랑의 브랜드가 되는 문화, 이른바 ‘셰프 중심 문화’가 이때 처음 싹텄다. 한편 미슐랭 가이드는 세계 공통의 기준으로 레스토랑을 평가하는 권위 있는 미식 평가서다. 2016년 11월, 세계적인 레스토랑 평가서 ‘미슐랭 가이드 서울 2017’이 처음 발간됐다. 이를 계기로 한국 파인 다이닝의 지형은 크게 달라졌다. 특히 셰프들에게는 요리의 완성도, 식재료 선별, 서비스 수준을 끌어올릴 구체적인 동기로 작용했다. 레스토랑에는 중요한 마케팅 수단이 되었으며,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믿고 가볼 수 있는 기준’이 주어졌다. 그렇게 미슐랭 가이드 도입 이후 국내의 파인 다이닝 생태계는 눈에 띄게 다양해졌다. 프렌치와 이탈리안, 일식 중심이던 미식 신에 모던 한식, 컨템퍼러리, 비건 파인 다이닝 등 다양한 장르가 뿌리를 내리며 질적 성장을 비롯해 양적 성장을 동반하게 됐다. 세계 무대에 선 셰프들 국내뿐 아니라 해외 무대에서도 한국인 셰프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출발은 한국 파인 다이닝계의 걸출한 셰프 중 하나로 꼽히는 임정식 셰프이다. 그는 2009년 서울에 ‘정식당’을 열고 2011년 뉴욕으로 진출했다. 파인 다이닝은커녕 한식 자체가 세계 미식 지도 위에 제대로 올라 있지 않았던 때, 한국인 셰프가 뉴욕 파인 다이닝 현장에 정면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전례 없는 시도였다. ‘정식 뉴욕’은 2024년 미슐랭 3스타, 2025년 제임스 비어드 어워드 최우수 셰프상 부문까지 수상하며 한국 파인 다이닝의 세계적 가능성을 입증했다. 정식 뉴욕 출신인 박정현 셰프의 ‘아토믹스’ 또한 2018년 뉴욕 개업 후 미슐랭 2스타를 거쳐 2025년 ‘북미 베스트 레스토랑 50’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최근 K-팝과 K-드라마 등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로 확산되며,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음식으로 이어졌다. 이 현상은 글로벌 미식 신에서 한식과 한국 셰프들의 입지를 넓히는 큰 동력이 됐다. 권숙수는 2016년 미슐랭 가이드 서울의 발간과 함께 별 두 개를 받았으며, 현재까지 매년 이 등급을 유지해 오고 있다. 미슐랭 가이드 서울은 한국 파인 다이닝의 수준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셰프와 레스토랑을 국제적인 미식 문화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촉매 역할을 했다. 권숙수 제공 대중문화의 영역이 된 파인 다이닝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주방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 셰프의 철학과 요리에 담긴 서사가 한 접시로 탄생하는 창작의 무대다. 이준 셰프가 이끄는 스와니예의 오픈 키친은 고객이 요리의 탄생 과정을 지켜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제철 식재료와 세련된 감성을 담은 코스 메뉴를 한 편의 이야기처럼 펼쳐내는 장소다. ⓒ 홍기웅 2024년 OTT 플랫폼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된 요리 경연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은 국내 파인 다이닝의 대중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슐랭 스타 셰프와 무명 셰프가 함께 경쟁하는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간 일부 미식가들만 알던 셰프들의 이름과 서사가 대중에게 명확히 알려졌고, 출연 셰프들의 레스토랑은 단숨에 몇 달 치 예약이 꽉 찼다. 파인 다이닝 셰프들의 이름이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인 변화였다. 현재 국내의 파인 다이닝은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축에 속한다. 프렌치, 이탈리안, 일식, 모던 아시안, 멕시칸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고급 요리 문화가 한 도시 안에서 공존하며 경쟁한다. 여기에 한국 고유의 식재료와 발효 문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한식 파인 다이닝이 더해지면서, 서울은 어디에도 없는 독자적인 미식 지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셰프들의 세대도 바뀌었다. 해외에서 배워온 것을 정교하게 재현하던 1세대를 지나, 지금의 젊은 셰프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이 땅의 이야기를 요리로 풀어낸다. 제철 식재료, 지역 생산자와의 직거래, 전통 조리법의 재해석이 하나의 흐름이 됐다. 이들이 만들어갈 국내 파인 다이닝의 다음 장이 기대되는 이유다. 서울 강남에 위치한 에빗은 호주 출신의 조셉 리저우드 셰프가 이끌고 있으며, 한국의 다양한 향토 음식과 식재료를 재해석한 코스 메뉴를 선보인다. 사진은 경상남도 함양의 전통주인 솔송주에 곁들인 방어 요리로, 숲의 향과 바다의 풍미가 어우러지는 조합이다. 에빗 제공 한국 파인 다이닝의 역사는 서울 중심부에 자리한 고급 호텔에서부터 시작됐다. 그중 호텔신라의 중식당 팔선은 1979년 호텔 개관과 함께 문을 연 국내 최고급 중식당 중 하나로, 한국 중식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미식 공간으로 명성이 높다. 사진은 팔선의 올해 여름 특선 메뉴이며, 정통 광둥식 요리를 현대적인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 호텔신라

한지의 조형적 실험과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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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의 조형적 실험과 가능성 한지는 현대 공예와 디자인 분야에서도 중요한 표현 매체로 활용된다. 형태를 구현하고 디테일을 표현하는 데 있어 한계가 없으며, 작가의 메시지를 유연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지는 고유의 문화유산을 넘어, 동시대 작가들의 재해석을 통해 현대인의 일상생활 속에 아름답게 스며들고 있다. 전통문화 연구소 온지음과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fnt가 협업하여 제작한 한지 제품들. 한국 전통 직물 문양을 디지털 패턴으로 만든 후 이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한지에 인쇄했다. 온지음 제공, 사진 김잔듸 최근 한지를 사용하는 공예 작가들이 예전과 비교해 훌쩍 많아진 것을 느낄 수 있다. 가장 확실한 이유는 한지 자체가 최고의 매체이자 소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지가 제작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세상에 이렇게 귀하고 정성스러운 소재가 또 있을까 싶다. 닥나무를 심고, 수시로 순을 솎아내고, 잿물을 만들기 위한 농사를 따로 짓고, 겨울이 가까워지면 마침내 닥나무를 찌고 말리고 삶고 세척해 한 장의 종이로 만들어낸다. 공예 작가들이 사용하는 모든 재료는 표면에 그 ‘물성의 영혼’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한지도 그러하다. 손과 눈으로 그 정연한 기품을 느끼다 보면, 이 소재로 쓰임이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는다. 무한한 가능성 라이프 에티켓 브랜드 희녹이 2026년을 맞아 섬유예술가 고소미와 협업하여 출시한 '새해 에디션'. 여러 장의 한지를 겹쳐 만든 ‘한지 패브릭 바구니’는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질감을 느끼게 하고, 한지를 변형해 만든 ‘소원 돌’은 돌을 쌓으며 행복과 건강을 빌던 풍속에서 착안해 만든 오브제다. 희녹 제공 한지를 주요 소재로 작업하는 고소미는 지금 이 순간 한지의 매력과 가능성을 가장 넓게 보여주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한지 가리개부터 조명, 오브제와 직물 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업을 선보인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무기는 그녀가 직접 개발한 한지사, 즉 한지로 만든 실이다. 한지를 떠올리면 반듯하게 떠 낸 평면의 종이가 연상되는데, 그녀는 한지를 섬유질 방향대로 길게 자른 후 물레에 걸고 조심조심 돌려가며 실로 잣는다. 처음에는 얼마 못 가 끊어져 버리곤 했지만, 자연 풀을 먹여가며 천천히 돌리다 보니 점차 튼튼한 실이 되었다. 이렇게 만든 실을 본인의 이름을 따 ‘소미사’라고 부른다. 이 실로 만드는 작품은 다채롭다. 우선 조명이 있다. 철사를 구부리고 꼬아가며 동그란 구 형태로 만들고, 그 안을 한지사로 촘촘하게 연결한 후 닥섬유를 풀어 헤친 나무통에 담갔다 꺼내면 철사와 한지실 사이사이로 종이죽이 묻는다.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 동그란 몸체 위로 제법 두꺼운 ‘종이 피부’가 올라가고, 그 안으로 전구를 넣어 불을 밝히면 은은한 빛이 매력적인 조명이 된다. 코바늘뜨기로 일일이 짠 커튼도 만들 수 있다. 황톳길이나 흙 같은 따스한 질감을 좋아하는 건축가 조병수는 이 커튼의 열렬한 팬으로, 많은 건축 프로젝트에 이 작품을 사용한다. 리넨이나 실크와 비교하면 확실히 두텁고 정겨운 느낌이며, 까슬까슬한 촉감도 매력적이다. 섬유 회화도 그녀의 시그너처 라인이다. 나무판 위에 두꺼운 한지 여러 장을 차곡차곡 올려 캔버스로 만든 다음 코바늘뜨기로 짠 한지 스웨터를 합치는 방식이다. 동양화에 쓰는 파란색 안료나 먹물로 스웨터 부분만 채색한 작품은 온화한 빛깔의 한지와 어우러지며 색다른 매력을 만들어낸다. 최근 그녀는 한지로 설치 미술 작품까지 만들고 있다. 한복에 자수를 넣을 때 사용하는 은실과 한지사를 한꺼번에 잡고 꼬아가며 춤추는 형상의 ‘섬유 외투’를 만든 다음 널찍한 장판지에 올린 작품으로, 2025년 청주공예비엔날레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다. “한지로 만들 수 있는 작품에 한계는 없어요. 나무처럼 세우는 것도 가능하고, 회화처럼 벽에 거는 것도 가능합니다. 은실을 사용하면 반짝이게 하는 것까지도 가능하지요. 무궁무진한 매력과 가능성의 재료입니다.” 고소미 작가의 말이다. 평면에서 입체로 한글을 모티프로 한 유남권의 지태칠기 작품이다. 근대 출판물 속 한글 서체의 특색을 칠기에 담아냈다. 지태칠기는 한지에 옻칠을 해서 만든 전통 그릇을 말하는데, 가볍고 물에 강한 특성이 있다. 유남권 제공 이정인은 평면적 재료인 한지가 얼마든지 입체도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작인 은 소파다. 언뜻 보면 흰색 대리석을 깎아 만든 것처럼 단단하고 볼륨감 넘치는 모습이다. 반듯한 한지를 작게 찢어 300여 개의 조각으로 만든 후 이를 다시 밀가루 풀로 겹쳐 붙이는 것이 1차 공정이다. 이렇게 완성한 큼직한 면의 종이를 100여 장 넘게 만들어 이를 다시 소파 형태로 쌓아 올리면, 거구의 운동선수가 앉아도 거뜬할 만큼 단단한 소파가 완성된다. 사극을 보면, 방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창호지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그래서 한지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명백한 오해다. 한지를 두세 장만 겹쳐도 강도가 세져 쉽게 찢어지지도, 흐느적거리지도 않는다. 한지의 강도가 우수한 것은 제작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일본 화지는 한 번에 2장을 뜰 수 있는 ‘쌍발뜨기’ 방식을 택하지만, 한지는 한 번에 한 장만 만들 수 있는 ‘외발뜨기’를 사용한다. 앞뒤 좌우를 모두 흔들며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섬유를 얹는 덕분에 어지간해서는 사용 시 손상되지 않는다. 홍익대학교에서 목조형가구학을 전공한 이정인은 이 작품으로 2025년 로에베 재단에서 시상하는 공예상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옻칠로 확장하는 미감 재단법인 예올이 주최하고 샤넬이 후원한 전시 의 전시작 중 하나인 박갑순 장인의 . 민화 속 까치와 호랑이에서 착안했으며, 호랑이 입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익살스러운 작품이다. 예올 제공 박갑순의 작품은 같은 영화에 소품으로 등장해도 될 만큼 사랑스럽다. 풀과 벌레를 주인공으로 그린 그림 ‘초충도’나 민화에서 봤음 직한 개구리와 호박, 풀벌레와 호랑이가 작은 캐릭터 인형으로 되살아난 느낌이다. 1999년 전통 한지 공예를 접한 그녀는 종이죽으로 다채로운 오브제를 만든 후 생생한 컬러로 마감한 작품을 통해 그녀만의 사랑스러운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중이다. 제작 방법은 우선 낡은 고서나 자투리 한지를 그러모아 밑재료로 준비한다. 이후 수집한 종이를 잿물에 삶고 깨끗이 씻어낸 후 삶은 종이를 잘게 찢거나 절구에 찧어 통밀 풀과 결합해 찰기가 있는 종이죽으로 만든다. 다음은 형태 잡기. 원하는 모양의 골격이나 틀 위에 종이죽을 겹겹이 바르며 두께와 모양을 잡아간다. 색을 내는 재료는 감물이나 우뭇가사리 같은 자연 소재들이다. 옻칠을 가미하는 때도 많다. 이런 작품들로, 그녀는 2025년 재단법인 예올과 패션 브랜드 샤넬이 함께하는 ‘올해의 장인, 올해의 젊은 공예인’ 시상에서 올해의 장인으로 선정됐다. 한지에 옻칠을 더하면 또 다른 미감과 기능이 만들어진다. 대표적인 이가 조명 디자이너 권중모다. 일정한 폭과 흐름으로 한지를 섬세하게 접거나 검은색으로 옻칠해 만든 작품들은 다양한 형태의 금속 지지대와 결합하며 저마다 빛의 투과율이 다른 조명 기구로 변신한다. 유남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한지로 기물을 만든 뒤 옻칠로 마감하는 ‘지태칠기’ 작품을 만든다. 기물에 옻을 바르고 건조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기는 텍스처와 색감이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저마다 농담이 다른 그의 작품들은 현대 공예 컬렉터들에게 인기가 높다. 한옥 창호에서 영감을 얻은 권중모는 빛의 음영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소재인 한지로 조명 작품을 제작한다. 한지를 접어 주름 패턴을 만들거나 또는 한지를 겹쳐 붙임으로써 빛의 투과성에 변화를 주고 있다. 사진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 LF03_em (Layers Floor lamp03_Embroidered )>. 권중모 제공

시간을 기억하는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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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기억하는 종이 한지는 시각과 촉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종이다. 한지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난다. 보통의 종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약해지지만, 잘 만든 한지는 오히려 섬유가 안정되며 질긴 내구성을 획득한다. 그래서 한지는 ‘천년을 가는 종이’라는 수사를 넘어, 실제로 시간을 견디는 재료로 평가받는다. 닥나무 껍질이 원료인 한지는 국내 여러 지역에서 생산되며, 각 지역에는 대를 이어 전통 기법으로 한지를 만드는 공방이 여럿 있다. 지역별 한지는 저마다 물성과 쓰임새가 조금씩 다른데, 이는 기후와 토양, 수질 등 닥나무의 생육 환경을 비롯해 제조 방법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제공 종이는 연약한 물질로 인식된다. 손에 쥐면 구겨지고, 물에 닿으면 흐트러지며, 불 앞에서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러나 인류는 이 연약한 재료에 역사를 기록했고, 예술을 남겼으며, 기억을 보존해 왔다. 종이는 약하지만, 가장 오래 버텨온 매체이기도 하다. 종이 중에서도 한지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한지는 단순히 ‘한국의 전통 종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담기 어려운 물성을 지닌다. 손끝으로 만졌을 때 느껴지는 깊은 결, 섬유가 서로 얽히며 만들어내는 조직감, 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비치는 투과감, 그리고 접었다 펴도 쉽게 상하지 않는 탄력. 이러한 한지의 물성이 최근 유럽의 문화재 복원 현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국제 복원지 시장에서는 오랫동안 일본의 화지가 사실상 표준처럼 사용돼 왔지만, 복원 대상이 다양해지고 복원 방식이 정밀해질수록 종이 자체가 유물에 개입하는 정도와 물성이 더욱 섬세하게 검증된다. 그 과정에서 한지는 대안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선택지이자 새로운 표준 후보로 조용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복원이라는 가장 보수적인 영역에서 그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복원지의 조건 문화재 복원에서 종이는 단순한 보강재가 아니다. 복원지는 원본을 떠받치되, 원본을 앞서서는 안 된다. 너무 강하면 원본을 압도하고, 너무 약하면 보강의 의미를 잃는다. 복원지는 강도와 유연성, 섬유 조직의 안정성, 접착제와의 궁합, 산성화에 대한 저항성, 그리고 작업 과정에서의 섬세한 조작 가능성까지 동시에 요구받는다. 복원지에 허락된 조건은 많고, 허용되는 약점은 거의 없다. 경기도 가평에서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장지방의 장성우 장인이 전통 방식의 한지 제조법인 외발뜨기 방식으로 한지를 만들고 있다. 외발뜨기는 발을 줄 하나에 매달아 놓은 후 좌우로 흔들면서 물을 뜨고 흘려 버리기를 반복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닥 섬유가 발에 전체적으로 골고루 안착해 종이 두께와 무게가 균일하고 강도가 우수해진다. 외발뜨기는 물을 흘려 버린다는 뜻에서 ‘흘림뜨기’라고도 부른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제공 한지는 이 까다로운 조건들 사이에서 드물게 균형을 이룬다.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 섬유는 길고 질겨 종이 내부에서 단단히 얽힌 구조를 형성한다. 덕분에 한지는 얇게 떠도 인장 강도가 높고, 접거나 습윤 상태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원본 위에 덧대어질 때도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섬유 사이에 형성된 미세한 공극은 습도를 머금고 내보내며, 종이·목재·섬유·채색층 등 서로 다른 재료 사이에서 완충재처럼 작동한다. 계절별 습도 변화가 큰 유럽의 기후 환경에서 이러한 특성은 더욱 의미가 있다. 한지의 이러한 물성은 실제 복원 현장에서 검토되고 기록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복원 전문가 네트워크인 ‘Gruppo 130°’는 한지를 일본 화지와 함께 비교 적용하며 실제 작품 복원에 사용했고, 습윤 상태에서의 강도, 유연성, 표면 특성, 작업성을 중심으로 평가를 남겼다. 이 과정에서 한지는 ‘동양의 전통 종이’가 아니라, 복원이라는 엄격한 기준 속에서 기능적으로 검토되는 재료로 다뤄졌다. 바티칸 박물관에서도 한지는 보존 처리 전문가 교육을 위한 새로운 재료로 학술·교육의 장에 들어왔다. 한지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과 공식 프로그램은 한지가 단발성 관심을 넘어 제도권 복원 담론 속에서 논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한지가 유럽 복원계에서 더 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라, 병행 사용 가능한 재료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우리는 과연 한지를 수출하기 전에 한지의 전통 기술을 충분히 전수하고 있는가? 체계적 기술 전달 한지가 세계 복원 시장에서 확장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의외로 단순하다. 종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종이를 쓰는 법을 함께 전수하는 것이다. 복원지는 재료 자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풀의 조성, 습식과 건식 공정의 차이, 박리와 접합의 타이밍, 색과 질감의 미세한 조정이 함께 축적될 때 비로소 재료는 현장에서 살아 움직인다. 일본 화지가 국제 복원 시장에서 오랜 시간 표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제품의 우수성뿐 아니라 교육과 연수 시스템을 통해 복원가 네트워크를 꾸준히 형성해 왔기 때문이다. 한지가 같은 길을 걷기 위해서도, 복원용 한지의 물성뿐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기술이 체계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기획된 것이 2025년 바티칸 박물관과 이탈리아 파브리아노 종이박물관을 잇는 ‘보존 처리 전문가를 위한 한지·자연색 기술 이전 워크숍’이다. 이 프로그램은 복원에 사용되는 한지를 단순히 공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원가 스스로가 한지와 자연 색상을 제작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 이전을 목표로 한다. 특히 복원 현장에서 가장 자주 요구되는 갈색 계열의 색상을 자연 재료로 안정적으로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오리목, 양파, 도토리, 오배자 등 현지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 복원 대상 유물의 변색 상태와 조화를 이루는 색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단순한 염색 교육이 아니다. 그것은 유물과 함께 변화해 갈 수 있는 재료를 다시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한지가 다른 나라의 전통 종이보다 내구성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최근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에서 문화재 복원 재료로 한지를 주목하고 있다. 사진은 바티칸 박물관의 한지 샘플. 이승철 제공 지역별 한지 한지는 단일한 종이가 아니다. 그것은 지역의 기후와 물, 원료, 그리고 기술이 만들어낸 서로 다른 종이들의 집합이다. 의령, 전주, 문경, 안동, 괴산 등 국내 주요 한지 생산지는 같은 닥나무 섬유를 사용하면서도 오랜 시간 전혀 다른 결의 한지를 만들어 왔다. 의령·문경·괴산은 국가무형문화유산 장인 공방을 중심으로 지역색이 뚜렷한 물성과 강도를 지닌 한지 생산을 이어오고 있다. 전주는 한지를 산업·관광·공예와 결합해 하나의 한지 문화권을 형성했다. 안동 한지는 전통 생활 공예를 통해 한지의 활용성과 연결성이 강조되어 왔다. 한지의 지역적 다양성은 복원지로서 오히려 강점이 된다. 복원 대상이 제각각이고, 하나의 종이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성격의 한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복원가에게 더 많은 선택 기회를 제공한다. 색한지의 확장 가능성 쪽물로 자연 염색하여 푸른빛을 머금은 색한지. 닥나무를 솥에 푹 찐 후 겉껍질을 벗겨내 쪽물에 담가 제작한다. 이승철 제공 전통적으로 한지는 자연 염색을 통해 색을 입힐 수 있는 종이였다. 색은 장식이 아니라 물성이었다. 한지 섬유가 염료를 머금는 방식, 빛을 받아들이는 깊이, 표면에 남는 결은 색한지를 하나의 완성된 재료로 만들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색한지 제작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자연 염색을 통한 색한지는 원래 원료를 염색하는 선염법과 염색된 원료로 만든 한지를 다시 염색해 색을 완성하는 후염법으로 만들어진다. 이 중 선염법은 거의 사라졌다. 한지를 만드는 이는 자연 염색을 모르고, 자연 염색을 하는 이는 한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색한지는 자연 염색 없는 화학성 후염법이라는 불완전한 방식으로만 남아 있다. 그럼에도 색한지는 한지가 지닌 확장 가능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영역이다. 특히 문화재 복원에서 요구되는 갈색 계열의 자연색을 안정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면, 색한지는 장식용 종이가 아니라 복원 기술의 핵심 요소로 다시 자리 잡을 수 있다. 오늘날 한지는 세계 복원지 시장에서 아직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지가 지닌 물성, 지역성, 그리고 장기 보존성은 분명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지닌 자산이다. 복원이라는 가장 보수적이고 엄격한 영역에서 한지가 호명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한지가 가진 기술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쩌면 한지가 세계로 나아가는 길은 새로운 역할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래된 역할로 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기록을 지키고, 예술을 떠받치며, 시간을 견디는 종이로서의 역할. 그것을 다시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때 한지는 세계의 시간을 기억하는 종이로 선택받게 될 것이다. 강원도 원주는 예로부터 주요 한지 생산지로 이름난 곳인데, 특히 다양한 색한지가 특징이다. 원주에 위치한 한지 공방 중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원주한지’에서는 230여 가지의 천연 색한지를 개발하는 등 전통 한지 보존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제공

예술 언어가 된 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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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언어가 된 한지 한지는 단순한 전통 재료를 넘어, 현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조형 언어와 실험의 매개체로 자리한다. 특히 ‘한국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갈망한 이들에게 한지는 그 자체로 비서구적 예술 철학의 구현을 가능케 한 본질적 방법론이었다. 천년 역사를 가진 한지는 시대의 미감과 예술의 가치가 급변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한국 미술의 동시대성을 생생하게 증명하는 예술 언어로 주목받고 있다. < Opening 21 >. 이정진. 2016. 한지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45.5 x 76.5cm. ed. 10+3AP. 작가 및 PKM 갤러리 제공 < Wind 07-95 >. 이정진. 2007. Photograph on hand-coated Korean Mulberry paper. 75.5 x 144.5cm. 작가 및 PKM 갤러리 제공 한국의 현대 미술가들이 한지를 작업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미술 한류’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단색화의 경우를 보자. 이들 작가들에게 한지는 단순한 전통 재료 이상으로, 작품의 존재 이유를 대변하는 고도의 매체에 가까웠다. 서양의 캔버스가 물감이라는 핵심 재료를 받아내는 보조적 위치에 충실했던 반면, 단색화에서 한지는 보다 주체적 역할을 맡는다. 예컨대 박서보의 유명 연작인 은 젖은 한지에 선 혹은 골을 만들어내는 반복적 행위로 작가 자신의 신체성 및 정신성을 담아낸 작업이다. 또 권영우는 한지 표면을 직접 찢고 뚫어서 획득한 종이의 물질성을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치환했다. 인간의 노동과 시간, 역사와 기억이 켜켜이 응축된 한지는 현대 미술가의 작업을 통해 재료 이상의 가치로 나날이 재해석된다. 획기적인 조형 언어와 다채로운 실험의 매체로 부상했을 뿐만 아니라 수행과 사색, 그리고 영감의 대상으로 거듭나고 있다. 형식과 사유의 정점에서 한지는 미술가들 각자의 고유한 방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진과 회화, 조각 등의 장르적 경계는 흐려지고, 과거와 현재가 교감하는 등 예술의 스펙트럼이 한결 넓어진다. 몰입의 깊이 . 김민정. 2022. 한지에 먹, 수채물감. 189 x 130cm. 작가 제공 30년 넘는 세월 동안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사진작가 이정진은 재현이나 기록 매체로서의 사진이 담아낼 수 없는 풍경을 포착해 왔다. 미대륙의 광활한 사막, 흙이나 바위 등의 자연, 한국의 석탑, 우표 같은 일상의 오브제들까지 수묵화를 닮은 이정진의 작업은 감성과 직관을 통한 시적 울림을 전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는 등 국적을 불문하고 보는 이들을 감동시킨 사진의 힘은 한지에서 출발한 아날로그 프린트 작업으로 배가된다. 작가는 1980년대 후반부터 전통 한지의 표면에 붓으로 감광 유제를 바른 후 이미지를 인화하는 독창적인 방식을 개발, 지속해 왔다. 장인정신이라 해도 좋을 수공적 방식은 복제 매체로서의 사진을 재정의하고, 사진의 물성과 회화성, 그리고 시간성을 표표히 드러낸다. 한지 특유의 거칠한 질감을 입은 이미지가 시각을 뛰어넘어 촉각까지 자극하는데, 이는 근래 시도한 아날로그 프린트와 디지털 기법을 결합한 새로운 작업에서도 유효하다. 이정진의 사진은 이 세상의 ‘풍경’을 넘어 ‘초상’을 찍은 듯한 특유의 느낌을 선사한다. 이는 손으로 찢은 듯 거친 한지의 가장자리를 그대로 작업 일부로 살리는 방식 덕분에 더욱 돋보인다. 이미지가 숨을 쉴 수 있도록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흑백 이미지를 숙성시키며 시공간을 초월해 현존하게 하는 것이다. 하여, 이정진의 이미지는 자유롭다. 프레임에 갇혀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무한히 확장되는 해방감으로 가득하다. 이정진에게 한지는 자기 경험과 감각을 보는 이가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장치인 동시에 사진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몰입의 깊이를 더하는 조력자다. 존재론적 대상 이정진에게 한지가 생명력을 상징한다면, 김민정에게는 사색의 매체이다. 프랑스 남부 생폴 드 방스에 위치한 고즈넉한 작업실에서 작가는 동아시아의 서예와 수묵화 전통, 그리고 동양 철학에 대한 탐구를 한지로 구현한다. 특히 김민정은 한지를 가볍고도 연약한 물성과 오랜 세월을 견디는 강인한 속성을 겸비한 독립적 대상으로 여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작가는 한지를 일일이 자르고 중첩해 형태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취해오고 있는데, 이때 한지의 가장자리를 촛불이나 향불로 그을려 먹 혹은 수채 물감이 자연스레 번지는 듯한 우연한 효과를 얻어냈다. 종이(한지)와 자연(불)의 통제 불가능한 협업은 인위적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몽환적 풍경을 그려낸다. 한지 조각들은 작가의 손끝에서 시시각각 색, 형태, 질감 등을 변주해 미묘한 입체감을 더한 신개념 추상화로 완성된다. 동양 예술의 정신과 서양 추상 회화의 어법,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물고 포용하는 실험적인 스타일은 작가의 전매특허로 자리매김했다. 김민정에게 한지는 매 순간 마주하는 가장 익숙한 재료이자 자신의 피부나 다름없는 존재론적 대상이다. 또한 기다림과 절제, 반복과 순환, 선과 도를 시각화하는 수행의 무대이기도 하다. 한지를 태울 때 작가는 명상하듯 호흡을 가다듬고, 그렇게 집중해서 얻어낸 조각들을 하나하나 얇게, 섬세하게 쌓아 올리는 노동의 시간을 필연적으로 거친다. 그녀의 작업은 태워 없애야만 얻을 수 있으며, 비움으로써 채워진다. 겹겹의 한지에 스민 사유가 예술 작품으로 승화되는 순간, 보는 이들은 치유의 힘을 체험하게 된다. 시간의 기억 전광영에게 한지는 기억의 매체이다. 그 작업 세계의 바탕에는 어린 시절, 한약방을 운영하던 작은아버지가 약재를 한지로 정성스레 감싸던 오래된 장면이 자리한다. 전광영은 고서를 찢은 종이로 서로 다른 크기의 삼각형 스티로폼을 일일이 감싸고 끈으로 묶어 한약방의 약첩 형태로 만든다. 언뜻 보자기로 싼 선물 같기도 한 조각들은 작품의 가장 실질적인 기본 단위이자 조형 언어가 된다. 이렇게 만든 조각 수천, 수만 개를 정교하게 합판에 붙인 은 그중에서도 가장 회자되는 작가의 대표 연작이다. 불규칙하게 삐죽삐죽 돌출된 조각은 부조 같은 화면에 율동감을 불어넣는다. 급기야 작가는 유기적 움직임을 극대화한 거대한 조각을 만들어내며 작업 영역을 대폭 확장하기도 했다. 베니스를 비롯해 각지에서 선보인 평면이자 입체인 작업들은 “민족의 혼과 얼을 담고 싶다”는 한국 작가로서의 바람을 직관적으로 구현했다. 작품의 주재료인 고서, 그리고 이를 이루는 빛바랜 한지는 곧 선인들의 기억을 의미한다. 작품 곳곳에 새겨진 문자와 시간 같은 단서들이 그들의 일상과 역사, 배움과 기록의 의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한지를 입은 조각들은 서로 충돌하고 때론 강렬하게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시각적 질서를 만든다. 작금의 세상을 비판하기도 하고, 천연염료로 얻은 밝은 색채를 빌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 그 정서를 감싼 전광영의 한지에는 상상 이상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 전광영. 2013. 한지에 혼합 재료. 250 x 200cm. © 전광영 & CKY 스튜디오 물질과 정신의 공명 . 양혜규. 2022. 한지, 알루디본드, 액자. 62 x 62cm. 작가 제공, 사진 양혜규 스튜디오 양혜규의 한지는 인간 문명의 보편적인 단서로 작용한다. 그동안 작가는 물질과 영성 사이의 관계를 탐구해 왔다. 특히 2020년부터 매진하고 있는 연작은 무속 전통에 사용되는 종이 무구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한 콜라주 작업이다. 무속에서는 제의를 치를 때 한지를 특정한 방식으로 접고 오려 ‘넋전’을 만드는데, 망자의 혼이 서리도록 하는 용도이다. 종이 무구가 물질과 정신이 공명하는 관계를 상징한다는 믿음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샤머니즘, 민속 또는 이교적 전통과 관련된 신성한 종이 오브제들이 전해오고 있으며, 한국의 한지를 비롯해 일본의 와시, 중국의 추피지 등이 그런 역할을 해왔다. 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통용되어 온 종이의 영적 특성을 현대 미술의 언어로 체화했다. 양혜규는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로 알려졌지만, 초창기부터 줄곧 평면 작업에 애정을 표해 왔다. 작가에게 평면성은 재료를 접고, 자르고, 붙이고, 겹겹이 쌓는 일이다. 역시 갖가지 문양 및 장식으로 추상적인 겹과 층을 생성하는데, 이는 그간 블라인드, 짚풀, 방울 등의 재료를 가공해온 방식의 연장선에 있다. 다른 점은 조각 및 설치 작품이 물리적 공간을 구축한다면, ‘납작하게 하는 행위’로 탄생한 평면 작업은 역설적으로 더 다채롭고 밀도 높은 층위를 품는다는 것이다. 접히고 축약된 은 평면성과 입체성의 이분법을 초월한 잠재적 추상의 세계로 매번 도약한다. 작가에게나 감상자에게나 종이, 즉 한지가 바로 그 세계로 진입하는 문이자 문고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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