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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 & Culture

컵에 담긴 청춘의 생존기

Arts & Culture 2025 SUMMER

컵에 담긴 청춘의 생존기 급격한 물가 상승 때문에 점심값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던 2010년대 초반, 서울 노량진에 포진한 포장마차들에서는 작은 혁명이 일어났다. 빠르게, 싸게, 든든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이른바 ‘컵밥’이 탄생한 것이다. 컵밥은 이제 단순한 끼니를 넘어 시대의 필요가 만들어 낸 새로운 식문화로 자리 잡았다. 고시촌의 생존 음식에서 K-푸드로 확장된 컵밥에는 청춘의 고단한 시간과 한국인의 밥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로벌 푸드엔터테인먼트 브랜드 ‘컵밥’은 송정훈 대표가 2013년 미국 유타주에서 푸드트럭으로 시작해 현재는 미국 전역으로 매장을 확장했다. 현지인의 문화와 입맛을 반영한 레시피 덕분이다. ⓒ 컵밥 “점심값 1만 원 시대.” 이 표현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2011년이었다. 당시 언론은 콩국수 한 그릇 9,500원, 칼국수 8,000원, 설렁탕 1만 원 등을 예시하며 물가 상승을 대서특필했다. 직장인들은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 관공서나 학교, 회사 구내식당을 찾기 시작했고, 편의점 도시락도 불티나게 팔렸다. 이는 단순한 식비 절약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생존형 소비에 진입했다는 신호였다. 2011년은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유난히 팍팍했던 시기였다. 제조업과 대기업의 생산성이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경제 성장률은 세계 평균에도 못 미쳤다. 생산자 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6.7%, 소비자 물가지수는 4%나 올랐다. 이 시기는 우리 경제가 ‘고성장’에서 ‘저성장’으로 궤도를 바꾼 변곡점이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비싸지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물가 상승으로 직장인조차 점심값을 고민하던 시절, 취업준비생, 특히 고시생들의 현실은 더욱 암담했다. 부모의 지원에 의존하며 온종일 공부에 매진해야 했던 이들에게 아르바이트는 사치에 가까웠다. 고시생의 하루는 공부를 중심으로 철저히 계획되어 있었고, 식사조차 효율성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했다. 노량진 컵밥의 탄생 서울 노량진은 학원가로 유명한 지역이다. 1980~90년대에는 대학 입시 학원들이 밀집해 호황을 누렸다. 이후 입시 학원들이 강남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는 공무원 시험을 위한 전문 학원들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노량진은 전국에서 고시생들이 모여드는 대표적인 고시촌이다. 이곳엔 ‘고시 식당’이라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일정 금액을 내면 밥과 반찬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뷔페식 식당이다. 지금도 고시 식당의 가격은 7,000원 안팎으로 저렴하지만 2011년 당시엔 3,000원 선이었다. 점심값이 1만 원을 넘는 시대에 이 가격은 분명 저렴했지만, 고시생들에게는 그것조차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물가가 오르면서 고시 식당의 가격도 조금씩 인상되고 있던 터라 고시생들의 걱정이 커져갔다. 노량진역 앞, 긴 행렬을 이룬 포장마차도 이 지역만의 독특한 풍경이었다. 떡볶이, 핫도그, 햄버거 같은 분식을 주로 팔았지만, 주먹밥이나 간단한 덮밥 형태의 메뉴도 일부 있었다. 그러던 중 2011년, 본격적으로 밥을 파는 포장마차들이 등장했다. 플라스틱이나 스티로폼, 혹은 넓적한 종이 용기에 볶음밥을 담아 팔거나 맨밥 위에 여러 가지 토핑을 얹은 덮밥을 팔았다. 가격은 한 그릇에 2,000원 정도였다. 뷔페식으로 구성한 고시 식당이 1인당 3,000원가량 했으니, 포장마차에서 파는 2,000원짜리 컵밥이 그다지 매력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시생에게 차액1,000원은 무시 못 할 금액이었다. 또 고시 식당은 여러 반찬을 내놓다 보니 개별 품질이 떨어졌으며, 음식을 고르고 받아야 하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는 고시생들도 많았다. 반면 컵밥은 간편하게 먹을 수 있고 양이 푸짐했으며, 달고 짠 맛으로 젊은 입맛을 사로잡았다. 줄 서서 기다릴 필요 없이 서서 5분 만에 한 끼를 해결하고 바로 학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컵밥은 가격, 맛, 시간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다. 노량진 컵밥 거리 모습. 컵밥은 노량진 포장마차에서 개발된 거리 음식으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수험생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 서울관광재단 컵밥 거리의 퇴색 ‘컵라면’에서 파생된 신조어 ‘컵밥’은 언론이 좋아할 만한 소재였다. 고시생들이 만든 신개념 식문화라는 스토리는 충분히 화제성이 있었다. 점심값 1만 원 시대에 한 끼에 2,000원이라는 상징성까지 더해져 컵밥은 빠르게 주목받았다. 단순히 값싼 끼니가 아니라, 청년 세대가 고안해 낸 생존 방식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컵밥 열풍이 커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주변 식당들이 포장마차의 컵밥 때문에 매출이 줄었다며 민원을 제기했고, 구청은 단속에 나섰다. 결국 포장마차 사장님들은 라면, 핫바 등으로 품목을 바꾸거나 컵이 아닌 알루미늄 포일 용기를 사용하는 식으로 우회해야 했다. 식당과 포장마차 간 컵밥 전쟁으로 컵밥 원조들이 노량진에서 사라져갈 때 아이러니하게도 컵밥은 전국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건강을 강조한 ‘비건 컵밥’, ‘키토 컵밥’ 같은 차별화된 메뉴도 등장했다. 2012년엔 한 편의점 브랜드가 발 빠르게 컵밥 제품을 출시했다. 이 무렵 노량진 포장마차들은 단속으로 인해 이미 컵밥을 팔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대기업은 되고, 서민은 안 되냐”라는 포장마차 사장님들의 항변은 컵밥 열풍 이면의 사회적 불균형을 보여줬다. 노량진의 컵밥 포장마차들은 3년 후 구청의 중재로 기존 학원가에서 150미터 떨어진 사육신역사공원 앞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컵밥 거리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청년 세대가 공무원을 더 이상 안정적인 직업으로 여기지 않기 시작하면서 고시생 인구가 줄었고, 이에 따라 고시촌의 분위기 역시 예전 같지 않게 됐다. 노량진 컵밥도 그만큼 활기를 잃었다. 그러나 컵밥 거리는 흥미로운 탄생 과정으로 인해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고, 한번쯤은 가봐야 하는 명소로 떠올랐다. 이제는 고시생보다 가족 단위의 여행객이나 젊은 연인들이 이곳을 더 많이 찾는다. 노량진 컵밥이 생존형 식문화에서 관광 콘텐츠로 확장되며 새로운 소비문화를 창출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포장마차에서 분식 대신 밥을 팔자 대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처럼 젊은 고시생들도 떡볶이나 국수 대신 밥을 먹어야 든든하다고 여겼다. 알곡 상태의 밀을 곱게 빻은 밀가루는 일종의 가공식품이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섭취 후 혈당을 급격히 올리고, 이내 급격한 허기를 유발한다. 반면 쌀은 천천히 흡수되어 포만감이 오래간다. 이는 수천 년 동안 쌀을 주식으로 삼아온 식습관에서 비롯되어 몸에 자연스럽게 새겨진 감각이다. 시대적 트렌드 오늘날 컵밥은 더욱 진화하고 있다. 고급화된 메뉴, 브랜드화된 제품, 해외에서의 K-푸드 아이콘으로 거듭나며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문화로 남아 있다. 우선 컵밥은 컵라면처럼 빠르게 대중화에 성공했다. 냉동식품이나 레토르트 형태로 가공되며 편의점과 마트에서 ‘전자레인지 2분’이면 완성되는 간편식으로 자리 잡았다. ‘집에서도 간단한 한 끼’라는 메시지는 시대 흐름과 맞아떨어졌고, 컵밥의 대중성을 더욱 굳혔다. 이제 컵밥은 한국을 넘어 세계로 향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 유타주에서 시작된 컵밥(Cupbop) 프랜차이즈다. 비보이 출신이었던 송정훈 대표가 유학을 왔다가 시작한 이 브랜드는 컵밥을 미국식 패스트푸드 스타일로 재해석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밥, 고기, 소스, 토핑을 조합해 하나의 볼로 제공하는 방식은 미국의 푸드 트렌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한국적 맛을 유지하면서도 서구적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 주효했다. 어느덧 창업 20년이 넘은 이 브랜드는 현재 미국 전역으로 매장을 넓혀가고 있으며, K-푸드 열풍과 맞물려 더욱 성장 중이다. 이 외에도 컵밥은 일본, 동남아, 유럽 일부 지역에서 한식 간편식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BTS, 김치, 불고기와 함께 컵밥은 ‘일상 속의 한류’를 구성하는 아이템으로 떠오르는 중이다. 컵밥의 가치는 단순히 간편하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한국 사회의 변화, 특히 청년 세대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음식이라서다. 고된 공부와 취업 준비, 아르바이트 사이에서 허겁지겁 끼니를 해결해야 했던 수많은 청춘들의 진심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컵밥은 시대의 필요가 만들어낸 음식 문화였다. 길거리에서 시작된 작은 컵 하나가 세계인의 식탁에 오르기까지 컵밥은 그 자체로 한국인의 생활과 감성을 담아낸 살아 있는 음식 문화의 사례다. 한 손에 쥔 이 작고 따뜻한 한 끼가 앞으로 또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지 기대가 된다. 노량진 컵밥은 간편식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1인 가구 증가에 따라 간편식 시장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다양한 종류의 컵밥이 편의점과 마트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 뉴스뱅크

전 세계를 울린 가족 드라마

Arts & Culture 2025 SUMMER

전 세계를 울린 가족 드라마 방영 내내 국내외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 폭싹 속았수다 >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한국적 정서가 물씬한 이 드라마는 국내를 넘어 세계 각국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 폭싹 속았수다 >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을 아우르며 주요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는 드라마다. 촬영지를 찾아 인증샷을 찍거나 드라마를 테마로 한 이벤트가 열리는 등 현재까지도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 넷플릭스 올해 3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16부작 드라마 < 폭싹 속았수다 >는 한반도 남쪽에 자리한 아름다운 섬 제주를 배경으로 광례에서 애순을 거쳐 금명으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가족사를 그려냈다. 이 드라마는 전 회차를 한꺼번에 공개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4회씩 순차적으로 방영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첫 회부터 최종회까지 흡인력과 화제성을 잃지 않으며 시청자들을 몰입시켰다. 특히 OTT 플랫폼의 주 이용층인 20~30대뿐만 아니라 중장년층과 노년층 시청자들까지 불러들이면서, 그동안 젊은 세대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던 OTT 서비스의 장벽을 허물었다. < 폭싹 속았수다 >는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력을 비롯해 김원석 감독의 짜임새 있는 연출과 임상춘 작가의 탄탄한 극본이 삼박자를 이루며, 작품성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근래 한국 드라마들 중 최고의 작품’이라는 극찬이 무색하지 않게, 지난 5월 열린 제61회 백상예술대상에서도 8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으며 최종적으로 작품상, 극본상 등 4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그런가 하면 글로벌 평론 사이트 IMDb에서 9.2점, 로튼토마토에서는 토마토미터 100%의 평점을 받았다. 이는 역대 한국 드라마 중 가장 높은 점수다. 이 수치는 < 폭싹 속았수다 >가 국내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국적 감성 < 폭싹 속았수다 >는 첫 회부터 한국인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바다 깊숙이 들어가 고된 물질을 하는 애순의 엄마 광례의 모습에서 저마다 자신의 어머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초반부의 시대적 배경이었던 1960~70년대는 경제 발전이 최상의 과제였던 재건의 시기였다. 이 시대를 살았던 한국의 어머니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억척스럽게 일하며 자식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키워내려 했다. 주인공 애순이 어린 시절 급장 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고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급장이 됐을 때 광례는 애순에게 “엄마가 가난하지, 네가 가난한 거 아니야. 쫄아붙지 마. 너는 푸지게 살아.”라고 위로했다. 그 말은 한국전쟁 이후 생존이 절실했던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가진 소망이었다. 광례는 딸에게 푸지게 살라고 했지만, 정작 자신은 거친 물질로 생계를 이어가다 겨우 스물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광례는 자신의 꿈이나 성공 같은 것은 사치에 불과했던 생존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열 살에 엄마를 잃고 생활력 없는 새아버지의 아이들을 돌보며 살아야 했던 애순의 삶도 모질기는 마찬가지였다. 애순에게는 지긋지긋한 섬을 떠나 대학도 가고 시인도 되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소처럼 밭을 일궈 수확한 양배추를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잇는 고된 삶만을 허락할 뿐이었다. 생존과 생계의 시대를 지나 부모 세대의 꿈을 현실화한 건 다음 세대이다. 애순의 딸 금명은 결국 애순이 그토록 바라던 섬을 떠나 최고의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고군분투 끝에 인터넷 강의 회사를 차려 성공을 거두고, 엄마의 꿈이었던 시집 발간도 대신 이뤄준다. 금명의 성공 스토리는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지는데, 행복과 불행이 끝없이 교차하는 복잡한 인생사를 통해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고통과 절망, 기쁨과 열망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시청자들이 온전히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래서 드라마가 공개된 후 오랜만에 펑펑 울었다는 시청 후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편적 테마 < 폭싹 속았수다 >는 지극히 한국적인 드라마다. 제주 방언을 그대로 사용한 제목에서부터 이미 드러나듯 지역적 정서가 깊게 밴 작품이다. 작품 제목인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 방언으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사실 제주 방언은 타 지역의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낯선데, 이 작품에는 한국인도 알아듣기 어려운 제주 사투리로 가득한 대사가 계속 이어진다. 여기에 더해 제주 지역의 토속적 문화, 여성들에게 버거웠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질풍노도 같았던 한국 현대사가 간접적으로 펼쳐진다. 18개 언어로 더빙되어 전 세계 시청자와 만난 이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 번역과 더빙에 심혈을 기울였다. ⓒ 넷플릭스 그런 연유로 이 드라마가 넷플릭스에서 막 공개됐을 때만 해도 세계적 반향을 일으킬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더욱이 자극적인 장르물들이 적지 않은 넷플릭스에서 따뜻한 가족 이야기가 과연 통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방영 내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들이 쏟아졌고, 넷플릭스 순위 집계에서도 비영어권 1위, 전체 3위를 기록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대부분의 국가들은 물론이고 남미권에서도 열풍이 불었다. 브라질에서는 한 마트에서 마지막 회를 다 같이 모여 단체 관람하는 이색적인 풍경도 펼쳐졌다. SNS에서도 해외 팬들의 이른바 ‘나의 관식’ 인증 릴레이가 유행처럼 번졌다. 평생 가족을 위해 몸을 혹사해 무쇠 같던 몸이 어느새 닳아버린 남자 주인공 관식은 당대를 살았던 한국 아버지들의 전형적 모습이다. 그런가 하면 아내 애순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순정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 캐릭터에 몰입한 팬들은 ‘당신의 아빠가 당신의 관식일 때’라는 제목으로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거나 커플 사진에 “나는 나만의 관식이랑 결혼할 것입니다.”라는 글귀를 붙였다. “나는 이미 나만의 관식과 살고 있다”며 다정해 보이는 부부의 사진을 올린 경우도 있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한 관식의 삶에 대한 감동을 릴레이 인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결국 국가, 언어, 문화가 달라도 ‘가족’이라는 보편적 테마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이 가장 한국적인 드라마가 세계인들의 ‘인생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한국형 가족 서사의 가능성 근대화 과정에서 남다른 가족주의 시대를 거쳐온 한국인들에게 가족 서사는 오랜 전통을 지닌 소재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1인 가구가 전체의 30%에 다다르게 된 한국은 가족보다는 개인의 삶을 더 중시하는 풍조로 변화했다. 이러한 사회상은 드라마에도 반영되어, 가족 드라마보다는 멜로물이나 장르물이 한국 드라마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다. 특히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의 등장 이후 보다 보편적인 서사에 무게중심이 쏠리면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스릴러 같은 장르물이 더 많이 쏟아졌다. 그런 점에서 < 폭싹 속았수다 >는 최근 흐름에서 빗겨나 있는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젊은 날의 꿈과 좌절, 가족 간 갈등과 화해, 예상치 못한 이별 등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들을 그려내며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 넷플릭스 문화적 할인(cultural discount)은 한 문화권의 문화 상품이 다른 문화권으로 진입할 때 언어, 관습, 종교 등 문화적 차이 때문에 가치가 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하지만 SNS와 유튜브가 공유되면서 문화적 할인은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다. 글로벌 시청자들이 한국 드라마를 함께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이색적인 풍경은 문화적 장벽이 점차 무너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는 곧 차별화된 로컬 문화를 깊이 있게 담아내는 콘텐츠가 글로벌 성취의 관건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취향과 관심사가 다원화된 시대에 전 세계 모든 대중들이 열광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 폭싹 속았수다 >의 이례적 성취는 가족 서사가 한국 콘텐츠 산업에서 중요한 매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미래의 꿈, 현실과 만나다

Arts & Culture 2025 SUMMER

미래의 꿈, 현실과 만나다 『네 이웃의 식탁』 구병모 작, 김지영 번역 와일드파이어, 2024 224쪽, 14.99 파운드 미래의 꿈, 현실과 만나다 구병모의 『네 이웃의 식탁』은 정부의 저출산 해결 프로젝트 사업에 참여한 네 커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녀 셋을 낳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서약을 하면 실험공동주택에 입주할 수 있게 해주는 사업이다. 요진과 남편 은오가 네 번째 입주 부부로 공동주택에 들어오면서, 독자들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이 커뮤니티의 모습을 처음 마주하게 된다.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라는 희망적인 이름과 달리, 이곳 입주민들 사이에는 이미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공동주택 반장 역할을 자처하는 단희는 쾌활하고 적극적이지만, 이웃에 대한 관심이 간섭과 참견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출산 직후 동화책 그림 그리는 일에 복귀한 효내는 남편이 출근한 사이 아이를 돌보며 마감에 시달리고 있다. 공동체 생활에 참여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여산과 교원 부부는 그들만의 문제가 있지만, 작은 공동체에서 비밀이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그 가운데 새로 합류한 요진과 은오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커플로, 요진은 ‘직장맘’이고 은오는 전업 아빠다. 단희의 남편 재강의 차가 고장 나자, 은오가 요진과의 카풀을 제안하면서 부담스러운 상황이 연출된다. 출퇴근길을 함께하게 된 재강은 요진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꾸 선을 넘으려 하고, 요진은 자신의 판단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서울의 높은 집값, 최저 수준의 출산율, 정부의 어설픈 대응 등 현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조명한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인간적 질문들의 틀에 불과하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전통적인 성 역할에 따라 사회가 아버지 또는 어머니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이를 낳은 후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요진의 친구들이 말하듯, 정말 아이를 낳아야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며, 그 이전까지는 그저 ‘소꿉놀이’에 불과한 것인가? 생물학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이 서로 얽히고설켜 인물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지만, 그 원인이 정확히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작품 속의 공동체는 마치 현미경 아래 놓인 페트리 접시와 같다.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이 고립된 공간에 모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리 좋은 의도로 시작했더라도, 곧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입주자들은 과연 그 균열을 메꿀 수 있을까? 아니면 균열이 점점 깊어져 그들이 섬세하게 쌓아올린, 취약한 세상을 뒤흔드는 단층선으로 변하게 될까? 중대한 사회 문제로 인해 아무리 상황이 심각하다 해도, 사회란 결국 개인과 개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곳이다. 구병모 작가는 거시적인 한국 사회와 미시적인 공동체의 삶을 동시에 들여다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성인으로 산다는 것, 부모가 된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무한화서』 이성복 작, 안톤 허 번역 앨런레인, 2023 176 쪽, 18.00 달러 시의 거장이 들려주는 시와 삶에 대한 성찰 이성복의 『무한화서』는 창작 수업 중 470개의 아포리즘을 학생들이 정리하여 담은 책이다. 깊은 성찰을 통해 얻은 지혜의 글을 통해 저자는 종교, 철학, 스포츠, 과학, 수학 등 다른 분야들을 인용하면서 은유와 비유를 통해 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언어, 사물, 시, 글쓰기, 삶이라는 다섯 주제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에 대한 저자의 일관된 생각이 그 기저에 흐르고 있다. 즉, 시란 의도적 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미묘한 사유가 드러나며, 저자는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도 매번 다른 관점과 시선을 보여준다. 각각의 아포리즘은 빗방울처럼 잠깐 스쳐 지나가지만, 쌓이고 쌓여 결국 바위를 뚫는 물방울처럼 깊은 울림을 남긴다. 특히 마지막 장에는 시와 무관해 보이는, 그러나 어쩌면 가장 시적인, 인생의 지혜들이 담겨 있다.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야 독자는 그 여정이 ‘언어’에서 ‘삶’으로 곧게 이어지는 직선이 아니라,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하나의 원형임을 깨닫게 된다. 한 번 읽으면 저자의 시 철학을 엿볼 수 있고, 차분히 여러 번 읽다 보면 더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 역성 > 이승윤, CD,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마름모, 2024 불합리한 세상을 향한 포효 이승윤은 2011년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이후 인디 음악계에서 활동했다. 그가 대중적 인지도를 얻게 된 건 JTBC가 2020년부터 방영하는 예능 프로그램 의 초대 우승자가 되면서부터다. 브릿팝, 하드록, 헤비메탈, 펑크 록에 이르기까지 날것의 재료들을 도마에 올려 난도질한 뒤 특유의 한국어 말맛을 뒤섞는 게 그의 음악적 레시피다. 2024년 발매한 정규 3집 은 싱어송라이터로서 그가 걸어온 여정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 용어를 가져온 가사들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폭풍처럼 질주하는 록 템포에 올라타 활어처럼 펄떡인다. 그가 쓰는 가사는 대체로 호전적이다. 싸움의 대상은 자기 자신과 세계다. 그는 세상이 제시하는 진리와 삶의 방식, 성공 방정식에 대해 끝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고개를 흔든다. 15곡이 실려 있는 이 앨범은 64분에 이르는 대장정이다. 타이틀곡 은 사납게 포효하는 보컬과 밴드 사운드에 산뜻한 현악을 가미해 ‘처박혀 버린 얼’과 ‘짓밟힌 넋’을 되찾는 역성혁명을 이루겠다고 천명한다. 앨범은 중반부 어쿠스틱 팝 발라드에서 야성적 펑크 록을 지나 후반부쯤 6분이 넘게 몰아붙이는 에서 하이라이트에 도달한다. 부드럽게 시작해 광기 어린 드럼의 질주로 치닫는 마지막 곡까지 이 앨범은 이승윤이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물게 굵은 붓과 커다란 캔버스를 쓰는 아티스트임을 입증한다. 다양한 음악적 색깔을 자기 식대로 쌓아 올려 큰 그림을 그려 내는 앨범 지향형 음악가 말이다. 이승윤은 이 음반으로 2025년 열린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악인, 최우수 록 노래, 최우수 모던록 노래 3개 부문의 트로피를 안으며 3관왕에 올랐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임희윤 음악평론가

조경가 정영선, 모두를 존중하는 조경

Arts & Culture 2025 SUMMER

조경가 정영선, 모두를 존중하는 조경 한국의 1세대 조경가 정영선(Jung Young-sun)은 서구에서 시작된 조경이란 개념을 한국의 땅과 기후, 그리고 한국인의 삶의 방식에 맞게 정착시킨 인물이다. 그녀의 대표작들은 자연과 인간, 장소와 시간이 서로를 존중하며 공존하는 풍경을 그려낸다. 그녀는 조경을 아름다움을 설계하는 기술이 아니라 모두의 삶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실천으로 여기며, 그 실천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겸허한 태도에서 출발한다. 원다르마센터는 원불교가 미국 포교 활동을 위해 뉴욕에 건립한 시설이다. 건축물과 경관이 하나의 유기체로 어우러지며 상생의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광활한 대지의 기존 질서를 그대로 존중해 설계되었다. 원다르마센터 제공 정영선과 그녀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2024)에서 ‘조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국토’이다. 그녀가 말하는 국토는 지정학적 범주나 경제적 개념이 아니다. 그녀는 국토를 시간과 기억, 생명과 감각이 중첩된 살아 있는 풍경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은 언제나 장소의 맥락을 읽는 것에서 출발하며, 이는 곧 국토를 구성하는 각각의 장소들이 지닌 고유성과 관계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1941년생인 정영선은 한국의 1세대 조경가이다. 그녀는 50여 년의 조경 인생 동안 우리 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자생종의 생물 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 하퍼스 바자 > 코리아 제공, 사진 표기식 정다운(Jung Dawoon) 감독의 다큐멘터리 < 땅에 쓰는 시 >의 한 장면. 선유도공원은 산업 시설물이었던 정수장을 다양한 공간적 체험이 가능한 장소로 탈바꿈시킨 사례이다. © 영화사 기린그림(Giraffe Pictures) 국토에 대한 인식 정영선에게 국토는 채워야 할 공간이 아니라, 비우고 들여다봐야 할 장소다. 그녀는 무분별한 도시화와 균질화된 개발이 국토의 고유한 풍경을 지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맞서 그녀는 조경을 통해 국토의 본래 결을 되살리고, 그 안에 스며 있는 역사와 생태, 사람의 흔적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다가간다. 서울식물원은 이러한 태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사례 중 하나다. 이 프로젝트에서 그녀는 기존의 습지와 수로, 버드나무 숲을 존중하며 인공적인 개입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흐름을 따라 정원을 구성했다. 관람객은 정형화된 식재가 아닌, 물과 식물이 어우러진 생태적 흐름을 경험하면서 국토의 원형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서울식물원은 다양한 식물 종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한편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도시의 일상적 공간에서 벗어나 어딘가 다른 곳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어졌다. 조경설계 서안(SeoAhn Total Landscape) 제공 이와 더불어 여의도샛강생태공원에도 정영선의 국토 인식이 스며 있다.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인 여의도에는 초고층 빌딩숲이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도회적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여의도 가장자리를 따라 흐르는 샛강 일대는 한때 콘크리트 제방에 갇혀 방치된 수로였으며, 생태적으로는 죽어 있는 공간에 가까웠다. 그녀는 이곳을 녹지 공간으로 만드는 데에서 나아가 본래의 자연성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도시와 생태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기존의 인공 구조물을 걷어내고, 샛강의 수질 정화와 호안 조성을 통해 강과 습지가 스스로 기능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 생태적 복원뿐 아니라 사람들의 접근성도 중요하게 여겼다. 행인들이 무심코 지나치던 둑길과 철로 주변을 걸으며 산책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고, 야생 식물과 조류가 살아 숨 쉬는 곳에 인간의 감각이 다시 접속할 수 있도록 연결 통로를 열었다. 이는 그간 잊혔던 국토성과 자연성이 어떻게 되살아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정영선은 국토를 감각과 경험의 장으로도 인식한다. 그녀는 땅을 걷고, 만지고, 냄새 맡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총체적 감각으로 국토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조경은 이러한 감각을 다시 연결하는 실천이며, 국토는 그러한 감각의 무대가 된다. 감각의 회복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옥상 정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녀는 문화 시설의 옥상이라는 비일상적 조건에서도 땅과 하늘, 바람과 식물, 사람의 움직임이 얽히는 생생한 풍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방문자들은 옥상 위에 펼쳐진 ‘대지’를 걸으며, 이곳이 위치한 광주라는 도시의 역사성과 자연의 숨결을 감각적으로 체험한다. 이는 단순히 흙이 깔리고 한국 고유의 수종이 식재된 정원이 아닌, 국토적 풍경의 수직적 확장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정영선이 말하는 국토는 ‘국가의 땅’이 아니라 삶과 시간, 감각과 기억이 쌓인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녀는 조경가의 역할을 단지 땅 위에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존재하던 것들을 다시 보이게 하고,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일로 파악한다. 국토는 그녀에게 있어 언제나 ‘다시 읽어야 할 시’이며, 조경은 그 시를 낭독하는 또 하나의 언어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은 빌딩 숲 사이에서 숲과 습지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조류학, 곤충학, 어류학, 식물학 등 각계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아 한강 변에서 가장 생태적인 공간으로 거듭났다. © 서울관광재단 공공성과 정치성 정영선은 조경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공공의 장소’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화려하고 기념비적인 공간이 아니라 걷고, 쉬고, 머물 수 있는 공간 말이다. 그녀는 그것이 조경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한다. 특히 그녀는 조경의 ‘정치성’에 주목한다. 즉, 조경은 사회의 구조와 권력의 흐름, 일상의 불균형을 드러내고 조율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의 프로젝트에서는 언제나 사용자의 관점이 중심이 된다. 벤치 하나, 나무 하나, 길 하나까지도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떻게 쓰일 것인지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특히 공공 프로젝트에서 이런 태도가 더 두드러진다. 특정한 계층의 미감을 위해 공간을 계획하기보다 누구나 평등하게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정영선은 조경을 공공성과 가장 깊이 맞닿아 있는 디자인 영역으로 본다. 그녀의 설계는 늘 사용자에 대한 세심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앉을 수 있고, 누구나 지날 수 있으며, 누구나 머무를 수 있는 장소. 그는 “조경은 삶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공간”이라 말한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조경, 누구에게도 편파적이지 않은 조경 말이다. 이러한 철학은 서울 곳곳의 공공 프로젝트에서 구현되어 왔다. 그녀는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경이 도시 속에서 어떻게 권력과 시선을 분산시키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며, 사회적 대화를 가능케 하는지를 고민한다. 조경을 사회를 조율하는 하나의 장치로 다루는 것이다. 정영선의 작업이 조용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 안에 기술을 넘어선 태도와 철학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조경은 그녀의 손에서 ‘풍경을 디자인하는 일’이 아니라, ‘삶을 위한 여백을 마련하는 일’로 확장된다. 복합 문화 시설인 예술의전당 설계를 위한 모형. 1980년대에는 경제 성장에 따른 생활 방식의 변화로 다양한 문화 기관과 레저 시설이 계획됐다. 특히 예술의전당은 여가 활동을 위한 장소를 조성하는 데 있어서 조경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한국적 조경 정영선의 작업에는 늘 묵직한 질문이 깔려 있다. “조경이란 무엇인가, 한국에서 조경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그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의 작업 속에서, 그리고 자연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 속에서 풀어내고자 노력해 왔다. 그녀의 철학은 2023년 세계조경가협회(International Federation of Landscape Architects, IFLA)로부터 제프리 젤리코 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주최 측은 선정 이유에서 “서양에서 유래한 조경의 낯선 개념을 한국적 토양과 경관에 맞게 해석했다”고 밝혔다. 이는 정영선이 보여준 조경적 감각이 단지 지역적 특색을 덧붙이는 토속주의가 아니라, 장소의 본질과 관계를 섬세하게 짚어내는 방식으로 조경의 세계적 언어를 갱신한 것임을 의미한다. 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호암미술관의 전통 정원 희원은 정영선이 전통적 요소를 본격적으로 구사하게 된 전환점이었다. 화계, 연못, 담장, 정자 등의 건축적 요소와 더불어 한국 전통 정원의 미의식이 곳곳에 구현되었다. © 호암미술관 그녀는 ‘한국적 조경’에 대해서 “조경은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야 한다”고 자주 언급한다. 건물, 나무, 물길, 동선 등 각각의 요소들은 그 자체로 목적을 갖기보다는 근경, 중경, 원경으로 이어지는 시선의 흐름과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다. 이때 그녀가 중시하는 개념이 바로 차경(借景)이다. 차경은 말 그대로 외부 자연 경관을 정원의 일부처럼 끌어들이는 전통적인 조경 기법이지만, 정영선에게 그것은 단순한 시각적 수법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태도, 자연을 향한 겸허한 시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영선의 조경은 흔히 말하는 ‘전통 재현’과는 다르다. 그는 전통의 형태나 상징을 복원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 한국인의 경관 인식과 자연관, 삶의 태도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구성한다. 그녀가 받은 제프리 젤리코 상은 단지 한 개인의 성취를 기리는 것이 아니다. 조경이라는 서양 중심의 공간 개념이, 한국의 경관과 철학 속에서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세계에 보여준 결과였다. 정영선은 자신의 설계가 “자연이 말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은 언제나 눈에 띄지 않지만, 자연이 항상 드러난다. 그녀의 작업은 땅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과 다시 관계 맺을 수 있도록 장면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녀는 그렇게, 오늘날의 땅 위에 담 너머 풍경의 조용한 아름다움을 다시 불러온다. 제주도에 위치한 오설록 티뮤지엄은 아모레퍼시픽이 차 문화를 소개하고 확산하기 위해 건립한 박물관이다. 정영선은 건축물 주변으로 제주의 차밭과 자연이 서로 어우러질 수 있도록 정원을 조성했다. © 김용관(Kim Yong-kwan)

과거에서 온 현재의 인형들

Arts & Culture 2025 SUMMER

과거에서 온 현재의 인형들 연희공방 음마갱깽은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 전통 인형극을 계승하는 동시에 현대적 요소를 도입해 전통 인형극을 확장하고 대중화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또한 기존 인형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표현과 움직임이 가능한 인형을 개발하고 있다. 흔히 꼭두각시놀음으로 불리는 덜미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전통 인형극이다. 남사당놀이 이수자이자 전통 연희 집단 음마갱깽 대표인 음대진은 인형 제작과 극 창작 및 연출을 통해 전통 인형극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서양에 마리오네트극, 일본에 분라쿠가 있듯이 한국에는 꼭두각시놀음이 있다. 전통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은 남사당놀이의 일부이다. 남사당놀이는 40여 명의 남성들로 구성된 유랑 극단 남사당패가 선보였던 전통 민속 공연이다. 풍물과 버나(대접돌리기)를 비롯해 현대의 텀블링과 비슷한 살판,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 등 총 여섯 마당으로 구성된다. 덜미가 바로 꼭두각시놀음인데, 연희자들은 꼭두각시놀음이라는 용어 대신 보통 덜미라고 부른다. 인형의 목덜미를 잡고 조종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꼭두각시놀음은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을 따서 박첨지놀음이나 홍동지놀음이라고도 불린다. 이 인형극은 음악, 춤, 곡예와 같은 기교 외에도 사회적 메시지를 던진다는 점에서 여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인형극의 등장인물들은 양반 주인과 저항하는 하인, 늙은 부부와 남편의 첩, 속세의 쾌락에 빠져버린 승려, 끝없는 억압과 착취로 고통받는 민중 등 각기 다른 사회 계층의 전형적인 인물을 대표한다. 극은 단지 이야기의 재미만 주는 것이 아니라, 신분제에 갇힌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풍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성평등과 인간 존중의 이상을 보여 주기도 한다. 사회상 반영 꼭두각시놀음은 포장막을 치고 사방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워 공중무대를 만든 다음 인형 조종자인 대잡이가 포장 안에 들어앉아 인형이 달린 막대기를 잡고 움직인다. 인형들은 상반신만 포장 위로 올라와 관객들과 마주한다. 대잡이가 막 안에 들어가면 관객들의 표정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무대 앞에 앉은 산받이가 내뱉는 소리를 통해 객석의 분위기를 파악한다. 산받이는 인형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대개 악사(樂士) 중에서 이 역할을 맡는다. 대잡이와 산받이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1시간 남짓 극을 끌어간다. 이들이 중간중간 관객에게 말을 걸기 때문에 꼭두각시놀음은 무대와 관객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형태를 띤다. 창작극 < 절 대목 >의 한 장면. 전통 연희와 전통 건축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절을 짓고 부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번뇌, 깨달음을 그리고 있다. © 음마갱깽 고려 시대의 문신이자 시인인 이규보(1168~1241)가 쓴 「관농환유작(觀弄幻有作)」은 꼭두각시놀음을 본 후 감상을 시로 남긴 작품이다. 꼭두각시놀음의 극본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시를 통해 고려 시대에도 극본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꼭두각시놀음의 내용은 채록본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보통 7~10막으로 구성된다. 주인공 박첨지의 일대기가 펼쳐지면서 서민들의 애환과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풍자, 종교를 뛰어넘는 구원 등이 묘사된다. 꼭두각시놀음은 일제강점기에 명맥이 끊어질 뻔했으나 1964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1988년에는 남사당놀이의 나머지 다섯 종목도 추가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9년 남사당놀이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 새로운 시도 연희공방(演戱工房) 음마갱깽은 남사당놀이의 덜미 인형을 직접 제작해서 가장 활발하게 공연하는 단체로 꼽힌다. ‘음마(音摩)’는 소리를 어루만져 음악을 만든다는 뜻이고, ‘갱깽’은 대장간에서 나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이다. 이들은 기존 덜미 인형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양한 표현과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개발해 현대에 맞는 전통 인형극을 보여 준다. 음마갱깽은 2016년 연희자이자 인형 제작자인 음대진(Eum Dae-jin 陰大眞)을 중심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출신 7명이 모여 창단했다. 현재 인형 제작 및 예술감독, 기획자, 작곡가, 디자이너, 연희자 등 총 18명이 활동 중이다. 음마갱깽 작업실 한쪽에 놓인 덜미 인형들. 덜미 인형은 하반신과 팔꿈치가 없는 것이 특징이며, 인형을 어떻게 잡고 조종하느냐에 따라 살아 있는 듯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하다. “저희는 덜미 인형극 단체인 만큼 처음부터 창작극에도 전통적 요소를 꼭 넣자는 원칙을 정했어요. 대잡이와 산받이, 그리고 관객의 구도 안에서 전통 인형극의 요소가 하나라도 나오게 합니다. 마리오네트극에 덜미 하나, 테이블 인형극에 산받이를 넣는 식이죠.” 음마갱깽 대표 음대진은 남사당놀이 이수자이다. 그는 덜미 인형뿐 아니라 마리오네트라고 불리는 끈인형, 손을 인형 안에 넣어서 연기하는 손인형 등 다양한 형태의 인형을 제작해 개성 있는 오브제극을 보여 주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미국, 러시아, 일본,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각지의 인형 전문가들을 찾아가 배웠다고 한다. 그는 꼭두각시극에 나오는 절을 짓고 허무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전통 건축인 대목(大木) 이수 과정을 수료하고, 실제로 절 짓는 현장에 들어가서 상세히 배우기도 했다. 이를 토대로 2023년 무대에 올린 창작극 은 세간의 호평과 함께 극단이 크게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덜미 인형은 팔꿈치와 하반신이 없는 게 특징인데, 대잡이에 따라 여러 동작이 가능합니다. 음악을 타며 춤 동작을 할 때면 투박하지만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덜미는 대사 외에도 즉흥적인 재담을 통해서 극을 이끌어 가다 보니 관객의 몰입도가 매우 높다. “공연을 하다 보면 인형에 사람의 감정이 투사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관객 입장에서 앞에 막이 드리워지고 인형만 나와 있는 상태에 놓이면 인형에 신경이 집중되죠. 또 인형과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 노출돼 있는 경우에도 인형의 동선에 따라 관객의 감정이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형극임에도 눈물을 흘리는 관객분들도 많습니다.” 그는 사람이 보여줄 수 없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게 인형극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한다. 음대진 대표가 덜미 인형을 제작하기 위해 도면 작업을 하고 있다. 인형은 성별과 성격에 따라 디자인이 다른데, 그는 주로 관상 책을 참고해 캐릭터의 특징을 담는다. 해외 관객들의 반응 음마갱깽을 세상에 제대로 알린 것은 2020년 황해도 장연(長淵) 지역에서 전승되던 인형극을 재현한 공연이었다. 장연 꼭두각시극에 사용되었던 전통 인형들을 복원해 제작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대 변화에 따른 현대화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 공연은 음마갱깽의 고정 레퍼토리로 자리 잡아 매년 무대에 올리고 있다. “황해도 장연 꼭두각시놀음의 경우 대본 채록본이 남아 있었어요. 대본에 나와 있는 6점의 덜미 도판을 토대로 29개 인형을 재현했습니다.” 인형극은 대본이 먼저 나오기도 하지만, 인형을 먼저 만들고 이야기를 풀어가기도 한다. 그때는 인형의 성별, 성격, 특징에 따라 디자인을 하는데 주로 관상 책을 참고한다. 또한 비뚤어진 성격이라면 코를 비튼다든지 말이 많은 캐릭터라면 입을 크게 하는 식으로 포인트를 잡아서 표현한다. 밑그림이 완성되면 모눈종이에 옮겨 그려서 나무 도판에 붙이고 조각한다. “덜미 인형은 얼굴부터 손잡이까지 일체형이에요. 얼굴 윤곽을 따고 코를 중심으로 조각하죠. 입이나 안구가 움직이는 구조라면 전체 얼굴을 먼저 완성한 뒤 뒤통수를 파내고, 어깨판과 팔을 만든 뒤 마지막으로 의상을 제작합니다. 사람이 입던 옷을 리폼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2024년 5월에는 모스크바 킥클랍(KykLab) 극장에서 음마갱깽의 대표 레퍼토리 세 작품을 옴니버스극으로 올려 화제가 됐다. 전석 매진을 기록한 이 공연은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한국 인형극이다. 지원 사업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기획으로 성사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지난해 10월에는 러시아에 이어 이탈리아 토리노 인칸티연극제(Incanti Theatre Festival)에도 참가해 꼭두각시놀음 중 일부를 공연했어요. 해외 관객들의 열띤 반응에 K-인형극의 가능성을 엿보았습니다.” 인형 제작자로서 그의 꿈은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의 대표 이미지로서 덜미를 알아봐주는 것이다. 음대진 대표의 작업 공간. 그는 탈이나 소도구 등 작품에 필요한 도구들을 모두 직접 만든다. 처음에는 인형 하나를 만드는 데 두 달이 넘게 걸렸지만, 지금은 며칠 만에 만들 정도로 손에 익었다.

이야기를 건네는 패션을 꿈꾸다

Arts & Culture 2025 SUMMER

이야기를 건네는 패션을 꿈꾸다 이승주(Sung Ju Beth Lee) 디자이너가 2017년 론칭한 다시곰(Darcygom)은 한국 전통을 모티브로 삼은 패션 브랜드이다. 브랜드명에는 ‘다시 한번 더’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모던 한복과 업사이클링을 통해 새로운 패션 아이템을 제시하고 있다. 디자인이 소비자와 소통하는 매개체라 생각하는 이승주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승주 디자이너는 선염 직물인 색동이 점차 사라져가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이를 대중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승주 디자이너가 이끄는 다시곰은 전통을 현재에 맞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구현하는 브랜드이다. 옛날 선비들이 착용했던 정자관의 형태를 본뜬 가방, 한복 저고리의 동정 깃 디자인을 활용한 점프슈트, 색동을 전면에 내세운 스니커즈 등 전통적 요소에 재치와 개성을 뒤섞으며 특색 있는 디자인을 선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둔 업사이클링 디자인도 병행한다. 브랜드명 다시곰은 부사 ‘다시금’의 옛말인데, 이 작명에는 그녀가 추구하는 패션의 가치가 담겨 있다. 기존의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해석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 그녀는 미국, 캐나다, 독일, 탄자니아 등지로 옮겨다니며 해외에서 오래 살았다. 그 세월을 합치면 17년이다. 패션 문외한이었던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 어느 날 불쑥 한복과 침구 등으로 유명한 서울 광장시장에 찾아가 옷 짓는 법을 배웠다. 그러고는 2017년 브랜드를 론칭하고 패션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후에는 오뚜기, 카스 등 국내 기업들과 다양한 협업을 펼쳤고, 디자인 영역도 계속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박물관,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과도 협업해 뮤지엄 스토어에 제품을 입점시키기도 했다. 패션 디자인과 거리가 먼 삶을 살다가 어떻게 브랜드를 만들게 되었나? 내가 해외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이 탄자니아였다. 당시에 건강이 나빠져 일을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당장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미래를 그려보다가 새로운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해외를 돌아다니는 동안 각 나라의 전통 원단이나 옷을 사 모았더라. 베트남에서는 아오자이를, 일본에서는 유카타를 사왔는데 막상 내게는 한복 한 벌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광장시장을 찾아갔고, 재봉하시는 분에게 대뜸 옷 만드는 걸 배울 수 있냐고 물어봤다. 이상한 사람 취급도 받았지만 선뜻 알려주겠다는 분이 있어 재봉을 배웠고, 서울디자인재단과 서울시 산하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다가 브랜드까지 만들었다. 정말 우연이었다. 어릴 적, 한복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나? 어린 시절을 북미에서 보냈다. 4~5살 때쯤 한복을 처음 입어봤는데 빨간색, 주황색에 장미가 그려진 옷이었다. 지금봤더라면 촌스럽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어린 내 눈에는 정말 예뻐 보였고 공주 옷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더 자라면 사이즈가 안 맞을 텐데 계속 입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했었다. 타향살이를 하면 고국에 대한 갈증이 생긴다. 남동생은 한식에 빠졌는데, 나는 옷으로 발현된 게 아닐까 싶다. 다양한 굵기와 색채의 색동을 조합해 선보인 프로젝트. 2021년 미국의 라이프스타일 잡지 『레드 핫 몽드(Red Hot Monde Magazine)』에 소개되었다. © 오승준(OH Seungjune) 색동은 다시곰의 시그너처다. 소비자들이 색동에 매료되는 이유를 무엇이라 생각하나? 나는 잊히는 것과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착이 있다. 광장시장에서 색동 원단을 구하다가 우리나라에서 색동을 만드는 곳이 이제 한 곳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요가 적으니 공급도 없어진 것이다. 색동은 한국의 문화유산인데 사장될 위기에 처한 것이 안타까웠고, 그래서 색동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다행히 반응이 좋아 여러 디자인에 적용할 수 있었다. 브랜드 이름처럼 ‘무언가를 다시’ 부흥시키는 경험이었다. 색동의 쨍한 색감에 매력을 느낀다는 이들도 있었고, 원단 자체가 주는 노스탤지어를 좋아하는 이들도 많았다. 현대무용단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와는 어떻게 같이 작업하게 됐나?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한류와 연계한 한복 프로젝트 공모전이 열렸다. 다른 사람들이 아이돌 같은 유명인과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과 달리 나는 평소 좋아하던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를 중심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운이 좋게도 내 제안이 채택되었고,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와 협업해 ‘애매모호한 다시곰밀림(Ambiguous Jungle)’이라는 타이틀로 2021년 SS 컬렉션을 준비할 수 있었다. 식품 제조 기업 오뚜기와 협업한 프로젝트로, 오뚜기가 제공한 현수막으로 의상을 제작했다. © 오승준(OH Seungjune) 전통적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첫 번째로 재미있어야 한다. 재미있지 않으면 고통스럽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는 정말 많지 않은가. 나는 스토리텔링을 중시하고, 그래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을 때 작업을 시작한다. 디자인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다음은 실용성이다. 나는 “이 옷을 입고 지금 당장 지하철에 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한다. 지금 내가 안에 받쳐 입은 상의는 네크라인을 한복 저고리처럼 디자인하고, 발열 원단을 써서 만든 기능성 옷이다. 전통적인 모티프와 스타일, 기능성을 접목하는 것이 다시곰 스타일이다. 패션 잡화에 특색 있는 이름을 붙인 것도 재미 때문인가? 가방을 만들어서 ‘놀부백’이나 ‘갓백(Gat Bag)’ 등의 이름을 붙였다. 놀부는 전래 동화 『흥부와 놀부』에 나오는 심술궂은 형인데, 동화책을 보면 정자관을 쓴 모습으로 등장한다. 정자관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평상시에 착용하던 모자로, 여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가방을 제작했다. 그런데 이 가방 명칭을 ‘정자관백’이라고 지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뾰족한 형태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놀부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 같아서 그렇게 지었다. 갓백은 갓 모양을 본떠 만들었기 때문에 그대로 이름을 붙였다. 2음절이라 부르기도 쉽고, 영어 단어 ‘god’도 연상되니 재미있었다. 소금을 담는 포대는 튼튼하지만 물류비로 인해 한 번 쓰고 전량 폐기된다. 이승주 디자이너는 국내 대표적 천일염 생산지인 신안군 비금도에서 버려지는 소금 포대들을 업사이클링해 의상을 제작했다. © JUNG Ji Hoon 전통 복식의 실루엣을 현대인의 체형에 맞게 디자인하는 노하우가 있다면? 한복의 아름다운 부분 중 하나는 자연스럽게 잡히는 주름이다. 그 주름이 체형을 보완해주고 움직임을 편안하게 한다. 그래서 평면 재단이 답이다. 입체 재단으로는 구현이 어렵다. 업사이클링 디자인에서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디자인을 먼저 잡고 그다음에 어울리는 소재를 찾는다. 하지만 업사이클링은 주어진 원단을 가지고 시작한다. 즉 디자인 프로세스가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일단 기상천외한 원단을 찾는다. 어릴 적에 패션 디자이너 경쟁 프로그램인 를 즐겨 봤다. 말도 안 되는 미션이 주어졌는데도 출연자들이 해결해 가는 모습을 보며 쾌감을 느꼈다. 나도 그렇게 챌린지를 한다는 마음으로 임할 때가 있다. 언젠가는 친구 차가 폐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동차 시트 원단을 떼어내 옷을 만든 적이 있다. 폐현수막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이 나온다. 기업들이 행사에서 사용한 현수막의 양도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기업과 연계를 맺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더 뿌듯한 마음이 든다. 해외 박물관들과는 어떤 협업 과정을 거쳤나? 오뚜기와의 협업을 눈여겨본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의 제안으로 뮤지엄 스토어에 몇 가지 제품을 입점하게 됐다. 이후에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과도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 내 작업을 흥미롭게 여긴 것 같다. 동대문에 위치한 서울패션허브 봉제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승주 디자이너. 그녀는 전통의 재해석과 업사이클링을 통해 지속가능한 패션을 꿈꾼다. ‘한국적’인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와 비슷한 세대라면 델몬트 오렌지 주스 병을 알 것이다. 옛날에는 주스를 다 마시고 나서 그 병에 보리차를 담아 사용하는 집들이 많았다. 그 병에 보리차를 보관하면 한동안은 보리차 뒷맛에서 희미하게 오렌지 향이 느껴진다. 그게 한국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스라하게 남아 있는 것. 오늘 하루를 사는 데 크게 필요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이 한국적인 것이 아닐까?

한글 글꼴을 향한 40년의 실험과 도전

Arts & Culture 2025 SUMMER

한글 글꼴을 향한 40년의 실험과 도전 안상수(Ahn Sang-soo)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한글의 조형미를 탐구해 온 디자이너이다. ‘안상수체(Ahnsangsoo Font)’를 비롯해 그가 발표한 파격적 글꼴들은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2007년에는 타이포그래피 분야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남긴 공로로 독일 라이프치히시가 제정한 구텐베르크 상을 받았다. < 홀려라, 홀리리로다 >. 2025. 종이에 실크 스크린. 100 × 70 ㎝. 신세계갤러리에서 열린 안상수 개인전 전시작 중 하나. 자신의 사진을 타이포그래피 작품으로 제작했다.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제공 어린아이들이 처음 학교에 들어가 한글을 배울 때 사용하는 국어 공책은 네모 칸으로 이뤄져 있다. 한 줄에 8칸, 혹은 10칸이다. 연필을 움켜쥔 아이들은 그 칸에 맞춰 글자를 쓰느라 안간힘 쓴다. 어른들은 옆에서 훈수를 둔다. 맞춰 써라, 똑바로 써라, 튀어나가면 안 된다. 1985년, 디자이너 안상수가 완성한 글꼴 안상수체는 네모틀 안에 맞춰 적는 것이 옳은 줄로만 알았던 한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깼다. 안상수체는 기존 네모틀에서 벗어나 아래로, 옆으로 삐쳐 나간 글씨체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글꼴 개발 회사에서 “이게 글자냐?” 하고 난색을 표해 세상에 못 나올 뻔도 했지만, 1991년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아래아한글에 기본 글꼴로 탑재된 후 사용자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혁신은 ‘근본’에서 탄생했다. “훈민정음 해례에서 ‘초성, 중성, 종성 글자를 음절 단위로 좌에서 우, 위로부터 아래로 쓴다’고 설명한것처럼 한글 합자(合字) 원리에 충실하게 만든 것이 안상수체입니다. 최고의 디자이너는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죠. 한글 창제는 아이폰 출시만큼이나 당시에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거예요.” 안상수는 안상수체가 초성, 중성, 종성이 모두 같은 크기인 평등의 서체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 글꼴은 형태적으로는 모음의 세로 기둥이 받침의 정가운데에 맞닿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한자 문화권의 영향으로 글자를 네모반듯하게 모아 적었던 고정관념을 깼고, 너무 얌전히 갇혀 있던 한글을 깨웠다. 포스트모더니즘 서체 글자는 사람을 닮는다. 안상수체는 안상수를 꼭 닮았다. 1952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난 그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면서 디자인에 발을 들였다. 학보사 편집장을 지낼 적에는 자신이 그린 만화를 연재했다. 대학신문을 인쇄하는 과정에서 좌우가 뒤집힌 활자를 지켜봤고, 그때부터 글꼴에 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LG전자 디자인연구소의 전신인 금성사 디자인실에 입사한 ‘대기업 직원’이 되고 나서도 잡지 창간과 편집 작업을 이어갔다. 글자에는 시대가 담긴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권위주의와 획일성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안상수체는 민주화와 다양성에 대한 목소리가 드높았던 시대정신의 한복판에서 태어났다. 네모틀을 벗어난 글자들은 기존 질서에 대한 작은 저항이자 새로운 시대를 향한 몸짓이기도 했다. 해체주의 담론이 한국에 막 도입될 무렵 탄생한 안상수체는 한국 디자인에서 거의 처음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실현한 상징적 작업이 됐다. 젊은 안상수는 반듯한 네모틀에서 자꾸만 벗어나려 했다. 30대 중반이었던 1988년에는 친구 금누리와 함께 홍익대학교 앞 골목에 일렉트로닉 카페를 열기도 했다. 조각가 금누리는 유명한 지휘자 금난새의 동생이다. 이들은 카페에서 영화 상영부터 PC 통신 동호회 모임, 서울과 로스앤젤레스를 연결한 실시간 통신 미술까지 선보였다. 이곳은 PC방의 시초로 꼽히며, 인디와 젊음의 상징인 홍대 앞 문화의 산실이 됐다. 안상수를 만나 물었다. 디자인이 뭡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멋을 짓는 일이죠. 옷도 짓고, 밥도 짓고, 집도 지어요. 의식주 모두가 ‘짓는’ 것입니다. 죄도 짓고, 시(詩)도 짓는 것이니 ‘짓다’라는 동사는 어마어마하게 중요합니다. 멋이라는 감각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고, 멋의 범주에서 보자면 촌스러운 것까지도 멋이 됩니다. 멋을 부리는 게 아니라 멋을 짓는 게 디자인입니다.” 안상수체.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에 근거하여 설계된 간결하고 기하학적인 탈네모틀 글자체이다. 마노체. 안상수체 이후 세벌식 모듈 글꼴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졌는데, 그중 마노체는 선 모듈로 이루어진 글꼴이다. 이상체. 안상수체를 해체한 다음 재배열하여 만든 글꼴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의 전위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미르체. 정사각형 모듈을 조립하여 설계한 글꼴이다. 모듈을 쌓거나 변형하는 방식으로 글꼴에 공간 개념을 적용했다. 안상수의 문자 그림 2012년 정년 퇴임으로 홍익대학교를 떠난 다음 날부터 안상수는 항상 같은 차림이다. 상하의가 붙은 점프슈트, 일명 작업복을 입고 머리엔 비니를 쓴다. 정체성은 일관성에서 나온다. 문자가 일관성 있는 사회적 약속이듯 안상수는 자신의 외양을 디자인했다. 한국 추상미술의 시작에 김환기가 있다면, 한국 디자인 전시의 첫 문은 안상수가 열었다. 삼성문화재단 리움미술관의 전신 로댕갤러리(Rodin Gallery)가 디자인 관련 전시로 가장 처음 기획한 것이 바로 2002년 개최한 안상수의 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파리, 오펜바흐, 홍콩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17년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이 대규모 회고전 를 개최했으며 이 전시는 해외 순회전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4월부터 6월까지 청담동 신세계갤러리에서 개인전 를 열었다. 2017년 개인전을 기점으로 시작된 ‘홀려라’ 연작은 한글에 민화적 요소를 더한 문자도 화풍이다. 자음 ‘ㅎ’이 등장하는 추상화가 ‘하하’ 웃고 ‘흑흑’ 울다가 ‘헉’ 하고 놀라기도 하고 ‘헐’ 하며 맥 빠지기도 한다. 혼(魂)과 흥(興)과 한(恨)까지 있으니 ‘ㅎ’ 하나가 관람객을 들었다 놨다 가지고 논다. “우리 글자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형태가 ‘ㅎ’이에요. 웃음부터 울음까지 ‘ㅎ’이 연상시키는 것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하나’, ‘한국’, ‘흙’처럼 한국적 정체성이 담긴 단어가 있는가 하면 행복과 해피(happy), 하늘과 헤븐(heaven)도 ‘ㅎ’ 소리로 통합니다.” 현대 미술가 에드 루샤, 바버라 크루거, 제니 홀저 등이 활자를 작품에 활용한다. 하지만 그들의 글자가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하는 반면 안상수의 문자 그림은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 대신 해석과 감각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 전시는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1910~1937)의 타계일인 4월 17일 개막했는데, 안상수는 개막식 퍼포먼스로 이상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로 시작하는 이상의 소설 「날개」는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로 끝맺는다. 안상수의 호 ‘날개’는 여기서 왔다. 미술을 하려다 건축가가 된 이상은 안상수의 이상(理想)이다. 그가 박사 논문 「타이포그래피적 관점에서 본 이상 시에 대한 연구」에 썼듯 그는 이상을 우리나라 최초의 타이포그래피스트로 여긴다. < UV_한글도깨비 >. 2025. 캔버스에 UV 인쇄, 아크릴 물감. 145 × 97 ㎝. 한글 자음 ‘ㅎ’과 ‘ㅇ’을 각각 두 개씩 결합하여 도깨비 형상처럼 보이게 제작한 작품이다. 안상수는 1990년대 초부터 전국의 도깨비 문양을 찾아다니고 그것을 도안으로 만드는 등 도깨비를 예술적 상징으로 되살리기 위해 탐구해 왔다.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제공 40주년 프로젝트 안상수체는 출시 이후 다양한 방법을 통해 확장되고 있다. 예컨대 이상체는 낱글자를 모아쓰지 않고 풀어서 늘어놓는 방식이고, 미르체와 마노체는 세벌식 모듈 글꼴에 대한 실험의 결과물이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국내외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을 초청해 안상수체 구조에 맞춰 한글 디자인을 맡겼어요. 내가 뭔가를 하기보다는 그들을 통해 한글을 퍼뜨리는 게 더 의미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외국인들이 전혀 다른 상상력으로 한글을 디자인했는데 정말 탁월했고 재미있었어요.” 2024년 10월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안그라픽스에서 열렸던 전시 < 안체 프로젝트 > 전경. 안상수체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세벌식 조합형 글꼴을 제작하는 프로젝트이다.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제공 2024년 10월 열렸던 전시 를 두고 그가 한 말이다. 올해는 안상수체가 태어난 지 40주년이다. 그는 이 글꼴의 확산을 위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안상수체 40주년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넷플릭스 다큐 시리즈에서도 소개된 타이포그래피 분야의 거장 폴라 셰어(Paula Scher), 20세기 디자인계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네빌 브로디(Neville Brody) 등 14명이 이미 안상수체를 활용한 서체를 선보였다. 올해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무인양품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하라 켄야 등 여럿이 참여할 예정이다. 올해 전시는 10월 9일 한글날을 전후해 개막할 계획이다. 더불어 ‘아티스트’ 안상수의 개인전은 올해 일본 도쿄 츠타야서점, 내년 중국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으로 이어진다.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사전 프로그램인 < 정거장-이미지 커뮤니티 >의 그래픽 디자인에 활용된 AG이상체.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제공

마음을 잇는 음식, 잔치국수

Arts & Culture 2025 SPRING

마음을 잇는 음식, 잔치국수 한국의 식문화에서 국수를 이용한 음식은 일상식이 아니었다. 외국 사신에게 예우를 갖추기 위해 대접하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잔치에서 유래하여 이름을 얻은 잔치국수다. 과거의 잔치국수는 재료와 제조법이 현재와 상이하지만, 축원의 의미를 담은 음식이라는 점은 여전하다. 잔치국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국수 요리이다. 삶은 소면 위에 각종 고명을 얹고, 진하게 끓여낸 멸치 육수를 부어 먹는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밀이 매우 귀한 식재료였다. 한반도의 기후 환경이 밀 재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918~1392)에는 밀을 중국에서 수입해 먹었고, 조선 시대(1392~1910) 에는 상대적으로 기후가 서늘하고 건조한 북쪽 지방에서 늦가을에 파종해 초여름에 수확하는 겨울밀을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 수량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주로 메밀이나 녹두, 콩 같은 곡물을 곱게 갈아 면을 뽑았다. 그런데 이런 재료들로 면을 만들면 찰기가 없이 뚝뚝 끊어진다. 식감도 거칠고 색도 거무튀튀하다. 이에 비해 밀은 글루텐 함량이 높아 길고 가늘게 면을 만들 수 있다. 색도 뽀얗고 표면도 매끈하다. 색감과 형태가 말끔하고 세련되니, 옛날 사람들은 밀가루 국수에서 순결하다는 인상까지 받았다. 지금이야 밀국수가 흔하디흔하지만, 그것을 처음 본 사람들에게는 매료될 수밖에 없는 등장이자 존재였을 것이다. 국수 건조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자연 건조 시 온도와 습도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다. 사진은 경주의 대표적 로컬 브랜드인 아화전통국수의 소면 건조 장면. ⓒ 아화전통국수 아화전통국수의 김영철 대표가 건조된 소면을 알맞은 길이로 재단하고 있는 모습. 아화전통국수는 2010년대 말 현대식 제면 기계를 도입했지만, 아직까지도 90% 이상은 예전과 같은 전통적인 수작업으로 국수를 만든다. ⓒ 아화전통국수 잔치의 주인공 고려 시대,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돌아가 작성한 견문록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사신이 경내에 들어오면 10여 종의 음식을 제공하는데, 면식(麵食)을 우선하였다”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조선 시대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불교 행사 때 주요 손님들에게 유과, 두부탕, 과일 등과 함께 국수를 대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세조(재위1455~1468) 때는 명나라 사신에게 접대하는 면을 여러 고을에서 장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언급도 있다. 선조(재위 1567~1608) 때는 국수를 장만하기 쉽지 않으니, 사신에게 주는 음식으로 국수 대신 밥을 대접하도록 조치했다고 한다. 이처럼 국수는 사신이 오거나 나라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상에 올리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민가에서는 혼례나 회갑연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나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잔치의 주인공들이 오랫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축복해 주러 온 손님들이 다 같이 국수를 나누어 먹었다. ‘잔치국수’라는 명칭은 이러한 풍속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미혼 남녀에게 주변에서 “언제 국수 먹게 해줄래?”라고 묻는 것은 언제 결혼하느냐는 의미의 우회적 표현이다. 기계화된 제면법 잔치국수의 사전적 정의는 “따뜻한 맑은장국에 국수를 말고 갖은 고명을 얹은 음식”이다. 더 정확히 정의하자면, 멸치를 넣고 장시간 끓여낸 육수에 밀가루로 만든 가늘고 긴 국수인 소면(素麵)을 넣은 음식을 지칭한다. 한마디로 멸치 육수와 소면의 조합이 잔치국수의 핵심이다. 잔치국수가 오랜 역사를 지녔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현재의 제조법대로 잔치국수를 먹게 된 것은 불과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전통 국수 요리에서 면은 재료나 형태가 오늘날처럼 단 몇 가지로 제한되지 않았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재료는 메밀 가루였고, 채소나 고기를 채썰어 가루를 묻힌 후 익혀서 면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때로는 꽃잎을 면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면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19세기 초 빙허각 이씨가 저술한 생활백과사전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왜면(倭麵)’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는 국수형 화채의 일종으로, 더운 여름철 소면을 삶아 오미자 우린 국물에 말아 시원하게 먹었던 계절 음식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이 편찬한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왜면을 만드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밀가루를 기름과 소금으로 반죽해 실처럼 늘어뜨려 말렸는데, 이 제조법은 현재의 소면과 유사하다. ‘왜(倭)’는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소면은 조선 후기 일본에서 유입된 식재료일 가능성이 높다. 1930년대 신문 기사에도 ‘일본 국수 소면’이라는 표현이 등장해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한다. 국내에서 소면을 대중적으로 만들어 먹기 시작한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추정된다. 제아무리 글루텐 함량이 높다고 한들 면발을 손으로 길고 가늘게 뽑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소면은 고도화된 제면기의 등장과 함께 발전했다. 1920년대 신문에는 ‘최신형 제면기 특가 판매’ 같은 광고가 자주 실렸는데, 이를 통해 그 당시 제면기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40년 조선일보 5월 8일자 기사에는 쌀 배급이 불안정해지자 대용식을 장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고, 이에 따라 소면이 인기를 얻어 주문이 쇄도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눈치 빠른 상인들이 쌀 장사를 접고 밀가루와 국수 장사에 대대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언급도 있다. 이후 제분기와 제면기 등 설비를 갖춘 국수 공장들이 전국 곳곳에 생겨났고, 기계화된 제면법이 활성화되었다. 1930년대 초반 출발한 식품 제조 회사 풍국면(豊國麵)은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국수 공장이라는 명예를 지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국내 최대 규모의 기업 삼성이 1938년 창업된 삼성상회(三星商會)와 이곳의 대표 상품 ‘별표 국수’에서 비롯됐다는 유래 또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지금과 같은 잔치국수의 전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피난민들이 멸치 어업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몰렸으며, 미국으로부터 잉여 농산물인 밀을 대량으로 원조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밀가루로 뽑은 면을 뿌연 멸치 국물에 말아 한 끼 식사를 해결했다. 마음을 위로하는 음식 오늘날 잔치국수는 더 이상 특별한 날에만 먹는 고급스러운 음식이 아니다. 가정에서는 한 끼를 간단히 때우기 위해 끓여 먹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직장인들이나 학생들은 분식집이나 포장마차에서 저렴한 잔치국수를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곤 한다. 결혼식 피로연에서도 서양식 뷔페에 밀려 겨우 구색을 갖추는 정도로 퇴색했다. 그럼에도 정성껏 끓여낸 멸치 육수에, 찬물에 힘껏 빨아 전분기 없이 뽀얀 소면이 담긴 잔치국수가 목전에 있다면, 그것을 마다할 한국인은 없을 터이다. 잔치국수의 입지는 예전만 못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인생의 어느 순간 잔치국수로 인해 위로를 받은 기억이 하나쯤 있으리라. 뜨끈한 국물이 대접 가득 낙낙히 담겨 있다. 똬리를 튼 국수를 젓가락으로 살살 풀어 입에 넣으면 면발이 미끄러지듯 입안으로 빨려든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국수에 구수한 멸치 향이 진득하게 들러붙어 흡사 갯가에 나와 있는 듯하다. 눈앞에 푸르른 바다가 펼쳐진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잔치국수는 지금은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혼례나 회갑연 같은 잔칫날에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이런 풍속에서 ‘잔치국수’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 셔터스톡

온전함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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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함에 대한 고찰 『희랍어 시간』 한강 작, 데보라 스미스, 원 에밀리 애 번역 펭귄북스, 2024 160쪽, 9.99 파운드 온전함에 대한 고찰 우리는 서로 대화하고 주변 세상을 보는 능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능력이 없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예를 들어,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과연 생각할 수 있을까?『희랍어 시간』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의 실어증으로 인해 ‘뿌연 침묵’에 휩싸인다. 말을 찾게 되었지만, 이후 부분적으로 다시 실어증을 앓게 된다. 듣고 읽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할 수는 없다. 주인공은 다시 한번 침묵이라는 껍질에 싸여 주변 세계와 단절된다. 여기에 한 젊은 남자의 이야기가 주인공의 이야기와 엮이며 전개된다. 그는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다가 17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결국 앞이 안 보이게 될 운명이다. 가족들은 그의 귀국을 반대하고 걱정하지만, 그는 독일 유학 시절 배운 고대 희랍어를 가르치는 아카데미 강사로 생계를 이어간다. 말할 수 없는 여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언어를 통해 언어와 다시 연결되고자 남자의 수업을 듣는다. 서로와 온전히 소통하지 못한 채 이렇게 한 공간을 오가다가, 우연한 사고로 인해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가장 표면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희랍어 시간』은 상실에 대한 고찰이다. 주인공들은 그들의 신체적 능력을 잃어가는 것 외에도, 소중한 사람의 상실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낸다. 여자는 얼마 전 이혼하고 전 남편에게 양육권을 빼앗긴 후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괴로워한다. 남자는 독일에 있던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폭력과 실연을 당한 기억에 시달린다. 이미 잃어버렸거나 약화되고 있는 그들의 능력(즉 주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은 산산조각난 관계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의 기저에는 ‘온전함’에 대한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제는 죽고 없는, 남자의 친구 요아힘은 역시 신체적 아픔이 있었다. 그는 한때 “매 순간 죽음과 마주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삶에 대해 가장 잘 성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온전함의 의미를 가장 잘 관조할 수 있는 이들은 자신의 중요한 일부를 상실한, 그리고 세상과의 연결을 잃어버린 사람들일지 모른다. 상실과 결핍이라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희랍어 시간』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오랫동안 서로를 맴돌던 여자와 남자가 마침내 함께하게 되었을 때, 미래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듯 보인다. 주인공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손쉬운 해결책이나 간단한 해피엔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내일은 오늘보다 더 밝아 보인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김수현 작, 안톤 허 번역 펭귄북스, 2024 272쪽, 28.00 달러 “네 잘못이 아니야”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 김수현은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 잘못이 아니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떠난 여정 끝에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가 탄생했다. 부제는 ‘어른살이를 위한 체크리스트’라고 되어 있지만, 저자는 기존의 답답한 규칙 대신 또 다른 규칙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저자는 확실한 한국적 관점에서 한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써내려가면서, 유교적이고 집단주의적인 한국 사회를 개인주의적인 서구 사회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얼핏 마치 외부인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다행히도 실제는 그렇지 않다. 외국인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 저자의 조언 대부분은 보편적인 내용이다. 문화적 차이는 존재하지만, 사람은 결국 사람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누구나 희망, 두려움, 꿈, 불안을 느낀다. 어떤 것도 단순한 흑백논리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집단주의나 개인주의 같은 꼬리표는 사회 전반에 대해 적용하기에는 편리한 표현일 수 있지만, 개개인에 대해서는 그 특징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가리는 결과를 낳는다. 분명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 매몰되어 그로 인한 신경증에 시달리는 이 시대를 위한 것이다. 독자들은 출신 국가에 상관없이 현대 사회의 부담감을 해소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2 > 미역수염(Seaweed Mustache), CD, 김밥레코즈(Gimbab Records), 2024 창의적 콜라주 미역수염은 2014년 결성된 부산 출신의 4인조 록 밴드다. 2016년 발매한 미니 앨범 < The Whistle >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2022년 정규 1집 < Bombora >가 록 마니아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 무렵부터 한국의 헤비한 록 음악을 대표하는 밴드로 급부상했다. 두 번째 정규 음반 <2>는 1집에서 들려준 청각적 풍경을 확장시킨 명작이다. 음반 전체가 마치 성나게 덮쳐오는 파도 같다. 이 앨범의 주된 재료는 슈게이즈, 포스트메탈, 블랙게이즈 같은 장르들이다. 44분 동안 진행되는 여덟 곡에는 흉측한 불협화음과 황홀한 멜로디, 불분명한 노이즈와 선명한 속주(速奏)가 온통 뒤섞여 있다. 공존하기 힘들 듯한 이질적 요소들이 합체해 이율배반의 괴력을 뿜어낸다. 기타, 베이스, 드럼의 격렬한 총진격은 종종 가녀리게 끊어질 듯 미려한 곡선을 그려내는 보컬 멜로디를 만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포옹한다. 형이상학적 묘사, 서사, 나열로 점철된 불가사의한 영어와 한국어 가사도 흥미롭다. 첫 곡 < FALL >은 미역수염의 미학을 압축한 서곡이다. 광야를 울릴 듯한 공간감 속에서 베이스와 드럼의 느린 통타(痛打)로 시작되는 노래다. 남성과 여성의 보컬을 통해 전달되는 무기력한 멜로디가 분출하는 사운드 위로 황홀하게 짓이겨진다. 묵직한 리듬, 기타의 격정적인 트레몰로 연주, 한껏 증폭돼 지글거리는 노이즈가 멜로디 위로 불꽃놀이처럼 떨어진다. 이어지는 곡 < HEX >는 또 다르다. 듣는 이를 옥죄는 기타의 불협화음, 노랫말을 툭툭 랩처럼 뱉는 여성 보컬과 살벌하게 으르렁거리는 남성 보컬이 교차하며 새롭고 기이한 모자이크를 만든다. 후반부에 분출하는 고음의 기타 트레몰로 멜로디는 공포 영화의 기막힌 반전(反轉)처럼 기능한다. 극단적 음악을 구사하는 미역수염에게도 발라드 같은 노래가 있을까? 처연하기 이를 데 없는 여섯 번째 곡 < SWEETHOME >이 그 답이다. 판소리라는 소재에 한국적 한(限)의 정서를 버무린 임권택 감독의 1993년 개봉작 < 서편제 >가 만약 30여 년 만에 리메이크된다면? 그리고 그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이가 의 나홍진이나 < 파묘 >의 장재현 감독이라면? 그 주제가로 추천할 만한 트랙이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임희윤음악평론가

목조 건축의 가능성을 향한 실험, 건축가 조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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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건축의 가능성을 향한 실험, 건축가 조남호 조남호(Cho Namho)가 설계한 건축물들은 건축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곱씹게 된다고 평가받는다. 1995년 솔토지빈(Soltozibin Architects, 率土之濱) 건축사사무소를 설립한 그는 기획과 기술의 결합이 새로운 건축을 만든다고 여기며, 목구조 시공 기술의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시기부터 오랫동안 목조 건축의 가능성을 좇아왔다. 목재의 세포벽은 다공성(多孔性)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남호는 이러한 목재의 특성을 확장해 ‘숨 쉬는 폴리’ 건물 외벽을 다공성 목구조로 디자인했다. ‘기후 위기가 건축의 중심 과제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풀어낸 프로젝트이다. ⓒ 윤준환 건축가 조남호는 현대적인 구법을 통한 목조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색해 왔다. 솔토지빈 설립 이전에 국내 대형 설계사무소에서 먼저 실무를 익힌 그는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을 설계하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 여파로 사무소 존속 문제가 불거졌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그는 수주에 급급해하는 대신 사무소의 성격을 학습 조직으로 전환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에 따라 솔토지빈은 미래 지향적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새로운 건축 생산 체계에 관한 대대적인 연구를 하는 조직으로 거듭났다. 물론 여기에는 경제적 전략에 대한 고민까지 포함되었다. 그때 주목하게 된 것이 목조 건축이 지닌 가능성이었다. 설계 사무실에서 철근콘크리트조의 분업화된 공정을 주도하는 것보다는 목수라는 전문가와 함께 직접 시공까지 아우를 수 있는 목조 건축이 그에게는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제대로 된 현대적 공법들이 발달하지 못한 한국의 목조 건축 시장에도 새로운 공법의 고안이 필요해 보였다. 산업화 시대를 거치는 동안 한국에는 일부 한옥들을 제외하고는 목조 건축이 거의 사라진 실정이었다. 솔토지빈이 설립되던 무렵, 북미 양식의 경골목구조가 유입되면서 경기도 일산을 중심으로 신도시에 목조 주택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북미 양식의 목조 건축을 그대로 수입한 것에 불과했고, 공급 방식과 공사비 등의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이러한 사회적·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남호는 한국 현대 건축에서 많은 부분이 목조 건축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경제성, 환경 문제, 건축적 가능성 등을 고려했을 때 그 영역이 빠르게 확장되리라고 본 것이다. 조남호는 건축과 사회, 삶의 관계를 탐색하는 건축가이다. 특히 그는 목구조와 현대적 공법을 접목하면서 인간과 환경의 공존을 염두에 둔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여 왔다. ⓒ 스튜디오 켄 변용과 진화 새로운 건축 생산 체계에 대한 탐구는 프로젝트를 거듭해 나갈 때마다 변용되고 개진되면서 점점 진화해 갔다. 그 시작점에는 1999년 완공한 신원동 주택이 있다. 신원동은 서울 도심과 수도권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고층 빌딩들이 인접해 있으면서도 동네 안에는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는 경작지가 존재한다. 조남호는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감안해 도시 생활과 전원 생활이 절충될 수 있도록 집을 디자인했다. 그 바탕이 된 게 철근콘크리트조와 목조가 혼합된 복합 구조였다. 시공까지 도맡았던 이 작업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전이었다.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교원그룹 게스트하우스(2000)는 준공하던 해에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을 정도로 이목을 끌었던 프로젝트다. 당시 목조 건축에서는 드물게 주택 10채로 구성된 큰 규모였고, 중목 구조를 포함한 여러 목공법이 적용됐다. 구조 엔지니어링을 뒷받침할 국내 기업이 없어 캐나다 및 뉴질랜드 회사와 협업해 완공했다. 조선 시대 교육 기관이었던 서원에서 모티프를 얻은 이 건축물은 전통 건축과 새로운 목조 구법 사이에서 제3의 유형을 탐색하는 작업이었다. 그런가 하면 서울시립대학교 건설공학관(2005)은 철근콘크리트조 건물에 경골목구조를 활용한 우드월 시스템을 접목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경골목구조는 구조 자체이면서 단열재를 채우는 틀, 마감재가 붙는 벽 등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건축가는 이에 대해 “목구조의 놀라운 효율에 주목하게 되면, 한옥처럼 기둥과 보의 구조미를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말한다. 이 프로젝트는 공법을 표현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작업의 기점이 되었다. 서울시립대 강촌수련원은 부재를 짜맞추는 기법을 통해 새로운 목조 건축의 형식에 도전한 작품이다. 목구조의 장점을 극대화한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11년 한국건축가협회상을 받았다. ⓒ 박영채 서울시립대학교 강촌수련원(2009)에서는 모든 부재의 규격을 통일시켰다. 기둥이나 보 등 각기 역할과 조건이 다른 요소들에 폭과 길이가 동일한 부재를 사용한 것이다. 한 가지 종류의 부재가 전체를 관통하면서 통합된 분위기와 질서를 갖추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 트러스 원리를 활용한 복잡한 구조적 전략이 요구되기도 했다. 이 건물에는 건축의 중심을 해체하고 상징적 요소를 없애 공간에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현대 건축의 특징이 담겼다. 비교적 최근작인 인왕산 숲속쉼터(2019)에서는 전통 목구조의 핵심 요소인 기둥과 보의 결합을 드러내지 않고, 기둥 사이에 지붕판을 끼워 넣어 마치 거대한 판이 떠 있는 것 같은 시각적 효과를 냈다. 결구이지만 비결구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일종의 역설이다. 일반적으로 기둥과 보로 이루어진 구조는 완결된 프레임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건축물에서는 시선이 내부 공간으로 쏠리기보다 바깥의 자연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비결구적 결구를 사용했다. 인왕산 ‘숲속쉼터’는 부재들을 입체적으로 조립해 3차원의 구조물을 조립하는 목구조의 전형적인 구법에서 벗어나 있다. 건축가는 철근콘크리트조 필로티 기둥 모듈의 1/2 간격으로 목재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지붕판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목구조의 새로운 형태를 실험했다. ⓒ 신정식 숨 쉬는 건축 조남호의 글과 말에는 “숨 쉬는”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광주폴리(Gwangju Folly)’는 광주광역시가 구도심 공동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추진 중인 도시 재생 사업인데, 조남호가 최근 광주폴리에서 선보인 작품의 제목 역시 ‘숨 쉬는 폴리’ (2023)다. 그에게 건축이 숨 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으니, 두 가지로 나눠 설명했다. 첫째는 말 그대로 건축물의 외피가 숨을 쉬는 것, 즉 바람이 통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는 단열 문제와 상충된다. 현대 건축은 기본적으로 단열과 기밀(氣密)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내부와 외부를 단절시킨 다음 열이나 오염 물질을 내보내 내부를 쾌적하게 만드는 데 중점을 둔다. 특히 콘크리트 건축물에서 단열과 방수, 기밀이 이런 방식을 따른다. 숨 쉬는 폴리는 숨 쉬는 재료와 숨 쉬는 결합 방법으로 벽체를 구성했다. 나무라는 취약한 재료가 근대 이후의 건축이 지향해 온 강함의 원리에 대응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했던 프로젝트다. 서울숲에 위치한 야외 공연장 ‘숨 쉬는 그물’은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탄생했다. 조남호는 1미터 간격의 목조 유닛을 그리드 형태로 쌓아 올려 건축물을 완성했다. 그 결과 벽의 구멍은 새 집이 될 수도 있고, 풀과 꽃이 자랄 수도 있는 유연성을 지니게 됐다. ⓒ 윤준환 두 번째로 “형태를 구상하고 재료를 선정하고 디테일을 계획하는 건축 생산의 전 과정을 포함하여 그 이후의 사용과 유지 보수, 그리고 폐기에 이르기까지 주변 환경에 최소한의 피해를 주는 건축이 바로 숨 쉬는 건축”이라고 그는 정의한다. 숨 쉬는 폴리는 두 의미를 모두 충족한다. 우선 기능과 형태에 있어 숨 쉬는 건축이다. 목재 자체는 습기를 머금고 내보내는 기능을 하며, 외피와 내부의 구성은 숨 쉬는 듯한 인상을 준다. 또한 탄소 배출량은 콘크리트 건축과 비교했을 때 10분의 1로 줄었다. 태양광 전기 생산 시스템을 도입해 그마저도 상쇄시킨다면 15년 뒤에는 탄소 배출 제로 시설이 된다.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다산동 주택은 주거 공간에 대한 건축가의 실험을 엿볼 수 있는 프로젝트이다. 이 집의 1층과 2층은 갤러리 형태로 디자인되었는데, 집주인 부부가 오랫동안 수집해 온 미술 작품들을 전시함으로써 교류와 소통의 역할을 수행한다. ⓒ 김용관 비판과 탐색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앎과 이론적 앎의 앞에 기술적 앎이 있으며, 기술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창안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조남호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지난 25년 동안 목구조를 현대 건축에 적용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국내 목조 건축의 발전은 더디기만 하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한옥이라는 전통 목구조 양식에 갇혀 있는 건축 설계를 문제로 꼽는다. 한국은 7세기에 황룡사 9층 목탑을 설계하고, 8세기에 석굴암 같은 우수한 건축물을 지은 국가다. 그러나 조선 시대부터는 혁신적 건축이라 할 게 없다. 고유한 건축 유형을 지속적으로 개발한 다른 나라들과 대비된다. 그들은 고대와 중세를 거쳐 높은 수준의 장인들, 학자에 버금가는 기술자들을 길러냈다. 반면 조선은 기술을 천하게 여기는 사회였으므로 혁신이 일어나기는 힘들었다. 이러한 흐름에 더해 일제강점기 때는 건축 교육의 공백이 이어지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그는 한옥 육성책의 보수적 성향을 지금 한국 건축계가 극복해야 할 고질적 문제로 진단한다. 목조 건축에 전통적 한옥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리걸음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건축가들의 솔직한 비판이 동반되어야 하며, 기술적 탐색과 보완을 통한 혁신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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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 ‘나주반’은 전라남도 나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반이다. 김춘식은 1940년대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춘 나주식 소반의 명맥을 이은 장인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우연한 기회에 나주반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지금까지 약 70년 동안 나주반을 지키고 있다. 국가무형유산 소반장 기능보유자인 김춘식 장인은 맥이 끊어져 사라질 뻔한 나주 소반의 명맥을 잇고 발전시켰다. 그는 수백 개의 헌 상을 해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이를 통해 나주 소반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소반(小盤)은 나무로 만든 작은 밥상을 말한다. 좌식(坐式) 주거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식생활부터 각종 의례에 이르기까지 여러 용도로 음식을 담아 운반하던 부엌 가구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소반을 사용해 왔다. 5~6세기경 제작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여러 유형의 소반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으며, 신라(B.C 57~A.D 935)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도 타원형 소반이 있다. 조선 시대(1392~1910)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보면 국가에 소속되어 상을 만드는 별도의 기관이 있었고, 제작 과정이 분업화되어 다양한 형태로 생산해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반의 종류는 산지, 형태, 용도에 따라 약 60여 종으로 분류된다. 특히 생산지에 따라 지역색이 뚜렷해 황해도의 해주반(海州盤), 전라도의 나주반(羅州盤), 경상도의 통영반(統營盤) 등으로도 구분한다. 해주반과 통영반은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성이 뛰어난 반면, 나주반은 소박한 짜임새로 견고함과 간결함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상은 우리 문화의 근간이 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옛날 어머니들은 상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아이의 탄생을 기원했고, 삼신상을 차려 안전한 출산을 빌었다. 출생 후 백일에는 백일상, 돌에는 돌상을 차려 아이의 건강과 행복을 염원했다. 자라면서는 생일상, 결혼 때는 혼례상을 거쳐 나이 육십에 이르러 환갑상을 받고, 죽은 후에도 오래도록 제사상을 받는다. 이처럼 상은 출생 이전부터 죽음 이후까지 삶을 관장하고 이어주는 도구였다. 원형 호족반. 소나무. 36 × 36 × 26 cm. 소반은 생산지, 형태, 용도, 재료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사진은 상판이 둥그런 호족반이다. 호족반의 다리는 위는 굵고 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지다가 끝부분이 위로 살짝 올라간 형태이다. 호족반의 재료는 주로 느티나무, 소나무, 은행나무를 사용한다. 솔루나리빙 제공 앉아서 받는 밥상 소반을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기술을 지닌 장인을 소반장(小盤匠)이라고 한다. 김춘식(Kim Chun-sik, 金春植) 장인은 일제강점기 이후 거의 사라진 전통 나주반을 복원해 냈다. 재료로는, 주로 여자들이 음식상을 차려서 운반한다는 점을 배려해 무늬는 아름다우나 무거운 느티나무보다는 가볍고 단단한 은행나무를 많이 사용한다. “목공예의 기본은 소반이지요. 임금님도 소반에 먹고, 양반이나 서민도 소반을 사용했습니다. 머슴에게도 개다리소반에 밥을 차려주었죠. 거지가 밥 빌러 와도 소반에 차려내는 것이 우리의 인심이었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 단아한 소반에 오르면 초라해 보이지 않습니다.” 김 장인은 소반의 아름다움 이전에 소반에 담긴 문화를 강조한다. 서양식 식탁은 음식을 먹기 위해 사람이 식탁으로 가야 하지만, 소반은 앉아서 기다리면 음식이 사람에게 온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존중의 의미이다. “식탁에 다 같이 둘러앉아 밥 먹는 것도 좋지만, 늦게 들어온 식구에게 밥상을 차려 들여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넓은 식탁에서 혼자 먹는 것과 일인용 소반을 받아서 먹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지요.” 반월반. 은행나무. 43 × 31 × 28 cm. 반달 모양의 상판에 세 개의 평평하고 넓적한 다리가 달린 소반이 반월반이다. 다른 상과 합체하여 쓰거나 벽면에 붙여 장식용으로 사용하곤 했다. 나주반전수교육관 제공 당초문 나주반. 은행나무. 50 × 36 × 29 cm. 나주반은 대개 간결하게 제작하지만, 더러는 운각에 문양을 넣기도 했다. 짜임새가 견고해 상판이 휘거나 갈라지는 일이 거의 없어 상대적으로 큰 소반이 많은 편이다. 상판이 널찍해서 책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나주반전수교육관 제공 헌 상을 스승으로 김 장인이 소반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다소 의외다. 1936년생인 그는 같은 연배의 장인들이 10대에 도제(徒弟)로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과는 달리,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 20대 초반 나주 영산포에 공방부터 냈다. 누구 밑에 들어가 기술부터 배운 게 아니라, 기술자를 고용해 소반을 만들어 팔았던 것이다. “목수 일을 하던 팔촌 형님이 연장을 물려주며 ‘상을 만들면 먹고 살만은 하다’고 해서 무작정 공방부터 열었어요. 그때만 해도 잘살든 못살든 어느 집이나 장롱은 없어도 상 없는 집은 없었으니까요.” 당시 솜씨 좋은 목수들은 전국을 떠돌며 더 나은 조건의 공방에 머물며 일하곤 했다. 그는 그런 기술자들을 채용해 곁에서 배워가며 상을 만들었다. 단순한 목물상(木物商)이던 그가 맥이 끊긴 나주반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공방을 차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받은 특별한 주문 때문이었다. “한번은 서울에서 손님이 찾아왔어요.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제사상을 사정상 잃게 됐는데, 그게 나주에서 만든 상이라는 거예요. 그것과 똑같이 만들어 달라며 자세한 그림과 함께 선금까지 내고, 얼마가 걸리든 부탁한다고 했어요.” 아직 기술을 갖추지 못한 그는 나주반의 마지막 장인으로 알려진 이운연(李雲衍 1895~1972) 선생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하지만 선생은 고령으로 이미 손을 놓은 상태였다. 이운연은 일제강점기 조선 예술에 매료됐던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과 그 예술』(1922)에서 극찬했던 소반장 이석규(李錫奎 1866~1940)의 아들이다. 결국 그는 서울 손님이 부탁한 숙제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참에 전통 나주반의 원형을 알아보기로 하고, 꾀를 내서 헌 상을 수리한다고 알리고 다녔다. 이윽고 집집마다 창고에 묵혀둔 오래된 상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방에서는 기술자들이 막상을 만들고, 정작 사장인 그는 공방 옆 헛간을 빌려 헌 상을 해체하고 보수하고 조립하는 일에 매달렸다. “웬만큼 먹고사는 집에 한두 개쯤은 있었던 옛날 상들이 엄청 들어왔어요. 그것들을 받아 연구해가며 고치기를 십여 년 하다 보니 나주반을 직접 짤 수 있게 된 거죠. 내 스승은 바로 그 헌 상들입니다.” 배움의 한을 풀다 전통 소목이 그렇듯이 소반도 모든 이음 부분에 쇠못을 사용하지 않는다. 먼저 나무판에 본을 대고 밑그림을 그린 후 재단해 상판을 만들어 대패질한다. 김 장인은 대패질이야말로 상의 품질을 가름할 첫 단추라고 강조한다. 그다음 상의 테두리 부분인 변죽을 만드는데, 이는 상판의 휘어짐과 갈라짐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준다. 해주반과 통영반이 상판을 파내서 변죽을 만드는 반면, 나주반은 변죽을 따로 만들어 상판에 홈을 파서 끼운다. 변죽을 돌려서 끼운 다음 상판과 다리를 연결하는 운각(雲脚)을 조각해 상판에 고정시키는데, 이때 접착제 외에 대나무못을 따로 만들어 박아서 고정하는 것도 견고함을 자랑하는 나주반만의 특징이다. 나주반의 운각은 보통 구름 문양이나 당초문이 많이 쓰인다. 상다리를 만들어 운각에 끼운 다음 다리와 다리 사이의 수평을 잡아줄 족대(足臺)를 연결하고 중간 가락지(中帶)를 만들어 다리 사이에 둘러준다. 상판을 대패질하고 있는 김춘식 소반장. 재단한 부재를 대패질한 다음 사포로 문질러 결을 다듬으면 상판이 완성된다. 대나무로 만든 못은 상판에 운각을 고정시킬 때 사용한다. 하나의 운각에 보통 4개의 대나무 못이 쓰인다. 백골 상태의 소반이 완성되면, 옻칠을 하고 말려서 사포로 문지르기를 7~8회 반복한다. 김 장인은 특히 옻칠에 자부심을 내비친다. 옻칠은 습기에 강해 나무를 보호하는 기능적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은은하고 아름다운 광채가 돌게 해준다. 이렇게 상 하나를 완성하는 데 40~60일 걸린다고 한다. 그는 재현해 낸 전통 나주반 70점을 모아 1977년 광주학생회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일반에 공개했다. 이 전시는 당시 방송 뉴스에 소개될 만큼 화제가 되었고, 나주반을 세상에 알린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공방은 존폐 위기에 내몰리기 일쑤였다. 전통 공예 장인들 다수가 그렇듯이 옛것은 지키기가 더 어렵다. 한때 직원이 열여덟이던 공방은 차압을 당하거나 작품이 경매에 넘어가기도 했다. “좋은 나무가 나오면 빚을 내서라도 무조건 사놔야 하는데, 그 나무들은 십 년 이상 묵혀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쌓인 나무만큼 빚인 거죠.” 그는 1986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유산 나주반장으로 지정되면서 공방을 접었고, 이후로는 전수 교육과 제작에만 힘을 쏟고 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소학교만 겨우 마친 그는 나주반을 만나면서 배움의 한을 풀었다고 한다. 2011년엔 오랜 염원이던 작품 전시실과 공방을 갖춘 나주반전수교육관이 세워졌고, 마침내 2014년 국가무형유산 소반장으로 지정되었다. 그는 전승에 대한 고민도 일찌감치 해결했다. 4남 1녀 중 막내아들인 김영민(Kim Young-min, 金鈴民)이 국가무형유산 전승교육사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구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그에게 소회를 묻자 눈시울이 붉어지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일등 공신은 제 아내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어요. 진짜 소중한 보물은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가 봅니다.” 2024년 12월 9일, 그와 62년을 해로한 이상순(李相順) 씨가 세상을 떠났다. 다양한 형태로 조각된 운각들이 벽에 걸려 있다. 나주반의 운각은 구름 문양과 당초 문양이 가장 많이 쓰인다. 상판의 형태와 상관없이 운각은 보통 두 쌍이 들어간다.

삶을 이야기하는 아트 토이

Arts & Culture 2025 SPRING

삶을 이야기하는 아트 토이 한국의 아트 토이 신(scene)은 해외에 비해 출발이 늦은 편이지만, 꾸준히 성장하며 발전하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들로부터 꾸준히 러브콜을 받으며 협업하는 작가들도 여럿이다. 올해로 결성 18년째인 핸즈인팩토리(Hands In Factory)도 그중 하나다. 이들은 조형미가 뛰어난 피규어를 넘어 삶을 매개하는 아트 토이 작업을 선보인다. 2008년 결성된 핸즈인팩토리는 한국 아트 토이 신의 1.5세대에 속한다. 업템포(사진 오른쪽), 락쿤, 하종훈(사진 왼쪽) 세 사람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팀을 이끌어간다. 이들은 국내외 전시 및 글로벌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작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아트 토이는 창작자의 철학이 깃든 장난감이다. 작가의 세계관과 기획력을 바탕으로 조형화된다는 점에서 단순히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입체화한 피규어와는 차이가 있다. 국내에서 서브 컬처로 치부되었던 아트 토이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현대 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2000년대 중반부터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는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젊은 소비자들이 신규 컬렉터층으로 등장했고, 온라인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로써 소수의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향유되던 아트 토이 문화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핸즈인팩토리는 국내 아트 토이 분야의 현재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크루이다. 2008년 결성된 이 그룹은 업템포(UpTempo, 본명 이재헌), 락쿤(RocKOON, 본명 박태준), 하종훈(Ha Jong-hun) 세 사람이 함께 이끌어 가고 있다. 이들은 자유로운 스트리트 컬처를 원동력 삼아 한국 아트 토이 신의 새 지평을 활짝 열어가고 있다. 아트 토이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껴 시작했나? 업템포: 우선 평면의 그래픽 디자인을 입체로 만들어 현실 세계로 불러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아트 토이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와 주제를 구현하는데, 이런 점을 젊은 층이 힙하다고 느끼며 열광한다. 아트 토이 문화의 기반이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마치 악보를 읽지 못하는 이들이 기존 질서에 반하는 랩을 만들고, 오늘날 힙합이 전 세계를 관통하는 장르가 된 것처럼 말이다. 아트 토이도 일종의 ‘카운터 컬처’인 셈이다. 또한 아트 토이는 팬들과 소통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의 대표적 캐릭터 ‘러닝 혼즈(Running Horns)’는 ‘Run again and the again’이 슬로건이다. 내 작업을 좋아해 주는 이들에게 “남들 눈치 보지 말고, 당신의 속도대로 꿋꿋하게 달려라”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업템포 작가의 대표 캐릭터는 뿔 달린 초식 동물을 의인화한 ‘러닝 혼즈’다. 최근에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을 캐릭터에 담아내고 있다. 핸즈인팩토리가 작업을 지속해 나가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하종훈: 한마디로 명쾌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아트 토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좋아하기 때문에 힘들 때도, 돈이 되지 않을 때도, 어떤 조건에도 상관없이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창작하는 일 자체가 흥미롭다. 만들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떠오른다. 이것이 꾸준히 창작을 이어올 수 있었던 또 다른 원동력인 것 같다. 각 캐릭터들의 성장과 세계관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는 것 같다. 업템포: 보통 아트 토이 작가들은 캐릭터를 창조할 때 자신이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요소를 투영한다. 내 경우도 과거에는 스트리트 컬처의 반항적 성격을 표현하거나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인형 놀이하듯 캐릭터에 입히곤 했다. 그래서 초기 작품에는 농구 시합하는 청년들이나 래퍼의 모습을 한 러닝 혼즈가 많았다. 최근에는 우편 집배원이나 정비사 같은 새로운 캐릭터가 생겨났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사회적 기준이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멋지게 보이더라. 하종훈: 도마뱀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 ‘하자드(Hazard)’를 만든 게 2016년이다. 나 역시 당시에는 캐릭터의 외형 묘사에 집중했다. 10년 정도 지난 지금은 캐릭터의 성격을 확장하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 주력한다. 겉모습이 귀엽다거나 스타일이 좋다는 평가를 들을 때마다 아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도마뱀 사육장을 디오라마로 연출하고 있다. 캐릭터가 살아가는 환경을 구현함으로써 생태계의 공존과 삶의 방식을 강조하고 싶었다. 하종훈 작가의 ‘하자드’는 꼬리가 잘려도 계속 살아가는 도마뱀을 형상화한 캐릭터이다. 그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강인한 의지로 삶을 이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캐릭터에 반영한다. 북청사자 프로젝트가 뜨거운 관심을 받았는데 어떻게 작업하게 됐나? 업템포: 우리는 러닝 혼즈와 하자드 캐릭터를 북청사자와 접목해 2023년 12월 공개했다. 스니커즈 브랜드 세븐에잇언더의 협업 제안을 받았을 때 우리는 단순히 그 브랜드의 신발을 신고 있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기존의 스니커즈 디자인에 핸즈인팩토리의 성격을 어떻게 매치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북청사자가 떠올랐다. 거대한 사자 가면을 뒤집어쓰고 여러 사람이 호흡을 맞춰 춤을 추는 북청사자놀음(Bukcheong Saja Noreum, Lion Mask Dance of Bukcheong) 말이다. 그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는 한 번도 한국적인 작업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 기회에 전통 민속놀이를 모티프로 한 작업을 시도해 보고 싶었다. 세븐에잇언더가 북청사자의 털을 신발끈으로 연출해 보자는 제안도 해줘서 더욱 생동감 있는 결과물이 탄생할 수 있었다. 2023년 말, 핸즈인팩토리가 스니커즈 브랜드 세븐에잇언더와 협업하여 제작한 북청사자 캐릭터. 한국의 전통 민속놀이인 북청사자놀음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다. 핸즈인팩토리 제공 한국은 아직 아트 토이 마켓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아쉬움은 없나? 업템포: 지금 우리나라에는 아트 토이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플랫폼이나 채널이 없다. 아트페어에 참여하거나 전시회를 개최할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이 개인 웹사이트나 소셜미디어, 온라인 스토어에서 작품을 거래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중개자가 개입되었을 때보다 구매자와 작가가 더 직접적으로 교류하고 친밀감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대량생산이 가능한 시장과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아트 토이가 ‘문화’를 넘어 ‘산업’의 단계로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아트 토이의 트렌드는 어떤가? 하종훈: 과거에는 점토가 주된 재료였고, 3D 프린터가 상용화되면서는 대부분 이 방식으로 제작한다. 하지만 근래에는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이루어 낸 상향 평준화의 반향으로 레트로 느낌이 물씬한 수제 아트 토이가 떠오르는 추세이다. 예컨대 나무를 재료로 써서 의도적으로 투박한 느낌을 주는 식이다. 레진을 사용할 때도 조각칼로 디테일을 덧입히는 등 핸드 메이드의 흔적을 남기려고 한다. 하종훈 작가의 또 다른 캐릭터 바인(VINE)은 퇴근길에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음악을 선곡해 듣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핸즈인팩토리 제공 솔로보다 팀으로 활동하는 이점은 무엇인가? 업템포: 혼자 작업할 때는 한계가 명확하다. 스튜디오에서 제작에만 열중하다 보면, 다른 분야에 관심을 두기 어렵고 익숙한 영역에만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를 전공한 이들이 팀을 이루어 활동하면 지속적으로 새로운 의견을 접할 수 있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피드백을 얻기도 한다. 팀원들에게 아이디어를 얻을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도움도 받으면서 혼자였다면 결코 구현하지 못했을 작업을 해나가기도 한다. 핸즈인팩토리의 올해 계획은? 업템포: 패션 브랜드 뉴에라의 마스코트 캐릭터 ‘팔로(FFALO)’ 디자인을 우리가 했다. 올해 10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컴플렉스콘(ComplexCon)에 뉴에라와 함께 참여할 예정이다. 아트 토이 작가로서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업템포 작가의 작업 공간. 언젠가는 러닝 혼즈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하종훈: 내 작품을 2D나 그래픽으로만 전시해 보고 싶다. 우리끼리 대화하면서 디자인이 정말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데, 오로지 디자인으로만 전시를 꾸려 관객들에게 그 중요성을 전달하고 싶다. 스티커만 몇 백 장씩 있는 전시회는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에 그려 본다. 스케치 작업을 하고 있는 업템포 작가(왼쪽)와 도색 작업 중인 하종훈 작가(오른쪽). 아트 토이 산업이 발달한 해외에서는 작업 과정을 세분화해 분담하는 경우가 많지만, 핸즈인팩토리는 디자인과 모형 제작, 도색 등 일련의 과정을 모두 각자 혼자서 전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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