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null > 상세화면

2024 AUTUMN

새롭게 도약하는 간송미술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 자리 잡은 간송(澗松)미술관(Kansong Art Museum)은 국내 최초의 사립 미술관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후대에 물려줄 문화유산을 지키며 연구해 왔다. 보수 공사를 마치고 올해 상반기 개최한 재개관전이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9월 초 대구간송미술관(Kansong Art Museum Daegu)도 개관하여 더욱 기대를 모은다.

간송미술관은 문화유산 보호와 연구를 위해 설립된 사설 미술관이다. 초기에는 소장품 연구에 집중했으며, 1971년 가을 정선(鄭敾, 1676-1759)의 작품 공개를 시작으로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전을 개최해 왔다.

지난 5월 1일부터 6월 16일까지 간송미술관에서 < 보화각(Bohwagak, 葆華閣) 1938: 간송미술관 재개관전 >이 열렸다. 설비 노후, 외벽 탈락 등의 문제로 1년 7개월간 보수 및 복원 공사를 마치고 다시 문을 연 이곳에는 45일 동안 3만여 명의 관람객들이 방문했다. 과거, 봄과 가을에 열렸던 정기전은 전시 기간이 짧았던 터라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귀한 작품들을 보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터넷 예매로 시간당 100명씩 입장을 제한해 관람객들이 한층 여유롭게 전시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번 전시는 간송미술관 건축 과정을 알 수 있는 설계도와 각종 자료들을 비롯해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초기 컬렉션들을 볼 수 있어 더욱 이목을 끌었다.

간송미술관은 일제강점기였던 1938년, 문화재 수집가인 전형필(Jeon Hyeong-pil, 全鎣弼, 1906~1962) 선생이 세운 미술관이다. 미술관 이름 ‘간송’은 그의 호(號)이다. 건립 당시에는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라는 뜻의 보화각으로 불렸다. 국내 1세대 건축가 박길룡(Park Kil-yong, 朴吉龍, 1898~1943)은 전형필의 의뢰를 받아 당대 최신 모더니즘 양식으로 건물을 지었다. 미술관 건물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국가등록문화유산(National Registered Cultural Heritage)으로 지정됐다.

지난 5~6월 열렸던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재개관전 모습. 1층 전시실에는 간송미술관 건립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었으며, 2층에서는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서화와 유물들이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간송미술관 정원에 설치된 전형필 동상. 교육자이자 문화유산 수집가였던 전형필은 선친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탁월한 감식안을 바탕으로 민족 유산 수집 및 보호에 일생을 바쳤다.

방대한 컬렉션

간송미술관은 흔히 ‘보물 창고’로 불린다. 그 이유는 소장품들의 면면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컬렉션의 정확한 규모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화, 서적, 도자, 공예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1만 점 이상을 보유했다고 알려졌다. 그중 12점은 대한민국 국보로, 30점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신윤복(申潤福, 1758~1814년경)의 < 풍속도 화첩(Album of Genre Paintings) >과 정선(鄭敾, 1676-1759)의 < 해악전신첩(Album of the Sea and Mountains, 海嶽傳神帖) >이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 모나리자 > 이상으로 유명한 신윤복의 < 미인도(A Beautiful Woman) >도 빼놓을 수 없다. 1938년 전형필이 일본 주재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John Gadsby)로부터 인수한 ‘개스비 컬렉션’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개스비로부터 고려청자 20점을 40만 원에 샀는데, 이는 당시 기와집 400채 가격이었다. 이 가운데 훗날 국보로 지정된 청자만 4점이다.

이 유물들은 모두 전형필이 개인 재산을 털어 사들였다. 그는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청년 부자였다. 그가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오세창(Oh Se-chang, 吳世昌, 1864~1953)의 영향을 받아,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 본격적인 수집을 시작한 것이 1934년 그의 나이 28세 때다.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연구∙보존할 장소로 현재 간송미술관이 자리한 성북동 부지를 사들였고, 4년 뒤 보화각이 세워졌다.

개스비 컬렉션 중 하나인 청자 기린형뚜껑 향로(Celadon Incense Burner with Girin-shaped Lid, 靑磁 麒麟形蓋 香爐). 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20㎝이다. 뚜껑에는 상상의 동물인 기린이 조각되어 있는데, 기린의 입을 통해 향의 연기가 배출된다.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며,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 국가유산청

간송미술관의 대표적 소장품 중 하나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Celadon Prunus Vase with Inlaid Cloud and Crane Design, 靑磁 象嵌雲鶴文 梅甁). 높이 42.1㎝, 입지름 6.2㎝, 밑지름 17㎝ 크기이며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 주는 유물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 국가유산청

뛰어난 감식안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한국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혼란 속에서 우리 문화재들이 어디로 어떻게 흩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전형필은 막대한 돈을 써가며 컬렉션을 늘려갔다. 귀한 물건이다 싶으면 가격을 깎지 않았고, 오히려 상대방이 제시한 가격에 웃돈을 얹어 사기도 했다. 좋은 물건을 유리하게 확보하려는 전략이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게 『훈민정음 해례본(The Proper Sounds for the Instruction of the People)』이다. 훈민정음은 조선의 네 번째 임금 세종(재위 1418~1450)이 창제한 한국 고유의 글자 ‘한글’의 옛 이름이다. 해례본은 새 문자 체계의 사용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1446년 간행된 책이다. 여러 사람이 실제로 사용하는 문자 시스템에 대해 이를 만들어 낸 사람이 직접 해설한 자료는 전 세계에 오직 이 책뿐이다. 이러한 연유로 이 책은 1962년 국보에 지정됐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됐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40년 경상북도 안동(安東)에서다. 여러 문헌에서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은 언급됐지만, 실물이 확인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한글이 창제된 원리를 두고 추측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제작된 지 약 500년 만에 어느 유서 깊은 가문의 서고에서 책이 발견됐다. 오랫동안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고 있던 전형필은 깜짝 놀랐고 당연히 그 가치를 알아챘다.

그는 책값으로 제시되었던 1천 원의 열 배인 1만 원을 주고 이 책을 사들였다. 그러면서 이 사실을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당시 일제는 한국인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한글학자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전형필은 보화각 깊숙한 금고에 책을 숨기고는 광복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 화접도(Flower and Butterfly, 花蝶圖) >. 고진승(高鎭升, 1822~?). 지본채색. 각 22.6 × 116.8 ㎝. 19세기.
간송미술관 제공
조선 시대 도화서 화원이었던 고진승의 나비 그림은 실물을 옮겨 놓은 듯 묘사가 세밀하다. 실제로 그는 나비의 생태를 관찰하고 연구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살아남은 유산들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면서 한국은 독립 국가가 됐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1950년 6월 25일 소련을 등에 업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면서 서울이 사흘 만에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다. 전형필은 가족들을 피난시켰지만, 자신은 보화각의 수장품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인근 빈집에 몸을 숨기고 아침저녁으로 북한군의 동태를 살폈다. 매일 피가 마르는 듯했다.

북한군은 보화각의 문화유산들을 북녘으로 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당시 국립박물관의 직원들을 불러서 포장을 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이들은 간송 컬렉션의 위대함과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으로 보낼 수 없었다. 이들은 “목록을 먼저 작성해야 한다”, “더 큰 상자가 필요하다”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던 중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면서 서울을 되찾았다. 전형필도 기쁜 마음으로 보화각에 돌아왔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이듬해 1∙4 후퇴가 벌어지면서 서울은 다시 위기에 처했다. 행운을 두 번 기대할 수 없었던 전형필은 중요한 수장품을 기차에 싣고 부산으로 피신했다.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은 늘 품 속에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문화유산들을 가져올 순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보화각에 남겨 두었던 수장품들이 부산에서 목격되기 시작했다. 누군가 빼돌려 내다판 것이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맺어지면서 그도 서울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보화각은 이미 큰 피해를 입은 뒤였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을 딛고 그는 다시 문화재를 사들이고 보화각을 정비했다. 196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문화보국(文化保國)에 대한 그의 신념은 한결같았다.

지금 간송미술관은 그의 아들을 거쳐 손자가 운영하고 있다. 9월 초엔 간송 컬렉션을 상설 전시하는 대구간송미술관도 문을 열었다. 대구광역시가 부지를 제공하고, 정부와 지자체가 사업비 총 446억 원을 부담해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건물이 들어섰다. 운영은 간송미술문화재단(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이 맡았다.

대구 개관전에는 간송미술관이 자랑하는 스타 유물들이 총출동했다.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은 1971년 대중에게 공개된 이래 처음 서울 밖으로 나들이했다. 이 밖에도 국보 청자상감운학문매병(Celadon Prunus Vase with Inlaid Cloud and Crane Design, 靑磁 象嵌雲鶴文 梅甁)과 최고 인기 유물 < 미인도 >도 빼놓을 수 없다. 대구간송미술관 개관전은 올해 12월 초까지 진행된다.

올해 9월 3일 개관한 대구간송미술관 전경. 이곳은 간송미술문화재단의 유일한 상설 전시 공간으로 운영된다. 소장품 중 국보와 보물을 선별해 공개하는 개관 기념전이 12월 1일까지 열리고 있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강혜란(Kang Hye-ran, 姜惠蘭) 중앙일보 기자
이민희 포토그래퍼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