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음악 활동을 시작한 김민기(Kim Min-ki, 金敏基)는 온 국민이 즐겨 부른 명곡들을 만들었고, 소극장 학전(Hakchon Theatre, 學田)을 개관해 기라성 같은 배우와 뮤지션들을 배출했다. 그가 연출한 록 뮤지컬 < 지하철 1호선(Line 1) >은 대한민국 공연 역사를 다시 쓴 작품으로 기록됐다. 2024년 여름, 유명을 달리한 김민기는 국내 음악 및 공연예술계에서 전설이 되었다.
뮤지컬 < 지하철 1호선 >의 2021년 공연 사진이다. 독일 그립스 극단(GRIPS Theater)의 동명 원작을 김민기가 각색하여 연출했고, 영화 < 기생충 >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 오징어 게임 >의 음악을 담당한 정재일(鄭在日)이 편곡했다. 이 작품은 한국 뮤지컬계의 교과서로 불리며, 1990년대 소극장 공연의 전성기를 열었다.
올해 7월 21일 김민기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수식어는 ‘한국의 밥 딜런’이다. 그는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특별한 음색으로 뭇사람의 귀를 파고들고, 시적인 가사로 가슴을 울린 싱어송라이터다. 그가 가수로 첫발을 뗀 1970년대는 군사독재 정권이 경제 개발을 국가의 제1 목표로 삼았던 시기이다. 청년들은 “나라의 역군이 돼라”, “열심히 공부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라”는 주문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야 했다. 그래서 당시 청년들에게 노래나 음악은 사치품처럼 느껴졌다.
그때 엄혹한 시대의 사슬을 뚫고 청년 김민기, 한대수(Hahn Dae Soo, 韓大洙), 양병집(Yang Byung Jip, 梁炳集) 등이 나타났다. 그들이 직접 쓴 노랫말에는 답답한 사회에 대한 직간접적 비판과 토로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게, 그러나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아로새겨 있었다. 그것은 바야흐로 대한민국 1세대 모던 포크 싱어송라이터 시대의 개막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김민기는 남달랐다. 늘 곁에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자연이나 동식물에서 그는 깊은 은유의 우물을 봤다. 그 심연으로 거침없이 노래의 두레박을 던졌다. 길어 올린 것은 그대로 사회를 투영하는 시가 되고 음악이 됐다. 그의 곡들은 가사와 멜로디가 어렵지 않고 수수하다. 하지만 듣는 이나 부르는 이 모두를 먹먹한 감동에 젖게 한다.
김민기(Kim Min-ki, 金敏基)는 한 시대를 이끈 가수이자 탁월한 기량의 예술가로 찬사받는 인물이다. 1970년대 그가 만든 명곡들은 지금도 널리 애창된다. 연출가로 전향한 후에는 소극장 공연 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헌신했다.
ⓒ 학전(HAKCHON)
저항의 상징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을 만든 1987년 6.10 민주 항쟁(June Democratic Struggle)은 대학생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밝혀지면서 촉발되었다. 분노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김민기의 대표곡 중 하나인 < 아침 이슬(Morning Dew) >(1971)을 한목소리로 불렀다. 6월 항쟁은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고, 한국은 진정한 민주화의 역사적인 첫걸음을 떼게 되었다. 이로써 이 노래는 한국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 잡았다.
1951년에 태어난 김민기는 원래 촉망받는 미술학도였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미술에 몰두했고, 196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친구와 즉흥 듀엣을 이뤄 공연한 것이 학내에서 바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에 김민기는 붓을 놓고 작곡가,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1971년 김민기는 유일한 정규 앨범이라고 할 수 있는 1집 < 김민기 >를 세상에 낸다. < 아침 이슬 >, < 친구 > 등 노래 10곡이 담긴 이 앨범은 대한민국의 현대적 싱어송라이터 시대를 연 기념비적 음반으로 꼽힌다. 그러나 1970년대에 그의 곡들이 지속적으로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불림에 따라 그는 당국에 소환돼 조사를 받고, 1집 음반은 판매 금지 조치를 받으며 거의 모든 곡들이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만다.
상심한 김민기는 학교와 무대를 떠나 농촌으로, 탄광으로, 공장으로 터전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 그의 또 다른 명곡 < 상록수(Evergreen) >(1979)가 태어났다. 자신이 일하던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합동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들을 위한 축가로 만든 것이 이 노래였다.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로 마무리되는 이 노래 또한 집회 때마다 수도 없이 불렸다. 이 곡은 훗날 다시 한번 전 국민의 가슴에 뜨거운 눈물의 비를 내리게 한다. 1998년, 한국 국민들이 아시아 금융 위기로 경제적 고난에 처했을 때 한 공익 광고에서 프로 골퍼 박세리가 양말을 벗어던지고 물에 들어가 스윙하는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것이다. 노래가 주는 메시지와 멜로디는 세월을 뛰어넘어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이들에게 다시 한번 불굴의 의지를 상기시켰다.
무대 뒤의 삶
김민기는 평생 노래를 만들고 불러도 좋을 사람이었지만, 무대에 제2의 삶을 던지기로 한다. 그가 지향한 곳은 정확히 말하면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뒤였다. 1978년, 그는 당국의 눈을 피해 노동자와 음악가들을 모았다. 그렇게 비밀리에 제작한 음악극 < 공장의 불빛(Light of a Factory) > 음반은 해적판 카세트테이프 형태로 유통되었다. 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탄압과 노동조합 결성, 투쟁으로 긴박하게 이어지는 스토리를 담았다. 포크, 재즈, 로큰롤, 국악 등 다양한 장르가 고루 사용되었고, 악기도 서양 악기와 국악기가 두루 쓰였다. 이 음악극의 짜임새를 보면, 영국 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명반 < The Wall >보다도 앞선 ‘콘셉트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김민기는 1991년 서울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개관한다. 극장 운영자이자 공연 연출가로의 완벽한 변신이었다. 1990년대 홍대 앞 라이브 클럽에서 한국 인디 음악 1세대가 태동하기 전까지 학전은 라이브 공연의 중심지였다. 수많은 명곡을 남기고 요절한 싱어송라이터 김광석은 이곳에서 1,000회 공연의 신화를 썼다. <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1991)도 학전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특별히 정해진 형식 없이 초대 손님과 진솔한 대화를 이어가며 음악도 감상했던 이 콘서트는 인기에 힘입어 KBS TV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되기에 이른다. 이후 < 이소라의 프로포즈 >, < 윤도현의 러브레터 >, < 유희열의 스케치북 > 등 음악 토크쇼의 계보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편 록뮤지컬 < 지하철 1호선 >은 독일의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Volker Ludwig)의 원작을 김민기가 번안해 각색한 작품으로, 20세기 말 한국 사회의 모습을 풍자와 해학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1994년 초연 이후 2008년까지 4,000회의 공연 횟수를 기록해 한국 뮤지컬계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훗날 한국 영화계의 거물이 된 김윤석, 설경구, 조승민, 황정민 같은 배우들을 배출한 것도 큰 화제가 됐다.
2012년 초연된 연극 < 더 복서(The Boxer) >는 복싱 세계 챔피언이었던 노인과 문제아로 낙인 찍힌 고등학생 소년의 만남을 통해 소통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독일 청소년 연극상(Deutscher Jugendtheaterpreis)을 수상한 루츠 휘브너(Lutz Hübner)의 1998년작 < 복서의 마음(Das Herz eines Boxers) >을 김민기가 번안해 연출했다.
ⓒ 학전(HAKCHON)
조용하고 묵직한 발자취
김민기는 농촌과 노동 현장에 있을 때부터 어린이들에게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마침내 2004년부터 어린이극을 집중적으로 제작해 무대에 올렸다. 그는 위암과 싸우면서도 학전의 마지막 작품이 된 어린이 뮤지컬 < 고추장 떡볶이 >에 큰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결국 김민기의 건강 악화와 극장 운영난으로 학전은 2024년 3월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약 넉 달 후 김민기는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뮤지컬 < 고추장 떡볶이 >의 한 장면. 천방지축인 초등학생 형제들의 성장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린 작품이다. 2008년 초연 이후 연극계에서 다수의 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한국 어린이 뮤지컬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 학전(HAKCHON)
한국처럼 유교 문화권에 속했던 나라에서는 본명을 직접 부르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허물없이 쓰기 위한 용도로 호(號)를 지어 사용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풍속이 거의 사라졌지만, 시조 시인이나 동양화 작가들 중에는 여전히 호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김민기에게도 비공식적인 호가 있다. 그가 스스로 붙인 호는 ‘뒷것’이다. ‘뒤에 있는 하찮은 존재’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이 호는 그의 삶을 압축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지 않고 뒤에서 묵묵하게 예술가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헌신했다.
노래와 연출로 역사를 보듬고 신념을 불태운 김민기는 무대 위의 거물이 되려 하지 않았다. 저마다 큰 별을 자처하는 세계, 휘황찬란한 빛을 선망하는 세상, 아주 어린 아이들마저 스타 유튜버나 아이돌을 꿈꾸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의 조용한 그림자가 더 크고 절실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