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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SUMMER

수제화, 오래된 로컬 콘텐츠

성수동은 국내 최대의 수제화 산업 집적지로서 1980~90년대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급격한 산업 환경의 변화로 인해 차츰 사양길로 접어드는 추세다. 이에 지자체에서는 다양한 지원 정책을 펼치며 수제화 산업의 부활을 꾀하고 있으며, 가업을 이은 디자이너들과 기술자들이 젊은 감각을 내세우며 성수동 수제화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지하철 2호선 성수역 관역 내에는 이 지역이 전국 수제화 산업의 중심지임을 상징하는 다양한 표식들이 곳곳에 자리한다.
ⓒ최태원(Choi Tae-won, 崔兌源)

성수역 2번 출구로 나가면 뚝섬역 방향으로 600미터 남짓 수제화 거리가 이어진다. 지금은 유명 패션 브랜드나 코스메틱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성수동의 랜드마크가 되었지만, 본래 이 지역을 상징하던 것은 수제화였다.

성수동 수제화 산업의 역사는 196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내 굵직한 제화업체 중 하나였던 금강제화(Kumkang, 金剛製靴) 본사가 인근 금호동(金湖洞)으로 이전했고, 1970년대 초에는 에스콰이아(Esquire)가 성수동에 공장을 세웠다. 이들 기업의 하청 업체들이 자연스레 하나둘 성수동으로 옮겨 오면서 이 지역은 국내 최대 규모의 수제화 산업 집적지가 되었다. 이후 전국의 구두 장인들이 몰려들면서 1980~90년대에는 수제화의 메카로 자리 잡으며 번성했다.

성수역 지하철 역사에는 이 지역 수제화 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 ‘헤리티지 SS’가 조성되어 있다. 성수동을 관할하는 성동구(城東區)가 2021년 마련한 이곳은 국내 수제화 산업의 역사를 비롯해 작업 지시서, 구두 모형 등도 볼 수 있다.

성수동의 터줏대감들

현재 성수동 수제화 산업은 예전 같지 않다. 노후한 시설과 제한적 판로, 치솟는 임대료 등 제반 여건이 매우 열악해졌기 때문이다. 가죽과 부자재 매장은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이전했고, 구두 가게들도 임대료가 더 저렴한 후미진 골목으로 밀려났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성수동 수제화가 다시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한 건 2010년대 초부터다. 서울시는 명장과 우수 숙련인을 선정해 수제화의 가치를 널리 알렸고, 성동구는 성수역 교각 아래 수제화 공동 판매장 FromSS를 마련해 지역 내 소상공인들을 지원했다. 수제화 업체 대표들은 서울성수수제화타운(SSST)이라는 고유 브랜드를 만들고 공동 판매장을 열어 유통 구조를 바꾸고자 했다. 모두 지역 특화 사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성수동에는 40년 이상 경력을 지닌 명장들이 여럿 있다. 이들은 수제화 허브센터의 공방에서 교육생들을 가르치는 멘토로 활약한다. 그중 서울시 구두 명장 1호로 선정된 유홍식(劉洪植) 장인은 문재인(文在寅) 전 대통령의 구두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아빠는 구두장이’를 운영 중인 박광한(朴光漢) 장인도 이 지역의 터줏대감이다. 전태수(全泰洙) 명장은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의 미국 순방 때 영부인 김정숙(金正淑) 여사가 신었던 버선 모양의 구두로 화제를 일으켰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딸 이방카 트럼프가 방한했을 때 신었던 꽃신도 그의 작품이다.

성수동에는 수십 년 동안 수제화를 만들어 온 솜씨 좋은 장인들이 여럿 있다. 그중 한 명인 전태수(全泰洙) 명장은 성수동 수제화 산업의 산증인으로 50년 넘게 구두를 만들어 왔다. 그는 신발 제작뿐 아니라 디자인 연구와 소재 개발에도 많은 공을 들인다.
ⓒ 서울시

성수동 연무장길을 걷다 보면 큼지막한 빨간 하이힐 모형이 한눈에 들어오는 건물이있는데, 이곳이 전태수 명장의 JS슈즈디자인연구소(JS Shoes Design Lab)이다. 매장 안에는 장인의 솜씨를 짐작하게 하는 화려하고 섬세한 구두들이 진열되어 있다. 한쪽에 놓인 꽃신은 2022년 tvN이 방영한 드라마 <슈룹>에서 배우 김혜수(Hye Soo Kim, 金憓秀)가 신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이다. 당시 한복에 어울리는 굽이 높은 스타일로 몇 켤레 만들어 달라는 주문에 제작했다. 이곳을 지나 몇 분 걷다 보면 남성용 구두 가게 더젠틀박(The Gentle Park)이 나온다. 이곳의 구두는 어퍼에 그러데이션을 주며 염색하는 파티나(Patina) 공법으로 유명하다.

뚝섬역 근처 찰스보툼(CHARLSE VOTUM)도 오래된 수제화 브랜드이다. 김철(金撤) 대표는 글로벌 명품 브랜드에서 20년 넘게 일한 남성용 구두 전문가로,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 회사를 그만뒀다. 유럽 감성에 성수동 장인들의 기술을 더한 제품으로 살롱 문화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2층 단독 주택을 개조해 만든 숍의 짙은 녹색문을 열고 들어가면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고객들을 반긴다.

수제화는 신발과 재료의 종류가 가지각색이다 보니 사용되는 도구 또한 매우 다양하다. 사진은 성수동의 오래된 수제화 브랜드 중 하나인 찰스 보툼 매장 내부로, 작업 단계마다 필요한 각종 도구가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되어 있다.
ⓒ 최태원

2세들의 등장

최근에는 가업을 승계한 2세들이 성수동 수제화 산업에 힘을 보태고 있다. 성수역 3번 출구 인근 건물 2층에 위치한 피노아친퀘(Finoacinque) 쇼룸에서는 곡선 형태의 실루엣을 강조한 구두를 만날 수 있다. 편안한 착화감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이곳의 구두는 굽 높이가 5㎝를 넘지 않는다. 이곳은 김한준(金漢俊) 기술자와 이서정(李敍正) 디자이너가 의기투합해 6년 전 문을 열었다. 김한준 공동 대표는 수제화 제작 공장을 운영하던 부모님으로부터 도제식으로 구두 제작과 관련한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이들이 제작한 구두는 국내를 넘어 글로벌 고객들에게도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 2월 파리 패션위크의 트라노이(Tranoi) 수주회에 참가해 5,000유로 이상 상담 성과를 얻었다. 뉴욕과 파리, 밀라노 등 셀렉트숍 바이어들과 생산 수량을 상담 중이다. 김한준 대표는 “패턴 제작, 바느질, 창 부착, 최종 검수에 이르기까지 제조 과정을 투명하게 밝히기 위해 모든 패키지에 장인들 이름을 적고 있다”고 말했다. 장인 정신을 중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수제화 품질에 자신이 있어서다.

구두 디자인을 전공한 백인희 대표가 운영하는 베티아노 내부. 가업을 이은 젊은 디자이너와 테크니션들이 성수동 수제화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 최태원

연무장길에 위치한 베티아노(VETIANO)도 외국인 고객들이 찾는 곳이다. 대학에서 구두 디자인을 전공한 백인희(白仁熙) 대표는 40년 이상 구두를 만들어 온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아 가업을 이었다. 매장 내부에는 플랫 슈즈부터 스니커즈류, 굽 있는 트렌디한 구두까지 다양한 종류의 신발이 진열돼 있다. 백 대표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에서는 수십 년 경력이 있는 전문 기술자들이 구두를 만든다. 덕분에 신발 가격을 합리적으로 책정할 수 있고, 더욱 세심한 고객 서비스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아버지 공장과 연계하여 일관성 있는 품질을 보장한다는 얘기다.

2세들의 젊은 감각을 비롯해 성수동 수제화 산업을 위한 다각적 노력이 어떤 결실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들어 낸 제품들이 고객들에게 큰 만족감을 선사하는 것은 분명하다.

정정숙(Chung Chung Suk, 鄭貞淑) 한국섬유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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