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의 랜드마크인 인왕산은 경치가 아름다워 예로부터 이곳을 그린 산수화가 많았다. 조선 시대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장소였고, 현재는 시민들이 즐겨 찾는 등산 명소이자 동네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인왕산에서 내려다본 서울 도심.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수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산인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의 능선을 연결해 성곽을 쌓았다. 서울 한양 도성은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른다.
ⓒ 한국관광공사(Korea Tourism Organization)
매일 집을 나서며 마주하는 골목 풍경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싸전이 오락실로 바뀌고, 철물점이 레스토랑으로 바뀌는 것이다. 방진 가림막에 싸여 정체가 모호했던 곳들이 하나둘 상가로 변했다. 저녁 무렵 귀갓길, 광화문 어깨너머 인왕산과 북악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마음이 놓인다. 마을 어귀 경복궁역 사거리에 서면 쭉 뻗은 자하문로 저 멀리 북한산 능선이 날개를 펼친 새의 모습으로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보현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나를 기다렸다 두 팔 벌려 말하는 것 같다.
웅장한 산세
인왕산은 창의문에 이르는 서촌 일대와 서대문구 무악동과 홍제동에 걸쳐 있다. 높이는 338.2메돌(m)이라 들머리를 어디로 하든지 산 정상까지 대략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화강암질의 바위산은 높이에 비해 그 웅자와 기세가 등등하고 골이 깊어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였다고 한다.
조선 초기 왕족의 집단 주거지였던 서촌은 후기에 이르러 권문세족들이 청풍계곡, 옥류계곡 주변에 터를 잡았다. 임진왜란 이후, 남부인 사직단 위쪽에 대규모로 들어섰던 인경궁을 철거하면서 군인과 평민들이 대거 정착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실 기관에 소속된 하급 관리, 궁궐의 잡일을 하는 하인, 권문세가에서 대소사를 맡아보는 하인 등 다양한 계층이 혼재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내내 짓고 허물기를 반복했던 왕족, 권문세족의 집들은 대부분 일제 시대에 용도 변경되거나 철거되어 역사의 흔적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 장동팔경첩(Album of Eight Scenic Sites of Jang-dong in Seoul, 壯洞八景帖).
정선(Jeong Seon, 鄭敾). 1750년대. 종이에 담채. 33.4 × 29.7 ㎝.
서촌에 살았던 화가 정선은 이 지역에서 경치가 빼어난 여덟 군데를 골라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은 그중 인왕산 기슭의 골짜기를 그린 작품으로, 70대 노년기의 무르익은 필치가 드러난다.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의 한양천도 이후 역사의 중심에 자리해온 서촌 지역에서 시간은 길로 연결된다. 옛 지명은 실록과 승정원일기 같은 국가 문서나 고서화에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책들은 입이 무겁다. 묵직한 입을 열도록 대화를 청해야 한다. 서촌에서 객관적 역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시간과 공간의 궤적을 달리하는 선인들과 소통하고픈 소망이 우리를 길로 나서게 한다.
변화의 한복판에서 서촌은 직선보다 곡선이 아직 살아 있는 곳이다. 사람들을 빠르게 다른 장소로 보내주는 직선도로에서 건물은 평평한 면이 된다. 물결치는 기와집이 점처럼 박힌 골목은 ㄱㄴㄷㄹ 한글처럼 이어진다. 그곳에서 문패에 적힌 그림 같은 문자들을 읽거나 문고리 혹은 쇠살 문양에 미혹되어 길을 잃는다. 길이 때로는 ㅁㅂ자로 나타날 때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촌 안에 공공도서관 4개와 20개나 되는 작은 서점들이 있어 글 읽는 마을 ‘서촌(書村)’이라 부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꽃놀이 명소
한양 도성 사람들은 봄꽃놀이 명소로 인왕산 자락 좌우에 있는 필운대와 세심대를 첫손에 꼽았다. 남쪽 자락의 필운대는 서대(西臺), 북악에 가까운 세심대는 동대(東臺)로도 불렸다. 조선 시대 세시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3월이 되면 살구꽃이 지천인 필운대와 복사꽃 가득한 세심대를 찾는 상춘객이 “구름처럼 모이고 안개처럼 밀려들어 줄지 않는다.”고 했다. 평소 시를 즐겨 짓지 않던 연암 박지원은 『연암집』 4권에 두 차례에 걸쳐 필운대를 시제로 삼을 정도였다. 당시의 모습은 18세기 문인 윤기의 『무명자집(無名子集)』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었다. “서대(西臺)가 솟아 있어 바위는 넓고 평평한데 / 화창한 볕 푸른 봄이 도성에 가득” 한 흥취를 느낄 수 있다.(시고 제4책)
“바위의 대는 높아 활쏘기 좋고 군기가 엄하여 군마가 고요하네 / 천관의 위치엔 푸른 버들 늘어서 있고 / 백보의 정원엔 붉은 과녁 설치되었네”(시고 제3책)
세심대는 왕실에서도 자주 찾는 곳으로 신하들과 올라 활도 쏘고 시를 주고받았던 상춘대임을 알 수 있다. 바위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각각 배화여고와 신교동 농학교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어 뭇사람의 발길을 에두르게 한다.
수성동 계곡
처서가 지나도록 무더위가 가시질 않더니 며칠 장대비가 내렸다. 어둠 속에 잠긴 수성동 계곡은 빗소리로 가득하다. 물소리로 이름을 얻은 수성동(水聲洞) 기린교 앞에 서자, 한낮의 수선함에 묻혔던 물소리가 주절거림을 들려준다. 비 온 뒤 우레 같은 물소리는 정악(正樂)처럼 힘차고 곧은 소리로 말미암아 산심을 숙연케 한다며 추사 김정희가 시로서 입을 떼었다(수성동 우중관폭[水聲洞雨中觀瀑]). 더구나 ‘층층이 기와 덮인 듯한 솔숲이 대낮에 걸어가는데도 밤인 것 같다.’고 하는 뜻은 어둠 속에서 오히려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산에서 내달려온 물줄기가 기린교를 향해 치달리다 너럭바위를 타고 힘차게 내리 꽂히며 튀는 소리는 장쾌하고 서늘하다. 억센 빗줄기에 소나무 가지들이 채찍처럼 흔들리며 공기를 가른다. 대지를 두드리고 바위틈을 구르는 그 모든 것이 뒤섞인 가운데 소리가 심장을 뒤흔든다.
수성동 계곡은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찾던 명승지이다. 길이 3.8m의 장대석 두 개를 붙여 만든 기린교는 한양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형대로 보존된 돌다리여서 역사적으로 가치가 크다.
ⓒ 셔터스톡(Shutterstock)
서울 전경
산허리를 베어 만든 인왕 북악 스카이웨이는 1968년 1월 21일 31명의 북한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청와대 경비 강화를 위해 만들어진 도로이다. 사직동에서 시작하여 북악산 능선을 따라 아리랑 고개까지 대략 10km이다. 도로에 올라서서 창의문 방향으로 걷다 보면 무무대(無無帶)에 이른다. 시야에 거칠 것 없는 전망대는 날이 좋으면 북악에 들어 앉은 청와대로부터 경복궁, 랜드마크인 롯데월드타워와 남산서울타워를 파노라마로 보여준다. 가깝게는 동네 개 짖는 소리, 수성동을 향해 달리는 마을버스와 자전거가 빤히 보인다.
이곳에서 도성에 이르는 최단 코스는 초소책방 건너편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최근에 설치한 계단을 따라 어둠 속에 둥둥 떠있는 노란 불빛은 입산객의 안전을 호시탐탐 엿보는 호랑이 눈처럼 빛나고 있다. 나무 계단이 끝나는 곳에 눈썹돌[屋蓋石]을 얹은 여장(女墻)이 등줄기처럼 나타난다. 도성 안팎으로 뻗은 산세를 흘낏흘낏 살피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두 다리를 버티고 선 호랑이 등에 올라탄 기분이다. 도성 밖 홍제원 또는 세검정 방향은 기차바위로 내려서야 한다.
인왕산은 30여 개의 군 초소가 있어 오랫동안 시민들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2018년 인왕산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대부분의 군 초소가 철거되었는데, 일부는 시민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진은 그중 하나인 ‘숲속쉼터’이며 초병들의 거주 공간을 레노베이션하여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 스튜디오 켄(Studio Kenn)
유럽에 로마로 이르는 길이 있다면 조선에는 중국 대륙과 연결되는 지름길이 의주대로였다. 현재는 통일 염원을 담아 통일로로 바뀌어 서울역에 이른다. 중국 사신은 의주를 지나 평양과 개성을 거쳐 한양으로 들어온다. 서대문 밖 홍제원은 사신들이 유숙하는 여관으로 마지막 의관을 정제하여 무악재를 넘었다.
“임진강 건너 한양을 바라보매 팔짱을 끼고서 성 밖을 겹으로 둘러싼 산들이 마치 봉새가 빛을 발하듯 환하다.”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조선부(朝鮮賦)』에 기록한 내용은 지금도 변함없이 마을 어귀에서 바라본 느낌과 같다. “홍제원(洪濟院)에서 동쪽으로 몇 리 가지 않아서 하늘이 만든 관애(關隘) 즉 좁은 길목이 하나 있는데 남쪽과 북쪽이 안산과 인왕산으로 막혀 있고 가운데로 말 한 필 겨우 통과할 정도이니 더할 수 없이 험한” 지세는 여전하다.
등줄기를 중심으로 ㅈ 자처럼 좌우로 뻗어내린 산세는 정상에 점 하나를 더 얹었다. 마치 한 계단 더 올라 시야를 넓혀 배움을 더하라는 듯 바위가 솟아 있다. 밝은 날 그곳에 서면 도성을 둘러싼 내사산과 외사산이 ㅅㅅㅅ으로 다가온다. 불 꺼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는 한 일(ㅡ) 자로 입을 굳게 다문 채 전각들의 규모와 배치로서 조선 시대의 위계질서와 덕목, 사상과 이념을 전한다.
우중에 오른 인왕산은 모든 것을 공(空)의 상태로 보여주었다. 가늘어진 빗발 속에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안산과 북악, 남산이 언뜻 언뜻 머리를 드러냈다. 문득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산에 올라 보았던 한양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왕산이 경복궁의 우백호를 담당하는 까닭에 지역의 변천사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터이다. 켜켜이 쌓인 이야기 속에 과거를 불러들이는 흔적들이 제자리에 있도록 꼭 눌러 둬야 한다. 대화를 위해 그나마 펼쳤던 책이 입을 다물지 않도록 인왕산은 역사의 문진(文鎭)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