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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AUTUMN

굿즈는 물건이 아니라 관계다

한국의 굿즈 문화는 1990년대 중후반 K-팝 아이돌 팬덤의 성장과 함께 하나의 소비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후 굿즈는 웹툰, 영화,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를 비롯해 미술과 문학 같은 장르로도 확산되며 문화 상품을 관통하는 공통 언어가 됐다. 최근에는 일상적 소비 영역까지 외연을 넓히며, 특정 팬덤을 넘어 보편적 소비문화의 양상을 보인다.

서울시립미술관의 2026년 한국 근대 거장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를 위해 제작된 굿즈.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의 작품을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이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풀어냈다.
ⓒ 일상의실천

오늘날 굿즈 산업의 원형 중 하나는 중세 유럽의 순례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순례자들은 성당과 수도원에 방문하면 납과 주석 합금으로 만든 순례 배지, 메달, 십자가 같은 기념품을 구매해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것은 단순히 여행 기념품이 아니었다. 자신이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믿는 사람인지,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이 점은 현재의 굿즈 문화와도 맞닿아 있다.

굿즈 산업의 맹아는 20세기 초에 찾아볼 수 있다. 영국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는1903년 자신의 동화 주인공인 피터 래빗을 인형으로 만들고, 이후 다양한 캐릭터 상품을 선보였다. 굿즈가 본격적으로 산업의 영역에 들어선 것은 1930년대 미국에서였다. 디즈니가 미키마우스 같은 인기 캐릭터를 다양한 상품에 적용하며 라이선싱 사업을 체계적으로 확장하면서부터다. 이후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굿즈 시장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라이선스 글로벌’의 2025년 조사에 의하면, 월트디즈니 컴퍼니는 자사가 보유한 슈퍼 IP를 활용해 2024년 전 세계에서 약 620억 달러 규모의 상품 판매를 이끌어냈다. 현재 굿즈 산업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에서는 1960년대부터 애니메이션과 만화 캐릭터를 활용한 상품화 사업이 본격화됐다. TV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을 바탕으로 1980년 출시돼 선풍적 인기를 끈 건담 프라모델은 캐릭터 상품 시장의 성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1970~80년대 들어서는 아이돌 팬 문화가 확산되면서 관련 상품 소비도 활발해졌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팬시 산업을 통해 굿즈 문화의 토양이 형성됐고, 1990년대 중후반 1세대 아이돌이 등장하면서 본격화됐다. 당시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룹을 상징하는 색깔의 풍선을 들거나 우비를 입고 공연장과 방송국을 찾았다. H.O.T.는 흰색, 젝스키스는 노란색, 신화는 주황색, god는 하늘색 등 각 그룹마다 고유한 색이 있었고, 이러한 응원 용품은 팬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 외에도 브로마이드, 향수, 음료 등 다양한 상품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아이돌 굿즈가 팬덤 소비의 한 축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팬덤이 키운 한국형 굿즈

미국에서 IP 라이선싱이, 일본에서 애니메이션과 오타쿠를 기반으로 한 굿즈 소비가 시장을 키웠다면,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굿즈가 팬덤의 결속을 강화하고 팬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매개체로 발전했다.

이러한 특징은 다른 콘텐츠 산업에서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웹툰과 웹소설의 경우 캐릭터와 세계관을 중심으로 영상, 게임, 출판, 굿즈 등 여러 분야로 IP를 확장해 왔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 중 하나가 <나 혼자만 레벨업>이다. 추공작가의 웹소설로 출발한 이 작품은 웹툰과 애니메이션, 게임으로 잇달아 영역을 넓혔으며, 팝업 스토어도 열려 작품 세계가 오프라인까지 확장됐다. 팬들은 웹툰과 애니메이션을 보고, 게임을 즐기고, 팝업 스토어를 찾아 굿즈를 구매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과 캐릭터를 거듭 만난다. 이때 굿즈는 팬들이 작품 세계에 지속적으로 머물게 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2026년 창원에서 열린 전시형 팝업 스토어에서는 AR을 활용해 작품 속 ‘그림자 군단’을 소환하는 체험을 제공했고, 즉석 사진을 부착한 개인 헌터증을 발급해 팬들의 몰입감을 한층 높였다.

팬덤을 토대로 성장한 굿즈 문화는 이제 대중문화를 넘어 다양한 장르로 확산 중이다. 미술 분야에서는 전시와 함께 굿즈를 기획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고, 출판 쪽에서도 책갈피나 북커버, 문진(文鎭) 등 이른바 ‘독서 굿즈’가 책과 함께 하나의 소비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굿즈는 문화·예술 전반에서 콘텐츠와 팬을 이어주는 중요한 접점이 되었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2021) 시즌 1의 공식 굿즈인 스페이스 래빗 인형. 드라마 촬영을 위해 사전 제작돼 소품으로 활용됐으며,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일반에도 판매되었다.
ⓒ 스튜디오 드래곤

일상으로 들어온 굿즈

편의점 브랜드 GS25가 출판사 민음사, 캐릭터 브랜드 ‘오늘의 귀여움’과 협업해 출시한 빵이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과 시집 표지 디자인을 패키지에 적용하고, 책 모양 책갈피 20종을 랜덤으로 넣어 문학 작품을 굿즈와 연결했다.
ⓒ GS리테일

굿즈를 사기 위해 캐릭터 전문 매장이나 팝업 스토어처럼 특별한 장소를 찾아가야만 하는 건 아니다. 집 앞 편의점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의점은 식음료와 생필품을 판매하는 공간이지만, 다양한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제작한 굿즈를 선보이는 유통 채널이기도 하다. 일례로, 1990년대 말 처음 등장한 포켓몬빵은 빵 안에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의 캐릭터 스티커를 넣어 판매한 상품이다. 2022년 SPC삼립이 이 제품을 재출시하자, 스티커를 모으려는 사람들이 편의점으로 몰리면서 품귀와 오픈런까지 연출됐다.

때로는 편의점이 직접 굿즈 기획에 참여하기도 한다. CU는 2025년 한국프로축구연맹,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와 손잡고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를 테마로 한 머플러와 티셔츠, 키링 등 다양한 한정판 굿즈를 선보였다. 그런가 하면 협업 대상도 기업이나 기관에 국한되지 않는다. GS25는 같은 해 유명 유튜브 크리에이터 ‘잠뜰TV’ 와 함께 디오라마 아크릴 스탠드, 키링 등을 출시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편의점은 이제 일상에서 굿즈를 발견하고 수집하는 또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

굿즈의 변화는 판매 장소의 확장에만 그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이제 굿즈는 반드시 손에 잡히는 물건일 필요조차 없어졌다. 중요한 것은 물성이 아니라 좋아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증명하고 소유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굿즈의 형식이 물리적 상품에서 디지털 형태로 이동한 대표적 사례가 디지털 포토 카드다. 2023년 데뷔한 걸그룹 트리플에스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포토 카드를 선보인다. 팬들은 공식 앱에서 포토 카드를 모으고 서로 교환하며, 이를 통해 얻은 투표권으로 그룹의 유닛 구성이나 타이틀곡 선정에도 참여할 수 있다. 굿즈가 소장하는 물건에서 팬과 아티스트의 관계를 매개하는 디지털 자산으로 확장된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굿즈의 개념 자체도 바꾸고 있다.

한솔제지가 K-팝 앨범 콘셉트로 제작한 샘플북. 실제 앨범 패키지처럼 구성해 고급 화보 용지의 인쇄 품질을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K-팝 굿즈의 문법을 제지업계에도 적용한 사례다.
ⓒ 스튜디오 고민

굿즈라는 세계

2021년 첫선을 보인 넷플릭스 예능 <솔로지옥>의 굿즈. 커플이 되어 ‘지옥도’를 벗어나 ‘천국도’로 향하는 프로그램의 설정을 캐리어와 여권, 항공권 등 여행을 연상시키는 물건으로 제작했다.
ⓒ 넷플릭스, 사진 제공 씨네핀하우스

굿즈 소비는 때로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이미 비슷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데도 새로운 상품이 나오면 다시 지갑을 열고,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인데도 한정판이라는 이유로 줄까지 서서 구매한다. 사람들이 굿즈에 끌리는 이유는 물건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에 있다.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키링을 가방에 달고, 전시 포스터를 벽에 붙이고, 응원하는 스포츠팀의 유니폼을 입는 일은 자신의 취향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동시에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서로를 알아보게 하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굿즈를 매개로 자연스럽게 소속감과 유대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희소성도 굿즈의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오늘만’, ‘한정 수량’, ‘이번 전시만 특별히’ 같은 홍보 문구는 놓치고 싶지 않은 심리를 자극한다. 무언가를 빠짐없이 모으고 싶어 하는 완결 욕구 역시 굿즈 소비를 추동하는 힘이다. 하나의 디자인을 여러 버전으로 만들어 시리즈로 선보이면, 한 세트를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랜덤 포토 카드와 시리즈형 굿즈가 반복 구매를 이끄는 것도 같은 이유다.

굿즈는 기억을 붙잡아 둔다. 공연이나 전시, 팝업 스토어에서 산 작은 물건 하나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날 그곳에 있었던’ 경험을 되살려준다. 추억이 손에 잡히는 형태로 남는다는 얘기다. 결국 굿즈는 그저 플라스틱이나 종이로 만들어진 기념품이 아니다. 정체성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게 하며, 특별한 순간을 간직하게 하는 ‘또 하나의 세계’다.

한국적 모티브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패브릭 브랜드 그린플레어의 액막이 북어 키링 ‘복태’이다. 액운을 막고 복을 기원하며 북어를 걸어두는 풍습을 오늘의 감각으로 풀어냈다.
ⓒ 그린플레어

디자인 스튜디오 오이뮤와 플라스틱 재활용 브랜드 노플라스틱선데이가 협업해 개발한 한자 ‘복(福)’ 키링. 내부에 NFC 칩을 넣어 스마트폰을 태그하면 매일의 운세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디지털 기술과 환경적 가치가 어우러진 굿즈이다.
ⓒ 오이뮤

이승윤건국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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