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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AUTUMN

그림이 된 말들

홍인숙(Hong In-sook, 洪仁淑)은 글자와 그림을 넘나드는 독특한 화풍을 구사하는 작가이다. 그녀는 민화 장르 중 하나인 문자도(Munjado, 文字圖)를 현대적 어법으로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해석하는데, 작품의 소재는 대부분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다.

자신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홍인숙 작가. 2000년 인사동 경인(耕仁)미술관(Kyung-in Museum of Fine Art)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개성이 뚜렷한 작품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노트에 수시로 기록하고 곱씹은 뒤 그것을 이미지화한다.

지난 5월, 서울 회현동(會賢洞)에 자리한 모리함전시관(Moryham Exhibition Center, 慕里函)에서 홍인숙의 개인전 < 다시 뜬 달, 월인천강지곡(Re-rising moon, Worin cheongangjigok) >이 열렸다. 『월인천강지곡(Songs of the Moon’s Reflection on a Thousand Rivers, 月印千江之曲)』은 조선의 4대 국왕 세종(재위 1418~1450)이 세상을 떠난 아내 소헌(昭憲)왕후(1395-1446)의 공덕을 빌기 위해 지은 찬불가(讚佛歌)다.

작가는 이 전시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심정을 달, 빛, 사랑 등의 글자와 그림을 통해 선보였다. 글자가 그림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림이 글자로 읽히기도 하는 작품들이다. 그녀는 글과 그림이 하나로 인식되는 전통 문자도를 자신만의 어법으로 표현하며, 우리 삶의 사라지지 않을 가치에 주목한다.

< 한글자풍경 – 꽃 >. 2024. 한지에 종이 판화, 드로잉, 채색. 140 × 118 cm.
ⓒ 홍인숙

< 한글자풍경 – 빛 >. 2024. 한지에 종이 판화, 드로잉, 채색. 140 × 118 cm.
ⓒ 홍인숙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글자는 무엇일까?’에 대한 작가의 상념을 전통 문자도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올해 5월, 모리함 전시관에서 열린 < 다시 뜬 달, 월인천강지곡 >의 전시작들이다.

 
유년의 경험

문자도는 민화의 한 종류로, 글자의 의미와 관계있는 옛이야기를 한자(漢字) 획 속에 그려 넣어 구성한 그림을 말한다. 조선 시대 유교의 주요 덕목이었던 효(孝), 충(忠), 신(信) 같은 글자를 형상화한 교훈적인 내용과 부귀(富貴), 수복강녕(壽福康寧), 길상(吉祥)과 같이 복을 기원하는 기복(祈福) 신앙적 측면이 강조된 그림으로 나뉜다.

“제 작품은 전통적인 문자도와 차이가 있어요. 작품 속 요소들이 저의 유년 시절 경험에서 나온 것들이거든요. 시대적 가치관이나 기복과는 거리가 멀죠.”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한글자 풍경’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달, 집, 꽃, 밥, 빵 등 한 음절로 이루어진 단어와 그에 맞게 형상화된 이미지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상상이 어우러져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다.

< 한글자풍경 – 안(安)>. 2020. 한지에 종이 판화, 드로잉, 채색. 110 × 90 cm.
ⓒ 홍인숙

< 한글자풍경 – 녕(寧)>. 2020. 한지에 종이 판화, 드로잉, 채색. 110 × 90 cm.
ⓒ 홍인숙

2020년 교보(敎保)아트스페이스(Kyobo Artspace)에서 열린 < 안,녕 >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두가 큰 고통을 겪었던 시기, ‘안녕’의 의미와 소중함을 되새기는 전시였다.

판화 기법

서툰 연필화 같은 드로잉, 순정 만화에 나올 법한 소녀의 모습, 글자의 획이 된 담벼락…. 홍인숙의 그림은 재기발랄하면서 키치적인가 하면 소박한 전통 회화의 면모도 엿보인다. 그런데 나무, 꽃, 새, 사람 등 풍경을 이루는 요소들을 자세히 보면 어쩐지 공예적 느낌이 든다. 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그렇다.

“제가 대학에서는 서양화를, 대학원에선 판화를 전공했어요. 판화 작업이 제게 맞는다 생각했는데, 뭔가 만족스럽지 않은 거예요. 서양식 소재에 한계를 느끼던 중 우리 전통 한지와 섬세한 동양화법에서 길을 찾았죠.”

그림 속 영롱하면서도 선명한 색채는 정교한 판화 방식을 접목한 결과다. 우선 담고자 하는 조형적 요소들로 종이에 밑그림을 그린다. 한지 위에 먹지를 대고 밑그림을 옮긴 다음 판화적 기법이 필요한 부분에 맞도록 색판을 만든다. 색깔별로 종이를 오려서 판을 만든 다음 물감을 칠해서 압축기로 찍어낸다. 그림판의 위치를 바꿔가며 찍어내기를 반복해서 원하는 색감을 완성해 간다.

“도장에 인주를 묻혀 찍듯이 간단할 것 같지만, 실은 찍어내는 과정 하나하나 엄청 집중해야 합니다. 컴퓨터의 포토샵 기능으로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하면 손쉽게 할 수도 있겠지만, 일일이 손으로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죠. 때론 조금 어긋나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죠. 그런 점이 그림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판화 기법을 이용한 그림은 붓에 물감을 묻혀 색칠하는 일반 회화와는 다른 독특한 색감을 보여 준다. 색깔별로 판을 자르고, 롤러로 색을 칠하고, 그 색판의 수만큼 프레스기를 돌리기 때문에 판화라고는 하지만 에디션 없는 그림이 되기도 한다.

“제가 작업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미련하다 못해 신선하다고 할 정도예요. 드로잉처럼 빠르지도, 컴퓨터처럼 매끈하지도 않아요. 가장 나다운 것을 찾다가 고안한 방식이죠.”

작가가 판화 작업 시 사용하는 다양한 크기의 롤러들. 오랫동안 판화 장르를 탐구해 온 홍인숙은 물리적 감각의 완급과 강약 조절을 통해 섬세하고 간결한 화법(畫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글자가 이루는 풍경

홍인숙은 1973년 경기도 화성(華城)에서 헌신적인 부모님의 삼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시골에서 자란 그녀는 또래 친구 하나 없이 놀잇감이라고는 나무, 꽃, 풀, 책이 전부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는데, 손때 묻은 책 속에 제가 어릴 때 낙서 삼아 그린 그림이 있었어요. 제가 즐겨 그리는 커다란 눈망울의 여자아이는 그 그림을 옮긴 거예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제 막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그녀에게 크나큰 상실이었다. 든든한 울타리와 같던 아버지를 잃고 작가는 마치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지나간 사랑을 찾듯 작품들을 쏟아냈다.

판화와 회화가 공존하는 그녀의 그림은 동양화와 서양화의 어딘가 중간 지점에 걸쳐 있는 듯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일러스트레이션이나 그래픽 디자인 같기도 하다. 혼성적 형식으로 담백한 느낌을 주는 그의 참신한 어법은 2003년 < 목단(牧丹) >, 2006년 < True Love, Always a Little Late > 등 초기 개인전에서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작가의 집이자 작업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水原華城) 성곽길을 마주보고 있다. 오래된 양옥을 개조해 갤러리를 겸한 집은 판화를 배우려는 학생들, 전시 공간을 찾는 젊은 작가들을 위한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혼자만의 작업도 좋아하지만, 뜻이 맞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시간도 소중하다”는 작가의 다음 글자 풍경이 궁금해진다.

< 누이오래비생각(Realize) >. 2011. 광목천에 채색. 116 × 90 cm.
ⓒ 홍인숙

작가는 여백, 시문(詩文), 낙관(落款) 등 전통 회화의 요소들을 자신의 어법으로 각색해 활용한다. 또한 뜻글자인 한자를 조합해 복합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이미지가 문학적, 서사적으로 전달된다.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 작가
이민희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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