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을 필사하는 사경(寫經)은 수행의 한 방편이자 청자, 불화와 함께 고려 시대 불교 문화를 대표했던 한 축이었다. 하지만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에 의해 지난 6백 년 동안 전통이 거의 단절되었다. 전통 사경 기능전승자 김경호(Kim Gyeong-ho 金景浩)는 그런 고려 사경의 맥을 이으며, 창조적 계승을 시도하고 있다.
불교 전통 사경 기능전승자 김경호 씨가 세필을 들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그의 작업대 위에는 직선용 붓, 곡선용 붓, 0.1mm용 붓, 0.2mm용 붓, 국산 금을 다루는 붓, 일제 금을 다루는 붓 등 저마다 쓰임새가 다른 56개의 붓이 놓여 있어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극복하는 치열한 그의 작업 세계를 말해 주고 있다.
붓끝에서 나온 선이 극소(極小)의 세계로 파고든다. 그는 1mm 안에 5~10개의 미세한 선을 흐트러짐 없이 그었다. 1mm에 불과한 부처 얼굴에 눈, 코, 입을 온전히 그려 넣을 정도였다. 그러니 2mm 공간에 경전 한 글자씩 적는 일쯤은 차라리 쉬워 보였다.그토록 정치한 작업이지만 붓은 머뭇대지 않았다. 금가루와 아교를 섞은 재료가 3~5초면 붓끝에서 굳기 때문이다. 그 사이 붓털 1~2개가 0.1mm 속의 정확한 지점을 다녀가야 한다. 숨을 가다듬을 수도 없다. 숨을 고쳐 쉬는 찰나에 선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품을 펼쳐 보인 김경호 한국사경연구회 명예회장은 말했다.
“1mm가 1mm로 보이면 선 못 그어요. 1mm 공간이 5mm, 1cm로 열려야 돼요. 그렇게 하는 데까지 짧게는 2~3일씩 걸려요. 일단 작업이 한번 열리면 하루도 쉬면 안 되죠. 하루 놀면 다음 날 작업이 안 되거든요. 그럼 불안해지죠. 불안하면 잡았다 놨다 하는 게 다시 일주일, 열흘, 그러다 한두 달까지 가기도 해요.”
그에겐 어금니가 거의 없다. 극한의 정밀 작업은 신체 여러 부분에 심한 긴장을 가져오는데 작업 기간 중에는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는 일 따위를 스스로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한과 절제의 기준은 더욱 혹독하다. 음식을 많이 먹어도, 잠이 부족해도 안 된다. 육체의 작은 흐트러짐이 마음을 흔드는 탓이다. 사경을 하기 전에는 작은 물건이라도 들지 않는다. 행여나 손이 떨릴 수 있어서다. 그 극단은 작업 환경이었다.
“제 작업실 온도가 35°에서 45° 사이에요. 35°가 넘어야 아교가 굳지 않거든요. 습도는 70~90%에 맞춰요. 그래야 금의 발색이 좋으니까요. 불쾌지수가 최고일 때 작업하기가 최고로 좋은 거죠. 땀범벅으로 밤을 새우면서 하루에 8시간에서 10시간씩 작업해요. 그걸 반 년, 길게는 10개월 정도 계속할 때도 있죠.”
그 세월이 20년이다. 그러니 김경호의 사경은 ‘경전 베껴 쓰기’라는 작은 틀에 가둘 수 없다. 그의 사경은 한계와 싸우는 모든 행위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극복하는 일이자 인간이 붓끝으로 장악할 수 있는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작업하는 인간’의 시간에서 인간을 어디까지 지울 수 있는지, 그래서 오로지 작업만 남는 시간의 순도를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기도 했다.
단순한 재현 넘어 창조적 계승으로
“고려 시대의 전통 사경 제작은 국가적 사업이었어요. 사경을 담당하는 국가 기관이 여러 곳 있었을 정도였고, 거기서 작업하는 사람만 300명이었죠. 고려 인구 300만 명 중에 300명이었으니까 현재 대한민국 인구 5000만 명에 대입하면 그 수가 5000명에 이르는 셈이죠.”
그는 불교 문화가 찬란했던 13~14세기 고려를 21세기로 소환했다. 초기 사경은 교리 교육과 전파를 위한 경전 필사에만 그쳤었다. 그러다 인쇄술이 보급되어 필사의 기능을 대신하면서 사경은 신앙 행위나 수행의 방편에 가까워졌고, 이후 먹 대신 금과 은을 재료로 사용한 금은자경(金銀字經)이 발달하면서 사경은 불교 예술의 극치를 이뤘다. 부처가 설한 불법을 가장 귀하고 정성스럽게 받들기 위한 노력과 실천이었던 셈이다. 당시 찬란했던 고려의 사경 문화는 중국에 사경 전문가들을 100여 명씩 파견할 정도로 전문 기술이 월등했고 고려 불화, 고려 청자에 못지않은 예술성과 완성도를 자랑했다. 하지만 억불숭유를 지배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를 거치면서 고려의 사경 문화는 사장돼 갔다.
그는 고려 전통 사경의 맥을 잇고 싶어 사경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단순한 재현을 넘는 창조적 계승을 원했다. 한문으로 된 경전 글씨는 한글로 바꿨고, 글씨와 함께 배치되는 변상도(경전 내용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그림)도 새롭게 수정, 재창작했다. 물론 사경의 기본은 서예였고, 그는 1cm 안에서 필획을 자유로이 구사할 줄 아는 경력 50년의 서예가다. 하지만 사경은 여러 영역이 맞물린 서예 너머의 경지였다.
“경전의 내용을 이해해야 그림을 그리죠. 불교를 알아야 돼요. 여러 가지 장엄(莊嚴) 요소를 곁들이려면 불교사는 물론 인도에서 중국과 한국으로 이어지는 불교 미술의 변화 과정까지도 숙지해야 해요. 새로운 표현의 근거가 있어야 하니까요. 관련 연구나 전문가가 전무하니 전해 오는 유물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연구했고, 한 작품을 준비할 때마다 50종 이상의 자료들을 검토하고 확인하면서 내용을 구성했어요.”
도구와 재료에 대한 혜안
그가 5년 전 완성한 작품 「감지금니(紺紙金泥) 7층 보탑(寶塔) -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을 펼쳤다. 법화경의 한 대목인 ‘견보탑품’을 짙은 남색으로 물들인 종이인 감지에 금으로 쓴 이 작품은 세로 크기는 7.5cm에 불과하지만 가로 길이가 6m 63cm에 이르는 대작이다. 긴 감지 위에 탑 463개를 나란히 그려 넣고, 그 탑의 층마다 경전 글귀를 한 자씩 써 넣었다. 표지는 태극기와 무궁화를 당초문과 연결시켜 장엄했는데, 100원짜리 동전만 한 무궁화엔 금빛 실선이 무려 2만 5천 개가 지나간다. 이를 두고 그는 “전통과 현대를 교차시켜 녹인 독창적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사경의 서체를 얘기하다가 불교 미술과 전통 문양, 그리고 현대적 이미지까지 거침없이 화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사경 전문가라니…. 그는 할 말이 많았다.
“고려 시대엔 글씨 쓰는 사람, 변상도 그리는 사람 모두 따로 있었어요. 줄 치는 사람들은 줄만 쳤죠. 금가루 제작, 아교 제작까지 모두 분업이 돼 있었어요. 그 옛날 300명이 나눠 하던 일을 지금 저 혼자 맡고 있죠.”
그 덕에 도구와 재료에 대한 혜안이 열렸다. 그는 전통 사경에 쓰인 금의 발색 상태만 봐도 제작 연대를 맞힐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13세기, 14세기, 14세기 후반, 그리고 이후 조선의 작품들은 금의 농도와 발색 상태가 각각 다른데,자신은 그 미세한 차이를 헤아릴 수 있다고 한다. 감지도 보는 즉시 꿰뚫는다. 종이의 질을 가늠하는 것을 넘어 붓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 종이인지도 알아챈다. 채 500자를 써 내기 전에 붓을 꺾어 버리는 감지도 있다고 했다.
그가 작업대 위의 붓 59개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이어 갔다. 직선용 붓, 곡선용 붓, 0.1mm용 붓, 0.2mm용 붓, 국산 금을 다루는 붓, 일제 금을 다루는 붓 등 저마다 쓰임새가 다르다고 했다. 크기와 굵기가 같은 붓이어도 용도를 모두 달리 쓴다. 그에게 직접 선택한 붓의 성질을 물었다.
“붓을 족제비털로 만든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진짜 족제비털인지, 털갈이 전의 봄 털인지, 털갈이 후의 가을 털인지, 꼬리털인지, 등쪽 털인지, 발쪽 털인지에 따라서 차이가 무한하죠. 그 차이를 다 알아야 붓을 선택할 수 있는 거예요.”
무엇에 대해 묻건 그는 한마디로 요약하지 않았다. 붓에 대해 온전히 말할 수 없는 상황이면, 붓이 뭔지 맛보기로도 보여주지 않는 식이다. 금가루와 아교를 묻힌 붓의 사용법을 물었을 때도 그랬다.
“야구공을 스트라이크 존에 던질 때 직구로 바로 넣을 때가 있는가 하면, 아래로 살짝 빠지는 변화구를 집어넣기도 하고, 포크볼로 떨어트려 넣을 수도 있잖아요. 상황에 따라 달리 쓸 필요가 있는 것이니 ‘공을 어떻게 던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간단히 답할 수 없는 거죠. 저는 표현할 선에 따라 금의 농도, 금가루의 양, 아교 농도의 조합을 매번 다르게 해요. 그 조합의 수는 수백 가지 이상이죠. 머릿속에 쌓인 경험적 데이터를 손이 즉각적으로 뽑아내지 못하면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없어요.”
“제 작업실 온도가 35°에서 45° 사이에요. 35°가 넘어야 아교가 굳지 않거든요. 습도는 70~90%에 맞춰요. 그래야 금의 발색이 좋으니까요. 불쾌지수가 최고일 때 작업하기가 최고로 좋은 거죠. 땀범벅으로 밤을 새우면서 하루에 8시간에서 10시간씩 작업해요.”
「화엄경 보현행원품 변상도」(華嚴經普賢行願品變相圖), 감지금니, 18.3 × 36 ㎝.국보 제235호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고려 시대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紺紙金泥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 변상도를 김경호 씨가 세밀하게 재현한 작품이다.
작은 것을 놓치면 세상에 별난 게 없다
인터뷰 내내 ‘최고의 작품’이란 말을 수없이 반복하던 그가 말했다.“돈 욕심은 별로 없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 줄 테니까 3년 동안 생애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보라는 제안을 한다면 기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인류 역사상 길이 남을 최고의 작품을 내놓을 수 있겠죠.”
그런데 “실력이 정점을 지나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엔 또 이런 대답을 했다.
“30세에 현역으로 뛰는 피겨 스케이터 김연아(金姸兒)를 상상해 보세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때처럼 할 수 없거든요. 최고의 기술은 체력과도 관련이 있죠. 0.1mm 간격을 띄워야 하는 이 선들이 이젠 가끔씩 붙을 때도 있어요. 5년 전엔 10개 중 9개 이상의 선이 0.1mm도 안 벗어났는데….”
심신을 극한으로 내몰면서도 그렇게 온전히 쥐고 싶었던 것이 ‘최고’라는 말이었나 보다. 하지만 노력과 의지만으로 넘어설 수 없는 ‘늙음’이란 한계 앞에서 그는 이미 생각을 정리한 듯했다.
인터뷰마저 너무 열심인 그를 새삼 다시 바라본다. 단단하고 평온한 얼굴 저 멀리 숨은 마음은 진실로 안녕할 것인가. 0.1mm의 선에 흔들리지 않는 자리를 부여하는 긴 시간 동안 그는 어떤 생각을 키워 왔을까. 그 엄청난 몰입의 시간에 생각 한 자락 정도는 지나갈까. 작업실의 침묵은 스트레스와 의지가 서로를 물고 뜯는 긴장과 치열함일까, 그저 붓만이 살아 있는 초월적 경지의 현현일까. 작업 시간을 버티는 그의 마음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 왔다.
“제정신이 아닌 그런 상태가 아니에요. 일급수를 생각해 봐요.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그 안에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노닐어요. 그런데 그 물고기들이 물의 투명함은 해치지 않아요. 마음도 같은 거죠. 온갖 생각들이 물고기떼처럼 지나가지만, 그것이 내 마음 맑은 것을 건드리지 못하죠. 평정심, 고요 그 자체예요.”
학창 시절 승려가 되기 위해 야간 열차를 세 번이나 탔으나 그때마다 방방곡곡의 사찰을 뒤져 아들을 기어이 제자리로 돌려 앉혔다는 그의 아버지의 일화가 오버랩된다. 그 시절을 가늠하면서 한 번 더 물었다. 불교에서 사경은 ‘공덕 쌓는 행위’로 대변되는데, 작업을 반복하면서 ‘종교적으로 특별한 경험’이 찾아오기도 하느냐고.
“특별한 걸로 말하자면 제가 숨 쉬는 것보다 더 특별한 게 세상에 있을까요? 이 공기 속 산소들이 제 몸에 들어왔다 나가는 게 가장 신비스러워요. 그게 기적이죠. 그 작은 것들을 놓친다면 이 세상에 별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사경’이란 글자에 갇혀 미처 살피지 못했던 김경호의 삶의 자리가 그제야 밝아진다. 4시간 동안 한결같은 손으로 금분을 정제하고, 사경에 몰두하는 20분마다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붓을 처음처럼 빠는 그를 다시 본다. 지극한 선(禪)은 절집 안에서만 피어나는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