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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WINTER

전쟁이 남긴 푸짐한 맛, 부대찌개

부대찌개는 한국전쟁 이후 생겨난 음식이다. 전쟁 이후 세 끼는 고사하고 한 끼도 제대로 먹기도 힘든 가난했던 시절 등장한 부대찌개는 푸짐한 양으로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선사했다. 양만이 아니었다. 서양의 식재료를 한국인의 손맛으로 풀어낸 맛도 일품이었다.

김치, 고추장 등의 한국 식재료와 햄과 소세지, 베이크드빈 등의 서양 식재료를 더해 만든 부대찌개는 동서양의 식문화 조합이 돋보이는 음식이다.

한 국가의 식문화가 고유성을 확립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동한다. 기후, 토질 등이 선천적 요소라면, 역사적 사건이나 자연재해 등은 후천적 요소다.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엔 전쟁이 있다. 전쟁이 전 세계 식문화를 바꾼 사례는 넘치고도 남는다. 끓는 물에 각종 채소와 소고기, 양고기 등을 넣어 살짝 익혀 먹는 샤브샤브는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가 세계 정복에 나서면서 퍼진 음식이다. 나폴레옹이 질 좋은 식량 보급품 마련을 위해 개발을 독려해 태어난 게 통조림이다.

‘부대’에서 시작한 맛

한국에도 이와 유사한 음식이 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이후 생긴 부대찌개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커다란 상흔을 남겼다. 남북으로 나뉜 한반도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체제가 공존하는 땅이 됐다. 남한엔 종전 후에도 미군이 의정부, 파주, 평택(송탄) 등 여러 지역에 주둔하게 된다. 부대찌개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바로 이 미군 부대와 관련이 있다.

부대찌개는 육수에 햄, 소시지, 베이컨, 베이크드 빈스, 다진 고기, 김치 등을 넣고 고추장으로 맛을 낸 매콤한 양념을 섞어 끓인 음식이다. 여기에 라면까지 넣으면 감칠맛이 두 배가 된다. 조선시대엔 없었던 부대찌개는 어떻게 한국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 되었을까.

부대찌개 원조집 중 하나로 알려진 의정부 오뎅식당의 역사를 들추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오뎅식당의 창업주는 1960년부터 포장마차에서 부대찌개를 팔았다. 창업 초창기부터 부대찌개란 메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뎅식당 누리집에 있는 기록을 보면, 당시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던 이가 가져다준 햄과 소시지, 베이컨으로 볶음 요리를 만들어 팔았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단골들은 밥과 함께 먹을 만한 국물 요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주인장은 고민 끝에, 기존에 팔던 볶음 요리에 물을 붓고 김치와 고추장 등을 넣어 찌개를 만들었다. 부대찌개가 탄생한 것이다.

고기 맛과 진배없는 소시지나 햄, 베이컨은 사람들 입맛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매콤한 국물은 밥을 말아 먹기에 충분했다. 단박에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몰렸다. 오뎅식당이 인기를 끌자, 인근에 부대찌개 식당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과 같은 ‘의정부 부대찌개 골목’이 생겨난 사연이다. 2009년, 이 지역은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로 지정됐다.

부대찌개 명가들이 몰려있는 지역 대부분은 미군 부대 인근이다. 경기도 의정부, 동두천, 평택(송탄), 전북 군산, 서울 용산 등에는 맛이 조금씩 차이 나는 부대찌개 식당들이 즐비했다.

한편, ‘존슨탕’이라고도 불렸다. 1966년 방한한 미국 대통령 린든 베인스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1973) 의 이름을 땄다는 설이 유력하다.

부대찌개가 처음 만들어진 경기도 의정부에 위치한 부대찌개 거리. 매년 이 거리에서 부대찌개 축제가 열린다.
ⓒ 의정부시 상권활성화재단

맛을 완성하는 재료

서양에선 소시지나 햄을 구워 먹거나 빵 사이에 넣어 먹는다. 이걸 국물에 넣어 익혀 국물과 함께 먹는 일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한국인에게 국물 요리는 식사에 필수적인 존재이다. 부대찌개의 넉넉한 국물 안에서 익은 소시지나 햄은 쫄깃하면서도 부드럽다. 또 소시지나 햄 특유의 기름진 맛이 국물에 스며든다. 여기에 베이크드 빈즈와 김치야말로 부대찌개의 간판 얼굴이다. 풍미를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시지와 햄의 쫀득한 식감에 지칠 때쯤 만나는 푹 익은 콩 요리는 혀의 쉼터가 되어줬다. 보드라운 질감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맛이다. 푹 익은 매콤한 김치는 부대찌개의 맛을 진두지휘는 장군 역할을 한다. 김치가 맛이 없으면 제아무리 다른 재료가 좋아도 부대찌개 특유의 맛이 안 난다.

식당에 따라선 라면이나 두부를 넣기도 한다. 치즈가 올라가는 식당도 있다. 라면은 탄수화물만이 줄 수 있는 넉넉한 포만감을 제공한다. 숟가락으로 들어 올릴 때마다 쭉쭉 늘어지는 치즈는 별미다. 치즈를 넣어 독특한 맛을 내는 한식이 부대찌개뿐이겠는가. 닭갈비, 등갈비 요리, 떡볶이 등 우리 전통 한식에 색다른 맛을 내려고 할 때 종종 출동하는 게 치즈다.

푸짐한 양과 다채로운 토핑, 감칠맛이 일품인 부대찌개는 김치찌개, 된장찌개 못지 않은 인기 메뉴이다.
ⓒ 셔터스톡

특색 있는 부대찌개 노포

한국에서 부대찌개 명가는 어디일까. 부대찌개 식당은 동네마다 3~4개 이상 있을 정도로 많다. 프랜차이즈 부대찌개 식당도 전국에 퍼져있고 편의점에만 가도 시판 부대찌개 제품이 있다. 하지만 탄생 역사를 새기며 먹을 만한 곳은 역시 노포다. 더구나 부대찌개는 지역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 ‘OOO파’ 식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선 ‘의정부파’부터 살펴보자. 이 파의 수장은 3대째 맛을 이어오고 있는 오뎅식당이다. 양념이 이미 진하게 배여 있는 볶음 요리에서 출발한 찌개다. 달짝지근한 맛을 내는 베이크드 빈스가 들어가지 않는 게 특징이다. 이런 이유로 담백한 맛이 장점으로 꼽힌다.

의정부 부대찌개에 견줄만한 상대는 ‘송탄파’다. 그런데 현재 ‘송탄’은 행정구역상 없는 지역이다. 1995년 평택시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송탄식 부대찌개의 가장 큰 특징은 육수를 사골로 우린다는 점이다. 사골 육수라서 전체적으로 맛이 진하고 걸쭉하다. 치즈도 올라간다. 소고기 다짐육과 대파 등 고기와 채소가 한데 어우러져 풍미를 그윽하게 한다. ‘최네집 부대찌개’와 ‘김네집’, ‘황소집’, ‘땡집’ 등이 이 지역 부대찌개 노포로 알려져 있다. ‘최네집 부대찌개’는 1969년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친구들이 당시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던 주인장에게 권유해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가네’는 주문 시 이 가게만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소시지와 햄 추가는 첫 번째 주문에서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이미 졸아든 육수에 추가한 소시지와 햄이 짠맛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라면을 넣는 시간도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반쯤 끓었을 때 넣어 먹어야 면의 익힘과 맛이 가장 좋다고 한다. ‘황소집’도 한우 사골로 육수를 우린다. 다른 송탄파 부대찌개에 견줘 덜 맵다는 평이다.

‘파주파’는 부대찌개 양대 산맥인 ‘의정부파’와 ‘송탄파’에 견줘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채소가 다른 지역 부대찌개에 비해 많이 들어가 팬층을 확보했다. 쑥갓이 푸짐하게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사골 육수가 아니라서 국물이 상대적으로 담백한 편이다. ‘원조 삼거리부대찌개’가 이 지역 대표 노포다. 5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1990년대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정미식당 부대찌개’도 이 지역 부대찌개 강자다.

‘군산파’는 소고기로 육수를 내는 게 특징이다. 마치 평양냉면집처럼 얇게 썬 소고기가 올라간다. 1984년 문 연 ‘비행장정문부대찌개’가 이 지역 부대찌개 노포다. 독특하게 햄버거도 판다. 부대찌개와 햄버거를 함께 먹는 여행자가 많다.

서울은 부대찌개 강자가 많은데, 그중에서 용산 이태원에 있는 ‘바다식당’을 으뜸으로 친다. 이곳은 1970년대부터 영업해온 곳으로, 메뉴판에 부대찌개 대신 ‘존슨탕’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부대찌개는 한국인의 창의력이 반영된 한식이다. 시대의 참혹한 현실에 조응해 탄생한 부대찌개. 사람들은 여전히 이 얼큰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으로 과거 역사의 상처를, 오늘날 고단한 삶을 위로받고 있다.

박미향(Park Mee-hyang, 朴美香) 음식 저널리스트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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