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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SPRING

경계를 넘어: 여성 작가들, 동시대 미술을 다시 빚어내다

한국 현대미술은 팬데믹 이후 국제 미술계에서 존재감을 크게 더해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새로운 세대에 속하는 한국 여성 작가들은 현재 전 세계 주요 미술기관과 갤러리로부터 전례 없는 관심을 받고 있다. 이들은 지리적 국경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각자의 시각으로 동시대의 화두를 살핀다. 기술과 인간 취약성의 관계, 디아스포라 상황에서 문화적 전통의 변화, 디지털 시대 정체성의 유동성과 같은 주제를 고유한 시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이미래, 제이디 차, 정금형은 이러한 보편적 주제들을 혁신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2024년 영국 테이트 모던 터빈홀에서 열린 이미래의 < Open Wound > 전시 전경.
ⓒ Tate, Photo by Larina Fernandes

지금 한국 동시대 미술은 젊은 세대의 여성 작가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전 세계 미술계의 변화와도 맞물린다. 최근 주요 미술 기관들은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다양성을 더하고 있으며, 글로벌 미술 시장의 확장으로 젊은 목소리에 전에 없던 기회가 주어졌다. 한국의 문화 위상이 올라가면서, 이와 함께 젊은 세대의 한국 여성 작가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마련된 셈이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작가들은 한국의 민주화와 개방의 혜택을 받으며 자났다. 따라서 이전 세대와는 뚜렷이 다른 청년기를 겪었고, 이러한 변화가 그들의 예술적 표현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세대의 젊은 작가들은 젠더, 환경, 문화 정체성과 같은 현대적 이슈를 혁신적으로 다루는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그들의 고유한 예술적 언어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 관객들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미래

지금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의 젊은 작가 중에는 유학 등 외부의 경험보다 한국 또는 현지의 문화적 환경이 빚어낸 인재들이 많다. 이미래는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폭넓은 국제적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녀가 모든 정규 미술 교육을 한국에서 이수했다는 점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이미래 작가가 맡은 2024년 테이트 모던 터빈홀 커미션은 한국 동시대 미술에 새로운 장을 써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래는 이 프로젝트에 선정된 첫 번째 한국인 작가이자 역대 최연소 작가이기도 하다. 터빈홀에 설치된 < Open Wound >는 기계 시스템과 유기적 형태가 융합되어 터빈홀이라는 기념비적 공간을 맥박이 뛰듯 강렬한 감각을 자극하는 환경으로 변모시킨다. 이 작품은 이미래 작가를 더욱 널리 알린 계기가 된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와 MMK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개인전 < 봐라, 나는 사랑에 미쳐 날뛰는 오물의 분수 >(2022)에서 전개한 주제를 확장한다. 산업 자재와 키네틱 요소로 구성된 이미래의 작품은 폭력, 취약성, 욕망을 탐구하며 강렬하고도 깊이 있는 환경을 창출한다.

흘러내리는 액체와 유기물이 두드러지는 이미래의 설치 작업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런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선 엄청난 기술적 정밀함이 요구된다. MMK 프랑크푸르트에서 선보인 작업은 차가운 콘크리트와 키네틱 요소로 강렬한 신체적 감각을 불러일으키면서 이러한 대조를 잘 보여준 바 있다. 테이트 모던에서는 과거 발전소였던 기념비적 공간을 변형하여 산업적 요소와 유기적 면모 사이의 긴장감을 한층 더 고조시킨다. 산업 시설로 쓰이던 크레인에 매달린 7미터 길이의 터빈은 촉수처럼 보이는 실리콘 튜브와 한 몸으로, 체액을 연상케 하는 끈적한 적갈색 액체가 흘러내린다. 터빈홀은 산업 건축과 유기적 형태가 결합된 하이브리드 환경이 된다. 이는 액체를 흡수하고 건조시킨 직물로 이뤄진 ‘스킨’을 통해 더욱 강조되며, 산업적으로 생산되는 동시에 살아있는 듯 계속해서 진화하는 설치를 만들어낸다.

이미래의 < Open Wound > 전시회장에 설치된 작품 일부. 이번 전시로 이미래는 터빈홀에서 작품을 선보인 역대 최연소이자 한국 첫 미술가가 됐다.
ⓒ Tate, Photo by Oliver Cowling with Lucy Green

정금형

정금형은 국내외에서 동시에 경력을 쌓아가는 새로운 세대의 한국 작가들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들은 먼저 현지에서 입지를 다진 뒤 세계 미술계로 활동 범위를 넓히기보다, 두 영역을 병행하며 경력을 쌓아간다. 2018년 서울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연 정금형은 쿤스트할레 바젤(2019)과 이탈리아 모데나 시각예술재단(2020) 전시를 통해 단기간에 국제 미술계에서 존재감을 확고히 했다. ICA 런던에서 최근 열린 전시 < under construction >(2024)은 이처럼 동시적인 궤적의 또 다른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다. 작가는 기계 부품과 결합된 인체 골격 모델들을 선보이며 유기적 형태와 기술적 형태의 경계에 대한 탐구를 이어갔다. 의료용 마네킹, 산업용 로봇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인간과 기계 신체 사이에 기이한 관계가 창조되는 것이다.

2018년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정금형의 < 스파 & 뷰티 서울 > 전시 전경.
Courtesy of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Photo by Kanghyuk Lee

정금형은 기계를 추상적 시스템으로 다루는 대신 전시를 확장하는 퍼포먼스를 펼침으로써 친밀하면서도 불안감을 자아내는 관계를 발전시킨다. ICA에서 선보인 설치는 퍼포먼스에서 남겨진 흔적, 재료들과 함께 전시 공간에 놓인 하이브리드 오브제들을 보여주었다. 전시 기간 중 일정에 맞춰 진행된 퍼포먼스는 이러한 오브제들을 단순한 대상이 아닌 공동 수행자로 활성화하며, 인간과 기계 사이의 육체적 관계에 대한 탐구를 더욱 심화시켰다. 정금형의 독특한 예술적 접근 방식은 미술계를 넘어 널리 주목받았다. 2023년, 작가는 미우치아 프라다의 초청으로 패션 하우스 미우미우의 런웨이 쇼를 퍼포먼스 작품의 무대로 변모시켰다.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탐구하는 그녀의 작업이 패션계에 진입한 순간이었다.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에 초청된 정금형의 < Toy Prototype > 전시 일부.
Courtesy of La Biennale di Venezia, Photo by Andrea Avezzù

제이디 차

런던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제이디 차는 밴쿠버에서 태어난 한국계 캐나다인으로, 한국이라는 문화적 뿌리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영감으로 삼는다. 그녀의 작업은 한인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정체성과 면모를 잘 드러낸다. 제이디 차가 국제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한 데는 20세기 중후반 미주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 이민자들이 정착하고, 그 후속 세대가 독립적으로 성장하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동시대 예술 담론을 재구성하는 상황도 큰 영향을 미쳤다. 퍼포먼스, 텍스타일, 비디오, 사운드, 멀티미디어 설치를 아우르는 제이디 차의 작업은 한국의 무속 전통과 당대의 디아스포라 경험을 엮어내면서 문화적 특수성과 정체성, 소속과 같은 보편적 주제를 담아낸다.

2024년 타데우스 로팍 파리 마레에서 열린 제이디 차의 < Rough hands weave a knife > 전시 전경.
Courtesy of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Paris, Salzburg, Milan, Seoul
ⓒ Zadie Xa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 House Gods, Animal Guides and Five Ways 2 Forgiveness >(2022)는 정교한 의상과 멀티미디어 설치를 통해 문화적 혼성성과 유동적 정체성을 탐구했다. 이 전시는 한국의 전통 색채론과 현대적 감성을 융합한 정교한 텍스타일 작업을 선보였고, 퍼포먼스에서는 한국 무속 의식과 현대 클럽 문화의 요소를 결합했다.

작가는 이처럼 다층적인 작품을 통해 문화적 이분법에 도전하며 디아스포라 경험의 복잡성을 다루는 몰입적인 환경을 창출한다. 그녀의 작업이 전통 문화의 요소를 동시대 세계를 아우르는 담론으로 번역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에서 열린 작가의 첫 개인전이 런던 전시보다 다소 늦은 2023년 스페이스 K에서 열린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는 한국 디아스포라 작가들이 고국에서 입지를 다지기 전에 국제적으로 먼저 인정받는 경향이 있음을 시사한다.

세계 미술계에서 부상하는 젊은 한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성’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흥미로운 역설에 부딪힌다. 한국이라는 국가 정체성은 이들을 호명하는 참조점이 되지만, 그들이 창작하는 예술은 국경이나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는다. 이같은 복잡성은 한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들과 한인 디아스포라 작가들을 비교할 때 특히 두드러진다. 예컨대 제이디 차와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는 무속, 전통 색채, 민담 등 ‘한국적’ 요소가 두드러지며, 문화적 뿌리와 깊이 연결된 모습을 드러낸다.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탐구해야 할 필요성 자체가 한국 문화유산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키며, 이는 전 세계적으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재해석으로 이어진다.

2022년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제이디 차의 < House Gods, Animal Guides and Five Ways 2 Forgiveness > 전시 작품 중 일부.
Photo by Andy Keate

지역적 특수성과 보편적 주제

이미래, 정금형과 같이 한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작가들은 동시대 한국 사회와 문화를 살아간 경험에 발을 딛고 작업하며, 은유적이고 개념적인 접근을 통해 문화적 정체성과 관계를 맺는다. 그들의 작품은 명시적으로 ‘한국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산업화, 기술, 현대성과 얽히고 설킨 복잡한 (한국적) 관계를 체현한다. 기계적 형태와 유기적 형태의 강렬한 융합에선 급속한 도시 발전이 가져온 긴장이 떠오르기도 하고, 기계와 관계를 맺는 정금형의 퍼포먼스는 초연결 사회에서 점점 모호해지는 인간과 기술적 사물의 경계를 건드린다.

디아스포라 작가들과 한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접근 방식 차이는 ‘한국성’이 개인적 경험, 역사적 맥락, 세계적 영향력 사이에서 오가는 역동적 대화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은 한국 동시대 미술의 가능성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미래, 정금형, 제이디 차의 작업은 국가 정체성으로 작가를 바라보는 단순화된 관념을 넘어서, 현대 예술가들이 지역적 특수성과 보편적 주제를 어떻게 섬세하게 탐구하는지를 드러낸다.

각자의 고유한 예술 언어로 국제 미술계에서 부상하는 한국 미술가들을 대표하는 이 세 작가는 상호 연결된 오늘날의 세계에서 정체성, 소속감, 문화적 번역의 문제를 다루며 이를 한국 동시대 미술과 연결한다. 물론,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한국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다채로운 면모 가운데 일부에 불과할지 모른다. 문화적 유산을 존중하면서도 경계를 넘어서는 혁신적 시도로 깊은 전통과 끊임없는 변화의 긴장에서 의미 있는 예술적 혁신을 만들어내는 모습…. 세계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세 작가는 동시대 미술을 다시 빚어내고 있다.

박재용미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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