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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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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한강 작, 데보라 스미스, 원 에밀리 애 번역
펭귄북스, 2024
160쪽, 9.99 파운드

온전함에 대한 고찰

우리는 서로 대화하고 주변 세상을 보는 능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능력이 없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예를 들어,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과연 생각할 수 있을까?『희랍어 시간』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의 실어증으로 인해 ‘뿌연 침묵’에 휩싸인다. 말을 찾게 되었지만, 이후 부분적으로 다시 실어증을 앓게 된다. 듣고 읽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할 수는 없다. 주인공은 다시 한번 침묵이라는 껍질에 싸여 주변 세계와 단절된다.

여기에 한 젊은 남자의 이야기가 주인공의 이야기와 엮이며 전개된다. 그는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다가 17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결국 앞이 안 보이게 될 운명이다. 가족들은 그의 귀국을 반대하고 걱정하지만, 그는 독일 유학 시절 배운 고대 희랍어를 가르치는 아카데미 강사로 생계를 이어간다. 말할 수 없는 여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언어를 통해 언어와 다시 연결되고자 남자의 수업을 듣는다. 서로와 온전히 소통하지 못한 채 이렇게 한 공간을 오가다가, 우연한 사고로 인해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가장 표면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희랍어 시간』은 상실에 대한 고찰이다. 주인공들은 그들의 신체적 능력을 잃어가는 것 외에도, 소중한 사람의 상실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낸다. 여자는 얼마 전 이혼하고 전 남편에게 양육권을 빼앗긴 후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괴로워한다. 남자는 독일에 있던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폭력과 실연을 당한 기억에 시달린다. 이미 잃어버렸거나 약화되고 있는 그들의 능력(즉 주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은 산산조각난 관계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의 기저에는 ‘온전함’에 대한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제는 죽고 없는, 남자의 친구 요아힘은 역시 신체적 아픔이 있었다. 그는 한때 “매 순간 죽음과 마주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삶에 대해 가장 잘 성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온전함의 의미를 가장 잘 관조할 수 있는 이들은 자신의 중요한 일부를 상실한, 그리고 세상과의 연결을 잃어버린 사람들일지 모른다.

상실과 결핍이라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희랍어 시간』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오랫동안 서로를 맴돌던 여자와 남자가 마침내 함께하게 되었을 때, 미래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듯 보인다. 주인공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손쉬운 해결책이나 간단한 해피엔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내일은 오늘보다 더 밝아 보인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김수현 작, 안톤 허 번역
펭귄북스, 2024
272쪽, 28.00 달러

“네 잘못이 아니야”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

김수현은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 잘못이 아니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떠난 여정 끝에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가 탄생했다. 부제는 ‘어른살이를 위한 체크리스트’라고 되어 있지만, 저자는 기존의 답답한 규칙 대신 또 다른 규칙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저자는 확실한 한국적 관점에서 한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써내려가면서, 유교적이고 집단주의적인 한국 사회를 개인주의적인 서구 사회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얼핏 마치 외부인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다행히도 실제는 그렇지 않다. 외국인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 저자의 조언 대부분은 보편적인 내용이다. 문화적 차이는 존재하지만, 사람은 결국 사람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누구나 희망, 두려움, 꿈, 불안을 느낀다. 어떤 것도 단순한 흑백논리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집단주의나 개인주의 같은 꼬리표는 사회 전반에 대해 적용하기에는 편리한 표현일 수 있지만, 개개인에 대해서는 그 특징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가리는 결과를 낳는다.

분명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 매몰되어 그로 인한 신경증에 시달리는 이 시대를 위한 것이다. 독자들은 출신 국가에 상관없이 현대 사회의 부담감을 해소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2 >

미역수염(Seaweed Mustache), CD, 김밥레코즈(Gimbab Records), 2024

창의적 콜라주

미역수염은 2014년 결성된 부산 출신의 4인조 록 밴드다. 2016년 발매한 미니 앨범 < The Whistle >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2022년 정규 1집 < Bombora >가 록 마니아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 무렵부터 한국의 헤비한 록 음악을 대표하는 밴드로 급부상했다.

두 번째 정규 음반 <2>는 1집에서 들려준 청각적 풍경을 확장시킨 명작이다. 음반 전체가 마치 성나게 덮쳐오는 파도 같다. 이 앨범의 주된 재료는 슈게이즈, 포스트메탈, 블랙게이즈 같은 장르들이다. 44분 동안 진행되는 여덟 곡에는 흉측한 불협화음과 황홀한 멜로디, 불분명한 노이즈와 선명한 속주(速奏)가 온통 뒤섞여 있다. 공존하기 힘들 듯한 이질적 요소들이 합체해 이율배반의 괴력을 뿜어낸다. 기타, 베이스, 드럼의 격렬한 총진격은 종종 가녀리게 끊어질 듯 미려한 곡선을 그려내는 보컬 멜로디를 만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포옹한다. 형이상학적 묘사, 서사, 나열로 점철된 불가사의한 영어와 한국어 가사도 흥미롭다.

첫 곡 < FALL >은 미역수염의 미학을 압축한 서곡이다. 광야를 울릴 듯한 공간감 속에서 베이스와 드럼의 느린 통타(痛打)로 시작되는 노래다. 남성과 여성의 보컬을 통해 전달되는 무기력한 멜로디가 분출하는 사운드 위로 황홀하게 짓이겨진다. 묵직한 리듬, 기타의 격정적인 트레몰로 연주, 한껏 증폭돼 지글거리는 노이즈가 멜로디 위로 불꽃놀이처럼 떨어진다.

이어지는 곡 < HEX >는 또 다르다. 듣는 이를 옥죄는 기타의 불협화음, 노랫말을 툭툭 랩처럼 뱉는 여성 보컬과 살벌하게 으르렁거리는 남성 보컬이 교차하며 새롭고 기이한 모자이크를 만든다. 후반부에 분출하는 고음의 기타 트레몰로 멜로디는 공포 영화의 기막힌 반전(反轉)처럼 기능한다.

극단적 음악을 구사하는 미역수염에게도 발라드 같은 노래가 있을까? 처연하기 이를 데 없는 여섯 번째 곡 < SWEETHOME >이 그 답이다. 판소리라는 소재에 한국적 한(限)의 정서를 버무린 임권택 감독의 1993년 개봉작 < 서편제 >가 만약 30여 년 만에 리메이크된다면? 그리고 그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이가 <곡성>의 나홍진이나 < 파묘 >의 장재현 감독이라면? 그 주제가로 추천할 만한 트랙이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임희윤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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