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M 건축사사무소(SKM Architects) 대표 민성진(Ken Sungjin Min)의 머릿속은 진행 중인프로젝트의 구상으로 늘 가득 차 있다. 그는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전체를 복기하는 것처럼 프로젝트의 작은 부분까지도 되새기고 상상한다. 그 긴 생각의 종착지는 효율적 기능과 감각적 아름다움의 균형이다.
아난티 클럽 서울(Ananti Club Seoul)은 주변의 울창한 숲과 자연환경을 고려하는 동시에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이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건축물의 대부분을 대지 안에 삽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고저 차이가 있는 경사진 지형을 활용해 공간을 5개의 레벨로 배치했다. 이를 통해 건물이 자연의 일부로서 대지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을 살릴 수 있었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송재영(Song Jaeyoung)
민성진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쓴다. 사무실에 쌓여가는 드로잉과 모형들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가 만들어 내는 크리에이티브는 근력처럼 단련을 통해 만들어진다.
“나는 프로그램, 동선, 평면 등이 어느 수준의 완성도를 갖기 전에 물리적 형태를 머릿속에 미리 그리려 하지 않는다. 확정된 형태나 이미지에 프로그램이나 동선을 끼워 맞추기를 거부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에서 무수한 모형 작업과 디지털 기반의 3D 스터디를 통해 최적의 상태를 찾아 나간다.”
부산에서 태어난 민성진은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건축학을, 하버드대학교 건축대학원에서 도시디자인을 공부했다. 미국 손학식건축연구소(Hak Sik Son Architect)에서 근무했으며, 1995년 서울에서 SKM 건축사사무소를 설립했다.
SKM 건축사무소 민성진 대표는 대담하고 파격적인 도전과 실험으로 유명하다. 이는 그가 존재 이유가 분명한 건축물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주거, 상업, 레저, 문화 등 저마다 용도가 다른 건축물들을 디자인하면서 그가 놓치지 않는 단 하나의 목표는 사람을 위해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 스튜디오 켄(Studio Kenn)
기능과 감각의 레이어링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Clayarch Gimhae Museum)에서는 2022년 12월부터 2023년 7월까지 < 건축가 민성진, 기능과 감각의 레이어링 >이라는 기획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에서 민성진은 미래 농촌 주택에 대한 제안을 담은 파빌리온 ‘메타 팜 유닛(Meta-Farm Units)’을 비롯해 대표작 15점의 아카이브를 선보였다.
농막을 연상시키는 메타 팜 유닛은 간결하게 구성된 온실 속 주거 공간이다. 이 작업은 공간 미학과 디자인의 문제에서 벗어나 농가 주택을 스마트팜이라는 생산 방식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준다. 중앙에 데크를 두고 각각 침실과 주방으로 나뉜 공간은 자연스레 외부로 연결되며, 필요에 따라 유닛을 조합해 필요한 규모로 확장할 수 있다. 수십 개의 스마트팜과 농촌 주택들이 모이고 커뮤니티 공간이 더해진다면 마을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린다.
한편 대표작들은 건축 모형과 영상, 사진, 도면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소개되었다. 교외와 도심을 넘나들며 작업한 복합 휴양 시설 아난티(서울, 남해, 부산) 시리즈, 세이지우드 골프앤리조트(Sagewood Golf & Resort)를 비롯해 S 갤러리, 세스코 아카데미, 준오 아카데미(Juno Academy), 숭실대 형남공학관(Soongsil University School of Engineering) 등은 ‘기능과 감각의 레이어링’이라는 그만의 작업 방식을 잘 보여 주는 프로젝트들이다.
“나는 기능과 감각의 상호작용에 관심이 많다. 미술관, 호텔, 사옥 등 건축물의 유형과 용도를 막론하고 하나의 목적을 갖고 설계를 시작한다. 그것은 내외부 프로그램의 완벽한 구현이다. 하지만 작업을 진행하다 보면 수많은 도전이 더해지며 결정해야 할 과제가 늘어난다. 그때마다 기능과 감각이 계속 레이어링되며 하나의 결정이 이루어지고, 다음 결정으로 이어진다. 이런 끊임없는 두 요소의 중첩된 관계는 좋은 건축물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하며, 여기에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직관과 장인 정신을 통해 디자인이 완성된다.”
세이지우드 골프 앤 리조트(Sagewood Golf & Resort)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700m 고지에 자리한다. 로비, 식당, 수영장, 객실 등은 글루램 목재 구조체를 사용하고, 질감이 자연스러운 재료로 내외부를 마감하여 숲속에 있는 건축물이라는 느낌을 강조했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남궁선(Namgoong Sun)
도시-만들기
그는 가속화되고 있는 도시화 속에서 자신의 건축가적 역할을 찾고 있다. 근현대 건축사에서 이른바 명작이라 불리는 건축물들은 빛나는 조형 언어로 인정받았지만, 오늘날의 도시에서는 복합적 용도의 설계와 프로그래밍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충돌할 법한 이질적인 기능을 한 곳에 공존시키고, 다양한 층위의 사용자가 만들어 내는 공간들이 상생 효과를 낼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며,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공간적 실체로 재정립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이런 복합적인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얻은 창의적 대안이 자신의 건축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가 조형성에 천착하는 아틀리에 건축가와는 다른 길을 가는 이유다.
“나는 오브제 같은 건축을 지양합니다. 건물은 조각품이 아니에요. 건축은 도시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고, 사람들이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장소입니다. 처음부터 형태를 정해 놓는다면 프로그램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디자인이 되겠죠. 설계를 하면서 주어진 대지, 빛, 바람 등 주변 환경을 당연히 고려해야죠. 그런데 오늘날 더 중요한 것은 공공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건축입니다. 사용자와 주변 지역에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혹시 정형화되어 있는 것들이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고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존 홍(John Hong)은 민성진의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 담론에 없는 ‘도시-만들기’라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도시-만들기는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차용하여 원래의 스케일을 의식하지 않고 일원화된 디자인 언어로 치환하는 시도다. 도시에 다양성과 교류에 기여하는 거리가 있다면, 건축에는 유사한 역할을 하는 복도나 길이 존재한다. 이는 동선, 오픈 스페이스, 물성, 이미지,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성까지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만들기는 정적인 명사가 아닌 동적인 동사로 활용되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다층적 스펙트럼을 지닌 공적 공간의 가능성에 초점을 둔다. 도시-만들기는 개인과 집단의 관계성을 공론화하고, 프로그램을 연결하며,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연의 역할을 고양하는 개념이다.”
아난티 남해 골프 앤 스파 리조트(Ananti Namhae Golf & Spa Resort)는 국내 리조트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평가받는 건물이다. 아파트처럼 짓던 그동안의 관례를 깨고 전체 층수를 3층 이하로 낮게 설계해 자연과 어우러지게 했으며, 티타늄 소재를 이용한 굵직한 유선형의 외형을 도입했다. 사진은 꽃을 모티프로 한 클럽하우스이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송재영(Song Jaeyoung)
도시 복합체로서 건축적 면모는 도심의 작업뿐만 아니라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리조트와 휴양 시설 설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건축이 도시를 만날 때 지니는 공공 프로그램에 대한 전향적 자세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고급 휴양 시설에 새로운 가치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날것 그대로의 자연이 아닌,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계획이 선행되고, 여기에 다양한 성격의 건축물들이 서로를 배려하며 디자인된 결과다.
한 건축평론가는 부산 아난티 코브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아난티 코브는 그것이 자리 잡은 세계에 마찰 없이 순응하면서도 형용과 꾸밈을 우아하게 고집함으로써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무대에 올리고, 그것이 빚진 하늘과 땅과 바다를 드러낸다.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이 됨으로써,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연의 풍경들을 아름답게 빚어냄으로써, 삶의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부산 해안가에 위치한 아난티 코브(Ananti Cove)는 펜트하우스와 호텔로 이루어져 있는 대규모 휴양 시설이다. 건축가는 과감한 공간 전개와 예상치 못한 동선을 설계해, 방문객들이 새로운 자극을 느낄 수 있도록 유도했다.
아난티 제공
사용자와의 교감
그는 건축물의 가능성에 대하여 사용자와 가능한 한 많은 대화를 나눈다. 건축가 개인의 자의식보다 사용자와의 적극적인 교감을 통해 프로그램을 공간으로 조직하고 완성해 가는 것을 선호한다. 사용자의 꿈과 바람을 온전히 담아낼 때 그 건축물의 생명력이 형상화된다고 생각한다. 즉 보편적인 가치를 뒤엎는 새로운 개념의 공간 지각, 행동 패턴, 동선 등의 변화를 유도하고 그것을 통해 사용자의 삶의 질이 향상되도록 형태와 프로그램의 모든 가능성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믿는다.
한창 설계 중인 심문섭미술관의 클라이언트 심문섭(Shim Moon-seup)은 민성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술관 모형을 보고 놀랐다. 매인 매스를 약간 기울였다. 마치 미술관이 운동하는 것처럼 움직임이 느껴졌다. 지난 3년 동안 나는 그와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는 내 작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렇게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냈다. 민성진은 아티스트다. 그는 사고의 폭이 크면서도 작은 디테일에 천착하는 끈기 있는 작가다.”
사용자와의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그는 창의적 방식으로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한다. 주어진 환경과 요청을 기반으로 건축물의 형태를 드러낸다. 아난티 클럽 서울은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면서 각 지형과 레벨이라는 자연적 요소에 사용자가 이용하게 될 프로그램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땅속에 90% 정도의 공간을 묻고 자연을 복원하여 덮는 방법을 택했다.
아난티 클럽 서울은 골프장뿐만 아니라 테니스장, 야외 수영장, 레스토랑 및 카페 등 다양한 레저ㆍ문화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송재영(Song Jaeyoung)
인천에 있는 엠파크 허브 중고차 매매단지는 자동차 전시관이라는 정체성에 초점을 맞췄다. 단지 내 전망용 엘리베이터는 수많은 전시 차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방문객들에게 신뢰와 더불어 편의성을 더해줬다. 전시장 내부는 차양을 고려한 입면 디자인으로 적절한 감도의 자연광이 유입되고, 내외부 마감이 한꺼번에 가능한 패널을 적용해 공간의 요구 조건에 부합하면서도 비용을 절감했다.
세간에서는 민성진의 건축에 대해 “대담하고 단단하며 자유롭다”고 평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건축에 대해 소리 높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나의 개념어로 자신의 건축이 규정되는 것도 피한다. 작업을 끝까지 잘 해내고자 온 마음을 집중할 뿐이다. 건축은 다양한 조건 및 관계자들과의 조율, 그리고 오랜 시간 축적된 감각을 통해 최선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 정답이 없다는 것. 그것이 그의 생각이다.
새벽녘 야외 수영장에서 바라본 부산 빌라쥬 드 아난티(Village de Ananti)의 타워 콘도. 자연 속 휴양지와 대도시의 활기찬 에너지가 공존하는 다중적 성격의 리조트를 구현했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남궁선(Namgoong Sun)
박성태(Park Seong-tae, 朴星泰)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