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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WINTER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핫플레이스

경복궁 서쪽 마을인 서촌(西村)은 매우 유서 깊은 지역이다. 조선 시대(1392~1910)에는 왕족이나 사대부 등 권력자들이 거주했고, 중인들의 문화 활동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서촌에 발자취를 남겼다.

사진은 경복궁 서쪽 담장이다. 이 담장은 지하철 경복궁역에서부터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의 발자취와 한국 전통 문화를 소개하는 청와대 사랑채까지 800미터가량 이어진다. 담장 가운데에 경복궁 서쪽문인 영추문(迎秋門)이 있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서촌은 한국의 전통 지리학(풍수지리)상 좋은 터이며, 경관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북쪽에 백악(白岳, 북악), 서쪽에 인왕산(仁王山)이 있으며, 동쪽은 경복궁(景福宮), 남쪽은 사직단(社稷壇)의 앞길이 경계가 된다. 또 서촌의 한가운데엔 인왕산과 백악의 여러 계곡 물을 아우른 백운동천이 남북으로 흐른다. 백운동천은 옛 서울의 중심 하천인 청계천의 제1 상류다. 인왕산 쪽엔 수성동(水聲洞)과 옥류동(玉流洞), 청풍계(淸風溪), 백운동(白雲洞) 등 아름다운 계곡이 많다.

서촌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 가운데 하나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는 세 곳인데, 서촌과 북촌(北村), 향교동(鄕校洞, 현재의 종로 3가 일대)이다. 고려(高麗) 때인 1068년 현재의 경복궁 북쪽 부분과 청와대(靑瓦臺) 일대에 고려 남경(南京, 남쪽 수도)의 행궁(임시 궁궐)이 지어졌다. 서촌과 북촌은 행궁의 바로 옆이므로 고려 때부터 동네가 형성됐을 것이다.

서촌이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경복궁이 지어지면서부터다. 이성계(李成桂)는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朝鮮)을 세웠다. 그리고 1395년 수도를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開城)에서 현재의 서울로 옮겼다. 이성계가 서울로 수도를 옮길 때 처음 지어진 궁궐이 경복궁이었고, 경복궁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궁궐이었다. 경복궁이 지어지자 자연스럽게 경복궁의 동쪽과 서쪽, 남쪽에 관련 국가기관과 민간 주거지가 형성됐다.

전통 문화유산을 가꾸고 지키는 비영리 문화재단, 아름지기재단 사옥에서 보이는 영추문 담장. 아름지기재단을 비롯해 이 길에 접한 건물들에서는 대부분 건너편 궁궐 담장을 볼 수 있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왕들의 탄생지

조선 초기에 서촌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3대 왕인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의 집이었다. 현재의 서울 종로구(鐘路區) 통인동(通仁洞) 일대에 있던 이방원의 사저에선 4명의 왕이 나왔다. 태종 이방원이 이곳에 집을 지었고, 그곳에서 아들 세종(世宗)과 손자 문종(文宗), 세조(世祖)가 태어났다. 왕세자는 궁궐에 살므로 사저가 있을 수 없다. 태종과 그 아들, 손자들이 사저에 살았던 것은 애초 그들이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태종 이방원이 여기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가 왕이 되면서 그 아들과 손자들이 모두 왕이 될 수 있었다. 특히 태종의 아들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세종은 한글을 만들었고, 영토를 넓혔으며,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 태종의 집은 세종 이후 사라졌는데, 대체로 시민단체 참여연대(參與連帶)에서 통인시장(通仁市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에 서촌은 경복궁 바로 옆이어서 태종과 세종뿐 아니라, 많은 왕족이 살았다. 태종의 형 정종(定宗)과 태종의 배다른 동생 이방번(李芳蕃), 세종의 형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모두 서촌에 살았다. 특히 안평대군의 집에선 조선 전기에 가장 유명한 풍경화인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가 그려졌다. 안평대군이 꾼 꿈을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安堅)이 그렸다. 이 그림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약탈돼 현재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学)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1951년 문을 연 대오서점(Daeo Bookstore, 大五書店)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카페를 겸한 문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는 서촌의 대표적인 핫플레이스이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장동 김씨 세거지

조선 때 서촌에선 가장 유명한 사대부(士大夫, 학자 정치인)는 김상헌(金尙憲)이다. 그 자신이 성공한 사대부였을 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이 조선 후기에 최대의 권력 가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집안은 바로 ‘장동 김씨(壯洞 金氏)’인데, 김상헌과 김상용(金尙容) 형제가 장동(현재의 서촌)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졌다. 이 집안은 조선 후기에 가장 강력했던 당파인 서인과 그 주류인 노론의 핵심이었다. 조선 후기 이 집안에서 15명의 정승과 35명의 판서가 나왔다.

김상헌은 그의 정치적 영향력뿐 아니라, 그가 쓴 여러 시와 글로 서촌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근가십영(近家十詠)」에서 서촌의 명승지인 백악과 인왕산, 청풍계, 백운동, 대은암(大隱巖), 회맹단(會盟壇), 세심대(洗心臺) 등을 노래했다. 또 인왕산에 대한 답사기를 썼고, 청나라에 잡혀가 있던 시절에 서촌의 집을 그리워하는 시도 썼다.

서촌의 대로변에는 큰 빌딩들이 들어서 있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옛 정취를 자아내는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정치 권력을 쥔 장동 김씨들은 문화도 주도했다. 김상헌의 증손자인 김창업(金昌業)과 김창흡(金昌翕)은 조선 후기 최고의 풍경화가인 정선(鄭敾)을 후원했다. 서촌에 살았던 정선은 그 보답으로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의 집을 그린 < 청풍계 >라는 작품을 7점이나 남겼다. 또 장동 김씨의 터전이었던 장동 일대를 그린 <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을 2벌이나 남겼다. 정선은 말년에 조선 후기에 가장 유명한 풍경화이자 서촌을 대표하는 그림인 <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를 그렸다.

조선 후기에 가장 뛰어난 왕이었던 영조(英祖)는 왕이 되기 전 서촌 남부의 창의궁(彰義宮)에서 살았다. 그는 왕이 된 뒤에도 이곳을 자주 방문했으며, 창의궁 시절에 대한 8편의 시를 썼다. 또 신분이 낮았던 자신의 어머니를 모신 사당 육상궁(毓祥宮, 현재의 칠궁)을 역시 서촌 북부에 마련해 자주 방문했다. 조선 후기에 가장 유명한 사대부 예술가였던 김정희(金正喜)도 서촌 남부의 월성위궁(月城尉宮)에 살았다. 그의 증조부가 영조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여기서 자라 조선 최고의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조선 후기엔 상업의 발달, 계급의 완화에 따라 서촌의 중남부에 살던 하급 관리 중인(中人)들의 문학 활동도 활발해졌다. 중인들은 여러 시모임을 만들어 장동 김씨와 사대부들이 터를 잡고 있던 옥류동 일대에서 함께 문학 활동을 벌였다. 중인들끼리 만든 시모임도 있었고, 사대부와 함께 만든 시모임도 있었다. 가장 유명한 시모임은 천수경(千壽慶)과 장혼(張混)이 이끌었고, 이들은 여러 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조선이 망한 뒤 일제 강점기엔 대표적 매국노인 이완용(李完用)과 윤덕영(尹德榮), 고영희(高永喜) 등이 서촌에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특히 윤덕영은 옥류동의 2만여평 터에 건축 면적 800평의 서양식 주택을 지었는데, 이 집은 당시 조선의 개인 집 가운데 가장 컸다. 해방과 화재 등으로 인해 윤덕영의 대규모 서양식 주택과 대규모 전통 주택(한옥) 본채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딸과 사위가 살던 서양식 집(현재 박노수미술관)과 그의 첩이 살던 한옥은 아직 남아 있다.

근대의 흔적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서촌엔 작가와 화가들이 많이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에 서촌에 살았던 대표적인 작가는 전위적인 시와 산문을 쓴 이상, 항일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윤동주와 이육사, 친일 활동을 했던 소설가 이광수와 시인 노천명, 해방 뒤엔 소설가 박완서와 김훈, 미술사학자 유홍준 등이 있다. 화가로는 좌파 화가였던 이여성-이쾌대 형제, 이중섭, 이상의 친구 구본웅, 친일 한국화가 이상범, 박노수, 천경자 등이 활동했다.

한국 근현대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자 소설가, 건축가였던 이상(李箱, 1910~1937)이 20여 년간 살았던 집이다. 한때 철거될 위기에 처했으나, 문화유산국민신탁이 2009년 시민 모금과 기업 후원을 통해 매입하여 관리하고 있다. 내부에는 그의 작품을 연대별로 정리한 아카이브가 한쪽 벽면에 설치되어 있다.
ⓒ 한국문화원연합회

해방 뒤 서촌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60년 4.19 시민혁명이다. 당시 부정 선거를 항의하려고 이승만(李承晩)이 있던 경무대(景武臺, 현재의 청와대)로 몰려든 학생과 시민에게 경찰이 총을 쏘면서 혁명에 불이 붙었다. 시민들이 경찰의 총에 쓰러진 곳이 현재의 효자로(孝子路)와 청와대 분수대 광장 일대였다. 또 군사 정부의 독재자 박정희(朴正熙)는 1979년 10월26일 현재의 무궁화 동산에 있던 보안 가옥(안가)에서 측근이었던 김재규(金載圭)의 총에 맞아 숨졌다. 서촌에 살았던 대표적 정치인은 2대 국회의장과 대통령 후보를 지낸 신익희(申翼熙)이며, 기업인으로는 현대의 정주영(鄭周永) 회장이 살았다.

조선 때부터 북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좋은 주거지였던 서촌은 박정희 군사 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점점 쇠퇴했다. 청와대에 대한 경비가 강화되면서 서촌 일대에 대한 통제가 심했기 때문이다. 또 1970년대 서울의 강남(江南)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가장 좋은 주거지가 서촌과 북촌 등 강북에서 강남 쪽으로 옮겨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서촌에 대한 여러 규제가 완화되고 2010년 전통 주택에 대한 지원이 시작되면서 서촌은 자연과 역사, 문화가 잘 갖춰진 서울의 인기 방문지 중의 하나가 됐다.

1920~30년대 지어진 개량 한옥과 현대적 건물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서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저 멀리 서촌의 랜드마크인 인왕산이 보인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김규원(KIM Kyuwon, 金圭元) 한겨레21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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